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냉장고가 없었기에 누리는 맛
동아일보 1927년 7월 15일자 신문에 실린 <녀름에 잘 썩는 음식 재료 보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당시의 고기 소비나 저장 방법에 대해 엿볼 수 있다.
소고기를 딴 나라 사람보다 우리나라 사람은 가장 많이 먹습니다. 늘 많이 먹는 이만큼 그 저축법에 대하야 궁금히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소고기는 대개 우리 가정에서는 소용 있을 때마다 사다먹으니 그 저축법에 대해서는 별로히 고심되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도 혹 어디서 고기가 들어온다든지 하면 저축법에 곤란한 때가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으로는 모든 가정에서 이때까지 실행해온 장조림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조림을 할 때에 생강을 열 개 썰어 넣고 조리면 냄새가 고상합니다. 조육 등은 생선과 같이 소금을 조금 뿌리여서 종이로 덮어서 두면 하루나 이틀 동안은 넉넉히 보존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가으내 추수한 작물들을 어떻게 잘 보관해 겨울을 날 수 있을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명확해 다양하고 풍요로운 음식들을 즐길 수 있던 반면, 매년 돌아오는 추운 겨울, 먹거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가 큰 문제였다. 그래서 작물이 영글어 가는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어머니들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애호박은 둥글납작하게, 서리가 내리기 전에 부지런히 딴 보들보들한 고춧잎은 살짝 데치고, 툭툭 꺾은 토란대는 하나하나 손으로 벗겨 내 볕에 넣어 놓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손 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겨우내 토란대가 듬뿍 들어간 육개장을 후후 불어 가며 알싸한 고춧잎향이 가득한 무말랭이 김치와 맛있게 먹을 식구들을 생각하면 힘든 것도 몰랐다. 여름, 가을뿐인가, 봄볕이 좋은 날엔 쑥쑥 올라오는 취나물, 꼬불꼬불 아기 손 같은 고사리 순을 꺾어다 잘 말려 두어야 한다. 준비는 번거러워도 두고 두고 유용하게 쓰일 귀한 식재료들이다. 추석 차례 상에도 올릴 이 나물들은 깨끗이 씻어 고운 마음으로 말린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지만 보살펴 주시는 조상님들 은덕과 제삿밥 좋아하는 아들딸들의 바쁜 숟가락질을 떠올리면 절로 힘이 난다.
바닷가 마을은 생선이나 해산물까지 말려야 하니 아버지들은 나서서 어머니 손을 거든다. 어머니가 손으로 명태 내장을 하나하나 빼내면 아버지는 그 명태를 얼음장 같은 물에 넣어 둔다. 아침이 되면 밤새 언 명태를 두 마리씩 엮어 덕에 올린다. 매서운 겨울바람과 반짝이는 햇살에 녹녹히 녹은 명태는 덕 위에서 밤을 지새우며 다시 꽁꽁 언다. 밤새 눈이라도 내린 날에 새벽같이 덕장으로 나가 덕을 들었다 놨다 하며 눈을 쳐 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웠다가는 눈이 녹으면서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 명태가 더디게 마르기 때문이다. 눈이 자주 내리는 대관령 산속의 덕장들은 그래서 겨울이 참으로 고단하다. 뺨이 떨어져 나갈 만큼 추운 날엔 게으름을 피우고도 싶지만, 결국엔 옷을 겹겹이 껴입고 덕장에서 변신 중인 명태를 꼼꼼이 챙긴다. 그 고단함이 덕 위에 쌓이며 명태가 반쯤 마르면 코다리, 3,4개월쯤 지나 바짝 마르면 눈부신 황금빛 자태의 보들보들한 황태가 탄생한다.
갓 잡은 꽁치를 바닷물로 씻어 낸 뒤 배를 반으로 갈라 내장을 제거하고 겨울의 차가운 바닷바람과 맑은 햇살에 밤에는 영하 1, 2도, 낮에는 영상 4, 5도에서 얼고 녹기를 사나흘 이상 반복하면 깊은 맛이 나는 과메기가 된다. 내장 째 통으로 말리던 예전에는 내장 맛이 살에 진하게 배어 그 맛이 더 깊었다고 한다.
동해안 지역에 살던 한 선비가 과거 길에 마른 청어가 언 것을 우연히 먹었다가 그 맛에 반해 말리고 얼려 먹게 된 것이라는 설, 뱃사람들이 배 안에서 반찬 삼을 요량으로 배 지붕 위에 청어를 던져 놓았는데 바닷바람에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다가 과메기가 되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유래가 있지만, 자연이 요리한 생선 맛에 매력을 느낀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것만은 틀림없다.
과메기는 청어로 만든 게 제격인데 1960년대 이후로는 청어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 꽁치로 대체되었다. 이제 국내에서 전혀 잡히질 않아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명태의 신세에 비하면 과메기는 그나마 국산이지만, 청어로 만들던 옛 과메기의 고소함과는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청어가 동해로 돌아왔다고 하니 청어 과메기의 부활을 기대해 본다.
