|
어머니의 사랑
마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
저는 8남매 중에 7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가 제 형들과 누님들을 위해 얼마나 사랑을 베풀고 헌신적이었는지를 옆에서 잘 보면서 자랐어요. 제가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저의 부모님들은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높으셨어요. 그래서 논산에서 초등학교를 마치면 대전으로 보내 중학교 유학을 시켰어요. 형님 누님들이 다 그랬습니다. 그 어린 누님, 형들이 연탄불을 피우는 자취방에서 밥을 해먹고 자취를 하며 살아야 했어요.
저의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농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나 집에는 돈이 별로 없었어요. 주말이 되면 형님과 누님들이 교대로 집에 내려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가지러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의 어머니는 늘 돈을 꾸러 다녔어요. 옆집, 앞집, 저의 어머니는 누구네 집에 돈이 있는지를 잘 알았어요. 누구네 집에 가면 소를 판 돈이 있을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골인지라 그것을 아는 것이 어렵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 집들은 저희보다 땅이 적었으나 돈이 늘 있었어요. 어머니가 늘 거기서 돈을 꾸어올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형님이나 누님들은 집에 와서 돈을 당시에 10만원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에게 달라고 했지만, 늘 4-5만원 밖에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누님은 돈이 부족하다고 늘 울면서 대전으로 올라갔어요. 저의 어머니는 누님이 갈 때, 1달 먹고 살 쌀을 부대에 담아 머리에 이고 30분을 걸어야 하는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줍니다. 그때의 풍경이란 게 ‘울며 가는 누님’, ‘그 옆에서 말없이 쌀을 이고 가는 어머니’ 그런 거예요.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저는 학교다닐 때 어머니에게 돈을 달란 말을 잘 못했어요. 불쌍한 어머니의 모습을 봤으니까요.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어머니의 눈은 늘 부어 있었어요. 자식들이 달라는 대로 주지 못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시면서 돌아오신 거예요.
그렇게 누님을 보내 놓고 저녁에 밥을 짓는데 어머니의 마음은 우울해서 대화도 없이 그저 일만 합니다. 그때 저는 어머니의 심부름을 평소 때보다도 더 잘했어요. 잘못했다가는 우울한 엄마의 심기를 건드려 부짓갱이로 맞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고 사셨지’ 생각을 합니다. 화가 김병화씨가 그린 ‘부모’라는 제목의 아이콘이 생각납니다(그림1). 그는 그 아이콘 밑에 이렇게 코멘트를 달았어요. “내 삶의 실이 다 풀려 그것보다 너의 훌륭한 삶이 짜진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어머니는 자기 생명을 다 바쳐서 자식들의 인생을 짜는 거예요.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있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사랑의 결과물인 것이지요. 어머니는 자녀에게 사랑을 주면서 자기는 다 소멸한 분들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그런 분이예요.
자녀 사랑이 만들어낸 기적
오늘 본문에 보면 훌륭한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이 이렇게 능력있는 분이야’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머니의 사랑이 만들어낸 눈물겨운 기적이 이 이야기의 의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지칭되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어요. 그 딸은 성한 딸이 아니었어요. 귀신들린 딸이에요. 때때로 벌거벗고 다니기도 하고, 뭐라고 연신 지껄이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는 비정상적인 딸이에요. 사람들이 그 딸을 보고 비웃어요. “저것도 사람이냐”고, “저 딸을 어디에 쓸고” 하며 비웃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딸입니다. 어머니는 이 자식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어머니는 이 소중한 딸을 사랑하기에 예수님에게 나아와 치유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세요. 어머니의 심정이 나타납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 나오는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딸이 치유받기를 원한다면 ‘내 딸을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합니다. 지금 어머니와 딸이 동일시됩니다. 하나예요. 딸의 고통이 어머니의 고통입니다. 딸의 병이 어머니의 병이에요. 딸의 부끄러움이 어머니의 부끄러움입니다. 어머니는 딸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을 안 하셨어요. 그 어머니의 외침이 계속되자, 제자들이 짜증을 내며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이 여자가 옆에서 시끄럽게 구니, 이 여자를 가라고 하세요.” 제자들의 충고대로 예수님이 그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니 이방인인 당신은 좀 집으로 가세요.” 당시에 이방인은 멸시를 받는 존재예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어머니는 끄떡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자기 딸의 치료를 거듭 부탁합니다.
