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_
사제불이의 공전보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3회 후쿠오카(福岡)
후쿠오카는, 규슈는 ‘선구’를 사명으로 한다.
선구의 길은 결코 순풍은 아니다.
거센 바람 속에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뚫고
미지의 드넓은 바다를 향해 도전하는 용기 없이는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
규슈에는 도전하는 마음이 불타고 있다.
그렇기에 즐겁다!
그렇기에 인간혁명할 수 있다!
이러한 기개가 후쿠오카의, 규슈의 벗에게서 불타오르는 혼이다.
후쿠오카의 동지는 광포의 스승과 함께
어떠한 간난신고(艱難辛苦)도 이겨낸다.
자, 오늘도 용감한 선구의 첫걸음을!
내 뒤를 잇는 사람이 바로
규슈 여러분이기 바랍니다
동양광포는 우리 손으로!
창가학회에는 각지에서 탄생해 전국으로 넓혀진 애창가가 있다.
교토에서 탄생한 ‘위풍당당의 노래’와 ‘신세기의 노래(도호쿠 건아의 노래)’ ‘약진의 노래(주고쿠 건아의 노래)’ 등이 전국으로 넓혀진 배경에는 이케다 선생님이 “좋은 노래입니다. 앞으로 이 노래를 전국에서 부르도록 하면 어떨까요.”라며 진심을 담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규슈에서 탄생해 넓혀진 ‘동양광포의 노래’도 그 중 하나로, 본디 제목은 ‘규슈제패(制覇)의 노래’였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경위는 소설 <신·인간혁명> 제3권 ‘불법서환’에 상세히 나와 있다.
1954년 규슈의 애창곡 ‘동양광포의 노래’가 탄생할 무렵, 규슈의 슬로건은 ‘규슈제패는 우리의 손으로’였기에 노래 제목도 ‘규슈제패의 노래’가 되었다. 올해는 노래가 탄생한 지 65주년에 해당한다.
“‘제패’란 무시무시하고 전투적인 표현이긴 하나 거기에는 전 규슈에 묘법을 넓혀 사람들의 행복을 실현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의지와 용기가 담겨 있었다.”(제3권 ‘불법서환’)
1957년 4월, 도다 선생님을 모시고 의기 드높이 개최한 제1회 규슈총회에서 단상 위에 올라간 발표자들이 입을 모아 ‘규슈제패’를 부르짖었다. 모두 ‘도다 선생님이 규슈의 기개를 기뻐하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의 말씀은 의외였다.
“조금 전부터 ‘규슈제패는 우리의 손으로’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소견 좁은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무래도 규슈에는 자신의 일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듯하다.
예를 들면, 규슈에서는 곧잘 ‘규슈 남아’라고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그런 표현을 그다지 쓰지 않는다. ‘홋카이도 남아’나 ‘간토 남아’ ‘오사카 남아’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규슈제패’라 하는 것도 자신들만을 생각하는 듯해서 스케일이 작다. 이왕이면 ‘동양광포는 우리의 손으로’라고 하면 어떨까.”(제3권 ‘불법서환’)
엄애(嚴愛)의 지도다. 규슈에서는 도다 선생님의 지도를 계기로 가사와 노래 제목에 들어간 ‘규슈제패’라는 부분을 ‘동양광포’라고 바꿨다.
이케다 선생님은 규슈를 생각하는 은사의 마음을 이렇게 적었다.
“도다 조세이는 예부터 대륙과 교류가 깊었던 규슈에 동양광포에 대한 크나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서거(逝去)하시기 반년 전, 규슈 총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한 도다는 아시아의 실정에 대해 언급하며 창가학회의 사명을 말하고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바라건대, 오늘의 의기와 패기로 일본 민중을 구제하고 동시에 동양 민중을 구제해 주기 바란다.’
그것이 도다가 규슈에서 한 마지막 지도였다.”(제3권 ‘불법서환’)
활약할 무대는 세계!
세월은 흘러 1961년 1월 8일, 후쿠오카의 고쿠라에 있는 미하기노체육관에서 규슈의 3개 총지부 결성대회를 열었다.
야마모토 신이치의 아시아 방문을 이달 28일로 앞두고 개최한 결성대회에서는 시작 전부터 ‘동양광포의 노래’의 힘찬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회장 야마모토 신이치의 아시아 지도에 발맞추어 동양에 행복과 평화의 빛을 보내려는 벗들의 결의가 담긴 합창이었다.”(제3권 ‘불법서환’)
지도에 나선 신이치는 규슈의 동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도다 선생님의 제자답게 여러분의 선구로서, 동양 민중을 위한 ‘행복의 다리’ ‘평화의 다리’를 구축해 갈 결의입니다. 그리고 저의 뒤를 이어 그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바로 ‘동양광포는 우리의 손으로’라고 자각하고 계신 규슈의 동지 여러분이시기를 염원하는 바입니다.”(제3권 ‘불법 서환’)
광포의 스승이 구축한 행복과 평화의 다리를 그 진열의 선두에 서서 건넌다. 광포의 스승이 개척한 동양광포, 세계광포의 길을 후계의 제자가 나아갈 길로 여겨 어느 곳보다도 앞장서서 끝까지 달린다. 그것이 규슈의 위대한 사명이다.
