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 무자성은 무엇인가 2. 무자성 비판(1): 실체화의 문제와 임시로 붙인 이름 3. 무자성 비판(2): 중도의 문제 4. 비어있음[공]의 개념, 분별하지 않음 |
1. 무자성은 무엇인가
1.1. 대승 불교에서 존재가 괸게에 의해 규정되므로 ‘실체성/자성’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존재의 실체성/자성은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도 있다.
구조주의에서는 사물의 존재의 양상을 실질과 형석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실질은 재료로서의 사물의 양상이고, 형식은 관계로 규정되는 사물의 양상이다. 구조주의에서 사물의 즌재는 헝식으로 정의되며, 그것의 값[성질]은 다른 사물들과 관계에 따라 정해진다. 만일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분리되어 홀로 있는 경우에는 그 사물은 어떤 성질도 있을 수 없다.
1.2. 아함겸에서는 모든 존재는 인연법의 관계로 맺어진 것이며, 그러한 관계 숙에서 사물의 싱질이 정해진다. 곧 인연법으로 헝성된 것들을 모두 어떤 고유한 성질[자성] 가진다. 그런데 관계가 끟어지면 사물의 존재도 말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그 사물의 성질을 말할 수 없다[무자성].
이를 고려한다면, 인연법에 의해 생겨난 것들은 자성을 가지므로, 무자성을 인연법에서 도출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 불교에서 어떤 뜻으로 공을 한사믜 본질적 무자성으로 규정하는 것일까?
일단 사물은 인연법의 관계 속에만 규정되기 때문에 무자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만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무자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하명에서 말하는 인연법이 끊어진, 분벌되지 않는 비어잏음을 틋하게 된다. 결국 아함경에서 공을 규정하는 것과 차이가 없게 된다. 여기서 다시 질문해야 한다. 대승 불교의 무자성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2. 무자성 비판(1): 실체화의 문제와 임시로 붙인 이름
2.1. 대승 불교에서 인연법이나 연연법으로 생겨난 모든 것들을 실체화하는 것을 경계하기 워해서 무자성으로 규정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아함경의 첫째 경인 <무상경>에서부터 많은 경들에서, 인연법으로 생긴 모든 것들은 공하고 비아/무아임은 설하고 있다. 또 삿된 소견을 설한 경들에서도 인연법의 생긴 것들의 실체화를 되풀이하여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아함경의 무상영만 읽어 보더라도 대승 불교가 우려하는 그런 일은 생길 수 없다.
그리고 아함경에서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 가명]은 인연법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인연법은 보통의 인간들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나와 세계에 태하여 그것들이 어떻게 생멸하는지를 이시로 붙인 이름[가호, 가명]으로 설한 것이다.
2.2. 그런데 무상경 등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연법으로 생겨난 모든 것들은 다 비어 있다[공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에서는 ‘12입처와 5음 등 인연법으로 생겨난 모든 것이 다 공아다’라고 했는데, 이는 곧 ‘색즉시공’과 다르지 않다. 또 공을 비분별의 비어있음으로 규정하는 공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공과 인연법의 구별도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대승 불교에서 인연법의 실체화를 우려한다거나 가명으로의 이해 등은 아함경을 조금만 이해한다면 아무련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승 불교에서 이러한 문제를 들어 굳이 공을 무자성이라 했다고 한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3. 무자성 비판(2): 중도의 문제
3.1. 대승 불교의 ‘무자성’의 개념은 오히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자성’이라는 것은 그것을 가진 무엇인가를 전재하는데, 무엇이 없다면 그 무엇리는 자성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자성’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무자성’을 나와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로 삼는다고 하면, 그러한 무자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전제를 뛰어넘어야 하는 또다른 추론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은 공을 무자성으로 규정한 본래의 의도에 반하는 결과이다.
3.2. 초기 불교의 ‘비어있음’은 반드시 무엇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비어있음은 무엇의 안에 어떤 것이 없다는 없다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는데, 그러한 비어있음의 쓰임은 무자성과 동일하다. 그런데 어떤 시공간 안에 무엇 자체가 없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무엇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 앞의 경우도 이와 같이 해석할 수 있는데, 무엇을 시공간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물론 시공간 자체도 비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비어있음은 무자성을 포섭하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4. 비어있음[공]의 개념, 분별하지 않음
4.1. 여기서 ‘비어있음’은 단순히 물리적인 비어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중아함경_190. 소공경(小空經)>에서 공은 ‘비분별의 비어있음’이다.
‘비분별’은 관찰자가 대상들을 분리하여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어떤 일정한 공간에 갖가지 사물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관찰자가 사물들을 구별하여 인식한다면 그것들이 있가고 하며, 구별하여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없다고 한다. 마치 어떤 장소에서 친구들 만나기로 했는에 많은 사람들 속에 그 친구들이 보이면 ‘다 있다’고 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는 ‘아무도 없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 때 ‘없다/비어 있다’는 물리적인 어떤 것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구별하여 인식하고자 하는 어떤 것이 보이지 않을 때 없다고 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관찰자가 어떤 것도 분별하지 않았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텅 비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세계는 분별하거나 분별하지 않음으로써 사물들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비어 있다]고 할 수 있다.
4.2.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인연법으로 생겨난 갖가지 것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하여 가다가 단단한 것에 부딪치기도 하고,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허기와 목마름과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고, 느낌과 생각과 의도, 욕망과 기억에 붙들려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실제로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비분별의 비어있음’을 실제로 존재할까?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을까?