감칠맛 나는 모든 국물의 기본! 맛국물을 내는 마른 멸치는 어떤가. 초승달 같은 해안가를 따라 난 길고 넓은 자갈밭은 봄이고 여름이고 할 것 없이 멸치로 가득 찬다. 바다에서 잡아 온 멸치를 펄 펄 끓는 소금물에 대친 뒤 채반으로 한 겹씩 뜬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다른 곳에 팔았다간 손가락만 한 멸치들이 푹 삶아져 버린다. 그 적당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떠내야 한다. 한 김 식힌 멸치들을 자갈밭 위 깔아 놓은 돗자리로 쏟아 붓고 따사로운 태양과 멈추지 않는 바닷바람에 마르도록 펼쳐 놓는다. 이 멸치들이 마르면 잔치국수, 어묵탕, 김칫국의 진하고 깊은 국물을 만드는 일등 공신이 된다.
이웃 나라 일본은 한국과 유사한 저장 문화를 가지고 있으나 특별히 가다랑어를 말려 얇게 포를 떠서 먹는다. 흔히 일본어 그대로 가쓰오부시라고 부르는 것이 가다랑어포다. 일본 음식에서 감칠맛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가쓰오부시는 건조와 훈제, 발효 등 다양한 과정을 거쳐 만드는 저장 음식으로, 자연과 시간, 인간의 노력이 절묘하게 결합된 맛깔난 식재료다. 가다랑어의 머리와 내장 등을 떼고 기름기 많은 배 쪽도 제거한 후 찜통에 찐다. 뼈를 발라내고 5, 6시간쯤 훈제, 즉 연기에 거을려 건조시킨 후 하루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연기에 그을려 건조시킨다. 이와 같은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여 충분히 건조시킨다.
일반적으로 시중에 판매되는 가정용 가다랑어포는 이 단계만을 거친 것들이다. 전통적인 방법은 마지막 발효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건조된 가다랑어를 하루 이틀 햇볕에 말린 후 밀폐 상자에 넣고 약 2주가 지나면 푸른곰팡이가 피는데 이것을 햇볕에 말린 뒤 다시 상자에 넣어 곰팡이가 피도록 하는 과정을 4, 5회 반복하면 곰팡이가 거의 피지 않게 된다. 그러면 전통 가다랑어포의 완성이다. 4, 5개월쯤 걸리는 이 과정을 거치게 되면 가쓰오부시가 아니라 카레부시, 더 오래 반복하면 혼카레부시가 된다. 일본에서도 매우 고급 재료인 혼카레부시는 2년에 걸쳐서 완성된다고 한다. 말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정성과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는 이 가다랑어포는 뜨거운 맹물에 담가만 놔도 일본 장국 특유의 감칠맛을 15분 만에 내는 기가 막힌 식재료이다. 그야말로 오랜 시간이 응축된 맛이다.
수확 후 건조한 쌀이나 곡식을 주식으로 하는 곳과는 달리 밀을 주식으로 하는 곳에서는 한번 만들어 놓은 빵을 보관하는 일이 문제였다. 물과 다른 재료가 첨가된 빵은 밀가루보다 훨씬 더 보관성이 떨어진다. 통풍이 안 되면 금세 곰팡이가 번지고,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두면 며칠 안 되어 딱딱하게 굳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이탈리아에는 아예 말려서 먹는 빵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베이글만 한 빵을 반 갈라 말린 프리젤레가 이탈리아 남부의 바실리카타와 풀리아를 대표하는 빵의 한 종류이다.
등 푸른 생선은 지방이 많아 상하기 쉬워서인지 저장 음식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흰 살 생선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국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오래전부터 대구를 말려 왔다. 특히 노르웨이의 차가운 바닷바람과 맑은 햇살로 말린 대구는 그 전통이 천 년이 넘으며 유럽 곳곳의 식탁에서 확고히 자리 잡아 왔다. 원재료가 되는 대구의 신선도나 포획 방법에 따라 그 등급이 나뉘는데 제일 좋은 등급은 낚시로 잡은 대구를 바로 건조시키는 것이다. 어망으로 대구를 잡으면 그 안에서 죽거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상태가 안 좋아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최상급의 마른 대구를 생산하는 이는 없다고 한다. 세계 어디든 손이 많이 가고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들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어망으로 잡아 말린 대구조차 생물 대구보다 값이 비싼 고급 식재료이다.