선구의 길에 방설임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두려움이 있으면 선두로 달릴 수 없다. ‘선구’는 사제불이(師弟不二)의 혼을 불태우며 겁쟁이의 마음을 물리치고 벗과 지역 그리고 사회를 위해 용기 있는 첫걸음을 내딛는 사자(師子)의 투쟁이다.
그리고 신이치는 3개 총지부 결성대회에서 ‘동양광포’의 의의와 나아가야 할 길을 힘주어 말했다.
“동양광포란 바꾸어 표현하면, 인간의 존엄을 끝까지 지키며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창조하는 휴머니즘 정신의 종자를 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활약할 무대는 일본만이 아니라 아시아, 세계입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크나큰 이상을 안고 또 현실의 대지를 단단히 밟고 다져, 신심즉생활의 승리자로서 한 걸음 한 걸음 기반을 다지며 전진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위대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제3권 ‘불법서환’)
결성대회가 끝난 뒤에 신이치는 규슈의 간부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거기서 “규슈에서 탄생한 ‘동양광포의 노래’를 전 학회에서 애창하여 동양의 평화 건설에 매진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하고 제안해 모두 기쁨과 찬동의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해서 ‘동양광포의 노래’는 일본 전국으로 파동친다. ‘선구의 규슈’에서 전국으로, 동양으로 그리고 세계로 ‘환희와 승리의 천과(千波), 만파(萬波)!’를 일으키기 바라는 광포의 스승이 거는 기대는 지금도 변함없다.
후쿠오카에 보낸 지도 마지막까지 언제나 선구로
“드디어 규슈의 시대가 왔습니다. 광선유포는 도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간사이도 일어서고 상승(常勝)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학회는 크게 비상했습니다.
이번에는 규슈의 차례입니다. 규슈가 일어설 때가 왔습니다. 앞으로는 영원히 ‘규슈가 있어 학회가 있다’ ‘규슈가 있어 광포가 있다’가 되어야 합니다.
규슈의 사명인 ‘선구’의 뜻은, 마지막까지 언제나 ‘선구’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기세 좋게 선봉에 서서 달려나가도 도중에 지쳐 뒤처지기 시작하다가 마지막에는 꼴찌가 되고 만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처음의 기세만으로는 ‘선구’를 계속 달리 수 없습니다. 지속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치밀한 계획성에 바탕을 둔 착실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선구’는 ‘견실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25권 ‘훈풍’)
광포의 영원한 길을
여는 것은 청년부입니다
남자부·여자부 총회
청년이 광포의 선두에 서야 차대(次代)가 열린다. 규슈는 그 모범이다. 제4권 ‘청엽’에는 청년을 생각하는 신이치의 깊은 마음이 나와 있다.
“어떠한 단체라도 청년에게 기세가 있고 또 청년이 유감없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영원히 정체에 빠지는 일은 없다.
학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광포의 영원한 길을 열어 가는 것은 청년부이다. 따라서 나는 모든 청년을 지금보다 더 한층 본격적으로 육성해 가고자 한다.”
그리고 신이치는 각 방면에서 개최하는 남녀청년부 총회에 모두 참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1961년 5월 7일, 규슈 후쿠오카에서 청년부 방면총회의 막을 열었다.
오전에는 여자부총회, 오후부터는 남자부총회를 후쿠오카 스포츠센터에서 개최해 신이치는 잇따라 지도하고 격려했다.
남자부총회에는 무려 규슈 남자부의 70퍼센트 이상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 결집의 중핵이 된 규슈의 남자부 리더가 총회를 향해 활동에 힘쓰면서 멤버들에게 외친 말을 <신·인간혁명>에 쓰셨다.
“이번 청년부 방면총회의 선구를 끊는 것은 우리 규슈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전국의 승패를 가름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가장 먼저 규슈가 승리하면 다른 방면도 규슈에 질소냐 하며 전력으로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규슈 남아의 열(熱)과 힘을 전국의 청년부에 보여 주고 싶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그를 위해서는 철저하게 가정 방문을 하고 신심 지도를 해 가는 것 외에 없습니다. 저는 모든 남자부원들을 야마모토 선생님의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조직의 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야마모토 선생님께서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신심은 물론 일이나 식사에 대한 것까지 걱정하며 매일 찾아가 격려하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그 동생이 근행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 당연히 철저하게 대화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각 조직을 들여다보면 근행도 하지 않는 멤버가 꽤 있습니다. 그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무책임하고 무자비한 것입니다. 물론 개인 지도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불법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여 신심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 중에서는 큰소리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두 선생님의 소중한 동생이라는 생각으로 끈기 있게 대화해서 전 규슈 남자부원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일기당천의 인재로 육성시켜 이 총회에 결집시키고자 합니다.”(제4권 ‘청엽’)
이 기술(記述)은 제자의 말을 빌린 스승의 진심이 아닐까.
‘청엽’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이치는 부원이었을 때부터 광선유포에 대한 도다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학회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려 했다. 그 지각은 반장 시설에도, 청년부 실장 시절에도 항상 변하지 않았다.
물론 위치나 역직에 따라 책임 분야나 역할은 달랐다. 그러나 내면의 자각에 있어서는 도다의 제자로서, 스승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하여 학회의 일체를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도다의 훈도를 살릴 수 있었고 커다란 성장도 있었던 것이다.”
