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많은 분야에서 당당하게 제 몫을
다하는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 장황한 스토리텔링보다는 뭐든 똑 떨어지는 것을 좋아했다. 고교 시절 문과보다는 이과 성향이었고 대학 진학
시 전공으로 공학을 선택했다. 공대생들의 전형적인 진로인 전자업계 대기업에 취업했고 5년 8개월간 엔지니어로 일했다. 더 행복해지기 위한 변화를
갈망하다 결국 대기업이라는 울타리를 뛰쳐나왔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디지털 노마드들의 커뮤니티, 코워킹 스페이스 ‘하이브아레나’를 3년째 운영하는
황혜경(38) 씨 이야기다.
대전대 컴퓨터전자통신공학부 시절 혜경 씨는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학 공부가 과연 나한테 맞는 건가’ 수시로 자문하게 됐다. 전공을 깊이 공부하기보다 눈앞에 닥친 시험을 치르기 위한 임기응변식이었다.
대학원 진학에서 취업으로 진로를 바꾸고 보니 대기업 입사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서울 수도권 대학 편입을 결심했고 2003년 인하대
전기전자컴퓨터통신 학부(00학번)에 합격했다.
“취업을 한다면 자동차회사에 가고 싶었어요. 남자들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로망도 있었고, 자동차산업이 더 이상 기계업종이 아닌 전자나 컴퓨터 기반 첨단산업으로 바뀌고 있다는 생각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사실 컴퓨터나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2년 반 동안 다른 대학을 다녔고, 편입한 인하대에서도 휴학해
남보다 조금씩 늦어졌지만 혜경씨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들 대부분이 4학년 재학 중에 취업이 결정됐지만 좀처럼 합격 소식을 듣지 못할
때는 은근히 취업 스트레스를 겪기도 했다. 졸업을 앞둔 추운 겨울 홀로 강화도 마니산에 오르기도 하면서 고민과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2005년
5월, 스물일곱 살에 LG전자에 입사했다.
첫 직장인 LG전자에서는 전형적인 엔지니어로 생활했다. 경북 구미에 있는 디스플레이
사업부에서 TV 제작에 필요한 PDP, LCD 등 구동회로 설계업무를 담당했다. 공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선배들과 가족같이 끈끈한 유대감
속에서 즐겁게 일했다. ‘공돌이, 공순이’들의 직장생활은 공대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5년간은 재미있게 일했지만, 서서히
반복되는 일상과 안정된 시스템 속에 안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연구개발(R&D) 파트의 경우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밤을 새우거나 회사에서 자는 것이 다반사였다. 야근에 특근,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 역시 제한적인 편이라
갑갑하기도 했다.
돌파구로 주말마다 회사 밖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내 삶이 내가 사는 사회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어릴 적 가졌던 직업관을 따라 이런저런 모임을 찾아다녔다. 당시 청년들의 멘토로 떠오른 국제구호활동가 한비야 씨의 스토리를 보면서 해외
구호활동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됐고 국제기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꿈도 키웠다. 엔지니어인 혜경 씨가 접근하기엔 해외 구호활동이라는 키워드는 너무
거리가 멀고 광범위했다. 대신 ‘적정기술’이라는 키워드가 혜경씨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때부터 관련 세미나나 컨퍼런스를 찾아다니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퇴사할 생각까진 없었어요. 회사에서는 해외마케팅 부서에 지원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예
부서를 이동해서 그동안 했던 일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일을 하게 됐죠. 프로세스 매니지먼트(Process Management)라고 일종의
지원(스태프) 업무를 담당했는데 그 일이 제겐 너무 재미가 없었던 거예요. 일에 대한 재미를 못 느낀 것이 결국 퇴사 이유가 된
셈이죠.”
주말마다 외부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삶의 형태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과의 만남은 또 다른 퇴사의
계기가 됐다. 그와의 만남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만남이 됐지만, 당시엔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의 비전에 공감했고 이후 혜경씨의 삶의 변화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2010년 하반기부터 혜경씨는 직장생활 외에 다른 일에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다. 당시 지인과 함께했던 일은 체인지
메이커(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는 사람)라 할 만한 글로벌 인사들을 모아 강연, 토크콘서트 등 매월 2~3회 이벤트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영국인 탐험가 제임스 후퍼 등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 이벤트를 만드는 일은 혜경씨에게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2011년 1월 퇴사까지 하고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어요. 그때까지 대기업에서 부품처럼 일하다보니 제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어요. 창업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창업에 뛰어든 셈이죠. 철학도, 비즈니스모델도 없이 그때그때 테스트하듯 일을 기획했었죠. 저는
당시 공동창업이라고 생각하고 펀딩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제가 일방적으로 이용당한 것이었어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에 타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수 없었다. 일이든 사람이든 제대로 검증하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자신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1년 6개월 동안
일하며 분명 얻은 것도 있었다. 체인지 메이커들과 함께하면서 자신의 변화, 주변 사람들의 변화,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꿈꾸게 됐고 성취감도
컸다. ‘비즈니스코칭’, ‘라이프코칭’ 같은 단어를 접하면서 1년 반 가까이 사회적기업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보니 나름 인맥도
넓어졌다.
