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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제사장의 의복(8) -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옷 입음
“너는 또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관 전면에 있게 하라 이 패를 아론의 이마에 두어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과 관련된 죄책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너는 가는 베 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가는 베 실로 관을 만들고 띠를 수놓아 만들지니라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28:36~43).”
가. 제사장 의복의 다섯 가지 항목
오늘은 제사장 의복의 다섯 가지 항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대제사장은 겉옷과 에봇과 견대들과 흉패와 관이 있다. 관은 머리에 쓰는 관이다. 일반 제사장들은 관과 속옷과 띠와 고의 이렇게 되어 있다.
의복은 무엇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신분을 표시하기도 하고, 성격을 표시하기도 한다. 표시와 상징이다. 그 옷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표시한다. 제사장의 의복은 무엇을 표시하도록 한 것인가? 거룩함과 의로움을 표시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제사장의 의복을 고안해서 만들었다.
제사장의 의복의 주된 재료가 금과 실이다. 세마포로 구성되어 있다. 금은 신성의 거룩함을 나타내고 세마포는 인성의 아름다움, 의로움을 상징하는 재료들이다. 전체적으로 거룩함과 의로움을 표시하고 상징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엄숙함이나 죄 없는 완전함이 아니고 신성한 본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별된 것이다. 거룩이란 말의 어원이 구별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의로움이라는 것은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의 의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진실, 그것이 의이다. 사람들은 이 의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의는 진실의 결과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진실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타난 모든 것이 의이다.
거룩함과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에베소서에서 한 새사람을 이야기할 때, 이것은 교회를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고 말했다. 그 진리의 거룩함이라는 말이 사실은 진실의 의로움이라는 뜻이다.
새사람은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로 지음 받은 자다. 그리스도 자신의 본질이 거룩함과 의로움이다. 그리스도의 본질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이 교회이고 그래서 교회는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새사람이라 부른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이 우주 가운데서 가장 정상적이고 합당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격을 갖춘 자가 정당한 자고 그것이 합당한 자이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 제사장들에게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옷 입혀 놓았다. 그것은 결국 거룩함과 의로움을 옷 입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가장 정상적이고 합당한 인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벗어난 것은 모두 비정상적이고 합당하지 않다는 말이다.
마이크는 소리를 확성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러므로 소리를 확성 하는데 쓰이면 정상적이고 합당한 것이지만, 만약 이것이 다른데 사용된다면 비정상적이고 합당하지 않은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고 합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위해서 제사장의 의복들이 마련되었다.
1) 금패
오늘 말씀드릴 것은 모자에 붙이는 금패이다. 모자를 썼는데, 그 모자 앞에다가 순금으로 된 패를 붙였다. 그리고 거기에 인을 새기는 것처럼 ‘여호와께 성결’ 이라고 쓰도록 했다. 이 말은 곧 여호와께 구별된다는 뜻이다.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관 전면에 있게 하라”고 되어 있는데, 관의 전면에 붙인다는 말은 어떤 선포의 의미가 있다. 이마에 붙어 있으므로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강력하게 무엇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마에다 붙인 것이다. 요즘 이마에 무슨 띠 두르고 나온 사람들을 보면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표시하기 위해서 이마에다 붙인다.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라고 했는데 청색은 언제나 하늘에 속하는 색이다. 하늘에 속한 매임이란 뜻이다. 이 거룩함이 그냥 인간이 만든 거룩함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포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매임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이렇게 말했을 때 그것은 하늘에 속한 매임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로 매인 것이 아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된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그 이외로부터는 다 구별되는 이것을 ‘거룩’이라 한다. 모자 앞에다 금패를 붙였는데 거기다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썼다. 이것은 나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 패를 아론의 이마에 두어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과 관련된 죄책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그 성물에 대한 책임과 보증이라는 뜻이다. 그 드리는 예물이 있는데 그 예물에 대해서 아론이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이 물건은 거룩하다, 이 물건은 온전하다, 이 물건은 확실하다’는 것을 아론이 보증한다는 뜻이다. 섬기는 자가 보증을 한다.
