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부흥계획 [European Recovery Program] 1947년 6월 미국 국무장관 G.C. 마셜이 <유럽 여러 나라가 유럽의 자립에 관해 합의한다면 미국은 이에 대해 원조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을 계기로 실시되었던 유럽의 부흥계획. 마셜플랜이라고도 한다. 47년 6∼7월 파리에서 영국·소련·프랑스의 외무장관회의가 열렸으나, 제 2 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유럽은 이미 동·서로 분열, 대립하여 냉전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 동유럽 여러 나라는 이 계획에 참가하기를 거부하였다. 서유럽 16개국은 마셜플랜을 수용하기 위하여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결성했다. 48년 4월 H.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53억 달러의 유럽경제부흥원조지출의 권한을 포함하는 1947∼48년도의 대외원조법에 서명하고, 그 원조를 관장하기 위한 경제협력국(ECA)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것이 상호안전보장법에 바탕을 둔 원조(MSA)에 인계되었던 51년 말까지 서유럽 여러 나라가 받았던 원조액은 본래 예정되었던 170억 달러보다 훨씬 적은 총 110억 달러였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원조의 성격도 차츰 군사적으로 변해갔고, 한국전쟁의 발발로 MSA에 인계되자 원조는 유럽의 재군비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라별 원조액은 프랑스·영국·이탈리아·네덜란드 순이었으나, 국민소득과의 비율로 보면 동·서 대결의 접점이었던 오스트리아가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그리스·네덜란드·트리에스테(지금의 유고슬라비아에 가까운 이탈리아령)·아일랜드 등의 순이었다. 원조는 주로 증여와 차관으로 구별되었는데, 증여는 미국 잉여농산물이나 구호물자 구입에 충당되었으며, 차관은 기계 및 기타의 생산수단 구입에 충당되었다. 마셜계획은 유럽통합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참가국 여러 나라에 평가절하를 실시하여 무역자유화의 촉진, 동·서 무역의 제한, 피원조국 재정에 대한 미국 간섭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마셜플랜은 자본주의 유럽의 부흥과 통합, 서유럽 통화(通貨)의 교환성 회복(1958), 유럽공동체(EC)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점차 전세계 저개발국에 대한 원조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