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追億)에서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전(生魚物廛)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晋州)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해설> 1962년 시집 [춘향이 마음]과 1983년 [추억에서]에 수록된 연작시이다.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추억에서'는 김소월, 박목월, 서정주 등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정서 '한(恨)'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진주장터 생어물전의 생선 장사이다. 오누이를 키워내기 위해서 새벽부터 나가서 생선이 다 팔릴 때까지 기다려 돌아오는데, 한밤중에 들어오기 일쑤이다. 그래서 오누이는 먼 별빛을 바라보면서 차디찬 골방에 누워 손을 비비며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잠이 든다.
작가는 어머니의 한스러운 삶, 고생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손 안 닿는 생선 눈깔'과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을 제시한다. 팔다 남은 생선 눈깔의 빛은 오누이를 둔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감각적으로 빛의 덩어리가 되어 빛 발하는 생선 눈깔의 인광에 투사된다. 생선 눈깔의 그것은 오들오들 떨면서 자기를 기다리는 아이를 가진 어머니의 다급한 마음과 대응된다.
새벽빛 속에서나 한밤중에 힘들게 오가느라 진주 남강의 물빛조차 맑은지 몰랐을 어머니를 옹기전의 옹기들로 투사시킨다. 달빛이 환기하는 여성적 특징에 옹기의 생김새나 용도가 환기하는 모성적 특징이 결합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것을 매개하는 말이 '말없이 글썽이는'이다. 한스러운 삶을 소리내어 말하지도 드러내 놓지도 못했을 어머니의 아픔에 아들은 공감하였을 것이다.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눈물이며 한스러운 어머니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김병국 외, 한국교육미디어문학)
* 이 시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감각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한(恨)의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 낸 작품이다. 어린 자식들을 두고 생계를 위해 멀리까지 장사를 나가야 했던 어머니의 고달픈 삶이 어머니 주변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사물('남은 고기 몇 마리', '진주 남강')에 투영되는데, 화자는 이렇듯 관념적 이미지를 가시적 이미지로 전환하여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그리움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의문형의 완곡한 종결 어미로 절제된 감정을 표현하여, 한(恨)의 정서를 노래하면서도 통속적인 감정에 빠지지 않고 아름답게 형상화한 점이 돋보인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추억(追憶)에서>와 같은 초기 시에서는 한국적 정서인 슬픔과 한의 세계를 살아 있는 언어인 구어(口語)투의 시어로 구사하여 표현하고 있다. 박재삼의 이런 시세계는 우리 전통 서정시의 세계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특히 여성적인 어조를 통하여 슬픔이 내면화된 정조를 그려내고 있다.
박재삼의 시는 전반적으로 서정시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후반기에는 어느 정도 현실에 대한 관심과 평범한 시적 언어를 통하여 넉넉하고 긍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그의 13번째 시집인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는 이런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박재삼은 김소월(金素月)의 서정주의 시세계를 계승한 것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1950년대 이후 한국 전통 서정시의 세계를 생동감 있는 구어를 구사하여 모국어의 질감을 눈부시게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재삼의 시에는 시간이 할퀴고 지나가면서 남긴 흉터가 담겨 있다. 그건 한(恨)이기도 하다. 김소월이나 김영랑의 시에서 보이는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한이 아니라 현실에 밀착된 삶 자체의 한이 담겨 있다. 박재삼은 평생을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죽음을 맞았다. 30년 가까이 계속된 고혈압과의 투쟁 끝에 죽음을 맞으면서 '이제서야 오랜 싸움을 끝내는구나'라고 유언을 남길 만큼 그의 삶은 고단함 자체였다.
'추억에서'는 그러한 박재삼의 흉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편을 일찍 잃은 어머니는 진주 장터에서 생선 장사를 하여 남매를 키운다. 그것도 큰 점포에서 하는 장사가 아니라 자배기에 생선을 가지고 가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그런 장사였다. 그랬기에 어머니는 바닷밑에 어스름이 깔리는 늦은 저녁까지 고기 자배기를 놓고 생선을 팔아야 했다. 그래야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가난을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다. 어머니에게 있어 돈(은전)은 '장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눈깔'과 같이 '속절없이 손 안 닿은 한'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장사를 나가신 후에 시인은 누이와 함께 난방도 되지 않은 작은 골방에서 손 시리게 떨면서 저녁도 굶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오들오들 떨면서 동구 밖에도 나가보고 마당에서도 서성이다가 추운 방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고 오누이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옆집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그런 원망 속에서,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웅크린 채 오누이는 잠이 들었다.
이제 시인도 그때의 어머니만큼 나이를 먹었다. '울엄매야 울엄매'라는 직설적인 표현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이 묻어 있다. 진주 남강이 아무리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고달픈 삶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 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이 그때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어머니는 곁에 계시지 않는다. 시인은 한 맺힌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추억에서'라고 했다. 결국 삶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때 그런 삶을 살지 않고 그때 그런 기억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시가 창조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아픈 기억은 시간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추억이 된다. 그래서 시인들은 역설적으로 행복하다. (한준희/교사, 매일신문 '문학기행')
<박재삼(朴在森) : 1933 - 1997 >
* 1933년 일본 동경(東京) 출생.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 1953년 [문예]에 시조 〈강물에서〉가 모윤숙(毛允淑)에 의해 추천되었으며,
*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정적 靜寂〉이 서정주(徐廷柱)에 의해 , 시조 〈섭리 攝理〉가 유치환(柳致環)에 의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 1961년 [60년대 사화집]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현대문학사, 대한일보사 기자를 역임했으며, 삼성출판사에서 근무하였다.
*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이 간행되었다.
* 시집으로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바람](1975), [어린것들 옆에서](1976), [뜨거운 달](1979), [비 듣는 가을나무](1981), [추억에서](1983), [대관령 근처](1985), [내 사랑은](1985), [찬란한 미지수](1986), [사랑이여](1987), [해와 달의 궤적](1990),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1995) 등의 시집과 여러 권의 시선집, 산문집을 발간하였다.
현대문학상 신인상(1956), 한국시인협회상(1977), 노산문학상(1982), 한국문학작가상(1983), 중앙일보 시조대상(1986), 평화문학상(1987), 조연현문학상(1988) 등을 수상했다.
<경남 사천시 노산공원 박재삼문학관>
<겅남 사천시 노산공원 박재삼 시비, 시제는 '천년의 바람'>
* 천년의 바람/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 Shenandoah/Sissel
http://youtu.be/W1EG_4IBz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