이 성물은 곡식의 소출인데 거룩한 땅에서 거룩한 수고에 의해서 거룩한 소출을 얻어서 그 소출의 1/10을 드린 것이다. 이것을 성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예물이다. 제물이 아니라 예물이다. 그 예물은 속죄제를 위해서 드리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드린 것이지만, 그 이외에 모든 제물들은 하나님과의 화목,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서 드리는 예물들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선물을 줄 때는 그 사람하고 친하다고 주는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좋은 관계를 가지자는 뜻으로 준다. 여기의 성물도 마찬가지다. 선물과 같은 그런 뜻이다. 이 성물은 하나님과의 화평, 교통, 누림, 친교를 위해서 드리는 예물이다.
소출의 최상품을 드렸다. 자기 소출의 최상품의 1/10이므로, 제일 좋은 것을 드렸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선물을 주면서 제일 나쁜 것을 주었다면 그것은 나쁜 마음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었다면 아주 좋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옛날에 바나나가 비쌀 땐,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물을 할 때 바나나를 주었다. 요즘에는 바나나가 싸니까 그것을 가져가면 욕을 얻어먹는다.
그리고 맛이 있든 없든 제일 비싼 것을 사 간다. 왜냐하면 ‘이만큼 나는 선의가 있습니다.’ 하는 것을 표현하려니까 비싼 것을 사 간다. 그래서 비싼 물건이 선물로 나가게 마련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최상품을 드렸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을 원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 거룩함이라는 것의 네 단계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물건들을 어디서 가져온 것인가? 거룩한 땅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데서나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준 땅, 거기서 재배하는 것이므로 거룩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것을 농사지었다는 것은 거룩한 수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수고이다. 보통 수고가 아니고 거룩한 수고이다. 내가 먹기 위한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수고이므로 거룩한 수고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첫 열매, 제일 좋은 열매가 나오는데 이것은 거룩한 소출이다. 다른 열매들은 본인이 먹지만, 처음 익은 열매를 여호와께 드리도록 되어있다. 이것은 거룩한 소출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1/10을 다시 드리는데, 거룩한 소출의 1/10을 드리는 것이므로, 1/10은 나머지라는 뜻이 아니고 최상품이라는 뜻이다. 먼저라는 뜻이다. 1/10을 먼저 드리고 나머지 9/10을 자기가 쓴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룩한 땅에서, 거룩한 수고로 인해서, 거룩하게 거둔 소출 중에서, 가장 최상품을 갖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을 원한다는 뜻이다.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거룩한 성물에 대한 책임이고 보증이다. 아론이 보증을 선 것처럼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것에 대한 보증이 되는 분이시다. 그분 자신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자신을 통해서 드리는 예물은 그분이 아니고서는 드릴 수가 없다. 그분과 같은 성질이 아니고는 드릴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예물을 드리게 된다. 내가 저런 사람이라면 저런 예물을 드리게 된다. 그러므로 드리는 사람이 바로 보증이다. 예물을 받을 때 그 사람을 보고 그 예물을 받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렸을 때, 두 사람 다 자기 소출을 가지고 왔지만 가인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되었다고 한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엽납하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아벨을 보고 그 제물을 받았다는 뜻이다. 제물을 보고 받은 것이 아니고 아벨을 보고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보고 받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결국 제사장을 보고 그 성물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책임져야 한다. 만일 다른 사람이 손댄 것, 다른 사람이 먹던 것, 이런 것을 가져갔을 경우에는 아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자기가 책임을 지는 문제이다. 그래서 “이 패를 아론의 이마에 두어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과 관련된 죄책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여호와께 성결’ 이라는 표를 이마에 붙였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그 성물을 받으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에 대해서 만일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될 것이다. 만약 아론의 이마에 그 패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 성물을 믿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드린 것이라야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 물질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마음을 받는 것이므로, 그 사람을 보고 그 예물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국 이마에 있는 표시, 책임의 표시, 보증의 표시를 보고 그 제물을 받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단계의 거룩함에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나는 지금 거룩한 땅이 있는가? 거룩한 땅은 오늘날 교회이다. 나는 지금 교회 안에 있는가? 아니면 교회 밖에 있는가?
