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의 진짜 원인은 ‘제주도 反日정서’였다고? [유석재의 돌발史전]
심지연 교수가 말하는 ‘4·3 원인의 지정학적 분석’
유석재 기자
입력 2023.04.07. 00:00업데이트 2023.04.07.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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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국군이 '무장공비와 함께 폭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주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해마다 4월 초만 되면 늘 돌아오는 기념일을 계기로 정쟁이 벌어집니다. 제주 4·3 사건을 둘러싼 공방입니다. 4·3은 수많은 무고한 국민이 국가의 폭동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불행한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2020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4·3 추념식에서 했던 말처럼 4·3을 ‘통일정부 수립 운동’이라고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통일정부 수립’이란 말은 4·3 무장폭동을 일으켰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명이 내건 슬로건이었고, 그들의 목적은 5·10 총선거 방해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수립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문 전 대통령의 당시 발언은 ‘무고하게 희생된 줄 알았던 제주도민 2만여 명(2003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이 사실은 남로당에 포섭된 사람들이었다’는 엄청난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는 해석입니다. 그런 말을 5·10 총선거에 의해 수립된 나라인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이 했다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문재인 전 대통령이 3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광장 추모제단에서 4·3 영령을 위해 참배한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2018년과 2020년, 2021년 세 차례 4·3 추념식에 참석한 바 있다. /뉴시스
그런데 4·3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분석할 때만 가능하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나왔습니다. 한국정치학회장, 정당학회장과 국회입법조사처장을 지낸 정치학계의 중진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입니다. 그의 의견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4·3 사건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이 왜 문제라고 보는가.
“최근 들어 이념적인 관점에서 제주 4·3사건을 분석함으로써 남·남 갈등을 증폭시키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국민통합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이념에 몰입될 경우, ‘단독정부’ 또는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포용을 불가능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비극을 오로지 민족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축소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4·3의 ‘지정학적 상황’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그것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 즉 일본의 종전(終戰) 대책과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공 및 상륙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이태경 기자
-일본의 종전 대책과 제주도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대미전(對美戰)과 대소전(對蘇戰)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재편성 및 재배치에 착수했다. 대미전에 대비해 대본영 직할부대로 제17방면군을 신설해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중부 이남을 작전 지역으로 맡도록 하고, 중부 이북 지역은 대소전을 대비하는 관동군이 맡도록 함으로써 이미 한반도 분할의 단초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 군사적 구도 속에서 제주도는 어떤 위치에 놓였던 것인가?
“1945년 3월 12일 대본영 작전회의에서 제17방면군에 보낸 ‘7호 작전’에 따르면, 일본은 미군이 북규슈(北九州) 상륙을 위해 8월 이후 제주도를 점령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기초해 3월에 제96사단을, 4월에는 제58군사령부를 제주도에 배치했다. 4월 이후에는 제111사단을 만주에서 제주도로, 제121사단을 하얼빈에서 제주도로, 독립혼성 제108여단을 일본 본토에서 제주도로 이동 배치했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때 만든 제주도 가마오름 동굴진지.
-그렇다면 대단히 많은 숫자의 일본군 병력이 제주도에 배치됐던 것일 텐데. 전략적으로 동서로는 중국과 일본 사이, 남북으로는 오키나와와 한반도 사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섬인 제주도가 전쟁 말기에 아주 중요한 지점으로 떠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1945년 7월에 나온 일본군 제17방면군의 정세 판단에 따르면 역시 미군이 규슈에 상륙하기 전에 먼저 제주도를 공략할 가능성이 크다고 파악했다. 1945년 2월 제주도 주둔 일본군은 약 1000명에 불과했으나, 8월에는 제58군사령부 산하에 6만여 명이 주둔할 정도로 병력이 폭증했다. 이는 당시 제주도민 22만 명의 28%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후에도 대본영은 미군이 제주도를 대일 공격기지로 삼을 수도 있다고 판단해 제주도에 병력을 증파할 계획까지 수립했을 정도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비행장 전경.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군의 군사용 비행장이었다. /뉴스1
-지금도 제주도 곳곳에서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군사기지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에 일본군은 한라산 중턱에 자동차 도로를 건설하고 제주도 각지에 토치카를 비롯한 방어기지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과 노력 동원이 강요되고 재산상으로도 막심한 피해를 주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이 때문에 제주도민의 반일(反日) 감정은 육지의 그 어느 곳보다도 높았을 것이며, 이러한 분위기가 8·15 해방 이후에 분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8·15 이후의 상황은 어떘는가?
“일본의 항복 직전에 소련군이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군은 8월 8일 밤 11시 50분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로 진공한 후 일본군과 전투하며 남진했다.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제25군으로 병력은 약 12만 5000 명 정도였다. 8월 25일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8월 30일 함경남도인민위원회로 개칭)가 결성됐고, 치스차코프 대장의 명령으로 함경남도의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이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등 소련군이 주둔한 순서대로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가 결성돼 그 지역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접수했다.”
-미군이 점령했던 남한 지역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은 무엇이었나?
“그냥 점령만 한 것이 아니라 신속하게 ‘북한 정부’를 세웠다는 것이다. 1945년 10월 8일 소련군의 지휘 아래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대표대회’가 개최돼 각 도 간에 당면 문제에 관한 유기적 연락을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1945년 11월 19일 북한 5도의 연락기관으로 ‘북조선행정국’을 평양에 설치했고 그 산하에 산업·교통·체신·농림·상업·재정·교육·보건·사법·보안의 10개국을 설치했다. 급기야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1949년판 ‘조선중앙년감’ 68쪽은 이를 ‘행정적 주권기관이 조직’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실상 단독정부가 수립됐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