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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 스크랩 제1회 질마재문학상 수상자 - 장석주
나는 나 추천 0 조회 14 11.01.21 16: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1회 질마재문학상 수상자 대표시>

 

 

겨우

 

   장석주

 

 

어둠은 깊다. 목이 마르다.

별들의 공전(空轉)이나 높새바람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내가 자꾸 목이 마른 것은

나무들의 생태(生態)와 닮은 몸?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표면의 물들 태반은 지하로 숨고

겨우 몸 안으로 들어온 물들이 순환하는 동안

나무들의 잎눈에서는 잔 근심과 후회들이

연초록으로 돋아난다.

비바람 따라 마실 나온 어린 천둥들이 우는 밤에는

잎들도 처절했다.

강제로 뜯겨 내동댕이쳐지는

그런 밤의 참혹에 증오의 미학도 깨치지 못하고

나는 굳게 대처하곤 했다.

조경선이 내려와 늦가을 무렵 연못은 완성되고

나는 위로를 받는다.

연못은 얕은 물로 단풍잎들을 받고

서리가 내렸다. 서리에 시드는 풀들,

노모의 잠꼬대 소리가 높아지는

동지 새벽에 깨어난 나는 겨우

은버들 한 쌍 같은 네 관자놀이와 쇄골을 더듬는다.

목이 마르고

목이 마른 밤들이 가고

네 마음 언저리에도 닿지 않는

네 푸른 정맥과 손목의 가냘픔을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고요가 깊으면 그 고요 속에 숨결을 묻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지 마라, 태중의 아이들아.

겨우, 라는 부사로써만 발설될 수 있는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으로 무구한 개와 고양이들만

태어나라. 나는, 겨우, 살아 있으니까.

겨우, 사랑을 견딜 수 있을 뿐이니까.

 

 

     

 그믐 눈썹

      -K에게

 

 

  해가 구르듯 지고 바람은 대숲 아래서 가벼이 목례를 하네요 고양이는 푸른 인광을 번뜩이며 하얗게 울고요 자꾸 울고요 숯이라도 내 마음 탄 자리를 검다 하지는 못하겠죠 물은 물속 일을 모르고 꿈은 꿈인 줄도 모르죠 그리고 살았죠 단풍나무 뒤에 서 있는 당신 어깨 너머로 계절 몇 개가 떨어져요 당신 눈 위에 눈썹은 검고요 당신은 통영을 간다 하네요 발톱 가진 어둠 몇 마리가 칠통(漆桶) 속에서 울부짖죠 무슨 일인가요 당신 눈동자를 보던 내 동공은 녹아 눈물로 흐르고 당신에게 뻗던 내 팔은 풀밭에 떨어져 푸른 뱀이 되어 스으윽 가을 건너 봄의 관목 숲으로 사라져요 피비린내가 훅 하고 끼치는 걸 보니 벌써 그믐이 가까워지나 봐요 당신이 내게 기르라고 맡기고 내가 젖동냥해서 기른 그믐이죠 어서 오세요 그믐 눈썹으로 오세요 열두 마리 고양이는 하얗게 울고요 그믐에 그을리고 탄 제 마음 자리는 숯이랍니다

 

 

몽해항로 1 

       - 악공(樂工)

 

     

누가 지금

내 인생의 전부를 탄주하는가.

황혼은 빈 밭에 새의 깃털처럼 떨어져 있고

해는 어둠 속으로 하강하네.

봄빛을 따라 간 소년들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네.

 

하지 지난 뒤에

황국(黃菊)과 뱀들의 전성시대가 짧게 지나가고

유순한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여네.

곧 추분의 밤들이 얼음과 서리를 몰아오겠지.

 

일국(一局)은 끝났네. 승패는 덧없네.

중국술이 없었다면 일국을 축하할 수도 없었겠지.

어젯밤 두부 두 모가 없었다면 기쁨도 줄었겠지.

그대는 바다에서 기다린다고 했네.

그대의 어깨에 이끼가 돋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네.

갈비뼈 아래에 숨은 소년아,

내가 깊이 취했으므로

너는 새의 소멸을 더듬던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라.

