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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다시 얻는 여행
―如如山房에서 보내는 편지
양문규
사월 초파일, 이른 아침 천태산 영국사에 들러 참배를 한 후 하동을 향해 차를 몰았습니다. 온누리가 푸르름을 더해가면서 세상은 맑고 향기로운 불국을 이루고 있었지요. 무주, 장수를 지나 남원으로 들어서자 보리밭 들녘은 벌써 황금빛으로 바꾸어놓고 있었습니다. 자운영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 모를 내기 위해 논갈이와 써레질이 한창이었는데요. 문우들과 악양, 강진 문학기행을 하기 위해 나선 길이 즐겁고 행복한 연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동 화개장터에 도착하자 김용길 시인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변영희, 황구하 시인과 장터 모퉁이 쉼터에 앉아 시원한 녹차로 목을 축일 즈음 울산의 임윤, 창원의 이주언, 박은주 시인이 합류하였지요. 서울팀은 오후 늦게 도착한다는 전언이 있었고요. 하여 우리 일행은 먼저 쌍계사로 향했습니다.
사월 초파일을 곁들인 황금연휴여서 그런지 절로 가는 길은 붐볐습니다. 그러나 물소리만은 세상 번잡함을 벗어나 청청하고 고즈넉하였습니다. 올라가는 길목 4대강사업 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었지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부처님의 일갈이었습니다. 사찰 경내를 들어서자 잘못 찾았구나 싶은 개운찮은 심정이었습니다. 고풍스런 건물 안팎으로 연등이 걸려 있었는데요.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의미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그 자리 돈으로 범벅된 조잡스런 연등이 줄줄이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금당을 오르면서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연유가 어디에 있을까 궁구하며 경건하게 참배하고 악양 평사리로 향했지요.
박경리의 『토지』는 한국현대문학사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토지문학관>이 만들어지고, 각종 행사를 기획, 성황을 이루고 있는데요. 저도 몇 년 전 이곳 ‘토지문학상’ 시 부문 심사를 한 적이 있었지요. 다시 찾은 평사리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토지문학관 주변으로 상가가 들어서고, 토지 드라마 중심인물의 가옥을 재현해 놓고 있었습니다. 마치 큰 시장에 들어선 것 같았지요. 그만큼 토지문학관은 지리산과 더불어 하동의 명품으로 거듭나는 증거이겠지요. 여여산방에서 출발하기 전 연락이 된 순천의 박두규 시인이 토지문학관으로 달려왔지요. 우리는 김용길 시인이 안내하는 찻집에 들러 가쁜 숨을 가라앉히고 곧바로 악양 하신흥리로 향했습니다.
하신흥리로 가는 길은 지리산 형제봉을 앞에 두고 구불구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길이었습니다. 아마도 몇 가구 되지 않은 첩첩산중 오지의 작은 마을일 거라 생각했는데,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서 앗, 넓은 분지 위에 제법 큰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참말로 큰 마을이구만. 난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한 별장쯤 생각했는디.” 박두규 시인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이었나 봅니다.
홀로 집을 지키는 연로한 김용길 시인의 아버님께 인사를 올린 후 마당에 차려진 음식상에 앉아 출출한 배를 즐겁게 하였습니다. 서울팀의 전건호 시인과 삼류(유미애, 유순예, 유현숙) 시인이 구례역에서 택시를 타고 달려왔고, 지리산의 이원규 시인이 아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왔지요. 박남준 시인은 4대강사업 반대 투쟁을 하기 위해 여주 남한강에 있다는 이원규 시인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토지문학관 관장 최영욱 시인은 토지문학관 관련 행사 때문에 다음에 보기로 한 터였습니다.