노르웨이에서 대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린다. 생선 배를 갈라 펼치고 내장을 제거한 후 소금을 치고, 그대로 바위 위에 넣어 말리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렇게 말린 대구는 노르웨이어로 클립피스크라고 불리는데 즉, 해안 절벽 생선이란 뜻이다. 해안가 바위에 올려놓고 말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산업화가 되어 건조기로 말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소금에 절여 말린 대구는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클립피스크로 남아 있다. 이 짜디짠 마른 대구는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주변 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바깔라(절여 말린 대구를 뜻하는 이탈리아어)는 그냥은 못 먹어. 너무 짜고 딱딱하거든. 적어도 하루 이틀 밤은 물에 담가 놔야 짠 기도 빠지고 보드라워져서 요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불린 대구를 잘게 잘라서 우유랑 물을 넣고 바글바글 끓이다가 생선살이 풀어지는 것 같으면 껍질이랑 가서 같은 건 걸러 내. 그런 다음 볼에 담아 올리브 오일을 섞어 가면서 크림처럼 만들지. 마지막에 다진 마늘이랑 레몬즙 좀 넣으면 바깔라 만테카토 알라 베네치아나(베네치아식 바깔라 크림)가 완성된다우. 오후에 출출할 때 있쟎아. 딱 그때 바깔라 만테카토가 올라간 치케타(베네치아의 작은 바에서 찾을 수 있는 스넥)와 스프리트 비앙코(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인 프로세코에 탄산수와 오렌지나 레몬 조각을 넣은 칵테일)를 한 잔해야 베네치아의 삶을 제대로 경험한 거라 할 수 있다고. 옛날에 뱃사람들이 그렇게 먹었거든.
사실 애초의 바깔라 만테카토 알라 베네치아나는 바깔라가 아닌 스토카 페쉐를 이용해서 만들었다. 이는 또 다른 방식으로 건조한 대구다. 배를 가른 대구 두 마리씩을 엮어서 소금을 치지 않고 나무 막대에 걸어 말리는 방법이다.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치던 베네치아의 인기 교역 물품은 노르웨이의 마른 대구였다. 당시는 소금이 금 다음으로 비싸던 시저이라 소금에 절인 바깔라는 그야말로 금값의 식재료였다. 반면 노르웨이의 바닷바람으로 말린 대구는 저렴하면서도 짠맛이 묻어났기에 서민들의 사람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의 북어와 유사한 형태의 이 마른 대구는 건조 방식도 북어와 동일하다. 노르웨이 북쪽 로포텐 섬, 대구가 바렌츠 해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2월 말이면 로포텐 섬에 모여 알을 낳는 데 그때부터 로포텐 사람들의 손은 대구를 잡아 말릴 준비에 바빠진다. 봄볕이 따사로워지는 4월이면 겨울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대구가 삼각 구조의 덕에 주렁주렁 매달려 섬 대부분을 뒤덮는다. 한 3개월쯤 볕과 바람에 말려 80% 정도 수분이 증발해 대구가 종잇장처럼 가벼워지면 유럽 곳곳으로 여행할 준비를 마친다. 딱딱하게 굳은 이 단백질 덩어리는 천년만년 보관이 가능할 것 같아서 보스포루스 해협부터 아프리카 중서 해안의 기니 만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의 시장에서 인기 상품이었다고 한다.
건조 음식이 태양과 바람의 힘을 빌린 것이라면 젓갈은 또 어떤가. 사람이 준비하고 자연이 완성하는 또 다른 합작품이다. 손가락만 한, 혹은 그것보다 조금 크거나 조금 작은 생선들은 한 번에 많이는 잡히는데 보관이 막막했다. 소금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생선들은 켜켜이 쌓여 부엌 한쪽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 동안 바닷물의 소금기와 부엌 안의 공기, 생선의 단백질이 어우러져 새로운 맛으로 변한다. 시간에 그 역할을 맡기는 것만으로 두고두고 요긴하게 쓸 수 있는 훌륭한 양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맛국물 낼 시간이 없을 때도, 재료가 미역밖에 없어 민미역국을 끓일 때도 젓갈로 간을 맞추면 제법 깊은 맛이 나니 고마울 따름이다.
‘니 어릴 적만 해도 말이다. 봄이면 생멸치를 잔뜩 실은 트럭이 동네 골목골목 다녔다니까. 멸치 사이소, 멸치 사이소! 한 상자 혹은 두 상자, 원하는 만큼 사면 멸치 장수 아주머니랑 같이 그걸 들고 와서 마당 수돗가에서 한번 휘릭 씻은 다음, 커다란 다라이에다가 굵은 소금이랑 멸치를 넣고 막 섞어, 아주머니가 항아리를 가져와 찬찬히 꾹꾹 눌러 담고 문풍지 같은 걸로 봉하면서 그늘에 두소! 하고 당부했지. 한 100일쯤 지나서 문풍지를 열어 보면, 곰국 찬 데 두면 기름막이 생기는 것처럼 생선 기름이 위로 올라와 있는데, 그걸 살살 걷어 내면 멸치 몸통은 다 가라앉고 말간 국물이 찰랑찰랑하거든. 그건 떠내서 따로 병에 넣어 두고 아껴 가며 쓰고, 아래 가라앉은 건더기는 푹푹 삶아 갖고 다시 문풍지에 받쳐. 그럼 국물이 똑똑 떨어지지. 고것도 액젓이야. 뭐 요즘 파는 사람이야 거기에 물 섞고 조미료 넣고 또 소금 넣고 하겠지만, 그땐 소금 간만 한 액젓을 먹었지. 그거 몇 병 생기면 1년 김치 담글 걱정은 안 했지.