그 다음 두 번째는 나는 거룩한 수고 안에 있는가?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내가 수고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가 얻은 소출이 거룩한 소출인가? 다시 말해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소출이 되는가? 네 번째는 그 소출의 최상품이 나에게 있는가? 가장 좋은 하나님께 드릴만한 최상품이 나에게 있는가?
그리스도는 이 문제에 대한 보증인으로서 완전하게 거룩한 땅에 있는 분이고 거룩한 수고 안에 있는 분이고 거룩한 소출을 갖고 있는 분이다. 그리고 거룩한 소출의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분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이런 수준으로, 이런 관계로 이끌기를 원하고 있다. 그분이 늘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그분이 있는 곳에 우리가 있게 하려고, 자기가 있는 곳에 우리를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요한복음에서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하였다. 그것은 자기 있는 곳에, 자기가 있는 수준에, 자기가 있는 거처에 함께 있게 하겠다는 말이다. 자기 수준으로 이끌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그냥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냥 믿는다. 어떤 의지할 대상으로, 기도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 수준으로 이끌려고 하신다. 자기 수준으로 이끌어야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있다. 자기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책임을 질 수 없다. 우리 모든 사람을 자기 수준으로 인도하려고 하는 분이고 결국은 그분 자신 안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자기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그분은 결국 쉴 수가 없다.
에베소서에서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도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고 했다. 이것은 자기의 수준이 그러함으로 결국 자기의 수준으로 이끄신다는 말이다.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려면 자기 수준으로 이끌어야 된다. 주님의 온전하신 신랑이라면 우리를 신부로 부를 때, 부르는 것은 무조건 부르지만, 같이 살려면 자기 수준과 맞아야 한다. 자기 수준에 이르러야만 온전한 아내가 된다. 그것이 자기 수준에 이끌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죄사함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그 수준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을 이야기한다. 쥐엄열매를 먹고 있던 아들을 불러들일 때, 그것은 그냥 무조건적인 은혜이다. 불쌍히 여기는 자비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영원한 교통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거지를 불쌍하다고 데려다 놨는데, 거지의 습성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같이 살 수가 없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거지였지만, 이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을 받아준 그 사실 속에서 자기가 회개하고 깨닫고 자기도 주인과 같은 수준으로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같이 한상에 밥을 먹을 수 있고 한 이불 속에 잠을 잘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보증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이 바깥에 나가서 흙장난을 하고 논다 하면 그것은 자기의 취미고 자기의 삶일 수 있다. 그런데 왜 엄마들은 그것을 씻기려고 하는가? 씻기지 않으면 같이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씻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자기의 수준으로 이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나를 이렇게 자기 수준으로 이끄신 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른다.
내가 어떻게 해서, 내가 어떤 수준에 이르러야지, 그럴 때는 내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내 어떤 노력에 따라서 올라갈 수도 있고 올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기 필요 때문에 나를 부르고, 그분이 자기 필요 때문에 나를 이끄시기 때문에 그분에 수준에 이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필연적인 일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하는 말이 나온다.
그분이 나를 부르시는 것은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수준에 이르게 해서 자기와 함께 살려고 나를 부르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질없이 자기가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자기가 무엇을 완성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기가 노력한 것은 그분의 부르심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분의 부르심이 우리의 소망이다.
2) 관, 띠, 속옷
그리고 속옷과 띠와 관이 있다. “너는 가는 베 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가는 베 실로 관을 만들고 띠를 수놓아 만들지니라.”라고 하였다. 가는 베실로 만들라는 말이 나온다. 가는 베실로 짠 것, 이것은 처리 받은 인성 안에 있는 진실이다.
실을 만들 때는 여러 과정으로 처리를 한다. 처리해서 마지막에 결국 실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사람도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서 처리해서 아름답게 만든다. 처리가 되지 않으면 아름답게 되지 않는다. 우리가 비록 부름을 받았다 할지라도 부름 받은 자리는 거칠다.