스승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한다. ‘스승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진지하게 기원하고 용감하게 행동으로 옮긴다.-여기에 승리를 여는 생명력과 지혜를 용현하는 근본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고 후쿠오카에서 ‘반전공세’의 봉화를!
소다 도시카즈 총후쿠오카장
우리에게는 절대 내리면 안 되는 깃발이 있다. 그것은 광선유포의 깃발, 절복(折伏)의 깃발이다.
우리에게는 절대 꺼뜨리면 안 되는 불꽃이 있다. 그것은 신심의 불꽃이다.
이케다 선생님은 39년 전, 이 ‘사제의 혼백’을 세계 어느 곳도 아닌 우리 후쿠오카에서 사자후(師子吼)하고 반전공세(反轉攻勢)의 봉화를 올리셨다.
소설 <신·인간혁명> 제30권(상) ‘웅비’에는 당시 정세가 모두 씌어 있다.
1980년 제5차 중국 방문의 여정을 마친 야마모토 신이치는 규슈로 갔다. 4월 30일에는 후쿠오카로 가서 이튿날인 5월 1일에 규슈평화회관(현재 하카타평화회관)에서 개최한 후쿠오카현 지역장회에 참석해 힘주어 외쳤다.
“광선유포를 위한 가슴속 깃발을 결코 내리면 안 됩니다!” “절복이라는 수행의 깃발을 결코 내리면 안 됩니다!” “일생성불의, 신심의 불꽃을 꺼뜨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당시는 이케다 선생님이 제3대 회장을 사임하신 지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사제를 말하지 마라’ ‘세이쿄신문에 지도를 싣지 마라’며 사제의 유대를 갈라놓으려는 종문과 반역자들의 비열한 모략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모략 따위는 바람 앞의 먼지처럼 날려버릴 기세로 후쿠오카의 땅에 발을 내디뎠다.
“사자(師子)가 왔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음성을 들은 동지는 얼마나 기뻤을까.
선생님은 달려오는 동지들과 악수를 나누고 차례로 기념촬영을 했다.
“소중한 제일선의 동지를 누가 지킬 것인가!” “이렇게 해서 회원을 지켜야 한다!” “사제를 분단하는 마(魔)와는 단연코 싸워 물리쳐야 한다!”며 벗 한 사람 한 사람을 끌어안듯 격려했다.
5월 2일까지 사흘 동안 선생님이 직접 만나 격려한 벗은 무려 2만명이 넘었다. 그날 그때 후쿠오카에 사제직결의 인재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감사하는 마음은 끝이 없다. 이때 격려받은 멤버의 자식과 손주가 사제의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 후쿠오카 천지에는 수만 명이 넘는 젊은 이케다 문하가 활약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영원히 선생님과 함께 광선유포의 깃발, 절복의 깃발을 드높이 내걸고 나아간다. 세계의 선두에 서서 나아가는 신시대 후쿠오카의 대행진은 지금부터가 본무대다!
가족을 잃은 벗을 격려한다
‘청엽’에는 규슈제1총지부의 부인부장 시바야마 미요코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들은 신이치가 남겨진 가족을 직접 격려하는 장면이 씌어 있다.
남편에게는 “아내를 잃는다는 것은 남성에게 가장 괴롭고 슬픈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약해지면 가장 슬퍼할 사람은 아마도 돌아가신 부인일 것입니다. 부인은 당신도 아이들도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부디 강한 마음으로 이 슬픔을 이겨 주십시오.”
세 딸에게는 “어머니는 위대한 분이셨습니다. 당신들이 평생 자랑할 수 있는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괴롭고 슬픈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장 큰 소원은 자식들이 구김살 없이 무럭무럭 자라 행복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생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진력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염원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더 괴롭고 힘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본존님에게서 떠나지 말고 신심을 관철해 간다면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지 말고 신심을 끝까지 관철해 가는 것입니다.”
소설에는 신이치가 가족이나 동지를 잃은 벗을 격려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신이치는 언제나 벗의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남겨진 가족이 성장하고 행복해지는 일이 고인의 염원’이라고 강조하고, 불법의 삼세(三世) 영원한 생명관(生命觀)에서 미래를 향한 희망을 제시했다.
학회의 위업은
민중을 소생시킨 데 있다
‘토관’ 지역
이름도 없는 서민이 ‘지용보살(地涌菩薩)’의 사명에 분기해 ‘입정안국(立正安國)’의 대원(大願)을 위해 끝까지 살아간다. 숙명에 괴로워하던 민중이 소생하는 드라마로 벗과 지역에 그리고 사회에 희망의 빛을 보낸다. 이것이 학회원의 삶이다. 진실한 불법의 힘은 숙명을 사명으로 하는 동지의 모습으로 빛난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당신을 “전다라(旃陀羅)의 자식(최하층 집의 자식)”(어서 891쪽) “빈궁하천(貧窮下賤)한 자(가난하고 천한 사람)”(어서 958쪽), “백성의 자식”(어서 1332쪽) 등이라고 말하면서 사회 최하층 출신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그야말로 니치렌불법은 ‘민중불법’이고 그 정신을 현대에 되살린 것이 학회다.
