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에서 내린 김 순경은 택시 기사에게 경찰 공무원 증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국가 권력이라고 내 보이자 택시기사는 요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수고하십시오’ 하고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떠난 택시 앞에 서서 속초 의료원 건물을 올려다본 김 순경은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새로 뜯은 솔 담배 꽉인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현금의 흐름이 대충 보이는 듯 하였다.
택시비를 내지도 않으면서 택시비를 빌려달라며 조 순경에게 삥 뜯었더랬다.
“아 씨발.”
하지만 담배는 샀지만 성냥 사는 걸 깜빡한터라 입에 문 담배를 다시 꼬깃꼬깃 담배꽉에 밀어넣은 김 순경은 속초의료원 응급실 쪽으로 올라갔다.
의료원 건물은 참 묘한 것이 정문은 영랑호 공원쪽으로 나있고, 후문이 도로 방향으로 나있어서 정작 차를 타고 오면 후문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어서 사실상 후문이 정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구급차가 들어가는 응급실이 정문인 셈이었다.
응급실 입구도 계단이 있고 침대차가 들어가는 비탈길이 있는데 또 구급차에서 들어오기 쉬우라고 비탈길이 정면에 있고 계단이 측면에
있다보니 결국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올라가는 길은 비탈길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닌, 묘한 설계였다.
김 순경도 평범한 사람인터라 어느새 응급실을 향해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태양 덕에 의료원
주차장에는 붉은 빛이 감돌고, 또한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동네의 유일한 병원인 속초
의료원이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이 동네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죽는 곳이기도 했다. 주차장에 적지 않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고,
병원 바로 옆에 위치한 장례예식장에서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 검은 양복 사람들이 간혹 보였다. 오늘도 사람이 죽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김순경은 그러려니하고 그냥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이 곳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막상 속초의료원 건물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또 다른 모양이었다. 노친네들이 환자복을 입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가 하면, 반팔 옷입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하며, 주사 안 맞겠다며 질질 짜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도 있고, 그 사이를 무관심하게 지나다니는 간호사들도
있었다. 완전히 개판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병원 풍경에 전혀 관심이 없는 김순경은 바로 원무과를 찾았다. 속초 의료원은 접수처 바로 옆에 원무과가 붙어있었다. 접수원이 병원 사무도 같이 보는 듯 했다.
“저기, 혹시 여기 최병훈 씨 계십니까?”
김순경은 접수창 앞에 경찰 공무원 증을 내어 보이며 물었다.
“네? 아, 잠시만요.”
경찰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동네의 모든 협조를 구할 수 있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스프링 노트로 된 장부를 한참 뒤지던 접수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김순경에게 물었다.
“혹시 언제 입원하셨는지 아시나요?”
아 이런, 김 순경이 물어본 이름은 최 씨 아바이의 이름이었다. 그 부인의 이름은 알지 못하던 차였다.
“아니, 입원한 사람은 그 부인인데요.”
“아, 그러면 알 수 없겠는데요.”
“하지만, 최병훈 씨 이름으로 영수된 영수증이 있습니다. 바로 엊그제요.”
“아,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김 순경의 설명에 접수원은 하던 일을 멈추고 옆 칸으로 넘어갔다. 원무과였다. 그 안에서 이 것 저 것 서류를 뒤지며 페이지를 한참 넘기던 그 여자는 마침내 뭔가 발견했는지 다시 접수창으로 넘어왔다.
좋은 시절이었다.
“찾았나요?”
“네, 입원한 환자분은 이이남 씨고요. 근데 오늘 퇴원하신 분이네요.”
“네? 오늘 퇴원했다고요? 혹시 어디로 간단 이야기 없던가요?”
“글세요. 더 좋은 데로 간다고 하셨던 것같은데요.”
“더 좋은데요? 도대체 이 동네에 여기보다 좋은 데가 어디랍니까?”
“글세요. 뇌암 말기라… 굳이 간다고 하면 서울대학 병원 아니겠어요?”
서울? 서울이라면 점점 멀어진다. 김 순경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수사가 진행되기는 커녕 점점 멀어져간다. 갑자기 가슴이 콱
답답해지는 게 관할 경합같은 게 떠 오르며 이대로 놓치는건가 싶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가로로 젓게 하였다.
“혹시 퇴원 언제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네, 퇴원 시간이 적혀 있는데, 오늘 두시에 나가셨네요.”
오늘 두시에 있었던 일… 임 부장이 사건을 신고한 시간과 일치한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김 순경의 머리가 일순 복잡해졌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납치사건은 대부분 면식범에 의한 것, 아이가 저항했다는 정황은 면식범에 의하지 않았다는 것, 집 구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아이와 면식이 없다. 둘이 하나로 합쳐지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하지만 그 것을 합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나 이상의 증거가 필요하다. 그 것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임부장이 최씨 아바이를 이용하여 아이를 납치한다면 딱 가능한 일인데…. 그러기에는 최씨 아바이의 동기가 설명되지만 임 부장의 동기는 없다. 어거지로 짜 맞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잠시 전화 좀 씁시다.”
“네. 쓰세요.”
접수창구에서 밀려나온 새까만 기계식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다이얼을 드르륵 돌렸다.
“34 국에…”
명함에는 명승기업 임현철 부장 이라고 한문으로 적혀 있었고 그 밑에는 사무실과 자택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또르르 굴러가는 다이얼 소리가 끝나자마자 신호음이 들렸고, 신호음이 한번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계속 전화를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마치 유괴범이 전화라도 하길 기다린 듯 싶었다. 김 순경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상대가 안심할지 상심할지 가늠할 수 없어 잠시 뜸을 들였다.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
이 다급한 목소리는 잠시간 뜸을 들인 김 순경의 가슴을 싸늘하게 하였다. 그가 말을 늦게 함으로서 상대가 초조해져있고,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식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을 김 순경은 주먹으로 조이고 있었던 것이다.
