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폐
(개요) 돈은 대체 무엇일가. 요즘 사용하는 지폐는 단순한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 종이로 못하는 것이 없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화폐라는 것을 만들어서 사람 목숨만큼이나 귀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화폐의 역사를 알아보자.
(세계의 화폐) 화폐가 사용되려면 교환 경제사회가 되어야만, 상품의 교환·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교환수단으로 화폐가 탄생하게 된다. 화폐가 처음 탄생한 곳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에서 대략 기원전 3,000〜2,000년 전에 은으로 화폐를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3세기에 조개를 화폐로 사용했고, 10세기에는 조개 모양의 청동 화폐가 사용되었다. 양이나 소, 돌, 조개, 옷감 등 다양한 물건이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에서는 거대한 바윗돌, 나뭇조각, 깃털, 심지어 해골까지 돈이라 보기 어려운 것을 돈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은 금, 은, 동과 같은 금속이었다.
기원전 7세기말 터키 서부 리디아 왕국에서 최초로 동전이 주조된 이후 동전은 화폐의 대표가 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리스, 로마 등에서는 동전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 넣었지만, 중국, 한국에서는 가운데 네모난 구멍을 뚫은 둥그런 모양을 가장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교역이 활발하거나, 제국이 안정적인 시대에는 화폐가 사용되지만, 정치가 혼란하거나 상업이 발달하지 않던 시대에는 화폐가 잘 사용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중국 송나라에서 지폐와 어음 등이 처음 사용된 이후, 19세기 이후 지폐가 화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과거 동전은 화폐의 가치가 실제 물건의 가치와 대개는 같았지만, 최근의 지폐는 명목가치와 실제 물건으로서의 가치는 완전히 다르다. 대신 정부와 은행이 화폐의 가치를 대신 보장해줌으로써 교환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역사 최초의 화폐)
우리 역사 최초의 화폐에 관해서는 19세기 초 한치윤(1765〜1814)이 쓴 『해동역사』에 따르면, 기원전 957년 고조선 9대 흥평왕 원년에 자모전(子母錢)이라는 철전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모전은 다른 기록에 등장한 바가 없고, 유물이 발견된 바가 없어 이를 시작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고조선 법률의 법금(法禁) 8조 중 제 3조에는 도둑질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든지 속죄금 50만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고조선 시대에 화폐가 통용된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고조선이 비파형 청동검, 잔줄무늬 동경 등 정교한 금속 가공 기술을 갖고 있었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금속화폐를 제작했을 것이다.
고조선 시대 활용된 화폐 가운데 유물로 가장 많이 남은 것은 명도전이라는 것이다. 명도전은 칼 모양의 화폐로 중국의 전국시대 연나라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 길림대 장보촨(張博泉) 교수는 명도전이 칼 모양이 굽어진 것은 고조선 화폐일 가능성이 높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명도전은 연나라의 영토 보다는 고조선 영토 안에서 대량 발굴되었다. 반대로 고조선 땅에서는 고조선 화폐가 한 개도 발굴된 바가 없다.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면, 고조선이 전쟁 상대 국가의 화폐를 대량으로 사용했을 이유가 없다는 것 등을 통해 명도전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북한의 손량구도 명도전의 출토 상황이 고조선 영토에서 3배, 유적지도 더 많다는 것을 바탕으로, 고조선이 경제가 가장 발전하고, 상품생산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명도전은 금, 은, 구리, 귀금속이 국가를 넘어 세계 공용화폐로 사용한 것처럼, 명도전을 만들 때 사용된 청동의 양만으로도 실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 유통되었던 듯하다.
(삼국시대 화폐)
삼국시대에 사용된 화폐는 특별히 이름은 없으나, 철 덩어리를 화폐로 사용했다. 길이 15〜50㎝, 무게는 800g에서 2.5㎏ 정도로 철을 녹여 불순물을 제거한 후 두드려서 만든 것이었다. 가야의 고분에서는 무덤에 1천 여 개를 무덤 바닥에 깔아 넣기도 했다. 525년에 만든 백제 무령왕릉에는 묘실 안에 철덩어리 수십 개를 고르게 깔아놓은 것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무덤 안에서 나온 돌에 새긴 매지권(買地券) 글에는 무령왕릉에 자신이 묻힐 땅에 응분의 대가를 땅의 신에게 지불한다는 내용이 등장하며 그 대가가 돈 1만문(文)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철정이 곧 돈이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삼국지』에 따르면 고구려의 결혼 풍습은 남자가 신부의 집을 찾아가서 결혼을 청하면서 돈과 폐백을 사위가 머물 집이라고 만든 ‘서옥’에 쌓아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종의 매매혼인데, 이때 지불한 돈은 철정이나 구리 등 현물화폐일 가능성이 높고, 동전일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철정 많이 아니라, 쌀이나 베 등도 화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고구려 온달이 평강공주로부터 받은 금팔찌를 팔아서 땅과 집, 노비, 소와 말, 기타 물건을 구입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금도 화폐로 사용되었고, 또『한원』이란 책에는 고구려에서는 안시성 주변의 은산에서 은을 캐내어 나라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은도 화폐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1149년에 송나라 홍준이란 자가 쓴 『전통(錢通)』책에는 동옥저와 신라는 무문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문전은 테두리가 있지 않고, 네모진 구멍에도 테두리가 없는 것을 말한다.
무문전 외에 북한 자강도 서해리의 한 무덤에서는 약 650개의 일화전이란 화폐가 나왔는데, 북한학계는 무문전, 일화전을 고구려 화폐였다고 보고 있다.