일찍이 후쿠오카시 하카타항(港)에서 튀어나온 매립지 한구석에 ‘토관’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었다. 제6권 ‘가속’에는 ‘토관(土管)’ 지역에서 탄생한 ‘민중 소생의 드라마’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가속’을 읽으면 불법에서 설하는 인간주의의 진수와 동지의 따뜻함 그리고 학회의 사명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토관’ 지역에는 겨우 함석만을 붙여 지은 허름한 판잣집이 밀집해 있었다. 길은 좁고 햇볕도 들지 않는다. 치안도 나빠 절도와 싸움은 일상다반사이며, 도박판이 벌어지고, 밀주도 만들어 알코올중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현재는 하카타항의 항만계획으로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이런 곳이 분명 존재했다.
이곳에 학회원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는 1954년 무렵이었다. ‘토관’ 지역 근처에 사는 여성이 ‘이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절복하기 시작해 묘법(妙法)의 씨앗을 심었다.
모두 남에게 배신을 당하는 등의 과거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사람을 불신했지만, 끈기 있게 대화해 한 사람 두 사람 신심을 시작했다. 신앙에 힘쓰면서 많은 공덕의 체험이 탄생하고 꾸준히 멤버가 늘어, 1962년 무렵에는 사백여 세대에 이르렀다. 그 곳에 거주하던 회원의 이야기로는 ‘토관’ 지역 주민의 절반 이상이 입회했다고 한다. 학회원의 증가하면서 아동 취학률도 높아지고 범죄 수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들의 모습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썼다.
“암흑 속에서 살아온 이곳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의 빛을 비추고 살아갈 용기를 갖게 한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창가학회의 가장 큰 위업은 고뇌하는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러한 한 사람 한 사람을 현실에서 소생시켜 온 것이라 하겠다.” (제6권 ‘가속’)
멤버들이 차례로 소생할 수 있던 배경에는 동지의 헌신적인 격려가 있었다. 회합장소를 제공하는 부부는 생선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매일같이 살을 발라내고 남은 생선 뼈로 전골요리를 만들어 회합에 모인 사람들을 대접했다.
“그 행동의 이면에는 자신들도 동지에게 격려받고 신심이 분기하여 장사가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체험을 통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제6권 ‘가속’)
동지가 아프기라도 하면 주위의 멤버들이 죽을 끓이는 등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다. 장례식이 있으면 모두 함께 관(棺)을 짜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곳에는 몸이 불편한 사람, 일본 국적이 아닌 사람, 전과자 등 다양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멤버들을 외면적인 것으로 차별하지 않았다. 일찍이 사람을 불신하던 사람들이 모인 지역이 어느 사이에 사람을 신뢰하는 유대로 빛나는 천지가 되었다.
이와 흡사한 지역은 전국 각지에 있었는데 이처럼 민중 소생의 드라마가 탄생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케다 선생님은 ‘가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창가학회가 걸어온 길은 불법이라는 휴머니즘의 철리를 인간의 마음에 확립하고 민중을 소생시켜 삭막한 현대 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바꾸고자 했다.
새로운 민중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알리는 서곡이 높게 울려 퍼졌던 것이다.”
‘가속’이 연재되자 “설마 우리 이야기를 소설에 써주시다니!” “하루하루가 감동의 연속입니다. 꿈만 같습니다.” “그리운 ‘토관’의 광경이 눈앞에 선합니다.” 등 일찍이 ‘토관’ 지역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놀람과 환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각지로 옮겨간 멤버들은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다. 모두 긍지를 가슴에 품고 새로운 천지에서 실증을 나타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매진했다. 멤버들은 소설에 게재되었다는 기쁨으로 크게 고조되었다.
“이케다 선생님이 ‘가속’을 통해 우리 ‘토관’ 지역 출신의 사람들을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해주셨다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하고 중심 멤버의 한 사람인 아사노 사다오 씨(본진상락권 부권장)가 감회를 이야기했다.
1999년에 개최한 규슈최고협의회에서 선생님은 다시 한번 벗을 칭찬했다.
“후쿠오카의 ‘토관’ 지역에서 탄생한 소생의 드라마는 우리 규슈의 영예로운 역사입니다. 같은 서민으로서 철저히 서민의 편에 서서 한 사람 한 사람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용기를 끌어냈기에 학회는 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규슈의 성(城)은 견고합니다. 우리 규슈, 우리 후쿠오카는 전원이 진정한 ‘영웅’이라고 진심으로 찬탄하고 싶습니다.”
‘다가와에 봄을’
1963년 11월 9일,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 있는 미쓰이미이케광업소에서 탄진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희생된 학회원도 있었다. 신이치가 그들에게 격려의 손을 내밀고자 후쿠오카를 방문한 장면이 제8권 ‘격류’에 등장한다.
그리고 11월 24일, 신이치는 기타큐슈시의 야하타시민회관에서 개최한 규슈여자부간부회, 규슈남자부간부회에 잇달아 참석했다. 그 뒤 간부에게서 피해를 본 회원에 관해 상세하게 보고받고, 학회 차원에서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추선법요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제18권 ‘비약’에는 1974년 1월 규슈 지도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19일, 후쿠오카로 이동한 신이치는 규슈대학회 총회에 참석하고, 이튿날인 20일에는 기타큐슈시립종합체육관에서 개최한 제22회 ‘청년부총회’에 참석해 후계의 제자들에게 희망을 보냈다. 이 총회는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 처음으로 실시하는 전국청년부총회였다.