김 순경이 자신을 밝히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안심을 한 건지 탈진을 한건지 알 수 없는 신음소리가 들렸고, 그 목소리가 약간은 관능적으로 들린 김 순경은 자신의 귀가 어떻게 된게 아닌가 싶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혹시 유괴범에게 온 전화가 있었나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니요, 없어요. 전혀 없어요… 그런 전화라도 왔으면… 도대체 아무런 연락도 없어서 불안해 죽겠어요. 으흐흑…]]
“사모님, 진정하세요. 진정하시고요. 반드시 찾아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찾아드리겠습니다.”
위로라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것 밖에 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울음참는 소리를 들으며 먼저 수화기를 내려 놓아도
되는가 고민하다가 그 시간이 10 초 20 초를 넘어서서 1 분 가까이 되자 김 순경은 할 수 없이 먼저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어디에 전화하셨어요?”
접수창구의 접수원 아가씨가 김 순경에게 물었지만 마땅히 대답해주기 껄끄러운 이야기라 어떻게 둘러댈까 생각하였다.
“극비사항입니다. 종결되면 말해드릴게요.”
그렇게 대답하자 접수원은 더 이상 김 순경에게 묻지 않았다.
사람들도 순진한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다.
=속초시 노학동 속초 경찰서 8월 15일 오후 7 시=
더 이상의 수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던 김 순경은 오늘은 여기까진가 싶어서 경찰서로 돌아왔다. 오늘은 김 순경이 당직인
날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오늘 하루 종일 김 순경이 수사반 사무실에 처박혀 있어야 했지만 경찰서가 발칵 뒤집힌 사건도 있었고,
서장하고도 한바탕했고 해서 경찰서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참이었다. 그래도 야간 당직을 벗어날 순 없었기에 아무도 없는 수사반
사무실로 기웃기웃 들어왔다.
“없네.”
아무도 없었다. 혹시라도 반장하고 마주칠까봐 눈치보며 들어왔는데 다행인지 무관심인지 자리를 싹 비우고 나가 있었다. 사실 휴일 당직은 혼자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괜히 서장이 불러들여서 들어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홀로 남은 김 순경은 당직 일지를 펼쳐 놓았다. 순찰 일지를 가라로 작성하고 순찰함은 새벽에 한번에 모두 작성할 참이었다.
허리춤에 찼던 총을 풀어 놓고 총기 수납함에 넣으며 총기 번호를 일일이 체크해가며 총이 모두 회수되었는지 확인하였다. 하지만 딱
하나가 비었다.
“아 씨…”
최 주임의 총이 비었다. 사무실 안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망나니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최주임이었다. 술 마시고 출근하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퇴근을 했는지, 어디서 노는지 알 수 없고, 가끔씩은 동네 깡패들과 술먹고 고주망태가 되어 경찰서에 들어와 자는
사람이었다. 완전 깡패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으나 그 놈의 선후배 사이가 뭔지 박 반장은 최 주임을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었다. 오늘
총을 가지고 나간 걸 보아하니 또 어디 어슬렁거리다가 술을 퍼마시고 있는 듯 싶었다.
김 순경은 오늘 총기가 모두 반납되었다고 체크하였다.
그리고 난 후 타자기 앞에 앉아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타자를 쳐 내려가기 시작했다. 금일 사건 일보였다. 날짜, 보고자 이름부터
시작해서 항목별로 체계적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글이 점점 길어지더니 완전히 소설이 되어 있었다. 결국 종이를
타자기에서 잡아 당겨 구겨버리고 다시 한 장을 넣고, 보고 내용을 최대한 간략하게 짜보았다.
현장을 토대로 알아낸 것, 그리고 주요 용의자 네명, 최씨 아바이랑, 순돌네, 오지미 씨랑, 작은 갯배 선장을 언급하였고 그 중
최씨 아바이에 대한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동기, 기회, 실행 가능성에 대한 내용이었고,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다고 적다가 다시
종이를 잡아당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씨 아바이가 범인이어서는 안되었다. 최 씨 아바이가 범인이라면… 다른 사건들이 여전히 미궁에 남게 된다. 차라리… 차라리…
‘이번 사건도 뭉개지면… 사람들이 계속 매달릴텐데….’
청호동 아이가 없어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속초 경찰들이, 대기업 임원의 자식이 사라졌다니까 하루 반나절도 안되어서 휴일에도
돌아다니는 꼬락서니가 너무 마음에 안들었다. 하지만 김 순경은 곧 고개를 흔들고 계속해서 일보를 써내려갔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한
아이가 받은 공포와 고통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그리고 왜인지… 세련된 집에 살고 있는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진
부인의 슬픈 얼굴도 떠 올랐다. 그 얼굴에 미소가 떠 오를 게 해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미치자 김 순경은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다.
첫댓글 글을 재밌게 쓰네요...
어이쿠 이게 얼마만에 받아보는 댓글인지... 감사합니다
ㅎㅎ 정말 재밌네여... 글솜씨가 아마추어는 아니신 듯...
하지만 경험이 묻어나는 글솜씨도 아니예요. 이야기 쫓아가느라 바쁘잖아요.
늘 재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제9편을 연재하셨더군요. 연리지를 위한 선물이리라 여기고 있답니다.^^
조만간 읽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