마침내는 예수님이 이렇게 까지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줄 수 없다.” 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심한 말을 합니다. 지금 이방인인 이 어머니는 “너는 개다. 너는 개 같은 여자다.” 이런 말을 들은 거예요. 이 말을 들으면서도 그 어머니는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딸을 위해서죠. 만일에 자기 자신의 병을 위해서라면 ‘나를 고쳐주세요’ 하다가 “자녀의 떡 을 취하여 개에게 줄 수 없다”라고 하면 “까짓 거 죽으면 되자나요. 내가 개 취급까지 받을 것 없잖아”, 화를 벌컥 내고 가 버릴 거예요.
그러나 어머니는 안 그래요. 그가 한 여자일 때는 그럴지 몰라도, 어머니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굴욕도 참습니다. 개라고 하면 어떻고 고양이라고 하면 어때? 속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런고로 부스러기 은혜라도 제발 주세요.” 그때 예수님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예수님이 감동이 됐어요, 이 어머니의 딸에 대한 사랑에 마음이 감동을 받았어요. “네 믿음이 크다” 칭찬 하시고 “네 소원대로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 만들어낸 기적입니다. 이 같은 사랑, 이 같은 모성애, 이 사랑이 기적을 낳는 거예요. 이 기적을 낳는 사랑을 우리의 어머니는 행한 거예요.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았어요. 여러분! 그런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이 늘 깨달아지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대리자
어린 시절 부모님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탈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실 수 없으시므로 이 세상에 어머니를 먼저 보내주셨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셨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하나님의 대리자예요. 이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사랑을 줬는데도 그것이 사랑인지 모르는 거예요. 부모님은 말하지 않고 가슴으로 사랑을 주었어요. 때때로 상처를 주기도 했으나 그러나 그 사랑을 진하게 가슴으로 주었습니다. 이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인정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랑을 인식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았다’는 느낌이 있으면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나 사랑받은 것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에요.
부모의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위대한 사랑을 보지 못하고 부모가 상처준 것, 못해준 것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에게 해 준 것이 뭐 있어’, ‘나한테 재산도 안 남겨줬어’ 그런 사람이 있어요.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의 자녀들 중에 함이 그랬습니다. 노아가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해 옷을 다 벗고 하체를 드러내놓고 잠이 들었어요. 그때 마침 둘째아들 함이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흉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고, 그것이 아버지의 전부인양 소문을 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수치, 약점, 잘못을 크게 본 거예요. 그 마음에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수치를 보자마자 그것이 크게 보인 겁니다.
반면에 다른 두 아들, 셈과 야벳도 아버지의 수치를 봤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옷을 찾아와서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에 덮어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했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으려고 한 거예요. 아버지의 잘못을 보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데 그 작은 수치, 잘못, 실수가 중요한가요?’ 부모님의 그 큰 사랑을 인식한다면 그런 수치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에게도 수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인식한 그들은 그 수치를 보지 않으려고 한 거예요.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도 부모로서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부모의 실수가 우리와의 관계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분들의 바탕에 있던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모는 자식에게 사랑을 줍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쁜 거잖아요. 우리의 부모가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바친 가장 소중한 분들이에요.