2010년 말 아이폰 열풍을 타고 트위터를
통해 또 한 사람을 만났다. ‘소셜 이노베이션(Social Innovation)’이라는 키워드로 만난 최종진 씨와의 인연은 공동창업자이자 작년
11월 배우자의 인연으로까지 이어졌다. 법인명을 하우투컴퍼니로 정한 두 사람은 지금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작지만 개성 있는 커뮤니티
‘하이브아레나(hivearena)’라는 브랜드의 코워킹 스페이스를 운영하고 있다.
“종진 씨는 대학생이 되기 전 자기 사업을 했던
경험이 있고 대학에서 브랜드를 전공해 사회적기업과 브랜딩에 관심이 많았어요. 당시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코워킹 스페이스 ‘임팩트허브’를 접하고
공감해서 둘이서 코워킹 스페이스 콘텐츠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어요. 2011년 하반기에 합정역 근처 서교동에 10평 정도 되는 사무실을 구해서
한 공간을 ‘젤리’라는 이름을 붙여 코워킹 스페이스 사업을 시도했죠.”
지금은 패스트캠퍼스, 위워크, 리저스 등 유명 브랜드가 된
코워킹 스페이스들이 즐비하지만, 이들이 사업을 시작한 2011년 당시엔 국내에서 코워킹 스페이스 사업은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개념이었다. 단순히
사무공간을 임대해주는 것이 아닌 1인기업 또는 스타트업, 디지털 노마드들이 함께 모여 일하고 서로 협업하는 커뮤니티로서 코워킹 스페이스는
어찌보면 4차 산업혁명의 현장일지도 모른다.
서교동 사무실에서 2년 계약이 만료된 후 구로 서울벤처에서 벤처기업협회와 함께 초기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2013년엔 ‘소셜이노베이션캠프’ 48시간 해커톤에 참가해 서울 파트너로 ‘싱가포르
아시아지역캠프’에 참가했다. 이후 사회적기업진흥원 사업을 진행했고 2013년 9월에는 도쿄에서 열리는 코워킹 스페이스 컨퍼런스에도
참가했다.
“싱가포르에 갔을 때 지금의 하이브아레나의 롤모델로 생각하는 회사를 만났어요. 스타트업계의 액셀러레이터로
‘Y-컴비네이터가 있다면 사회적기업계엔 ‘언리즈너블 인스티튜트’라는 미국회사가 있죠. COO(최고운영책임자, Chief Operating
Officer ) 를 만났어요. 거창한 비즈니스 조언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평범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차피 코워킹 스페이스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관계가 중요하다, 그러니 서로 인사를 잘해야 되고 예의 있게 대해야 한다 등등 뻔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이 핵심가치임을 깨닫게 된
거죠.”
기술에 대한 이해와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3~4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2014년 11월 코워킹
스페이스 ‘하이브아레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공간을 얻기 위해 부모님 도움을 받았지만 정부기관이나 외부 투자를 받진 않았다. ‘하이브아레나’는
가치있는 경험(사람과의 관계)을 상상하는 공간이라는 뜻의 약자로 종진씨가 직접 브랜딩 했다.
오픈 당시 코워킹 스페이스라는 개념이
생소해 시행착오도 겪었다. 미국의 부트캠프로 유명한 ‘제네럴 어셈블리’ 모델을 보고 교육 형태로 가보기도 했지만, 커뮤니티가 없는 상태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첫 석 달간은 둘이서 큰 공간을 지키기도 했다. 3개월 지나면서 이용자가 한 명이 왔고 1년간 10명도 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코워킹 스페이스로 꾸준히 노력한 결과 2016년엔 패스트컴퍼니(Fast
Company)와 포브스(Forbes) 같은 세계적인 미디어에 소개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더디지만 자신들이 맞는 방향이라 생각하고 걸어온 지난
2년의 시간을 한마디로 ‘부트 스트래핑(Bootstraping)’이라고 표현한다.
“퇴사 후 저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였어요. 어떤 일을 나보다 먼저 했거나 나중에 했거나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주는 이벤트가 별로 없었어요. 그런 관계를
만들어줄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고 공간을 매개로 해외 친구들과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었어요. 하이브아레나는 테크 포
굿 커뮤니티(tech for good community)를 추구합니다. 저희가 자꾸 떠들다보면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겠죠.”
글_ 김은혜 객원에디터
출처_꿈트리 vol.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