초기 불교의 관점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관찰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 붓다는 인연법으로 생겨난 모든 존재들 속에 있으면셔도 동시에 비어 있는 세계에서 지낸다. 그리하여 그것들에서 비롯되는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 인연법으로 생겨난 갖가지 세계들과 공을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비어있는 세계는 모두 가능세계들이다.
4.3. 비분별은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멍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잡아함경_282. 제근수경(諸根修經)>의 울다라와 붓다와 아난의 대화에서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 경에서 ‘눈으로 빛깔을 보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모든 감각기관을 닦는 것이다’라는 말에 말에 대하여, 붓다와 아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붓다: “만일 너의 스승 파라사나의 말과 같다면, 장님이라야 감각기관을 닦을 것이 아닌가? 왜냐 하면 오직 장님만이 눈으로 빛깔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난: “파라사나의 말과 같다면, 귀머거리라야 감각기관을 닦을 것이 아닌가? 왜냐 하면 오직 귀머거리만이 귀로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충] 무자성 비판에 대한 다른 논의는 다음을 참고하세요.
1. 대승 불교의 공 사상 비판, 아함경에 비추어 보다
2. 비어있음(공)은 실체 없음(무자성)이 아니다: 공의 정의의 문제
++++++++++++
[제미나이의 논평]
제시한 논평은 초기 불교의 '비어 있음(공, Suññatā)'과 대승 불교의 '무자성(無自性, Niḥsvabhāva)'을 비교하며, 대승의 무자성 개념이 가진 논리적 한계와 초기 불교 공 사상의 포괄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특히 구조주의적 관점과 아함경의 텍스트를 결합하여 '비분별'로서의 공을 강조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 논평에 대해 몇 가지 핵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의견을 전한다.
1. 무자성과 인연법의 관계에 대한 통찰
논평의 1.2절에서 "인연법에 의해 생겨난 것들은 (관계 속에서) 자성을 가지므로, 무자성을 인연법에서 도출할 수는 없다"는 지적은 매우 독창적이며 도발적인 비판이다.
논리적 타당성:
대승 중관학(Madhyamaka)에서는 "연기하므로 무자성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논평에서 지적했듯, '형식(관계)'에 의해 '실질(값)'이 결정된다는 구조주의적 관점을 빌려오면, 관계 맺어진 존재는 그 맥락 안에서 분명한 '성질(Property)'을 가진다.
비판적 지점:
대승이 말하는 '자성'은 '어떠한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독립적인 실체'를 뜻하지만, 논평은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구체적 성질'까지 무자성으로 부정해버릴 때 발생하는 현실 인식과의 괴리를 정확히 짚고 있다.
2. '가명(假名)'과 '실체화'에 대한 비판
2.1절에서 아함경의 <무상경>과 <공경>을 근거로, 대승이 초기 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무자성을 내세웠다는 명분을 반박한 점은 문헌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다.
아함경의 충분성:
실제로 초기 경전에서 '오온이 비어 있다'거나 '내가 없다(무아)'는 가르침은 이미 존재의 실체화를 철저히 경계하고 있다.
색즉시공의 연원:
<잡아함경>의 내용을 통해 '색즉시공'의 원형이 이미 초기 불교에 완성되어 있음을 논증함으로써, 대승 불교의 독자적 기여도가 '개념적 차별화'에 그칠 수 있다는 점을 잘 드러냈다.
3. 중도의 문제와 '비어 있음'의 확장성
3.2절에서 '비어 있음'이 '무자성'보다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정의한 부분은 논리적으로 우수하다.
공간적/본질적 공:
'무자성'은 성질의 유무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비어 있음'은 '그것이 없음(Absence)'과 '분별되지 않음'을 모두 포함한다. 이는 공(空)을 단순한 형이상학적 속성이 아니라 인식론적 사건으로 확장시킨다.
4. '비분별'로서의 공: 인식의 전환
4.1절과 4.3절에서 제시한 '비분별의 비어 있음'은 이 논평의 핵심이자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소공경(小空經)의 재해석:
공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관찰자가 특정 대상을 분별하여 인식하지 않는 상태'로 정의한 것은 현대 현상학적 해석과도 궤를 같이한다.
제근수경(諸根수經)의 인용:
멍한 상태나 감각의 차단이 아니라, 대상을 보되 그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여 분별하지 않는' 수행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공 사상의 실천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4. 총평 및 보완 제언
본 논평은 대승 불교의 '무자성' 개념이 가진 철학적 과잉을 비판하고, 초기 불교의 '공'이 가진 본래적 의미(인식론적 비분별)를 성공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다만, 논의의 균형을 위해 다음 사항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대승의 '자성' 정의:
대승에서 부정하는 '자성'은 논평에서 언급한 '관계적 성질'이 아니라, '고유성(Svalakṣaṇa)'중에서도 '불변하는 독립적 실체'에 국한된다. 대승 논사들은 "관계적 성질이 있다"는 것조차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에 결국 공하다고 본 것이다. 이 '자성'의 층위를 조금 더 세분화하여 비판한다면 논리가 더 견고해질 것이다.
수행적 층차:
<소공경>에서 말하는 단계적 공(空)의 수행(마을을 비우고 숲에 머물며, 숲을 비우고 무한한 허공에 머무는 과정)이 '비분별'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 구체적인 단계를 덧붙인다면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논평은 초기 불교의 공 사상이 대승의 무자성론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식의 주관성과 수행의 실제를 더 잘 담아내고 있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