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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믿을 만한 증거
본문: 사도행전 17:22-31
어린이 설교
여러분은 그리스 로마 신화 알아요? 혹시 신 이름 아무 거나 5개 댈 수 있는 사람? 혹시 가장 좋아하는 신이 누구에요? 참 재밌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옛날에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요. 그 신들을 진지하게 종교로 숭배를 했대요. 그냥 우리처럼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동화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런 신들이 있다고 믿었대요. 그리고 그 신들을 위해서 건물도 세우고, 조각상으로도 만들고, 그 앞에 절도 하고, 제사도 지냈대요. 그 신들이 자기 복을 빌어 준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냥 신 한 개만 골라서 섬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온 모든 신들을 섬기고 제사를 드렸대요. 여러 명을 섬기면 복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건 같아요.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와서 예배 드리려고 해도 힘든데, 수백 명의 신들을 섬기려고 하면 얼마나 할 일이 많고 피곤했을까요?
심지어는 내가 모르는 어떤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신한테 제사드리지 않으면 나한테 해코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언노운이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신으로 섬겼어요. 언노운은 모른다는 뜻인데, 그 모르는 신에 대해서도 섬긴 거에요.
이런 사람들한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신들은 여러 명이 아니다, 한 오직 한 분이다, 하나님만을 믿어라 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어요. 이 세상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오직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어요. 이 사실이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이고,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이라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는 증거였어요.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걸 믿었을까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요. 바울의 정신이 나갔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오늘도 마찬가지에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 듣고도 잘 믿지 않아요.
하지만 바울은 그런 욕을 먹으면서도 계속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자기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으니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은 참 복이 있어요. 예수님의 그 부활 생명을 함께 누리게 돼요. 이 땅에서도 생명력이 넘치게 아주 활기차게 살고요. 나중에 죽은 뒤에도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영원히 살 수 있어요. 여러분은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듣고 믿기 바라요!
머리말: 사도 바울이 관악교회에서 설교한다면?
사도 바울이 관악교회에 와서 설교한다면 어떤 설교를 할까요?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며 복음이 로마 전역에 전파되는 데 큰 기여를 한 분입니다. 수많은 신약 성경의 저자이며 복음을 가장 깊이있게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오늘날 사도 바울이 설교한다면 어떤 식으로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고, 세상에 사로잡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높이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할까요?
오늘 말씀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행한 설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 사도의 설교가 9편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유대교의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적인 이방인들을 상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는 오늘 본문이 유일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한다면 아마 이 본문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설교를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다시 새롭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상 숭배에 사로잡힌 우리의 마음을 풀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충만히 채워 주시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의 흔적을 무시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세상 (22-29절)
먼저 22-29절에서 바울 사도는 아테네의 거짓된 우상 숭배적 경향을 폭로합니다. 16절에서 바울 사도는 아테네에 도착해서 다른 전도팀원들을 기다리면서 혼자서 성을 한 바퀴 쭉 돌아봅니다. 그런데 온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격분하였습니다. 격분했다는 것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테네의 우상 숭배적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형태를 달리 해서 그대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1) 철학적 변론과 새로운 가르침 (18,19절)
먼저 첫째는 철학적 변론과 새로운 가르침에 민감한 경향입니다. 18절에 보면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가 나옵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 사조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 세상에서 겪는 불필요한 욕망과 고통을 줄임으로써 정신적인 만족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는 신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신을 믿는다고 해서 특별히 신이 잘 해준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안정감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자기 만족을 위해서는 신을 믿는 게 더 좋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신은 없지만 종교가 개인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견해와 비슷합니다.
스토아 학파는 온 세상을 움직이는 신의 원리가 있다고 봅니다. 모든 자연 만물에 이 신의 정신이 깃들여 있다는 범신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신의 지혜를 체득해서 순응하면서 살아갈 때 행복할 수 있고, 괜히 이 신의 원리를 거스르거나 하면 불행해진다고 봅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 이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신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두 철학은 당시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방식들입니다. 그밖에도 이 사람들은 이 세상과 신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하는 다양한 사상들을 접하고 토론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그런 색다른 주장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성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잣대였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든, 스토아 학파든, 그밖에 어떤 사상이든지 나의 이성과 나의 판단에 입각해서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최고의 신은 사실은 자기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논리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을 추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과학주의입니다. 과학주의는 이 세상은 오직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세상의 모든 원리는 과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랑이나 믿음, 이런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도 뇌 속의 뉴런의 신경작용으로 환원된다고 봅니다.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신의 존재는 결코 인정되지 않습니다.