쥐엄 열매를 먹던 사람을 불러 놓으면 쥐엄 열매를 먹던 그 습성이 그냥 그대로 있다. 그것을 여러 과정을 통해서 정결케 하고 씻어서 주인의 상에 앉아서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채색 옷을 입을 수 있고 반지를 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베실이라는 것은 처리 받은 인성 안에 있는 진실을 의미한다.
관을 그것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므로 의의 영광이다. 진실의 영광이다. 늘 이야기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하나이다. 십자가에서는 사람의 진실이 드러났다. 인간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신다. 십자가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있는 인생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부활은 바로 그 사람의 영광을 말한다. 의로운 사람을 하나님이 인정했을 때 그것이 영광이 된다. 진실은 의를 낳고 의는 다시 영광을 낳는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 죽고 다시 삶,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 관은 십자가를 거쳐서 나온 부활의 영광이다.
그리고 띠는 무언가를 졸라매는 것이다. 옷을 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강화하는 역사이다. 붙들어 매는 역사이다. 우리가 무엇을 아무리 한다 하더라도 그 무엇인가 우리가 모르는 어떤 힘이 우리를 붙들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 있다.
뭔지 모르는 어떤 힘이 나를 주님 앞에 붙들어 매놓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이 우리를 묶어놓고 있다. 형제와 형제를 묶어놓고 있고, 주님과 우리를 묶어놓고 있다. 이것이 띠에 해당되는 것이다.
띠는 강화시키는 분으로 체험된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무엇을 체험했는데, 나도 모르는 무엇이 나를 붙잡고 있다. 그것을 체험했을 때 우리는 그 띠를 체험하게 된다. 관은 영광으로 체험된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고” 했는데 여기서 속옷은 아름다움으로 체험된 그리스도를 말한다. 여기서 속옷이라는 말은 일반 제사장들이 입는 옷을 가리켜 말한다. 겉옷은 대제사장만 입는다. 일반 속옷이라는 것은 보통 제사장들이 모두 입는 옷이고, 그 위에다 대제사장만 다시 겉옷인 에봇을 입는다. 이 속옷이 알고 보면 제사장들의 일반적인 옷이다.
여기서 제사장이 의복을 입고 있는 그 전체의 모습을 볼 때, 의이신 그리스도로 덮여져 있다. 우리 몸이 그렇지 않은가? 옷으로 모두 덮여 있는 셈이다.
3) 고의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고 하였다. 고의라는 말이 우리가 말하는 진짜 속옷이다. 팬티나 마찬가지다. 속옷이다. “허리에서부터 다리까지 하체를 가리게 하라” 왜 이것을 가리게 하는가 하면, 드러난 살을 가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벌거벗은 육체를 가리켜 말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그들은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래서 무화과 잎으로 가렸다(창3:7참). 창세기에 보면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6:3)”했고, 그래서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창6:3)”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오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하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육이라고 하는 어떤 개념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벌거벗은 육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실 수 없는 육체를 말한다. 그래서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했다.
이 육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려야 하는, 가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부끄러움을 상징한다. 그래서 무화가 잎으로 가렸고, 하나님은 가죽 옷으로 가려줬다. 그런데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은 햇빛이 나면 말라져 버리는 것이므로 이것은 자기 의에 해당된다. 자기가 이루어놓은 자기 의로 자기를 가리려고 한다.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옳은 것으로 항상 자기를 덮으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햇빛이 나면 말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짓이다. 진짜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서 입혀줬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덮어줘야 덮어진다. 그런데 이것도 한정적인 것이다. 영원히 그러면 덮어만 주면 될 것이냐? 영원히 덮어만 줘서는 안 된다. 그 자체가 덮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떳떳한 것이 되어야 한다.
항상 남이 덮어주기만 한다면 그것은 속은 그대로 있다는 뜻이므로, 가죽옷으로 덮여져 있는 육체는 그냥 가죽옷으로 덮어져 있는 그 상태를 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의이신 그리스도로 가려지는 것, 이것이 온전한 길이다.