나 어렸을 때도 멸치 장수 아지매들이 젓갈 만들어 주러 다녔지. 아, 새우젓은 한 달에 한 번식 배달해 주러 오는 단골 젓갈 장수 아저씨가 있었어. 새우젓은 찬이 없을 때 양념이 아니라 반찬으로 그냥 먹었으니까 금방금방 동났거든.‘
우리 할머니는 햄을 정말 끝내주게 잘 만들었어요. 고기에 소금 치는 용으로 특별히 만든 나무 서랍 칸 같은 것도 있었어요. 할머니의 햄은 간이 정말 딱 맞았는데 할머니는 그게 다 그 나무 서랍 덕이라고 하셨죠.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했어요. 아, 뼈에다가는 후추도 문질러 줬지요. 그게 다였어요. 소금이랑 후추, 다른 건 필요하지 않았죠. 고기가 적당히 절여지면, 그러니까 고기가 물을 더 이상 떨어뜨리지 않으면 아주 깨끗이 마련한 하얀색 천으로 고기를 잘 싸서 천정 서까래에 매달아요. 그럼 오순절쯤 햄이 완성되었죠.
햄을 만들고 남은 고기 부위로는 소시지를 만들었어요. 잘게 썬 고기에 로즈마리, 타임, 마늘, 후추를 넣었지요. 에이, 크기가 중요한가, 큰 조각도 있고 작은 조작도 있고 그랬지요. 먼저 건조 숙성해 놓은 소시지들도 다져 넣었어요. 그러면 풍미가 깊어지거든요. 아, 소시지 표면에 밀가루를 고루 묻히면 더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어요. 난 창자를 씻어서 절이는 걸 도왔죠. 핏물이 안 나올 때까지 창자를 물에 담가 놓았다가 헹구면서 햄을 싸 놓는 것처럼 하얗고 깨끗하게 될 때까지 문질러야 해요. 그러고 나면, 앉아서 깔때기로 창자에 소를 얼마나 열심히 넣었는지 몰라. 내가 어려서 손이 작으니까 소를 창자에 넣는 것도 잘했거든, 엄마는 그 옆에서 돼지피를 잔득 넣은 검정 소시지를 만들었죠. 꼭 기다란 뱀 같았는데 양동이에 가득 찰 때까지 똬리를 틀며 올라왔다니까요. 그러고는 마를 때까지 시원한 창고에 걸어 놨죠. 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검정 소시지들이 단단해질 때까지 소금물에 넣고 익혀야 하는데 물이 넘쳐서도 안 되고 껍질이 터져서도 안 되니까 냄비를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 했어요. 그렇게 긴 하루가 지나면 저녁은 어김없이 식구들이 둘러앉아 돼지 내장이랑 와인, 당근, 무 한두 개, 허브 여러 가지를 넣고 스튜를 만들어 먹었어요. 동네 신부님과 이웃 사람들도 불러다가 말이지요.
스페인의 하몽 세라노 햄, 이탈리아의 프로슈토 디파르마 햄 등 치즈와 함께 농부들의 든든한 단백질 공급원이던 이 저장 고기들은 이제 유럽 어느 지역에서든 슈퍼마켓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독특한 맛과 질감 덕에 많은 이들의 기호 식품이 되어 전 세계로 수출된다. 한국에서도 흔히 살 수 있는 소시지나 햄 등은 이런 저장육의 변형된 형태이다. 하지만 고기보다는 밀가루나 전분 등이 더 많이 들어가고 고기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고기 맛 첨가물들을 넣고는 한다. 유럽에서도 고기를 늘 넉넉하게 구할 수는 없으니 소시지에 여러 가지 곡식이나 감자를 으깨 넣기도 했다. 이런 전통이 대량 생산과 맞물려 등장한 게 혼합 가공육이다. 하지만 고기보다는 다른 재료가 많이 들어간 이런 햄이나 소시지는 저장 음식이라기보다는 고기가 부족하던 대 등장한 가난의 음식, 또는 원재료 값을 낮추고 이윤을 올리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음식에 가깝다.
소금은 고기나 생선뿐 아니라 치즈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차렐라 치즈와 같은 생치즈를 조금 오래 보관할 때는 소금물에 담가 보관하고는 했다.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딱딱하게 말려 먹는 치즈들은 말리기 전에 소금물에 한참 담가 놓는다. 이탈리아 농가에서 이따금 만나던 매우 짠 치즈들은 김치가 잔지로 불리던 것처럼 냉장고가 없던 시절 치즈를 오래 보관하려던 옛 사람들의 노력이다.
유럽 생활을 시작했을 대, 매일 먹던 김치를 못 먹는다는 생각에 찾아낸 음식이 치즈였다. 간단히 말해 우유나 염소젖 등 동물의 젖을, 콩을 뭉글뭉글 끓여 두부로 만들 듯이 응고시켜 건조 발효한 것이 치즈다. 대표적인 발효 음식인 김치를 서양의 대표 발효 음식인 치즈로 대체할 마음이었는데, 김치 먹듯이 매끼 반찬 삼아 먹었더니 3개월 만에 살이 무려 8kg나 쪄 버렸다. 원재료가 단백질 덩어리이다 보니 채소인 김치에 비해 고칼로리일 수밖에. 나중에 알게 된 이탈리아의 여자 친구들은 몸매 관리 때문에 치즈를 많이 먹지 않는단다. 그나마 리코타나 코티지 치즈처럼 발효 과정을 겪지 않은 생치즈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치즈들이다. 하우다 치즈와 같은 숙성 치즈들 중 작게 잘라 하나씩 끊임없이 집어 먹게 되는 치즈들이 비만의 주범이다.