총회가 끝난 뒤 신이치는 다가와회관으로 갔다. 1년 전에 다가와본부장인 요시이 도시미에게 ‘다음에는 꼭 방문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지쿠호탄전 최대의 탄광도시로 번영한 다가와시는 시대의 흐름으로 석탄대신 석유가 주요 에너지원이 되면서 탄광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다가와도 탄광이 문을 닫아 직장을 잃은 동지들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각지로 옮겨 갔다.
1968년, 신이치가 규슈를 방문했을 때, 다가와의 어느 부인이 이렇게 질문했다. “다가와에서는 광산이 폐쇄돼 모두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다가와 사람들은 어찌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제18권 ‘비약’)
신이치는 확신과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어떠한 사태에 내몰려도 신심은 반드시 활로를 열 수 있습니다. 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목을 끝까지 불러 회원을 지켜 주세요. 부탁합니다.”(제18권 ‘비약’)
이듬해 1969년 3월 7일, 신이치는 규슈전력기념체육관에서 개최한 규슈간부회에 다가와의 멤버 50명을 초대하고 단상에 자리도 마련했다. 나아가 신이치는 다부지게 투쟁하는 다가와 멤버를 참석자에게 소개하고, 다가와의 벗에게 “여러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고 말했다.
멤버들은 감동과 결의를 가슴에 품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원을 담아 애창가를 제작했다. 노래 제목은 ‘다가와에 봄을’이라고 정했다.
‘언젠가 이 노래를 야마모토 선생님께 들려드리자!’고 결심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시련의 고개를 넘었다.
요시이 본부장은 다가와회관을 방문한 신이치에게 ‘다가와에 봄을’의 노래 가사와 악보를 내밀었다. 신이치는 이틀 뒤에 규슈전력기념체육관에서 개최할 예정인 본부간부회에서 대표가 노래를 부르도록 제안했다. 도쿄 이외의 장소에서 본부간부회를 개최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본부간부회 날은 시작부터 끝까지 눈물이었습니다.”라며 요시다 미토시(규슈 참사)는 그때를 회고했다.
올해는 그 원점으로부터 45주년이 되는 해로 요시다 씨는 이케다 선생님이 다가와회관을 방문한 당시를 이야기했다.
1974년 1월 20일은 겨울 특유의 구름 낀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리는 추운 날이었다. 이케다 선생님의 몸이 좋지 않아 측근 간부가 걱정하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다가와 행을 결행하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다가와회관으로 갔다. 도중에 ‘선생님이 오실지도 모른다’며 기다리고 있던 학회원을 발견한 선생님은 차창을 활짝 내려 두 손을 크게 흔들고, 미래부원에게는 과자를 선물했다.
2시간 동안 흔들리는 자를 타고 다가와회관에 도착했다. 요시다 씨는 커다란 마스크를 한 이케다 선생님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왔습니다. 드디어 다가와에 왔습니다!” 선생님은 요시다 씨와 회관 관리인에게 말을 건넸다.
회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창제실에서 창제를 했다. “다가와 동지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했습니다.” 하는 선생님의 말에 모두 가슴이 뭉클했다.
“선생님은 1시간 반 가량 다가와회관에 머물며 끊임없이 격려해주셨습니다. 다가와의 영원한 원점입니다.”(요시다 씨)
2011년에는 분카방송에서 방송한 <신·인간혁명> 낭독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다가와에 봄을’ 노래가 흘러나왔다. 본부간부회에서 노래를 부른 멤버를 비롯해 다가와의 동지는 기쁨을 가슴에 안고 대화확대에 앞장섰다.
“탄광이 잇달아 문을 닫는 속에서 모두 이를 악물고 노력한 날들이 선생님 덕분에 황금의 원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다가와에 봄을 알리는 지역광포를 위한 투쟁을 온 힘을 다해 추진하겠습니다.” 하고 요시다 씨가 힘주어 말했다.
기고 난공불락의 ‘선구의 인재성’을!
다이라 마스미 총후쿠오카 부인부장
“광선유포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드는 지금, 만년에 이르는 견고한 신심의 토대를 전 동지의 마음에 구축해야 한다. 또 인재를 찾아내어 육성하자! 전국 각지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인재성(人材城)을 만들자!”
이케다 선생님은 1977년 5월 17일부터 규슈 지도에 나서는 진심을 제25권 ‘공전’에 써주셨습니다.
후쿠오카는 니치렌 대성인 재세 당시 몽고 내습이 격전의 무대였습니다. 1958년 8월 10일, 요새가 남아 있는 니시진(현재 사와라구)의 땅에 선구의 본진 규슈 본부가 탄생했습니다. 경사스러운 개관식에는 당시 총무였던 이케다 선생님이 참석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동양광포의 노래’에 맞추어 용장하게 춤을 추셨습니다. 회합이 끝난 뒤에도 규슈 본부 뒤쪽에 있는 바닷가에서 청년들과 낚시를 하는 등 추억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1983년 3월 29일, 같은 장소에 세워진 규슈이케다평화기념관(현재 후쿠오카 평화회관)을 방문하신 선생님은 ‘영원한 승리를 위해’라며 월계수를 식수하셨습니다.