부모를 공경하라
그래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잠언에서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23:22) 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이 말씀은 부모에게 ‘무조건 잘 하라’는 것인데,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반대로 부모에게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신명기에 보면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신27:16)
출애굽기에 보면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은 때려죽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7) 저주는 비방하고, 헐뜯고, 욕하고, 잘 해준 것은 생각 않고 부족한 것만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주 하는 사람은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부모도 몰라보는 자식은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다. 이런 사람이 있는 한, 사회는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면서 행복한 마음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면 팥을 심어놓고 콩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부모님을 공경하여 복된 인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이 시대의 어머니여 비전을 품고 자녀를 사랑하라
오늘날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젊은 세대 속에서 약화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자녀를 돌보지 않는 어머니, 자기의 입장이 불리하면 얼마든지 자식을 내버릴 수 있는 어머니, 자식의 수치와 실패 앞에서 그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등을 돌려대는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기적인 어머니 밑에서 온전한 자녀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1889년, 역사를 바꾸어놓은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사촌간인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년은 알코올 중독자인 숙모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했고, 16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극렬분자가 됐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또 다른 한 아이가 같은 해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란 소년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입니다. 두 사람은 국가의 수장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분노의 독기로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일으켰고 다른 한 사람은 평화를 외쳤습니다. 히틀러는 56세 때 대피소에서 자살해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고, 아이젠하워가 눈을 감을 때는 세계가 애도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느냐 아니냐가 두 아이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아이들이 먹고 자라는 젖은 손등에 달라있지 않고 가슴에 달려 있습니다. 자식은 항상 어머니의 가슴 속에 안고 키우라는 예기입니다. 어떤 분은 “아이고, 손 등에 달려 있으면 참 편리할텐데.” 그러면 편리할 것입니다. 밤중에 한참 자는데 애가 젖 달라고 칭얼대면 “옛다! 먹어라” 하고 손등만 들이대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이 아닙니다. 자식은 어머니 품 안에서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며 자라도록 젖을 가슴에 달아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들은 힘이 들어도 아이들을 껴안고 사랑의 젖을 공급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들은 가슴이 늘어질까봐 젖을 안 먹이고 분유를 먹인다고 합니다. 그것은 창조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예요.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라고 거기서 꿈꾸고 인물이 되는 거예요.
아이에게 가슴으로 사랑을 주면서 키우면 어머니의 가슴 속에 있는 비전과 소원이 자녀들의 가슴에 그대로 전달됩니다. ‘아빠는 기계를 만드나 엄마는 인물을 만든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사랑을 전할 때 가슴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에게서는 자녀가 꿈과 비전을 가집니다. 돈만 아는 엄마에게는 그런 자식으로 성장합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은 항상 자신의 어머니의 비전이 자기를 키웠다고 합니다. 사랑 속에서 어머니의 비전이 전달되는 거예요. 요한 웨슬리, 아브라함 링컨, 록펠러 등 왜 그들이 자기의 인생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말합니까? 사랑 속에서 비전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하되 비전을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어머니의 비전을 받아서 자랍니다. 그는 영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기독교지도자입니다. 그는 단순한 종교지도자가 아닙니다. 영국을 도덕적 위기에서 구출해 낸 지도자였습니다. 그에게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웨슬리가 옥스퍼드대학에 다닐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편지 내용 중에 ‘내가 너희들을 키울 때 한 가지 중요한 뜻이 있었다. 그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내 자식 교육의 초점이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19명의 자녀를 키웠는데 그는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했고 자식들에 대한 비전을 품었습니다. 그녀의 19명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훌륭한 인물로 자라났습니다. 어머니가 가슴에 품은 뜻대로 자녀들은 자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지는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훗날 어머니를 회고하면서 쓴 글 중에 ‘하나님이여, 내 어머니를 축복하소서. 오늘의 나의 전부, 그리고 내일의 내가 소원하는 전부는 다 천사같은 내 어머니로부터 온 것입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링컨이 인류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어머니의 비전이 실현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비전을 발견하고 그 비전이 자녀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을 소원하며 마음에 품고 기도할 때 우리의 자녀는 비전대로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사함으로 부모님들을 공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들은 진정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키우되 자녀에 대한 비전을 품어서 바른 부모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