과학주의 관점에서 세계와 역사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책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베스트 셀러가 됩니다. 이기적 유전자, 코스모스, 총균쇠, 지리의 힘, 사피엔스, 이런 책들이 현대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오늘날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이 책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사실상 부인하고, 기독교를 인간의 필요에 의한 발명품쯤으로 격하시킵니다.
2) 종교심 (22절)
아테네의 두 번째 우상숭배 경향은 종교심입니다. 미신을 의지하는 경향입니다. 22절에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하고 평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로마신화가 단지 어린이들의 동화가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이 진지하게 숭배하는 우상들이었습니다.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12신들 뿐만 아니라, 태초신들, 티탄족, 바다의 신, 지옥의 신, 님프들, 영웅들 등등 우리가 이름도 잘 못 들어본 엄청나게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또 로마가 정복한 여러 지역들의 토착 신들도 신화의 세계에 편입되어서 점점 섬기는 신들이 많아졌습니다. 나중에는 로마 황제들도 신으로 섬겼습니다.
심지어는 아테네 신전에는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제단도 만들어 두었습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신이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그 신을 잘 안 섬기면 해코지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놓은 제단입니다. 철저한 다신교 사회입니다.
28절에서는 당시 시인들의 유명한 문구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 “우리가 그의 소생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절대적 존재를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서 다신론에 빠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합리성이 굉장히 발달한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많은 미신적 요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각종 점집들이 성행하고 있고, 사업을 시작하거나 큰일을 앞두고 점을 보고 굿을 하거나 고사를 지내거나 부적을 사는 일들이 많습니다.
정재계 고위 인사들 중에도 미신에 깊이 물든 사람이 많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젊은 사람들도 재미 삼아서 사주를 보거나 타로점을 보는 일들이 많다고 합니다. 또 각종 이단들이 활개치는 것도 사람들의 종교적 열심을 파고드는 결과로 보입니다. 현대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수록 어떤 신비적인 존재에 의존하고 싶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종교적 성향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현실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초월적 존재를 추구하는 성향은 인류의 보편적인 성향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의 이런 종교적 특성을 가리켜서 “호모 렐리기오수스”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도록 우리 인간의 영혼 가운데 심어 주신 흔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종교심을 가지고 미신으로 나아갔습니다.
3)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 (24,25,29절)
마지막 세 번째 우상숭배 경향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조각입니다. 사람의 노력을 통해 신에게 나아가고자 하였습니다. 24-25절에 아테네 사람들은 화려한 신전을 지어서 신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29절에는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조각을 만들어서 신처럼 섬겼습니다. 우상숭배를 아주 열심히 노력해서 했습니다.
언뜻 보면 신을 두려워하고 신한테 노력해서 잘 보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신전도 짓고 제물도 바칩니다. 하지만 사실은 신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 조종하는 모습입니다. 성전 안에 신을 가두어 놓고 신이 좋아하는 것을 제물을 바쳐서 자신에게 복을 내리도록 유도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상숭배의 본질이 있습니다. 신을 조종해서 자기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우상숭배의 밑바탕에는 인간의 탐심이 있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은 겉으로는 신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섬깁니다.