그것은 미래를 내다보고 청년에게 기대를 거는 선생님의 마음이 각인된 것이기도 합니다.
1994년 11월, 제가 후쿠오카의 여자부장이었을 당시, 후쿠오카돔(당시)에서 ‘아시아청년평화음악회’를 개최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반전공세의 ‘선구의 사명’을 완수하겠다고 기원하고 싸워 승리한 초창기의 부모님. 그리고 그 혼을 이어받은 청년 5만명이 부른 ‘환희의 노래’.
사제의 개가(凱歌)가 울려 퍼지고 돔의 지붕이 천천히 열리자 한 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아시아 민중에게 빛을 보낸다’는 도다 선생님의 시(詩)를 상기시키는 하늘을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올려다본 일은 생애 잊지 못할 황금의 원점입니다.
올해는 그로부터 25주년의 가절을 맞이합니다.
“‘후계의 사람’이란 승리의 깃발을 치켜세우는 ‘선구의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제2권 ‘선구’)
이러한 스승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창립 90주년을 향해 단연코 ‘완승의 깃발’을! 지금이야말로 선구의 서원을 불태우며 세계 제일의 청년을 선두로 ‘인간혁명의 빛’으로 빛나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후쿠오카를, 인재와 행복의 성을 구축하겠습니다.
후쿠오카에서 광포의 조류를
신이치는 1977년 5월 17일부터 사흘간 후쿠오카에서 광포를 지휘했다. 그 모습이 제25권 ‘공전’에 나와 있다.
18일에는 후쿠오카시 하카타구에 탄생한 규슈평화회관(현재 하카타평화회관)에서 본부간부회를 개최했다. 신이치는 후쿠오카에 도착한 17일에 규슈 후쿠오카의 간부와 간담할 때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드디어 내일은 이곳 규슈평화회관에서 본부간부회가 열립니다. 굉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후쿠오카에서 전국, 전 세계로 광선유포의 조류를 일으켜야 합니다. 앞으로는 각 현이 하나의 창가학회가 될 수 있을 만큼 전반적으로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번 본부간부회는 그를 위한 전초전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신이치의 말에 담긴 진심을 이렇게 썼다.
신이치는 도쿄라는 기관차 한 대가 전국을 끌어당기는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각 차량에 진동기를 장착한 고속철도처럼 각 방면이 더 나아가 각 현과 구가 자력(自力)으로 주행하며 다른 지역을 이끌 수 있는 힘을 지녀야 비로소 광선유포도 각 지역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새롭고 크게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이 모든 실력을 갖춰야 비로소 ‘지방시대’가 도래한다.
선생님은 그 선구를 규슈에 맡기셨다.
본부간부회 다음날인 19일, 신이치는 10년 만에 야마구치 지도에 나섰다.
22일에는 기타큐슈에 가서 다시 한번 후쿠오카에서 거듭 격투했다. 제25권 ‘훈풍’은 이 기타큐슈에서 펼친 격려행부터 쓰기 시작했다.
22일 저녁, 기타큐슈문화회관(훗날 기타큐슈평화회관) 정원에서 시비(詩碑) 제막식을 열었다.
규슈가
있기에 2장(章)의
출범이로다
“이 시는 창가학회가 ‘광포 제2장’의 높고 넓은 하늘로 새롭게 비상하기 시작한 1973년 3월, 야마모토 신이치가 기타큐슈시에서 열린 제1회 ‘규슈청년부총회’를 기념해 이 시를 읊었다.
시에는 규슈 동지가 짊어져야 할 광선유포의 ‘선구’라는 사명을 단연코 완수해 창가(創價)의 견인력이 되기 바란다는 신이치의 한없는 기대가 담겨 있었다.”(제25권 ‘훈풍’)
제막식을 마치고 신이치는 회관 안으로 이동해 간담회를 열었다. 참석자는 남자부를 중심으로 한 규슈, 후쿠오카의 간부들이다. 신이치는 여기서 도 온 힘을 쏟아붓듯 청년을 훈육했다.
신이치는 사회 그리고 근행의 부도사를 맡았을 때 명심해야 할 점을 구체적으로 세심하게 조언했다. 또 청년 치과의사 세 명이 학회활동에 힘쓰면서 사회에서 실증을 보인 일을 칭찬하고 진정한 불법자(佛法者)로서 창가의 대도(大道)를 끝까지 걸어가기를 바라며 이렇게 말했다.
“치과의사로서 기술을 철저히 연마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자신의 인격을 연마해 인간으로서 신뢰를 받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역에 공헌하기 바랍니다. 또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올바른 길인 학회활동의 영원한 투사이기를 바랍니다. 그곳에 진정한 인생의 행복도, 승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야마모도 신이치는 이튿날 23일, 기타큐슈의 지부결성 17주년을 기념하는 근행회에 참석했다. 24일에는 기타큐슈문화회관에서 개최한 후쿠오카현의 공로자 추선법요에서 도사(導師)를 맡고 이어서 니치렌불법의 생명관을 말했다.
그날 저녁, 규슈의 각부 대표와 가진 간담회를 마치고 신이지는 ‘다베회관(개인회관)’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동지와 함께 근행하고 평소의 헌신에 감사했다.