삼국시대 무덤에서는 종종 화폐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특히 이웃한 중국의 전국시대에 쓰인 명화전, 전한시대의 반량전, 왕망시대에 쓰인 대천오십과 화천, 후한의 오수전이 한 개의 무덤에서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이러한 화폐들이 실물로도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국가와 시대를 넘어 화폐로서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삼국에서는 그리스, 로마, 조선시대와 같이 동전을 대규모로 만들던 것인지 실물로 발견되는 동전은 많지 않다. 투박하지만 실물의 가치를 지닌 철정 등을 화폐로 계속 이용했기 때문도 있고, 화폐를 특정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하게 되면 화폐가 위조될 가능성 때문에, 또는 7세기 삼궁이 튼 전쟁에 휩싸이면서 청동이나 철로 만든 화폐는 대량의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적게 실물이 남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의 화폐)
우리나라에서 화폐가 확실하게 제조된 것은 고려시대였다. 996년 고려 성종은 정부에서 만든 최초의 화폐인 건원중보를 만들었다. 이 화폐는 당나라 숙종 때 발행한 것을 모방한 것이어서, 앞에는 건원중보, 뒤는 동국이란 표현을 새겨 넣었다. 재질은 동전과 철전 2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건원중보는 널리 유통되지 않았고, 여전히 물품 화폐가 주로 이용되었다. 결국 1097년 숙종 2년에 의천의 건의에 따라 화폐를 만드는 일을 맡은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해동통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후 동국통보, 동국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해동중보 등이 만들어져 유통되었으나, 여전히 쌀, 베 등 물품화폐도 통용되었다. 반면 고려 말의 공양왕은 원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지폐인 저화(楮貨)를 사용하고자 했으나, 제대로 유통되지는 못했다.
(위조 화폐)
화폐를 유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가짜 화폐, 즉 위조 화폐의 문제다. 우리 역사에서 위조 화폐가 있었다. 고려 숙종은 상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화폐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펼친 임금이었는데, 1101년에는 은 1근으로 만든 은병을 만들어 유통시켰다. 고려의 영토 모양을 닮은 입이 넓은 병모양이어서 활구라고도 했다. 은병의 가치는 개경에서는 쌀 15.6석, 지방에서는 18.9석을 기본 교환율로 정하고, 농사 풍흉에 따라 가치를 다소 조절했다. 그런데 워낙 고가의 화폐이다 보니 위조사범이 나타났다. 은병에 동을 많이 넣어 실제 가치를 떨어뜨린 위조화폐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은병의 품질을 보증하는 표시를 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1311년 충혜왕은 은병 유통을 금지시키고, 은의 순도를 높여 새로 제작한 소은병으로 대체하였다. 하지만 소은병조차 위조품이 나돌았다. 결국 조선 초기에 공식적으로 은병의 통을 금지시켰다.
(조선 화폐)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상업을 크게 억제해, 화폐 유통 환경이 좋은 나라는 못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초기부터 꾸준히 화폐를 만들고, 화폐를 유통시키려고 했다. 조선 태종은 고려 말에 사용하던 지폐를 다시 발행했고, 세종은 1423년 조선통보를 주조해 유통시켰고, 각 도에서 올라오는 세금(稅納)을 동전으로 받는 등 유통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또 세조는 1467년 화살촉 모양의 철전(箭幣)을 주조해 유통시켰다. 하지만 지폐, 철전 등은 제대로 유통되지 못했다. 철전은 유사시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잦은 화폐 위조 사건으로 인해 화폐로서의 가치를 잃었다.
조선에서 화폐가 유통이 잘 안된 것은, 화폐를 집안에 보관하고 묻어두는 소위 퇴장 때문도 있다. 화폐 발행을 늘려도 실제 화폐가 잘 유통이 되지 않는 것이다. 화폐로 물건을 자꾸 사고팔아야 하는데, 화폐를 사용할 필요성이 농촌에서는 크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상평통보가 등장하면서 비로써 화폐가 전국적으로 널리 유통되었다. 상평통보가 널리 쓰기에 된 원인은 대동법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농민이 세금을 쌀이나 특산물이 아닌 화폐로 국가에 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도 화폐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평통보의 사용은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화폐 역사에서 특이한 것은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866년에 만든 당백전(當百錢)이다. 모양과 중량이 상평통보의 5〜6배에 불과하지만, 명목상 가치는 100배로 정했기에, 화폐가치가 엄청난 폭락을 가져왔다. 결국 이 돈은 8개월 만에 사용이 중지되고 말았다.
(근대의 화폐)
우리나라에서 신식화폐가 만들어진 것은 1883년 고종이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해 독일식 기계와 기술을 들여온 이후부터다. 하지만 근대화시기 정치가 혼란해져 화폐제도를 제대로 개혁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 강점기를 맞이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제일은행권이 사용되었다. 일본 화폐는 1878년부터 조선에 유통되기 시작했었다. 1910년 12월 21일 조선총독부는 한국 은행권을 처음 발행했다. 1911년부터 조선 은행권으로 바뀌어 계속 유통되었고, 해방 후에도 한 동안은 조선은행권이 유통되기도 했다.
1950년 대구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인 천원, 백 원 권이 발행되어 통용되기 시작했다. 1950년 8월 1차 통화조치로 구 조선은행권의 통용을 막았고, 1953년 2월에는 2차 통화조치를 하여, 원화의 명목가치를 100대 1의 비율로 절하하고, 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바꾸었다. 이후 1961년 3차 통화조치를 통해 화폐 개혁이 실시되어, 다시 환에서 원으로 바뀌었고, 그 가치도 10:1로 절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