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노나라의 혼란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는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던 중 허술한 세 개의 무덤 앞에서 슬피우는 여인을 만났다. 사연을 물은 즉 시아버지, 남편, 아들을 모두 호랑이가 잡아먹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자가 "그렇다면 이 곳을 떠나서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여인은 "여기서 사는 것이 차라리 괜찮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면 무거운 세금 때문에 그나마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말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무섭구나."
《예기(禮記)》, <단궁하편(檀弓下篇)>,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고대의 세금 제도라는것은 겉모양은 어찌되었건 결론은 백성에 대한 국가의 착취라는것은 큰 변화는 없을 없을 것입니다.
중국 역사 속에서 호구 조사로 인한 인구의 수치는 마치 엿가락과도 같이 늘어났다, 줄어났다를 반복합니다. 물론 전란의 시기가 길어지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살육이 벌어지는것은 분명하나, 4천만이 넘던 인구가 단순히 8백만 가량으로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단순히 대살육만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첫번째는 물론 국가의 행정력이 마비가 되어, 실제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인구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전란이 없던 시기에도 인구는 늘어났다 줄어났다를 반복할수 있습니다.
고대 한나라의 조세 제도에서는 인두세(人頭稅)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두세. 사람 인, 머리 두, 세금 세. 즉 사람 머리 숫자대로 돈을 거두어 들였다는 것입니다. 3∼14세의 남녀에게 23전을(구부라고 한다.), 15∼56세의 남녀는 120전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는 가혹한 일이었는데, 백성들의 부담은 인두세에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전조(田租)라는것이 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작하는 땅에 부과하는 세금이었는데, 수확량의 일정량을 바치는게 목적입니다. 일종의 지세입니다.
자신의 몸에 해당하는 인두세, 그리고 땅에 해당하는 지세를 동시에 내야 하니 그 부담은 만만치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땅이 없는 사람, 즉 사실상 재산이 없는 사람도 인두세의 부담에 시달리니 방법이 없습니다. 소작농을 한다손 쳐도 지주에게 주고 인두세로 바치고 하면 그 부담은 절망적인 것입니다.
거기다 지방의 지주들이나 유지들은 관과 유착을 하게 됩니다. 그 비리로 인해 세액은 일반 농민들에게 전가되어, 조세의 불균형 현상은 더욱 심해집니다.
너무나 가난한 백성들은 살기 위해 도망을 칩니다. 절이나 사원으로 들어가거나, 유랑민이 되어 떠돌거나, 산속으로 들어가서 도적질을 하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이미 명나라 시대부터 실질적인 중국 내의 인구는 어마어마했는데, 호구조사를 하면 정작 인구는 증가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조사에 포함되지 않고 떠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백성들의 문제 뿐만이 아닙니다. 집도 근거지도 잃고, 징세를 할수도 없는 유랑민들이 많아지는것은 국가에 있어서도 심대한 타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할 뾰족할 방법이 없어, 중국 내 인구는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지 않고 그렇게 수천년을 지나게 됩니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정세(인두세)와 지세를 통합하는것입니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시키면, 인두세는 사라지게 되고, 땅을 가지지 않은 불행한 농민들은 부담에서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명나라 말 시기부터 이런 시도를 해보려는 모습은 있었는데, 섬서성 호현(戶縣)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시행해보았고, 청나라 순치제 시절에도 몇몇 현에서 시도가 되보았지만 어디까지나 한정적인 이링었을 뿐입니다.
청나라 강희제
강희제 시대에 이르면 농민들은 스스로 나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서게 됩니다. 절강성 영파부(寧波府)의 농민들은 "토지에 따라 정역을 부담하라!" 라고 주장하였지만, 이는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큰 난관이 있었습니다.
부호, 지주 기득권층 들의 반대였던 것입니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면 땅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압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땅 많은 토지의 소유자는 역으로 세금이 늘어납니다. 이에 땅 가진 부자들은 이러한 개혁 조치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항주부 인화현(仁和縣)에서 경작지가 없는 사람은 정세를 면제해주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거부되었습니다. 항주 전당현(錢塘縣)에서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호들은 관과 연계를 하여 백성들의 이러한 의사를 막았던 것입니다.
의식이 있는 관리가 없는것은 아니었습니다. 증왕손이라는 관리는 지세에 비례해서 정세를 부과하는 방법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자면 정세를 부과하려면 우선 인구 조사가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 가난한 농민들은 도망을 치고, 부자들은 관하고 연계하여 정세를 피합니다. 그 결과는 재정이 부실해지고, 조사하는 관리들도 문책을 당하니 문제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득권 층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이유라는게 이런 것이었습니다.
"세금은 모두가 똑같이 내야지, 가난하다고 세금을 안내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부자들에게 가는것이 아닌가? 부자들이 왜 그것을 책임져야 하는가?"