김치의 기본은 배추 절이기다. 다른 무엇보다도 배추가 잘 절여져야 발효가 잘 된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면 수분도 빠지고 거의 모든 박테리아가 죽는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테리아가 바로 김치를 맛있게 익히는 유산균이다. 이 유산균이 차려 낸 풍요로운 잔치가 한국의 김치 문화다. 배추김치부터 총각김치, 깍두기, 오이김치, 백김치, 나박김치 등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김치부터 고들빼기, 씀바귀, 갓, 고구마 순 등등 다양한 종류의 채소로 만들 수 있는 김치는 수백 가지다. 김치뿐만이 아니다. 메주콩을 푹 삶아 쿰쿰하게 발효를 시킨 후 소금물에 담가 두면 숙성된 어두운 색 물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간장이 아니던가. 그 간장을 걸러 내고 남은 콩들을 으깨면 된장이 된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는 장아찌들까지 생각하면 한국의 식탁이 왜 발효의 식단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냉장고와 거리 두기
일반적인 냉장고의 온도는 1도에서 4도다. 토마토나 애호박, 토란 등은 10도 이하에서, 가지와 오이, 강낭콩은 7도 이하에서 저온 장애를 겪기 시작한다. 토마토는 색이 변하기도 하고 물러진다. 상큼하면서도 달달한 토마토 고유의 맛은 기대하지 마시라. 오이는 표면에 미끌거리는 액체가 생기기도 한다. 생강도 7도 이하에서는 갈변이 되면서 물러진다. 감자의 경우 눈에는 띄지 않지만 4도 이하에서는 탄수화물 성분이 당분으로 바뀌게 된다. 생감자로 만든 감자튀김과 냉동 감자로 만든 것의 맛 차이는 이 당분의 비율이다. 감은 냉장고 안에서 서서히 무르기 시작하고 내부 조직이 망가진다. 망고, 아보카도, 파인애플 등의 열대 과일에게 냉장고는 너무 추운 곳이다. 다른 열대 과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온에 강하지만 수박도 원산지는 아프리카다. 4~4.5도 이하에서 맛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채소와 과일은 수확 후에도 살아 있는 생명체다. 인도가 원산지인 가지에게 냉장고는 너무 추운 환경이다. 반면 겨울을 날 수 있는 배추나 양배추는 냉장고에서 견딜 수 있다.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남미에서 온 고구마는 13도 이하에서는 색과 맛이 변하며 심할 경우 가운데가 딱딱해지기도 한다. 감기에 걸리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겉은 멀쩡해도 속은 골골거리는 채소를 먹는 셈이다. 우리네 식탁에 건강한 변화가 필요하다.
-냉장고로부터 식재료를 구하라
사과의 에틸렌 가스가 감자의 노화를 늦춰 준다는 과학을 만나 새로운 지식이 되었다. 사실 에틸렌 가스는 일반적으로 채소나 과일의 성장을 촉진하는 물질이다. 키위나 아보카도가 덜 익어 딱딱할 때 종이봉투 안에 사과 하나와 함께 넣고 잘 봉해 놓으면 빠르면 하룻밤 혹은 며칠 만에 부드럽게 익은 과일을 먹을 수 있다. 수입된 새파란 바나나가 하룻저녁에 노랗게 변해 시장에 나오는 것도 다량의 에틸렌 가스의 힘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감자한테는 반대로 작용해 통풍이 잘 되는 공간에서 에틸렌 가스에 적당히 노출된 감자는 노화가 지연된다. 물론 감자를 보관할 때 에틸렌 가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빛을 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감자는 빛에 노출이 되면 푸른색으로 변하며 흰 싹을 빨리 틔운다. 빛이 차단되고 통풍이 잘 되는 주머니에 감자와 사과를 담아 부엌의 그늘진 곳에 두고 쓰면 추워서 퍽퍽하게 변해 버린 감자는 먹지 않을 수 있다. 아예 싱크대 서랍 한 칸을 감자와 사과를 보관하는 용도로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부엌의 또 다른 구석에는 모래 바구니를 하나 마련해 보자. 이 모래 바구니로 냉장고에서 살려 낼 식재료들이 몇이나 된다.
아버지는 서리가 오기 전에 감자를 수확하셨어요. 손으로 감자에 묻은 흙을 깨끗이 털어 낸 다음에는 썩지는 않았는지, 벌레가 들지는 않았는지 하나씩 확인한 뒤 상태가 좋은 것들만 보관용으로 쓰셨죠. 보통은 자루 같은 데 담아서 보관했는데 어떤 것들은 작은 벽돌집 같은 데다 넣어 뒀어요. 그게 아버지가 모래를 깨끗이 마른 상태로 보관하려고 직접 지은 건데, 뭐라 불러야 하나, 지붕 같은 게 비스듬하게 놓여 있어서 비나 눈을 막아 줬어요. 감자가 필요하면 이 지붕을 들어 올려서 모래 속으로 감자를 찾아내곤 했지요. 어렸을 때는 정말 재미난 놀이 같은 거였답니다. 너무 심하게 뒤적거리고 놀다가 원래대로 놓느라 애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니까요.
