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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 묘주, 한나라 무덤 벽화와 많이 닮았다.
행렬도(안악3호묘)
부엌(안악3호)
연꽃은 불교의 영향이고, 삼족오는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새이다.
하늘의 4방위를 지키는 신(사신도)도 중국의 신이다.
무용총의 하늘세계, 연꽃도 보이고, 그러나 잘닭은 상당히 우리의 닭을 닮았다. 장닭이 천상세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
씨름의 모습은 상당히 한국적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
옛 사람이 남긴 그림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사관이나,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 많다. 무덤에 남긴 그림은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대라고 말하는 시기는 삼국시대와 그 이전 시기를 말한다. 이때의 그림은 전해오는 것이 거의 없다. 솔거가 그린 소나무 그림에 새가 날아들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만 전해온다. 몇 몇 지역에 암각화가 남아 있으나 읽기에는 고급 암호풀이보다 더 어렵다.
고구려 고분에는 벽화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다. 무덤은 인간의 삶이 끝나는 종착역인 동시에 사후 세계로 들어가는 시발역이다. 무덤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애도를 표현하는 장소이고, 저승으로 여행을 한 후에 복되게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남기는 곳이다. 무덤에 남긴 그림을 통하여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행적과 신앙관, 우주관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인은 무덤에 벽화를 남겼다. 신라인들은 무덤의 구조가 그림을 그릴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벽화가 없다. 벽화로서 옛 신라인의 삶을 유추해보기는 어렵다. 고구려가 우리의 조상이라면 고구려인이 남긴 그림에서 우리의 조상이 어떤 사유 세계에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고구려인 남긴 고분벽화를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질 때가 많다.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정신세계를 너무 강하게 지배하였다. 불교 이전의 사후관이며, 우주관을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고구려인들이 5~7세기에 무덤 벽화를 남겨 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조성시기가 알려 진 고분 벽화는 357년에 축조한 안악 3호분이 제일 빠르다. 407년에 축조한 덕흥리 고분의 벽화도 양식이 비슷하다.
남쪽에는 신라와 백제가 있었고, 압록강변의 즙안은 고구려 도읍지이다. 신라와 고구려는 무덤의 양식에서 서로 다르다. 고구려는 석실분이므로 벽화를 그릴 공간이 있었다. 신라는 적석총이므로 그립을 그릴 수 없다. 천마총에서 보듯이 벽화가 아니고 출토된 유물에서 그림을 볼 수 있다. 석실분은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나타나는 양식이다. 벽화를 그린 것도, 벽화의 내용도 한나라와 고구려는 비슷하다.
무덤 조성을 위시한 장례 의식은 가장 느리게 변화를 하는 민속이라고 한다. 무덤 벽화는 장례 의식의 하나인 장례 예술의 한 분야이다. 무덤의 방식과 무덤의 그림이 비슷하다는 것에 대하여 이유를 한 번 생각 해 보아야 한다. 또 다르다면 그 이유도 따져보아야 한다. 보기로서 백제의 무덤이 방으로 된 것은 (무령왕릉은 전실묘이다.) 백제의 지배층이 고구려 왕실에서 분가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해가 된다.
무덤은 살아 있는 자의 현실세계와 죽은 자의 저승세계를 이어주는 장소이다. 서로가 헤어지는 장소일 뿐 아니라 두 세계를 이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무덤 벽화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무덤 주인의 생전의 삶을 추모하여 그의 행적을 그림으로 남긴다. 마치 비석의 비문과 같다. 또한 사후세계에 대한 기대와 염원을 주술적으로 남기기도 한다. 말하자면 장의 미술은 무덤을 조성하던 시대의 사람들이 가진 의식을 담는다. 내세(사후세계)는 상상의 세계이다. 그들이 소망하는 내세는 당연히 현실을 뒤어 넘는 초월의 세계이다. 상상의 뿌리는 현실이라고 하니 현실을 바탕에 둔 초월의 세계이다. 현실을 각색하여 주술적인 의미만이 아니고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미적 세계를 표현하였다는 뜻이다.
고구려에는 4세기무덤에 벽화가 나타난다. 반면에 신라 백제 가야에서는 벽화를 그리지 않았다. (무덤의 구조가 이유이겠지만) 초기 고분인 안악 3호분과 덕흥리 고분의 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인의 생활과 사후관을 엿보기로 하자. 우선은 안악 3호분과 덕흥리 고분이 소재하는 평양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된 지역으로서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문화는 물이 흐르듯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중국 문화가 흘러들어온 지역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더욱이 외래 문화의 수용은 지식층과 상류층이 더 적극적이다. 안악 3호분의 경우는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의 무덤이라는 주장과 고구려 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고구려의 최고 상류층이다.
