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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의 에스더" 문준경 전도사
황영준 목사는 194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광주체신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중에 소명을 받아 목사의 길을 걸었다. 총회신학원을 졸업하고, 1980년에 광주동산교회를 개척하여 29년 사역을 한 후에 65세에 조기 은퇴하여 후진양성과 새로운 복음 사역을 이루고 있다. 목회 시절 부터 꾸준한 글쓰기와 호남교회역사와 탐방으로 지역 교계에 인정을 받은 실력자이며,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김경원 목사. 당시 옥한흠 목사) 사역을 하고 있다. 또한 IB 사진동호회를 창립하여 목회자들의 우익을 도모하며, 교회탐방의 기록과 보존을 위한 다양한 사역을 하고 있다.
‘예수의 피 흘리신 십자가, 민족 복음화’의 비전으로 살다 가신 김준곤 목사님은 섬마을 전도부인 문준경 전도사의 전도 열매였다. 김 목사님은 생전에 문준경 전도사를 못 잊어하며 전라도 섬마을 증도로 내려와 6‧25 순교자 문준경의 무덤을 찾기도 했다. 김 목사님은 문 전도사님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내 삶과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바로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님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외롭게 사시던 어머니(김통안 권사)를 위해 나룻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찾아오시곤 했다. 과자 선물과 함께 나를 껴안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아름다운 음성으로 <희망가>나 <천당가 天堂歌>를 부르면 동네 아낙들이 모였고, 그러면 일장 전도가 시작됐다… 산모의 아기를 받고, 병을 치료해 주고, 사랑이 담긴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
증도의 노인들 가운데는 고인 된 문준경 전도사(文俊卿, 1891.2.2-1950.10.5)를 ‘신앙의 어머니’라 말하는 이가 많다.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섬겼던 아름다운 기억, 자랑스러운 이야기들이다. 그가 전도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헌신의 삶을 살았던 아름다운 흔적이 이제 많은 열매로 맺고 있는 것이다.
문준경은 신안군 암태도에서 출생해서 17세(1908) 때 증도 정씨와 결혼했는데 남편에게 처음부터 소박을 받았다. 첫날밤부터 혼자였고 그렇게 젊은 날을 살았기에 혈육의 자식도 없다. 남편은 이웃 섬에서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그래도 친정 부모님은, 여자가 혼인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시댁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했기에 친정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런 중에도 시아버지가 자부를 잘 살펴 주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는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홀로된 문준경은 증도를 떠나 목포로 나와서 삯바느질을 하며 살았다. 버림받은 여자, 외로운 인생, 소망도 없는 눈물 세상을 사는 그녀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다가왔다. 친척의 인도로 이성봉 전도사가(당시 전도사-성결교 부흥사) 개척한 북교동 성결교회에 나갔다.
“가난한 사람도 오시오! 병든 사람도 오시오! 외로운 사람도 오시오! 주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나 내게로 오라 하셨습니다…”
길 잃은 문준경을 부르는 예수님께 그녀의 영혼이 붙들렸다.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예수 십자가 앞에 세상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세례(1928)를 받으면서 ‘죽는 날까지 전도하리라’ 다짐했다. 41세에(1931) 성결교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고 방학 때면 열심히 전도해서 임자도에 진리교회(1933), 증도에 증동리 교회(1935)를 세우고 대초리 교회(1936)와 20여개 교회를 세웠다. 그 교인들 가운데서 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 등 30여 명 목사가 나왔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지만,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찬송하며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다짐했다. 1950년, 6․25 때는 좌익이 일어나 교회를 핍박하고 주민과 교인을 학살했다. 국군이 목포에 들어오면서는 최후 발악을 했다. 문준경도 목포로 끌려갔다가 국군이 들어오는 바람에 죽음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두고 온 교회와 교인들이 염려되었다. 좌익이 잔류하고 있는 증도에는 아직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을 지켜야 한다.”며 증도로 들어온 그녀는 결국 폭도들에게 붙들렸다. 솔무등 모래 언덕에서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며 몽둥이로 때리고 칼과 죽창으로 찔렀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딸처럼 사랑했던 백정희 전도사를 생각해서 “백정희를 살려주라, 교인들 죽여서는 안 된다’고 애원하고 “하나님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하며 숨을 거두었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그녀는 59세였다.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 순교의 제물로 드림이요, 섬마을 주민들을 위한 한 알의 밀로 죽은 것이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복음지고 가는 자야 무안군도 십일면에 십만 여명 귀한영혼 이 복음을 못 들어서 죄악 중에 헤매이네 달려라 귀한발걸음 전하여라 그 귀한 복음을 압해 지도 도초 안좌 자은 암태 임자 하의 비금 팔금 흑산에 전하여라 그 복음을’
<도서가島嶼歌>를 부르며 노둣길을 건너다니던 문준경 전도사. 증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는 곳을 ‘보물섬, 천사의 섬’이라 부른다. 지금 증도의 복음화율은 90%을 넘는다. 전체 마을의 주민이 장로와 권사요 집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면 많은 결실을 맺나니...
▲ 일본 선교사와 현지 목사들이 방문하여 호남 교회 순교지를 탐방할 때 가이드와 교육을 담당한 황영준 목사
▲ 문준경 전도사님이 사역했던 신안군 증도면 소재지 일원. 전경은 문준경 순교 기념관 의 모습(오른쪽으로 증동리 교회 위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