1711년. 강희제 시대에 마침내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이 시행되었습니다. 이 해의 인구를 철저하게 조사한다음, 그것을 기준으로 인두세를 정한다음, 그 기준에서 더 늘리지 않겠다고 선포한것입니다. 즉, 사람이 더 증가해도 지금 기준보다 더 걷지 않겠다는 것이니, 실질적인 인두세의 폐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되었으나 정세를 징수당하는 농민들이 도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습니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지세 1냥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로서 문제가 해결이 된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이 실행되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사천, 광동이나 하남성 등지에서 부분적으로 시행이 될 뿐이었고, 실행된 정책에 대해서도 이광파(李光坡) 등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것입니다.
옹정제
그러는 사이에 강희제가 죽었습니다. 두 가지 의견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고, 옹정제는 물론 정세를 지세에 합치자는 파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음으로 함부로 먼저 시행하진 않았습니다. 옹정제는 막무가내로 개혁, 혁신을 주장하는게 아니라, 일이 풀릴 때까지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당장 옹정제가 즉위한 바로 그해, 산동의 순무 황병(黃炳)이라는 인물이 산동에서 정세와 지세를 통일하여 징수하겠다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황병은 지방관리로 오래 근무하면서 가난한 백성들이 도망치는 광경을 많이 보았고,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방법만이 빈부의 차이를 해소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옹정제는 놀랍게도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개혁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쓸데없이 이런 상소를 올렸다고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의 내심은 전혀 달랐지만 말입니다.
한달이 지나 직예 순무 이유균(李維鈞)은 가난한 백성들을 이롭게 하자고 주장하며 황병과 동일한 논지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옹정제는 또다시 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개혁을 하려면 신중하게 논의해야 하며, 제도를 바꾸려면 풍년이 들어 사회가 안정될때 시행해야 한다는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옹정제는 일을 막무가내로 처리하지 않고 확실하게 의견을 모으기 위해 호부에서 논의하도록 하며 신중을 기했습니다. 호부에서는 이유균의 의견이 옳을듯 하다고 그들의 의견을 밝혔는데, 호부의 승낙이 나왔음에도 옹정제는 또다시 문제를 더 검토하도록 했습니다. 1무(畝 : 토지를 재는 단위)의 크기는 일정한가? 질이 떨어지는 토지에 대해 동일한 세금을 매기는것은 부담이 크지 않는가?토지를 파는 사람이 매입자를 대신하여 토지세를 납부하면서 정세를 내는 일도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신중을 기한 것입니다. 이유균은 논의에 논의를 걸쳐 토지를 상중하 3등급으로 매겨 차등적으로 징세하도록 해 불공평함을 없앴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서야 옹정제는 이유균을 칭찬하고, 바로 다음 해부터 이 정책을 시행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만 이유균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부자들이 이 제도를 반대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방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걱정하지마라. 소신껏 시행하라."
그리하여 이유균이 있는 직예성이 이 일이 시행되었고, 황병도 산동성에서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곧 청나라 전역으로 제도가 시행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정은제(地丁銀制)입니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었습니다. 기득권 층이 반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절강성에서 지주들은 순무를 찾아가 매우 거친 태도로 항의하여, 절강 순무 법해(法海)는 겁에 질려 정책의 실행을 미루고 맙니다. 1726년 전당현에서 치루어진 향시에 참가한 천여명의 응시생들은 지정은제 시행을 터무니 없다고 비난하며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상인들을 위협하여 파시를 하라고 협박했습니다. 파시는 상인들이 국가의 정책이나 지방관의 횡포에 반대하여 모든 장사를 그만두고 파업을 벌이는것으로서, 예전부터 관리에게는 파시를 당하는게 최대의 치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 당시 지방의 지배자들은 향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살고 있는 자 또는 향촌의 퇴직관리나 유력인사 등의 인물들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실질적인 향촌의 지배자였습니다. 향신들은 관과 연계하여 온갖 불법행위를 벌이며 정책의 시행을 막았습니다. 그들은 정세도 면제를 받았고, 사실상의 행정 권력의 일부를 점유하고, 지방 관리들조차 함부로 그들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향신들은 관료 사회에 개입을 할 정도로 그들의 입지는 어마어마했던 것입니다.
1727년, 직예 동광현의 현령 정삼재는 이들의 기세에 질린 나머지, "이곳의 악랄한 향신들이 각종 구실로 관을 위협하여 지세를 내지 않고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라고 보고했습니다.
옹정제가 개혁을 시행하려고 한다면, 이 향신들을 모두 적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옹정제는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향신들의 기세에 밀리기는 커녕, 오히려 옹정제는 지방 관리들에게 "눈치를 보며 폐딴을 혁파하지 않거나, 탄핵, 비방을 할시에는 중벌을 내릴 것이다." 라고 경고하여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또한 향신에 대한 면제는 오직 그 향신 개인에게만 있다는것을 천명하면서, 만약 그 이상의 탈세 행위를 한다면 향신들도 모두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사민이 부역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생원들도 백성들과 똑같이 부역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남 축현이라는 지역의 지현 장가표는 "생원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을 담당해야 한다" 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생원들과 향신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았습니다. 생원들은 장가표가 과거 평민에게 돈을 빌린적 있다는 개인적인 사실까지 끄집어 내려서 그를 비난했는데, 진상을 파악한 옹정제는 역으로 그 생원들에게 처벌을 내렸습니다.