감자는 모래 속에서 수분 유지가 적절히 되어 무르지도 마르지도 않으며 편히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강이나 잎을 잘라낸 빨간 무와 같은 뿌리채소도 모래에 보관할 수 있다. 수분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서로서로 붙어 무르는 것도 방지해 주어 유럽의 옛 농가에서는 작물을 보관하기 이해 모래를 이용해 왔다.
잠깐! 생강을 얇게 저며 설탕과 1:1로 유리병에 넣어 일주일쯤 지나면 돼지고기 김치찌개, 짐닭 등 생강과 설탕이 들어가는 거의 모든 요리에 간단히 쓸 수 있는 생강청이 된다는 것도 잊지 말자.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생강이 많다 싶을 때 남는 대로 만들어 놓으면 후에 요리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다. 양념 선반에 올려놓고 쓰다 보면 가끔 뽀글뽀글 거품이 일기도 하는데 그건 발효가 일어나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 역한 냄새가 날 때는 버리는 것이 좋다.
당근도 모래 안에서 보관이 잘 되는 채소 가운데 하나다. 다만 당근처럼 쭉쭉 뻗어 자라는 뿌리채소는 세워 보관하면 좋다. 서서 자라던 생명인 탓에 누워 있으면 다시 서려고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쓴다.
미미한 효과일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채소의 에너지를 생명 연장에 쓰는 쪽으로 환경을 만들어 주자. 반면 토란은 습한 걸 좋아하니 젖은 모래 속에 보관하면 도움이 된다. 다이어트에 좋다고 해서 덜컥 사다 놓고 처치 곤란인 돼지감자는 얇게 쓸어 말린 후 차로 덖어 두는 것도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한 방법이다. 그러고도 남은 돼지감자는 토란과 함께 젖은 모래 속에 보관하며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별미로 먹어 보자. 잎을 떼 낸 비트나 순무, 무처럼 생겼지만 실은 양배추과인 콜라비도 습한 환경을 좋아해 젖은 모래 안에서 잘 지낼 수 있다.
식탁 위에는 초록색 호박, 보랏빛 가지, 빨갛고 노란 파프리카 등을 올려놓자. 자주 이용하지만 눈에 안 보이면 어느새 잊혀 냉장고 안에서 시들어 가기 십상인 채소들이다. 알록달록 예쁘게 담아 꽃에 뿌리듯 분무기로 물을 뿌려 주거나 물이 담긴 그릇 위에 망을 포개 놓고 올려놓는 방법도 있다. 수분 함량이 높은 채소들이라 수분을 지켜 주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채소들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다. 눈앞에 보이면 마음이 쓰이는 법. 가지에 누렇게 멍이 들어 보이면 다른 식재료를 살 게 아니라 오늘 저녁을 가지찜을 해 먹으면 된다. 아이들과 함께 채소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메뉴를 정할 수도 있다. 자신들이 먹는 음식의 재료를 자연스럽게 알아 가고, 그 재료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해 가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샐러드도 해 먹고 떡볶이에도 넣어 먹는 양배추는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로 저온에 상대적으로 강하나 냉장고 밖에서도 무리 없이 보관할 수 있다. 수확 당시, 혹은 구매할 당시 겉잎을 떼어 버리지 않으면 안쪽 잎들을 보호해 줘 도움이 많이 된다. 겉잎이 마른 듯해도 몇 장 걷어 내면 신기하게 속은 여전히 촉촉하고 쌩쌩하다. 먹을 때도 반을 통째로 잘라 쓰기 보다는 겉잎을 하나씩 떼어서 쓰는 것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 형님이 양배추가 많다며 가져다줬는데, 봉지마다 물을 조금 넣어서 그 안에 양배추를 세워서 묶어 주더라고. 그렇게 세워서 보관하면 한참을 싱싱하게 먹을 수 있다네.
양배추는 수분 함량이 높은 채소라 물이 공급되면 그 싱싱함이 더 오래 유지된다. 다만 잎이 물에 닿지 않도록 물을 얕게 담아 양배추를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에 잎 부분이 오래 잠겨 있으면 물러서 썩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화할 때 몸이 쓰는 열량보다도 더 적은 열량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다이어트 채소로 인기가 높은 셀러리도 수분 함량이 95%나 된다. 저온에 강해 냉장고에서 큰 탈이 날 일은 없지만 원한다면 냉장고 밖에서도 꽃처럼 물 담은 화병에 꽂아 보관해도 된다. 일주일은 문제없이 그 자체를 뽐내며 식탁 위를 푸른빛으로 물들여 준다. 단, 양배추처럼 셀러리의 뿌리 부분만 닿도록 물을 조금만 넣어서 보관해야 한다. 며칠이 지나 물속에 담가 놓은 셀러리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 식재료들이 생명임을 새삼 깨닫는다.