오늘날에는 신앙 생활도 우상 숭배적으로 하기가 쉽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신론자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을 교회 안에 가두어 두지는 않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 예배 드리고 헌금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나머지 시간과 돈은 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 봉사를 했으니까 하나님께서도 내가 잘 되게 도와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필요한 일, 어떤 절박한 상황이 생기면 열심히 기도하지만, 평소에는 좀 적당하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태도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뜻을 이루려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 나의 환경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고 나를 하나님처럼 높이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심 (30-31절)
1) 부활은 가장 분명한 믿음의 증거
바울 사도는 설교를 통해 아테네 사람들의 우상 숭배적인 경향을 신랄하게 폭로했습니다.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참된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 우상숭배에 물든 아테네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돌이킬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31절에서 한 사람에 대해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입니다.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분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분의 권능 앞에 엎드려 심판당할 것입니다. 이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심판주로 정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바울은 놀라운 증거를 아테네 사람들 앞에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다.”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고대인들은 과학적 사고가 발달하지 않았고, 환상과 마술의 세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다 쉽게 믿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부활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고, 믿음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18절에서 사람들은 바울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은 바울이 엉터리 궤변가라고 부르기도 하고, 부활이라는 새로운 신을 소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8절에 “이방 신들을 전한다” 하지 않습니까? 그냥 신이 아니라 신들입니다. 예수도 신이고, 부활도 또다른 신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승리의 신 니케, 정의의 신 디케, 평화의 신 에이레네와 같이 부활이라는 또다른 신이 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또 20절에서는 이상한 이야기,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로 취급했습니다. 그리스의 여러 신화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지만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사람,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새롭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32절에서는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도 확실한 믿음의 증거이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무엇보다도 당시에 수많은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아테네 설교를 한 것이 대략 주후 50년 경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은 지 대략 20년 정도 지난 시점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두 눈으로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부활하여 새로워진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로 오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3-8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합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들이요 증인입니다.
당시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많은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치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예수님이 잠깐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예수인 것처럼 연기를 했다는 등등의 주장입니다. 설득력이 굉장히 떨어지고 앞뒤가 안 맞는 이론들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서 죽은 것을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옆구리를 찔렀는데 물과 피가 나왔다고 합니다. 해부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심장 안쪽에 고여 있던 혈액과 체액이 뿜어져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무릎을 꺾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죽음은 확실했습니다.
당시에 로마 군인들이 무덤 주변을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곧바로 다시 모여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경비를 뚫고 시체를 빼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비한 힘에 의해서 돌문은 열렸고, 예수님의 무덤은 확실히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수많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쉽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육체가 신비하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릴 때 알던 사람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다가 완전한 성인이 되었을 때 다시 만나면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의심 많던 도마나 바울과 같은 제자들도 부활 예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은 꾸며낸 이야기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부활의 소식을 꾸며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저주받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분이 곧 하나님이고 동시에 사람이시다? 너무 설득력이 없는 말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면 훨씬 논리적으로 말이 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교리를 창안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면서 이익을 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랍비이자 로마인으로서 보장된 생계를 잃고 불안정하게 떠돌아 다녔습니다.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고 살해의 위협을 수 차례 당하였습니다. 헬라인들에게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했습니다. 로마 당국으로부터는 반역죄로 몰려서 결국 순교를 당했습니다. 제자들이 이 부활을 거짓으로 꾸며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 가운데서 일어난 확실한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만은 아닙니다. 역사 속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이 확실한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 아주 실제적인 믿음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겠다, 꾸며낸 신화적인 이야기 아니냐, 고대 이집트의 신화들을 짜깁기한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역사적 지식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적 사건들을 사실로 믿고서 살아갑니다. 예전에 정말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압니까? 역사 기록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압니다. 예를 들어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약 성경 또한 아주 믿을 만한 역사적 기록입니다. 내용의 구체성과 일관성, 사본의 수와 상호 일치성, 사실관계의 정확성, 이 모든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신약 성경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다른 어떤 기록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신뢰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혼 가운데 일하시고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본다고 더 잘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님의 증언이 훨씬 더 큰 설득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았지만 잘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셀 수 없는 교회와 성도들도 성경 말씀을 듣고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여기 바울 사도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조롱당하면서 증언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확실한 목격자의 증언이 있습니다. 2천 년 동안 반박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증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꾼 성령님의 증언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2) 부활은 심판주의 임명식
우리는 모두가 우상 숭배하는 죄인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죄 용서받고 새 생명을 얻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30절에 바울 사도가 아테네의 우상 숭배자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15:17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완전히 씻어 주셨다, 우리의 죄는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의로우신 분임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디모데전서 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죽음 가운데 일으켜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이 죽으셨으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분임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세상을 심판할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온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망과 죽음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활하신 예수님께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로 피하는 모든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가 그들을 틈타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하며 먼저 누리신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도 나눠주실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것입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비한 육체, 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우리도 덧입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9은 증거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로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홀연히 다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다 끝내고 부활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기쁨과 행복의 날입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 품으로 간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들을 다시 만날 소망의 날입니다.
