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어요,
어제는 히끗히끗 눈발이 보였다는데 난 궂은비만 보았지요.
11월 중순이면 가을이 한창 깊을 것인데 계절에 이상징후가 있는 듯
봄과 가을이 사라지는 기분? 여름에서 가을은 건너 뛰고 겨울이 다가온 듯 합니다.
몸 조심들 하구요.
올해 우리 잉근내 동인에는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고 해야 하나요?
이인순 님과 천용순 님이 시집을 발간했어요.
헤아릴 수 없이 기쁜 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두 분의 시집과 소개 글은 이야기와 사진방에 올립니다.
푸른 갈기의 말들을 위한 기도/ 김추인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나의 말들은 어디쯤 달려오고 있을까
뮤즈들은 협곡마다 숨어
여린 화성음의 서정으로 노래하겠지만
내 말들이 알아차리기나 할까
까불까불 덤불 속에서 놀다 낯선 야생에 접질린 다리 끌며
길 헤매지는 않을까
칼리오페의 그림자 지나치진 않았을까
이리 오래일 리 없는데 왜지? 왜지?
몸 기울여 귀 나발통같이 열어도 뜬소문 같은 바람 소리만 와랑 와랑 내 귀에만 들릴 말발굽 소리 아직이다
오라
뮤즈의 음표들을 훔쳐 오라
억년 바위 침묵을 엿보고
빙원이 품은 바이칼 푸른 달빛에 영혼 씻어들고
백설의 순결로 오라
죽어서라도 오라
내 기다림은
신들의 언덕에 선 만년 바람의 성이다
아이야 성문을 활짝 열거라 진부한 환대는 사양하리라
신전에 내리는 어둑살 너머
서풍이 말머리성운을 밀어올리고 있지 않느냐
저 홀로 광년의 트랙을 돌아올 신신한 나의 말씀이여 시(詩)여 푸른 갈기털 휘날리며 오시라
트랙 / 이화은
여자가 쉐타를 푼다
남자의 뺨을 때리던 오른쪽 팔이 없어졌다
구경하던 왼쪽 팔이 없어졌다
잠시 여자가 손을 멈추고 인공눈물을 넣는다
다시 목을 푼다 목을 꺾듯
아직도 붉은 꽃을 가슴에서 풀어낸다
꽃이 사라지자 가슴도 사라졌다
트랙을 달리는 마라톤 선수처럼
여자가 달린다 여자를 따라 빙빙 털실이 달린다
트랙을 수백 바퀴 돌아도
여자의 눈물을 훔쳐간 도둑을 잡을 수가 없다
털실 뭉치가 자꾸 커진다
남자를 다 풀어낸 여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시 눈물을 넣는다
아무도 여자가 운다고 말하지 않는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살 또는 타살 / 이화은
꽃 속에 갇힌 채 죽은 벌을 두고
누구는
죽을 때까지 밥그릇에 코를 박아야 하는
노동의 비애를 한탄하더니
꽃의 치마폭에 싸인 채 숨을 거둔
카사노바의 정사를 부러워하는 로맨티스트도 있다
식후 잠시 오수에 들었다가
제 몸속에 손님이 든 줄도 모르고 몸을 닫아버린
꽃의 방심을 탓하는가 하면
이미 사주팔자에 생(生)과 사(死)가 다 정해져 있었던 거라는
운명론자도 있으니
노동과 로맨스와 사주팔자를 비껴갈 생이 있을까마는
나는 지금 모든 해석을 잠시 보류한다
비몽과 사몽 사이
달콤한 낮꿈의 끝자락에 코를 박고
노동과 운명과 사주팔자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꽃꿈아 제발 몸을 닫아라
당신에게도 상처가 있나요 / 김종미
절벽에서 발을 헛디딘 뱀이 추락한다
추락하는 한순간도 거두절미하면 날아가는 한순간이 될 수 있어
내가 본 것은
날아가는 뱀
한순간의 절박함에 대해
당사자인 당신과
구경꾼인 나는 시선을 나눈 적도 없는데
당신을 잘 아는 것처럼 말했다
하나의 마침표로 완성되는 문장을 만들었다
당신에게도 상처가 있나요? 라고 내게 말하는 사람
실은 나도 추락 중이라
당신과 눈을 맞춘 적이 없다
우리는 소 닭 쳐다보듯 허기가 없는 관계였구나
누우떼 바라보는 악어처럼
안다는 것은 그런 거지
서로의 허기 속에 서서히 제 살이 되어 가는 서로의 슬픔
물음표도 느낌표도 제 몸에서
추락하는 마침표를 가지고 있다
석류 / 손택수