그러면 의이신 그리스도로 가려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말은 빌립보서에 있는 말씀대로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9)”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가죽옷으로 가려진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발견된다는 뜻이고, 내가 그리스도의 의로 가려진다 하는 말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죽옷으로 가려졌다 하는 것은 ‘주여 나는 죄인이지만 당신이 나를 덮어주셔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런 입장이다. 그런데 의이신 그리스도로 가려진다는 말은 내가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훨씬 더 깊은 것이다.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그것을 가리지 않고는 쓸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은 무화과 잎으로 가리든가, 가죽옷으로 가리든가, 아니면 의이신 그리스도로 가리든가, 무엇으로 가리든 가려야 한다.
그런데 온전한 가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말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산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내가 따로 있고 그리스도가 따로 있는데,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발견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밖에는 발견된 데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아무데서도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
어떤 물건은 꼭 그 장소에서만 발견된다. 예를 들면 미나리를 발견하려면 시궁창에 가야한다. 메마른 산에서 미나리를 찾을 수는 없다. 꼭 그와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사람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발견되지 않는사람이 있다. 그 말은 그리스도 아닌 데서는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는 잘 발견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발견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발견되는데 세상에서는 발견이 안 된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 우리의 부끄러움이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합당하게 입지 아니하면 죽는다. 그러므로 내가 합당하게 가려지지 않으면 죽음의 상태이다. 그리스도로 온전히 가려지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항상 어디서 생기는가? 그리스도로 온전히 가려지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모든 문제가 다 그렇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자기를 가리려고 무언가 발버둥을 치게 된다. 자기를 가리려고 애쓴다.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자기를 계속 가리려고 하다 보니 사람이 억지를 쓰게 된다. 남에게 억지로 인정받으려고 한다. 자연스럽게 인정받으면 편하고 좋을 텐데 상대방이 날 인정하지 않으면 억지로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이것이 결국 내가 나로서 가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가려질 때만 억지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당연하게 사는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표시이고 또 우리의 흔적이고 우리의 선포이다. 합당한 표현으로 사는 사람, 이 사람이 정당한 사람이다. 합당한 표현으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표시되고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고 그리스도로 선포가 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지극히 합당한 위치에 있고, 합당한 표현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자기를 봐도 안정이 되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봐도 안정이 된다.
사람이 합당한 표현으로 살지 않으면 불안하다. 어떤 것이라도 자기대로 표현된 것은 다 자연스럽다. 개가 개로 표현될 땐 자연스러운데 개가 개 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될 때 이상해진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리스도로 표현될 때는 지극히 당연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될 때는 사람이 이상해지게 된다.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옷 입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것이 인생에 합당한 길이고 그것이 당연한 길이다. 특별하게 어떤 사람만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이 필요했던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중에 어떤 사람을 골라서 제사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온 인류를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온 인류가 그렇게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선택했고,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안 되었기 때문에 레위지파를 선택했고, 레위 지파가 그렇게 안 되었기 때문에 아론을 선택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 아론을 통해서 레위로, 레위를 통해서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인류가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이다. 우리는 모두 다 제사장의 직분 안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불렀는가? 제사장이 되게 하려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가 제사장들이 될 때 제사장 나라가 된다. 전체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다. 제사장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에서는 만인제사설을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된다는 말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표현되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표현되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이 열 가지 옷을 입는다. 열 가지 옷을 입었다는 것은 완전한 옷을 입었다는 말이다. 완전하게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그런 형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표현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살고 있는 것이 모두 다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서 무엇을 볼 것인가?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선포할 것인가? 알고 보면 이것이 인생 문제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인생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것이 목표가 되지 않고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무엇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성공이 되기도 하고 실패가 되기도 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쓸모없는 인생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그런 영광스러운 제사장의 직분 안으로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것이 가장 합당한 길이고 이것이 가장 온전한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주께서 말씀해주시고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확실하게 알게 해주시고 우리를 어디로 가는가를 확실히 알게 해주셔서 우리가 가는 길에 오직 주님을 섬기는 나라로 우리가 가게 되길 원하고 제사장 나라로 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수준으로 우리를 이끌어서 당신과 함께 살기를 원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고자 원하시는 거룩한 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됩니다. 이 목표를 위해서 살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가 더욱 더 이 목표를 향해서 전진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