당시 여자부 멤버로서 활약하던 개인회관 제공자의 장녀 가나가미 에리코 씨(오쿠라기타본진권 권부부인부장)는 그날의 일을 뚜렷이 기억한다.
“이케다 선생님이 오신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창제했습니다. 선생님의 방문 그리고 규슈 지도의 무사고와 대성공을 기원하면서 진지하게 창제를 거듭했습니다. 오후 8시가 되자 모두 ‘이만큼 제목을 올렸으니 흡족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지금 선생님이 그쪽으로 가셨습니다’라고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시 개인회관은 논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가나가미 씨가 부모님과 함께 현관에서 선생님이 도착하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논두렁 길 쪽에서 선생님 일행이 걸어오고 있었다.
선생님은 정원에 심은 창포꽃을 바라보며 가나가미 씨에게 “아가씨, 물 좀 주시겠습니까?” 하고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컵을 받아 들고 창포꽃에 물을 주었다. 동지의 진심에 격려의 자양분을 주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도 그 창포의 자손이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선생님이 방문한 뒤에도 동지들은 사랑하는 지역을 위해 분투했다. 불법대화의 꽃을 피우고 정의의 언론전(言論戰)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회관 주변의 길이 넓어지고, 고속도로 나들목이 근처에 생겨 주택지가 넓혀졌다. 가나가미 씨는 지역의 발전에 마음이 흐뭇했다.
“선생님은 소설에서 회관을 방문하신 일을 상세히 써주셨습니다. 오직 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광포를 위해 끝까지 달리겠습니다.”
후쿠오카에 보낸 지도 인생을 즐겁고 가치 있게
(‘규슈의 노래’ 가사에 담긴 마음을 신이치가 말하는 장면)
“규슈에는 허세 따위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던져버리고 투쟁해야 합니다. 2절 4행 가사를 ‘선구 규슈 / 자 즐겁게’로 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광선유포의 활동에는 생명의 환희가 있습니다. 제목을 부르고 신심에 힘쓸수록 더욱더 환희하게 되고, 마음은 신바람이 납니다. 물론 괴로운 일도 분한 일도 있겠지만 신심의 세계에는 그보다 몇 배나 큰 기쁨이 있습니다. 즐거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 학회활동입니다. 비장함이 가득한 세계가 결코 아닙니다.
또 모두가 즐거움을 만끽하고 신심에 힘쓰기 위해 선지식(善知識)인 동지의 연대와 창가가족(創價家族)이 있습니다. 가족이므로 괴로워하는 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도 괜찮습니다. 상하관계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서로 이야기하면서 진심 어린 온정으로 감싸고 격려하는 것이 창가가족입니다. 타인을 격려하면 자신이 강해지고 힘이 납니다. 타인을 감싸 안으며 자신의 경애가 넓어지고 커집니다.
불도수행과 학회활동을 하는 까닭은 ‘자신을 연마하고 단련시켜 인생을 즐겁게 최고로 가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격려는 사람을 소생시키고,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고, 사회를 활성화하는 풀뿌리 운동의 힘이 된다.
신이치가 다시 가사를 보았다. “3절에 있는 ‘무너지지 않는 길’은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위대한 정신을 이어받아 광선유포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 창가사제(創價師弟)의 길입니다. 규슈 여러분이 학회를 비방하는 승려들 때문에 얼마나 괴롭고 힘들어하는지 나는 잘 압니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의 정법정의를 관철한 단체는 학회입니다. 정의롭기 때문에 마가 여러 모습으로 다투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한 걸음도 물러서면 안 됩니다. 더욱더 기세 당당하게 우리 함께 창가의 정의의 역사를 만듭시다!”(제28권 ‘광선보’)
개인지도의 기본자세
“창가학회의 세계에서는 개인지도는 당연한 일처럼 인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고뇌를 이겨내기 위한 격려의 연대이며 현대사회에서 분단된 인간과 인간의 유대를 되살리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 행동에 학회뿐 아니라 사회의 중요한 무형 재산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윽고 사회가, 세계가 그 사실에 놀랄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신이치가 1978년 5월 17일, 규슈문화회관(현재 후쿠오카중앙문화회관)에서 개최한 규슈최고회의에서 이러한 확신을 말한 장면이 제27권 ‘격투’에 나와 있다.
‘격투’에서 신이치는 개인지도의 기본 자세를 강조했다. 광포를 추진하는 데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개인지도이고, 한 사람을 위한 격려다.
어떠한 싸움에서도 승리하는 원동력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희망을 불태우며 전진하는 속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이치가 강조하는 개인지도의 포인트를 써두고자 한다.
첫째, 절대 감정적으로 되면 안 된다.
둘째, 개인지도는 어디까지나 신신에 대한 확신이 근본이다.
셋째, 상담한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
넷째, 끈기 있고 포용력 있게 그리고 풍부하게 철저히 지도해야 한다.
다섯째, 발고여락(拔苦與樂)의 정신이 바로 개인지도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신이치는 자신의 실감한 점을 말했다.
“제가 이제까지 많은 간부를 보며 느낀 지은 개인지도를 끝까지 관철한 분은 퇴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지도는 화려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으며 영속적인 인내가 필요한 힘든 작업이기에 그것을 실천하는 속에 진정으로 신심을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개인지도를 거듭하면 자신을 응시하고 지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퇴전하지 않습니다.