무덤 주인의 부부상이 그려져 있다. 호위하는 문무 신료가 도열해 있다. 의장대와 고취악대, 그리고 250명 이상의 군인들이 호위하고 있는 대행렬도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것은 생전의 삶이 고위 관료로서 권세를 누렸음을 과시한다. 수박희, 춤과 노래를 하는 가무도와 연회도가 그려져 있다. 안락하고 복된 생활을 누렸음을 보여준다. 부엌과 외양간을 비롯한 부유함을 보여주는 생활도도 그렸다. 묘주의 생전의 삶일 수도 있지만 사후세계에 이렇게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벽화의 내용은 당시의 사람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삶의 형태가 아니었을까?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생전의 삶이 사후에도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계세사상(繼世思想)을 가졌다.
407년에 조성한 덕흥리 고분의 벽화 내용도 비슷하다. 무사가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수렵도가 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모습이 실크로드 지역의 무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무사의 두건의 양쪽에 깃털을 꼽은 것은 서로 다르다. 이것은 신라, 백제에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천정은 일반적으로 천상세계를 나타낸다. 사후에 영혼이 가서 머무는 세계를 그린다. 안악 3호분에는 연꽃이 중앙에 있고, 해와 달을 그렸다. 덕흥리 고분의 천정에는 견우직녀도가 있고, 천마와 태양을 상징하는 새(양광조), 신선세계를 상징하는 옥녀와 선인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내용은 중귝인의 사유 세계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357년에 연꽃을 그렸다는 것은 불교가 이미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유한 사후세계는 어떠 하였을까? 이 그림들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안악 3호분의 무덤 벽화 양식은 후한 때 축조하여 벽화를 남긴 한묘의 양식과 유사하다. 서진 때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요양성의 상왕가촌 벽화와도 많이 닮았다. 후한 때 축조한 하북성 안평의 녹가장 전실묘 벽화와도 유사하다. 고분 벽화간의 유사점을 생각해보면 안악 3호분 은 한 대 이후에 하북성 - 요양성 - 고구려가 서로 공유하는 전통의 맥이 있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장례의례는 쉽게 변하지 않는 전통성을 지닌다. 고구려 고분 벽화가 중국의 묘실 벽화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의 깊은 해석을 요구한다.
장례의례는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송별 의식이다. 떠나는 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가무를 곁들인 연회를 베푼다. 낯선 저승길을 안내하는 길 안내군도 상정한다. 특정한 동물을 안내군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북방지역과 고구려는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장례의례의 일반성과 인접성만으로 해석해도 될까? 그렇다면 인접국인 신라와 차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문제에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내세우며 고구려를 자기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항 논리를 정연하게 전개해야 한다.
안악 3호분에는 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라는 사람의 이름이 묵서로 적혀있다. 이것 때문에 동수의 묘라는 주장이 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훌륭한 그림을 남긴 무덤이라면 고구려 왕의 무덤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역사적 근거가 있다면 몰라도 단순히 민족 감정만으로 주장할 필요까지 있을까? 동수의 무덤이라면 중국사람인 동수가 중국식 묘를 축조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리 없다.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논리에 반박의 근거도 되지 않을까? 이것은 순전히 비전문가인 내 생각이다. 역사학자나 미술사가가 규명해야 할 일이다.
다시 그림 이야기로 되돌아 가자. 묘실의 천정에는 사후에 영혼이 가는 천상세계를 묘사한다. 벽에 그린 생활도도 말할 것 없이 천상에서 그렇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표현한 것이라면 천상세계일 수도 있다. 따라서 단순한 생활도라기 보다는 고구려인들이 생각한 이상향일 것이다.
연꽃 한송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 세계이다. 연꽃은 극락정토의 상징이고, 새로운 탄생의 상징이다. 이상향의 모습을 세세히 그리지 않더라도 묘사된 세계가 있으므로 상상으로 메끌 수 있다. 이때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안악 3호분의 연꽃은 불교가 빠른 시간에 고구려까지 전파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인인 동수의 개인적인 종교일 수도 있다.
덕흥리 고분에는 전실의 남쪽 천정에 하늘 세계를 남겼다.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그려져 있다. 천상에 살고 있다는 신성한 동물과 천인(天人)이 그려져 있다. 날개가 달린 말이 비상하는 그림도 있다. 천마는 인간의 영혼을 하늘로 안내한다. 신라의 천마총 출토 유물에서도 천마도가 나왔다. 태양을 상징하는 새(陽光鳥 ), 선인과 선녀도 그렸다. 천상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중국의 신선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쌍영총에는 해와 달, 그리고 연꽃이 그려져 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다. 해와 달에는 삼족오와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기원 전 2세기 경의 무덤인 마왕퇴 벽화에도 나오므로 중국인의 뿌리 깊은 천상세계를 표현하였다. 5세기 경에 축조한 평양 지역의 감신총에는 서왕모가 그려져 있다. 서왕모는 중국 한 나라 때의 무덤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주제이다. 중국의 화상석에 가장 흔히 등장하는 인물이 서왕모이다.