네가 산양의 젖을 빨고 악기의 목을 비틀 때

중국술은 빠르게 주는 대신에

밤의 변경(邊境)들은 부푸네.

 

 

몽해항로 2

            - 흑해행

 

 

잡풀들이 무너져 키를 낮추고

들에 숨은 웅덩이들이 마른다.

가을 가뭄은 길고 꿈은 부쩍 많아지는데

사는 일에 신명은 준다.

탕약이 끓는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옛날은 가고 도라지꽃은 지고

간고등어나 한 마리씩 먹으며 살아도 되나.

요즘 웬만한 길흉이나 굴욕은 잘 견디지만

사소한 일에 대한 인내심은 사라졌다.

어제 낮에는 핏물이 있는 고기를 씹다가

구역질이 나서 더 먹지를 못했다.

비루해, 비루해. 남의 살을 씹는 거,

내 구강(口腔)에서 날고기 비린내가 난다.

이슬람이라면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할 텐데,

금식은 얼마나 순결한가.

안성 시내에서 탄 죽산행 버스 안에서

취한 필리핀 남자 두 명을 만났다.

안성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겠지.

황국이 피는 이 낯선 땅에서 술을 마시며

헤매는 저 이방의 노동자들!

 

기온이 빙점으로 내려가는 밤

서재에서 국립지리학회보를 들여다보는데

뼛속의 칼슘들이 조용히 빠져나간다.

지난해 이맘때 자주 출몰하던 너구리가

올해는 보이지 않는다.

하천 양쪽으로 콘크리트 옹벽을 친 탓일까.

배나무에서 배꽃 필 무렵

잉잉대던 벌들도 올해는 드문드문 보인다.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가창오리들이 꾸륵꾸륵 우는 소리 들으니

집 아래 호수의 물이 어는 모양이다.

꿈속에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를 탄다.

누군가 흑해행 버스라고 했다.

검은 염소들이 시끄럽게 울어 댄다.

한 주일쯤 달리면 흑해에 닿는다고 했다.

나는 참 멀리도 가는구나, 쓸쓸한 내 간을 위하여

누가 마두금이라도 울려 다오,

마두금이 없다면 뺨이라도

철썩철썩 때려 다오, 마두금이 울지 않는다면

나라도 울어야 하리!

 

 

몽해항로 3

      - 당신의 그늘

 

 

구월 들어 흙비가 내리쳤다.

대가리와 깃털만 남은 멧비둘기는

포식자가 지나간 흔적이다.

공중에 뜬 새들을 세고

또 셌다, 자꾸 새들을 세는 동안 구월이 갔다.

식초에 절인 정어리가 먹고 싶었다.

며칠 입을 닫고 말을 삼간 것은

뇌수막염에 걸린 듯 말이 어눌해진 탓이다.

여뀌와 유순한 그늘과 나날이 어여뻐지는

노모와 함께 나는 만월의 슬하에 든다.

당신의 그늘을 알아,

당신에게 그늘이 없었다면

몇 그램의 키스를 탐하지 않았을 터다.

만월에는 오히려 성운(星雲)의 흐름이 흐릿하다.

금식 사흘째다. 모자를 쓰고

안성 시내를 나갔다가 원산지 표시가 없는

쇠고기를 먹었다. 중국에서는 부화 직전의

알을 깨서 통째로 씹어 먹는다고 했다.

사람의 식욕은 처절하다.

초승달이 뜨고 모란꽃 지던 밤은

멀리 있었다, 밤엔 잠이 오지 않아

따뜻한 물에 꿀을 타서 마셨다.

흑해가 보고 싶었다.

물이 무겁고 차고 검다고 했다.

날이 차진 뒤 장롱에 넣었던 담요를 꺼냈다.

안성종고 이영신 선생이 올해 텃밭 수확물이라고

고구마 한 박스를 가져왔다.

조개마다 진주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삽살개의 눈에 자꾸

눈곱이 낀다. 속병을 가진 모양이다.

집개는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못하는데,

나는 치통 때문에 신경 치료를 받으러

두 달간이나 치과병원을 드나든다.

작년보다 흰 눈썹이 몇 올 더 늘고

바둑은 수읽기가 무뎌진 탓에 승률이 낮아졌다.