물론 절복도 중요합니다. 단, 절복만 하고 입회시킨 뒤에 철저히 지도하지 않으면 일시적인 싸움으로 끝나고 맙니다. 또 절복 성과는 바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기에 주위 동지에게서 상찬도 받습니다. 그것으로 만심에 빠져 신심이 무너지고 만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전복과 함께 개인지도에 온 힘을 기울이는 일이 자신의 신심을 단련하고 경애를 높이는 필수 조건입니다.
절복과 개인지도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신의 개척작업입니다. 개척에는 어려움에 도전하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힘든 작업이 사람들의 생명을 일구어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은 성실하게 대화를 거듭하며 벗의 생명을 개척하는 괭이질을 멈추지 말기바랍니다. 개인지도는 조직에 따뜻한 인간미를 흐르게 해 조직을 강화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규슈최고회의에 이어 신이치는 후쿠오카시 니시구(사와라구)에 있는 규슈기념관(현재 후쿠오카평화회관)에 들렀다. 그곳에서 개최한 체험담대회의 참석자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등 그의 격투는 멈출 줄 몰랐다.
‘광선유포를 위한 가슴속 깃발’을
결코 내리면 안 됩니다!
신념과 확신을 강하게
규슈의 노래인 ‘불의 나라 노래’가 탄생하는 장면은 제28권 ‘광선보’에 그려져 있다. 신이치는 이동하는 차 안이나 지도와 격려를 하는 속에 짬을 내어 정신을 집중해 작사에 힘썼다.
제30권<상> ‘웅비’에는 신이치가 회장을 사임한 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때를 기다려 격려행을 시작한다. 1980년 4월 30일, 5월 1일 그리고 2일에 후쿠오카에서 동지들을 차례로 격려했다.
5월 1일 밤에 규슈평화회관에서 기초한 후쿠오카현 지역장회에서 신이치는 사자(師子)의 혼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불어넣는 심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광선유포를 위한 가슴속 깃발’을 결코 내리면 안 됩니다!”
“‘절복이라는 수행의 깃발’을 결코 내리면 안 됩니다!”
“‘일생성불의 신심의 불꽃’을 꺼뜨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1981년 12월 14일, 신이치는 후쿠오카현 남부에 이어서 구루메회관, 야메회관, 지쿠고 시내에 있는 개인회관을 잇따라 방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지도를 거듭했다.(제30권<하> ‘승리의 함성’). 특히 지쿠고에서 가진 간담회에서는 리더의 행동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리더 여러분은 어떠한 대난이 일어날지라도 커다란 바위와 같은 신념으로, 반드시 이긴다는 강한 일념으로 유유하게 당당하게 사명의 길을 뚫고 나아가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을 보고 회원들은 모두 안심하고 용기를 갖기 때문입니다.
리더에게는 다음과 같은 요건이 필요합니다.
‘신념과 확신이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성실하고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늘 생기발랄하게 지휘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일에서, 직장에서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사회에서 내는 실증이 지도력에 빛을 더하기 때문이다.’ ‘지도할 때는 늘 평등하고 판단이 건전해야 한다.’ 이 점을 마음에 새기고 나아가기 바랍니다.”
종문사건으로 고통받던 시달린 동지를 위해 반전공세에 나선 신이치의 외침은 후쿠오카의, 규슈의 동지의 마음을 강하게 울렸다.
종문사건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속에 당시 규슈의 남자부장이었던 다무라 다카오 씨(규슈 총주사)는 멤버와 함께 ‘학회의 진실을, 광포 스승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먼저 규슈평화회관 ‘별관’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외치는 전시를 시작했다.
1980년 5월의 일이었다. 이듬해 1981년 5월 2일, 규슈기념회관을 개장한 ‘규슈이케다평화기념관’이 개관했다. 학회의 ‘평화·문화·교육’의 철학을 발신하는 전시에는 많은 사람이 관람했다.
“대표 멤버가 감사 인사를 드릴 겸 선생님에게 보고하러 갔습니다. 선생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앞으로 광선유포는 절복과 평화·문화·교육이라는 양 수레바퀴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고 미래의 전망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회상하는 다무라 씨의 원점은 1972년 9월, 규슈의 대학부원 대표로 선생님과 간담했을 때, “'규슈에서 일본, 세계 광선유포의 다음 시대의 패턴을 만들기 바랍니다.” “함께 도와야 합니다. 규슈 밖에 없습니다.” 하고 격려했다.
다무라 씨는 이렇게 서원했다.
“선생님의 일념에 감싸이듯 규슈에서 청년부터 일어나 새로운 평화의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어려운 때이기에 차대(次代)를 여는 투쟁을 시작한다. 선생님이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듯이, 또 소설에 써주셨듯이 우리 규슈도 앞으로 광선유포의 길을 앞장서겠습니다.”
이처럼 당시 규슈의 많은 리더가 이케다 선생님에게 격려를 받고 일어섰다. 그리고 지금도 후쿠오카의 빗은 광포 스승의 혼을 가슴에 혁혁히 불태우며 정의로운 대화확대를 향해 선구의 투쟁을 펼치고 있다.
“후쿠오카에서, 규슈에서 세계광포의 빛을! 창가승리의 돌파구를! 그 광포 서원의 기개가 바로 규슈의 혼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 되었어요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