냉장고 없이 보관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추 등의 잎채소류도 낱장이 아닌 포기로 구입했다면 셀러리와 같은 방법으로 보관할 수 있다. 다만 잎채소의 종류에 따라 보관할 수 있는 기간이 달라진다. 잎이 얇고 포기가 엉성하게 차 있을수록 보관이 어렵다. 잎들이 좀 처졌다 싶을 때는 먹기 전에 찬물에 잠시 담가 두면 다시 아삭한 시감이 살아난다. 식초를 몇 숟갈 넣은 물에 담그면 세균도 씻어 낼 수 있다.
바질이나 파슬리 같은 허브류도 같은 방법으로 보관할 수 있다. 물론 물에 넣기 전 줄기 아랫부분에 붙어 있는 잎들은 다 제거하도록 하자. 잎이 무르기 시작하면 줄기도 더 빨리 물러 보관 기간이 짧아진다. 아스파라거스도 아랫부분을 물에 감가 놓으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대신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은 물을 갈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신선하고 깨끗한 물은 사람뿐만 아니라 채소에게도 건강한 삶의 원천이다.
물에 담가 보관할 수 있는 식재료는 이밖에도 여럿이다. 콩나물이나 두부는 소금을 푼 물에 넣어 둔다. 매일매일 물을 갈아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루 이틀 안에 먹을 것이 아니라면 같은 조건으로 냉장고에 넣어 두면 보관 기간이 길어진다. 실온에서 쉽게 상하는 떡도 이전에는 물에 넣어 보관하곤 했다고 한다. 매일 물을 갈아 줘야 하지만 칡 전분인 갈분을 탄 물에 떡을 보관하면 며칠이고 끄떡없다.
물속의 떡이라니 상상도 못 했는데, 물속에 보관하는 것이 생소하게 들릴 식재료가 또 있다.
한쪽 용기에 버터를 채우고 조금 더 큰 다른 용기에 뒤집어 넣는다. 그리고 남은 공간에 물을 채우면 물이 버터와 산소의 접촉을 차단해 산화를 방지한다. 사나흘에 한 번씩 깨끗한 찬물로 갈아 주면 한 달쯤 원할 때마다 부드러운 버터를 먹을 수 있다. 버터 종류에 따라 보관 가능한 기간이 조금씩 다르지만 소금물을 이용하면 대체로 문제없이 이용할 수 있다.
열대 지방 고산 지대가 원산지인 토마토는 저온에 약하다. 에틸렌 가스도 상대적으로 많이 뿜는데다가 겉껍질이 얇아 토마토끼리 함께 뭉쳐 있으면 서로에게 해가 된다.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동그란 빵 반죽 여러 개를 오븐 쟁반 위에 올리듯 서로 붙지 않게 놔두면 좋다. 특히 파란 꼭지를 아래로 해서 보관하면 자체 수분 증발을 늦춰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통풍이 잘 되지 않는 곳에서는 꼭지에 수분이 차 곰팡이가 생길 수가 있으니 가끔씩 확인할 필요가 있다.
줄 맞춰 보관하기에 토마토가 너무 많다면 저장용으로 조리를 해 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자른 토마토를 뭉그러질 때까지 끓인다 이탈리아 남부 출신의 라우라네 집에서는 끓인 토마토에 바질 잎을 넣어 풍미도 더하고 바질의 항균 기능을 이용해 보관 기간도 늘린다. 반면 이탈리아 북부 출신의 알레산드로 집에서는 보관할 유리병에 바질 잎을 바로 넣는다고 한다. 껍질이나 씨앗 등이 크게 상관없다면 끓인 것 그대로, 깨끗한 질감이 좋다면 망에 한 번 거른다. 뜨거울 때 멸균한 유리병에 넣어 뚜껑을 꼭 닫고 거꾸로 세워 천천히 식히면 밀폐가 더 잘된다. 뚜껑 가운데를 눌러 봤을 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움직임이 없으면 진공 상태가 된 것이다.
다 익은 노란 레몬은 10도 이하에서 저온 장애를 겪는다. 냉장고 안에서 레몬을 보관하면 반점이 생기기도 하고 심해지면 물러 버리기도 한다. 눈이 저절로 감기는 신맛 사이로 천천히 올라오는 달콤함은 더 빨리 사라져 버린다. 색깔도 예쁜 레몬은 장식용으로 여기저기 눈에 보이는 곳에 두어도 1, 2주 정도는 끄떡없다. 겉껍질이 두꺼운 덕에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다. 한 달 이상 보관을 해야 한다면 모래 바구니 안에 두거나 얇은 종이로 싸서 보관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참 잊고 있던 레몬의 겉껍질이 딱딱하다면? 그냥 버리지 말고 먼저 반을 갈라 보자. 안쪽 과육은 촉촉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오는 외국산 레몬은 어찌 됐든 안 먹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 식단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만큼 무조건 푸드 마일리지를 줄이라고 강요하기는 어렵다.