석류가 붉은 건 다 설명할 수 없다 석류는 천연 에스트로겐만도 아니고 여름의 소나기와 천둥과 뙤약볕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당신에게 내가 이끌리는 이유처럼, 이유를 몰라도 좋은 이유처럼 그걸 그늘이라 부른다면 석류는 그늘로 살찐 과육이다 물론 그 또한 나의 해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적어도 석류를 사랑으로 외롭게 하지는 않겠다는 뜻 해마다 석류가 붉는 것은, 석류 앞에 내가 서 있는 것은 석류의 비밀을 너와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풀고 풀어도 풀 수 없는 비밀을 함께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석류는 그저 석류이다 석류로서 투명하고 석류로서 충만할 뿐이다 침이 고이는 것들은 대체로 그렇질 않던가 |
물구나무(외 2편) / 조정인
내가 물구나무를 설 때 세상 모든 나무는 물구나무. 나랑 같이 물구나무서는 물구나무. 팔락팔락, 바람을 듣던 그 많은 귀때기는 연녹색 발바닥이 되어 참방참방, 하늘 수영장에 물장구치다 그 많은 보드라운 발바닥으로 하늘 옆구리를 간질이는 물구나무. 분홍 저녁 하늘을 신어 보지만 갈 데도 없는 물구나무. 내 방, 창밖엔 심심한 나랑 같이 물구나무나 서는 모과나무 한 그루.
웨하스를 먹는 시간
그러니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막내 이모 이모 집엔 눈이 파란, 잿빛 고양이가 산다. 엄마는 어림도 없지. 고양이라면 우선 눈이 무섭대. 내 생각엔, 고양이가 먼저 엄마를 무서워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코로나19가 가져다준 학교에 가지 않는 요즘. 나는 아예 짐을 싸서 이모 집에 와 있다. 거실 장으로 햇살이 비쳐 들고 이모와 나는 웨하스를 먹는다. 웨하스 포장을 뜯을 때는 마음부터 바스락거린다. 포장지 붉은 줄을 떼어 내는 손끝에서 자그만 행복이 실눈을 뜬다. 바삭바삭, 입 안에서 행복이 소리를 낸다. 이모는 이야기를 이어 가고…… 귓불에서 귀고리가 흔들린다. “그러니까, 사막을 지나던 루스팜이 도적 떼에 붙잡힌 노인을 구했대. 밤이 왔어. 사막의 밤은 춥고, 루스팜은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닥불을 지폈어. 불을 쬐던 노인이 소원이 뭐냐고 물었어. 노인은 사실 마법사였어. 루스팜은 손사래를 쳤지. ‘아녜요. 모닥불은 따뜻하고, 연기는 향긋해요. 밤하늘 별들은 쏟아질 듯 반짝이고…… 아름다운 게 여기 다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그러자 노인은 연기 한 줌과 너울거리는 불꽃 한 송이, 빛나는 별 두 개를 양손에 모아 쥐고, 숨을 불어넣었어. 손을 펴자 세상에! 새끼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지 뭐니. 털은 연기처럼 푸른 잿빛이고, 두 눈은 별처럼 빛나고 혀는 불꽃처럼 붉었어. 이렇게 아름다운 것 세 가지가 모여 태어난 게 바로 고양이란다.”* 고양이 제제는 내 무릎에 턱을 얹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고양이의 잠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봄날의 햇살 한 주먹? 여름날 뭉게구름 한 덩이? ⸺⸺⸺⸺⸺⸺⸺⸺ *페르시아의 고양이 탄생 설화 참고.
나는 잎이야,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를 들었다
분홍 꽃망울들이 잔뜩 맺힌 채 함부로 꺾여 길바닥에 던져진 꽃가지였다. 부러진 꽃가지를 화분에 심었다. 자주 그 앞에 쪼그려 앉고는 했다. 얼마 안 가서 꽃나무 가지는 꽃과 잎을 다 떨어뜨린 빈 나뭇가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지 끝에 반짝, 연둣빛이 비쳤다! 반짝이는 눈물 같은 잎. “나는 잎이야.”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른 나뭇가지가 온 힘을 모아 가지 끝에 팥알만 한 속잎 두 장을 밀어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