향신들은 옹정제의 정책에 자기내들끼리 똘똘 뭉쳐 조직적인 반대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산동성의 향신들은 거의 대부분이 한꺼번에 지세를 납부하지 않으면서 지방관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 라는 말까지 나돌며 반발이 극심했습니다. 이에 옹정제는 산동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천 4백여 명의 공명을 모두 박탈 하는 초강경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산동 뿐만 아니라 호광 지역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고, 계주에서는 지세를 얼른 내놓으라고 향신들을 재촉한 진순예라는 관리가 역으로 향신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고 탄핵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비난과 욕에도 불구하고 옹정제는 진순예를 처벌하지 않고 그를 응원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소신 있는 지방관리들은 큰 힘을 얻어 온갖 위협을 무름쓰고 정책을 밀고 나가게 됩니다.
한편 옹정제는 동시에 즉위 후 3,4년동안 무려 1천만냥에 가까운 지세를 면제해주거나 탕감해주어 백성들의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빈민 구제 정책도 펼치자 백성들은 옹정제의 정책을 크게 지지하며, 오히려 이번에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 지정은제를 반대하는 향신들과 대립하는 용기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각지에서 향신들과 가난한 농민들이 충돌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위
궁지에 몰린 향신들은 발잘적으로 대응하며, 향시를 거부하고 답안지를 찢어버리는가 하면 소작인을 발로 차서 죽이거나 지현을 협박하고 온갖 거짓죄를 꾸며내어 익명으로 상소를 올려 옹정제의 정책을 지지하는 측근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옹정제의 측근들 역시 그들이 모시는 상관 만큼이나, 악명 따위에는 아랑 곧하지 않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게중에서도 이위는 향신 측의 대규모 시위집회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개 패듯이 두들기며 쫒아버렸습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막장에 가까운 일이나 ─ 시위를 두들겨서 진압했으니 ─ 그 당시에는 오히려 시위를 일으킨 계층이 기득권이라는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당연히 이위는 온갖 중상모략에 향신들의 비난을 한번에 받았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할 일만 했습니다.
엄청나게 단호한 정책들려 결국 향신들의 기세도 점점 수그러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향시를 거부하는 왕손, 범호라는 감생 두명을 아예 처형하기까지 하자, 향신들도 결국 겁을 먹고 다시는 소동을 일으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지정은제는 드디어 전중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릅니다.
효과는 바로 드러나게되었습니다. 땅이 없는 농민들은 더 이상 지세의 부담에 짓눌리며 도망갈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들이 모두 호구조사에 집계됨과 동시에, 고구마 등의 작물이 전해지고 평화가 유지됨에 따라 청나라의 인구는 경이적인 수준으로 증가 추세를 겪게 됩니다. 20년, 30년 사이에 천만, 이천만 씩 인구가 엄청난 수치로 증가하며, 그에 더불어 국가의 부도 급증했습니다. 50~60년 사이에 1억명의 인구가 증가하는등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수준의 인구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그 대신 옹정제는 오랜 시간 동안 악명을 떨쳤고, 각종 출처가 불분명한 음험한 소문이나 악질적인 면모로 이야기가 전해져왔습니다. 옹정제가 이룬 업적들은 건륭제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졌고, 강희제를 시해했다는 소문이 퍼져 패륜아라는 면모가 강조되는가 하면 유독 형제들에 대한 숙청이 강조되어 잔인하고 나쁜 군주로 내몰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재평가가 이루어진 뒤입니다.
첫댓글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무장했으면서도, 냉철함을 잊지않은 현실주의자의 대개혁이군요. 요즘 같은 시기라 더더욱 아쉬운 리더쉽이라 생각합니다
독재적인 권력이 있지 않으면 가지기 힘든 리더쉽이라는 점도 있죠. 참 씁슬하다고 봅니다.
경재개발은 독재자의 특권?
멋있네 옹정제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도 몇 안 되는 개념황제죠.
지정은제. 단순히 은으로 세금 납부하게 되어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엄청난 일이 있었군요. 생각해보면 기득권에게 세금 부과하는 것이 당연시된 것도 얼마 안됐네요.
음 하긴 단순한 고구마 감자 옥수수등의 도입과 개간활성화 농업기술 발달로는 청대 중후반의 인구폭발을 설명하긴 힘들죠. 인두세가 폐지되며 세 부담이 줄자 호구조사에 편입된 인원도 꽤 되겠네요.
봉건왕조시대의 개념을 국민국가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현대사의 독재자들 보다 나은 거 같음.......................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는 [대동법]이라는 초유의 개혁이 있었습니다. 백성의 조세부담이 거의 1/5로 줄어들었던 대개혁... 근데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까거든...-_-; 잘한 일은 꼬투리잡아 욕하고, 못한 일은 아예 짓뭉개고...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거야 아마...-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