저온 장애를 특별히 겪지는 않지만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는 식재료들도 있다. 일부러 말려서 사용을 하는 마늘이나 통풍이 중요한 양파가 대표적이다. 쿰쿰한 메주 냄새가 가득한 시골집 아래채의 문을 열고 나오면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마늘 다발들, 유럽에 오기 전엔 스페인의 부엌에도, 이탈리아의 부엌에도, 네덜란드의 부엌에도 마늘 다발이 자리 잡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마늘은 영미 문화권에서는 많이 먹지 않지만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즐겨 먹어 왔다.
마늘은 그 자체로 항균 효과가 강해 무르지 않도록 신경 써 주면 매우 오랜 기간 보관 가능한 식재료다. 가정에서는 지저분한 잎 쪽만 정리하고 대를 좀 남겨 부엌이나 베란다에 매달아 보관하면 좋다. 마늘과 같은 종류의 식물인 양파는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망 위에 펼쳐 보관하면 제일이겠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양파를 하나씩 망이나 스타킹으로 싸서 매달아 놓는 것도 오래 보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늘, 양파와 함께 양념 채소로 많이 쓰이는 파는 하얀 뿌리 부분을 5, 6cm 크기로 자라 화분에 심으면 적어도 서너 번은 더 잘라 먹어도 될 때까지 계속 대가 자라난다. 아삭한 식감이 중요한 음식에는 냉장고에 넣어 놓은 파를 쓰다가 화분에 심은 파가 올라오면 잘라 쓰면 그만이다. 뿌리 부분을 잘라 낸 몸통은 적당히 달라 용기 안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하거나 송송 썰어 말려도 된다. 익혀 먹는 음식에는 말린 파를 쓰는 것도 한 방법. 마르면서 수분이 날아가 크기가 줄어들긴 해도 향은 더 진해져 국물 맛을 내는 데 도움이 된다.
냉장 보관하지 않아도 쉽게 상하지 않는 식재료지만 미국 식품의약국은 달걀을 냉장고에 보관하라고 명시한다. 한국의 농림축산식품부는 역시 15도 이하에 보관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는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살모넬라균 때문이다. 반면 유럽식품정보위원회에서는 냉장고 안에서 살모넬라균의 번식이 느려지기는 하나 달걀을 만진 후 손을 깨끗이 씻고 잘 익혀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살모넬라균은 닭이 알을 낳을 때 달걀 껍데기에 남게 되는 세균이다. 70도 이상에서 가열하면 죽기 때문에 실제 달걀 내부의 감염보다는 달걀을 만진 속에 남아 있는 균에 직접적으로 감염되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다. 다만 깨지거나 금이 간 달걀은 균들이 달걀 내부로 침투했을지 모르니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여러 달 보관할 게 아니라면 바셀린을 바를 것도 없이 부엌 한쪽 볕이 닿지 않는 곳에 두고 쓰면 된다. 숨구멍이 있는 달걀의 둥근 쪽이 위로 가게 두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조리하기 전 달걀을 물에 넣고 신선도를 확인하는 것을 잊지 말자. 달걀이 물에 가라앉으면 먹는 데 문제가 없다.
이래저래 요리를 하고도 남은 채소들은 어떡한담. 한번 잘린 채소들은 냉장고 안에서든 밖에서든 세균에 감염될 확률이 높다. 반드시 뚜껑이 있는 용기에 담아 보관하되 되도록 빨리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오늘 저녁에 쓰고 남은 가지, 호박, 감자, 양파 등은 부글부글 끓여 카레를 만들어 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전날 끓인 카레는 막 끓여 낸 카레보다 맛있는데다가 카레의 강황 성분 덕분에 잘 상하지도 않는다. 매번 해 먹는 카레가 지겹다면 발랜틴이 소개하는 발칸의 맛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마늘과 양파를 기름에 볶다 어느 정도 익으면 오븐 그릇에 담는다. 그 위에 감자 한 겹, 또 그 위에 토마토 한 겹, 그 위에 볶은 채소, 감자, 토마토 이렇게 그릇이 찰 때까지 계속 쌓아 올린다. 그리고 뚜껑을 닫고 오븐에서 한 시간 반쯤 낮은 온도로 익히면 완성이다. 밥이 남은 게 있다면 겹겹이 함께 넣어도 맛이 좋단다.
-에필로그 - - 냉장고의 부엌에서 사람의 부엌으로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사과 창고에 가셨다고 한다. 돌을 괴어 놓은 사과 상자 아래로 찬물을 매일같이 부으셨다. 그러면 물이 증발하면서 창고 온도도 떨어뜨리고 장에 나가기 전 사과들이 수분을 잃고 곯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이다. 사과가 잘 지내려면 수분이 필요한 거구나. 사과도 생명이나 당연한 것인데 왜 몰랐을까.
커다란 아파트 창으로 한낮의 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엄마의 거실에서는 오늘도 무가, 인삼이, 우엉이 말라가고 있다. 집 안에는 파랗고 빨간 플라스틱과 나무로 만든 오래된 채반들이 거실의 1/3을 차지하고 있으며, 화장실 욕조에는 배추가 절여지고 있다. 전통은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의 생각과 관습과 행동이 반복되고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으로, 계속해서 진화하고 확장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이 마음을 쏟지 않는다면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