흑해에 갈 날이 더 가까워진 셈이다.

 

 

몽해항로 4

- 낮에 보일러수리공이 다녀갔다

 

 

겨울이 들이닥치면

북풍 아래서 집들은 웅크리고

문들은 죄다 굳게 닫힌다.

그게 옳은 일이다.

낮은 밤보다 짧아지고

세상의 저울들이 한쪽으로 기운다.

밤공기는 식초보다 따갑다.

마당에 놀러왔던 유혈목들은

동면에 들었을 게다.

개똥지바퀴들은 떠나고

하천을 넘어와 부엌을 들여다보던 너구리들도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누굴까, 네게 외롭다고 말하고

서리 위에 발자국을 남긴 어린 인류를 생각하는

나는 누굴까.

나는 누굴까.

낮에 보일러수리공이 다녀갔다.

산림욕장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속옷의 솔기들 마냥 잠시 먼 곳을 생각했다.

어디에도 뿌리 내려 잎 피우지 마라!

씨앗으로 견뎌라!

폭풍에 숲은 한쪽으로 쏠리고

흑해는 거칠게 일렁인다.

 

구릉들 위로 구름이 지나가고

불들은 꺼지고 차디찬 재를 남긴다.

빙점의 밤들이 몰려오고

물이 언다고

물이 언다고

저 아래 가창오리들이 구륵구국 구륵구국 운다.

금광호수의 물이 응결하는 밤,

기름보일러가 식은 방바닥을 덥힐 때

나는 누굴까.

나는 누굴까.

 

 

몽해항로 5

      - 설산 너머

 

 

작약꽃 피었다 지고 네가 떠난 뒤

물 만 밥을 오이지에 한술 뜨고

종일 흰 빨래가 펄럭이는 길 바라본다.

바람은 창가에 매단 편종을 흔들고

제 몸을 쇠로 쳐서 노래하는 추들,

나도 몸을 쳐서 노래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덜 불행했으리라.

노래가 아니라면 구업을 짓는

입은 닫는 게 낫다.

어제는 문상을 다녀오고,

오늘은 돌잔치에 다녀왔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작약꽃과 눈[雪] 사이에 다림질 잘하는 여자가

잠시 살다 갔음을 기억할 일이다.

떠도는 몇 마디 적막한 말과

여래와 같이 빛나는 네 허리를 생각하며

오체투지하는 일만 남았다.

땀 밴 옷이 마르면

마른 소금이 우수수 떨어진다.

해저보다 깊고 어두운 밤이 오면

매리설산(梅利雪山)을 넘는 야크 무리들과

양쯔강 너머 금닭이 우는 마을들을 떠올린다.

누런 해가 뜨고 흰 달이 뜨지만

왜 한번 흘러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바람 불면 바람과 함께 엎드리고

비가 오면 비와 함께 젖으며

곡밥 먹은 지가 쉰 해를 넘었으니,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는 일만

남았다. 저 설산 너머 고원에

금빛 절이 있다 하니

곧 바람이 와서 나를 데려가리라.

 

 

 

 

몽해항로 6

     - 탁란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을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감자의 실뿌리마다

젖꼭지만 한 알들이 매달려 옹알이를 할 뿐

흙에는 물 마른자리뿐이니까.

생후 두 달 새끼 고래는 어미 고래와 함께

찬 바다를 가르며 나가고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물 뜨러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나귀 타고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집은 텅 비어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지금은 탁란의 계절,

알들은 뒤섞여 있고

어느 알에 뻐꾸기가 있는 줄 몰라.

구름이 동지나해 상공을 지나고

양쯔강 물들이 황해로 흘러든다.

저 복사꽃은 내일이나 모레 필 꽃보다

꽃 자태가 곱지 않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좋은 것들은

늦게 오겠지. 가장 늦게 오니까

좋은 것들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시집『몽해항로』 2010 민음사

 

장석주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붉디붉은 호랑이』, 『절벽』 등과 산문집 『이 사람을 보라』, 『추억의 속도』, 『강철로 된 책들』, 『느림과 비움』, 『책은 밥이다』, 『새벽예찬』, 『만보객 책 속을 거닐다』, 『취서만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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