하지만 모든 우상숭배자들에게는 합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심판하실 때, 그 우상들을 추종하는 자들도 함께 멸망당할 것입니다. 어서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 멸망의 저주에서 빠져 나오십시오.
3.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자의 변화된 삶
부활 예수를 믿는 것은 단지 미래의 심판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며 살게 됩니다.
1) 회개하고 하나님과 교제함
먼저 부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부활하고 영광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거듭나고 새롭게 된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가장 소중한 열매입니다.
부활 생명으로 영혼이 새롭게 된 사람은 우상 숭배를 버리게 됩니다. 돈이나 명예나, 자아실현이나, 그밖에 세속적인 가치가 예전만큼 큰 만족을 가져다 주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과 교제하는 일에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부활 생명에 동참하는 것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미리 맛보며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한 뒤에 성령님에 충만하여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얼굴로 대면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 땅 가운데서 예배하면서, 또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미리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또 다른 성도들과 함께 믿음의 교제를 나누면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과 친교 가운데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2) 고난 가운데서도 부활 생명을 나타냄
다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이 땅의 여러 고난 가운데서도 부활 생명을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속하여 살아가지만, 이 땅에는 여전히 고난이 있고, 죽음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크고 작은 좌절과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생명이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 고난 가운데 인내하면서 계속해서 사명을 감당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6-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 생명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지금 여러분이 겪고 계시는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결코 여러분을 넘어뜨리고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 되십니다.
여러분을 좌절시키는 죽음의 세력에 짓눌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건강의 어려움, 정서적인 어려움, 육아나 공부나 직장생활 등 이 땅에서 행하는 여러 고통스러운 노동들, 소득의 부족으로 인한 압박과 불편함, 인간관계에서의 부당한 공격과 갈등, 이런 죽음의 그림자들이 여전히 우리의 삶에 깊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의 영혼 가운데, 삶 가운데 계속해서 샘솟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옮기고 날마다 새롭게 하루를 살아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주님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나눠주는 일을 계속합시다. 주님께서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연합하려면 십자가의 죽음에도 함께 연합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겪으시는 그 죽음과도 같은 어려움, 회피하고 싶은 상황이 바로 부활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결론. 주 예수를 믿으라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먼저 우리의 우상 숭배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 믿음의 증거가 되는가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2000년 전 아테네에서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다 듣고 믿어야 할 하나님의 복된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32-34절에서는 이 부활의 복음에 대한 듣는 자들의 세 가지 서로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조롱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음에 다시 들어 보겠다고 합니다. 당장의 판단을 보류하면서 지적인 관심을 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사람은 믿음으로 나아옵니다. 디오누시오와 다마리와 그밖에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이 참으로 복됩니다. 누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합니까? 누가 심판의 날에 구원을 얻습니까? 바로 지금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상 숭배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읍시다. 참으로 확실한 믿을 만한 증거인 부활의 사실을 굳게 붙듭시다. 이 땅에서 부활의 생명을 누리고, 장차 영원한 부활을 경험하는 우리 모든 관악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결론: 우상 숭배를 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읍시다.
1. 하나님의 흔적을 무시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세상 (22-29절)
1) 철학적 변론과 새로운 가르침 (18,19절)
2) 종교심 (22,28절)
3)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 (24,25,29절)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심 (30-31절)
1) 부활은 가장 분명한 믿음의 증거
2) 부활은 심판주의 임명식
고린도전서 15:17
디모데전서 3:16
고린도전서 15:49
3.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자의 변화된 삶
1) 회개하고 하나님과 교제함
2) 고난 가운데서도 부활 생명을 나타냄
고린도후서 4:16-18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질문>
1. 아테네 지역에서 우상 숭배는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나요?
2. 예수님의 부활이 믿을 만한 증거라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3. 마지막 날에 누가 온 세상을 심판하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나요?
<개인 묵상과 소그룹 토론을 위한 질문>
1.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우상 숭배적인 경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그런 경향에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자신의 우상 숭배의 죄를 묵상해 보고 회개합시다.
2.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한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습니까? 주변의 가족이나 친지 중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설명한다면 어떤 식으로 설명하시겠습니까? 다른 성도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3. 나는 지금 삶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생생하게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나의 삶의 영역 가운데, 또 우리 교회 안에서 에수님의 부활 생명이 가장 절실하게 나타나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요? 다른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