무덤 벽화의 배경으로는 화려한 인동 연꽃이 바람에 휘날리고,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모습도 중국의 남조에서 시작하여 인근지역으로 퍼져나간 양식이다. 5-6세기에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복식이 중국 관료의 차림이 많다. 수렵도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자세는 감숙성의 벽화에서도 같은 자세를 볼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벽화는 온통 외래 양식이다. 고구려 고유의 양식이 무엇이냐, 는 질문을 던지면 대답이 어렵다.
묘실 주인의 복식이나, 지배층의 복식이 아니고 무희들, 시종들, 또는 활을 쏘는 무사의 복식에서 고구려 인의 특징을 찾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건에 꽂혀 있는 새날개(翼鳥冠) 복장은 중국에서 삼국시대 사람을 소개할 때 흔히 표현하는 인물상이다. 장희태자의 묘실벽에 그려진 인물에서 백제인이라는 설명이 있다. 긴 바지와 짧은 웃옷은 고구려 서민들의 의상이다. 중국인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다양한 생활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사후관도 나타나 있다. 불교적인 사후관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벽화를 남긴 무덤의 주인은 모두가 외래 문화를 수용하는 지배층이고 상류층이다. 이들의 벽화만으로 고구려인의 사유세계를 판단할 수 없다. 짧은 웃옷과 바지를 입고 춤을 추는 고구려 무희들, 시종들은 어떻게 살았으면, 그들의 사후관은 어떠하였는 지 알 길이 없다.
고구려 후기 무덤 벽화로는 강서대묘와 중묘를 꼽는다. 힘이 넘치는 사신도로 유명하다. 천상세계의 네 방위를 지키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렸다. 이것도 중국인의 사유세계이다. 고분벽화에서 수용한 천상세계는 불교적인 것, 신선사상, 그리고 도교적인 것까지 다양하다. 이것은 시대의 유행일 수도 있고, 문화를 수용하는 지배층의 개성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장례의례의 특징으로 꼽는 것이 변화가 적고, 전통성이 유지되는 것이라면. 고구려 고분 벽화는 빠른 변화를 보여준다. 이것은 고구려 지배층이 외래 문화의 수용에 민감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는 상류층이 남긴 벽화에[서 보다는 하층민의 민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중국인들이 고구려 풍속이나 신앙에 대하여 남긴 기록이 있다. 기록을 남긴 이유는 자기들과 달랐기 때문이리라. 중국의 삼국지에는 고구려 무덤을 적석총이라고 하였다.(장군총은 적석총이다.) 무덤 앞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수목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무덤 벽화에 나무가 나오는 것이 수목신앙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고구려인의 고유의 종교 의례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 행사이다. 중국인은 이것을 음사(陰邪)라 하여 나쁘게 말하였으므로 이것이 고구려 고유 사후관일 것이다. 최근의 연구에서 고구려가 올리는 가장 큰 제사는 국내성에서 동족으로 17km쯤 떨어진 통천혈(通天穴)임을 밝혔다. 이름에서 보면 하늘과 통하는 굴이다. 중국에서 올리는 제사와는 다르다. 나라의 동쪽에 있는 굴에서 수신(隨神)을 맞이하여 강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남겼다. 이처럼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고구려 민속은 고분 벽화의 내용과 다르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두고 고구려인의 힘찬 기상을 표현한 고구려인 미술이라고 자화자찬한 것이 지금까지 한국 미술사의 설명이다.
나는 천상도에서 그려져 있는 조선의 토종 장닭이 인상적이었다. 혹시라도 이런 것에서 고구려 고유 양식을 설명할 수는 없을까? 우리 뿌리를 찾아야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고구려 무덤 벽화를 대강이나마 살펴 보았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해 하는 이유는 중국인이 남긴 벽화와 다를 것이 거의 없다는 거다. 이것으로 과연 우리 선조들의 사유세계를 엿볼 수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상류층과 지식층은 외래 문화를 앞장 서서 받아들이는 계층이라고 하니, 무덤을 남긴 지배층이 외래 문화에 젖어 있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덤 벽화 하나 남길 수 없었던 민중층의 문화가 오늘의 우리 핏속으로 흘러서 조선 사람, 한국 사람의 원형을 만든 것이 아닐까? 그것이 무엇일까? 호랑이신, 영동할매, 삼신할매, 그리고 주몽이 강을 건네게 해주었고, 바리떼기가 황천 여행을 하도록 다리를 놓아진 거북이가 우리의 신이 아니었을까?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