마당에 널따랗게 차려진 음식상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푸근했습니다. 텃밭에서 갓 뜯어온 상추, 쑥갓, 곰취, 가죽잎과 물앵두, 거기에 숯불구이 고기와 술이 있었습니다. 김용길 시인의 세 아우님이 수고를 해주었는데요. 노랫가락 이어지는 가운데 종종 이들의 입담은 흥겨운 자리를 보다 더 흥성하게 해주었습니다. 말벌 열방 쏘이고, 지네에 물리고도 멀쩡했다는 막내동생, 산삼 서른 몇 뿌리를 캐서 두루두루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형제애를 과시하기도 했는데요. 형제는 엉뚱하게도 뱀(독사)을 들고 나타나 모두 아우성을 쳤는데, 사월 초파일이니만큼 뱀은 무사히 방사되었지요.
술이 또 한 순배 돌고 노래가 이어졌습니다. 임윤 시인의 노래가 5060세대로 데려가기도 했고 김용길 시인이 ‘나비부인’을 부르겠다고 하자 뭔 오페라냐고 했는데 테너 톤으로 부르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를 들으며 모두 배꼽을 뺐습니다. 동작까지 어린이가 된 이주언 시인의 노래를 들을 때는 모두 환하게 동심이 되기도 했고요. 박두규 시인의 ‘부용산’은 압권이었습니다. 애잔하면서 힘이 들어있는 부용산, 예전에 소설가 송영 선생님을 비롯한 시인 이광웅, 김남주 선생님의 부용산을 들은 바 있습니다. 이미 두 시인은 작고하였지만, 박두규 시인의 노래로 그리운 이광웅, 김남주 시인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지요. 임윤 시인의 젓가락 장단 속에 불러대는 노랫가락에 넋을 놓고 있을 즈음 샛노란 반달이 어느새 서쪽 형제봉에 걸쳐져 있었습니다. 새벽 두 시가 넘어 내일의 일정을 위해 흥겨웠던 술자리를 내려놓고 마을회관으로 들었지요.
이른 아침, 재첩국으로 속을 푼 우리는 강진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악양 큰 길로 나가기 전 동네 뒤편에 있는 금봉암에 올랐습니다. 섬진강과 상신흥리와 하신흥리 등을 비롯한 인근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는데요. 풍광의 아름다움이 지리산의 넉넉한 품을 닮아있었지요. 평사리를 지나 “그냥 쑥쑥 빠져 강진으로 가야할틴디, 저 친구 하세월이고만.” 전건호 시인의 한마디가 웃음을 자아냈지요. 이왕 하동에 왔으니 처처를 구경시키고자 하는 김용길 시인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앞장선 김용길 시인의 차는 또 구불구불 낯선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광양 매화마을이 아닌 하동 흥용리 먹점마을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전건호 시인은 이곳을 훤하게 알고 있었는데요. “여기가 매화의 시배지.”라고 하면서 알이 굵어 실하고, 광양의 매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계곡과 매화나무를 따라 얼마간 올라가니 무릉도원이나 다름없는 별천지 ‘산골매실’ 펜션이 나타났는데요. 자연 그대로의 멋을 살린 가옥과 정원이 우리들을 한동안 그곳에 붙들어놓았습니다. 주인장이 내놓는 차를 마시고야 겨우 차를 돌릴 수 있었으니까요.
강진 무위사에서 박부민 시인과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가장 빠른 길을 이용했지요. 지난겨울 배한봉 시인, 김경복 문학평론가와 함께 목포 김선태 시인을 만나러 갈 때 국도를 이용, 가는 도중 벌교 <조정래문학관>을 둘러본 후 그곳에서 꼬막정식을 먹은 바 있었는데요. 우리 일행도 시간의 여유만 주어졌다면 아마도 그 길을 택해 <조정래문학관>을 관람하고 점심으로 꼬막정식을 먹었겠지요. 그뿐 아니라 낙안민속마을도 구경하면서 여행의 기쁨을 맘껏 즐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진에서 우리가 지도를 그렸던 곳을 돌아봐야 하는 까닭에 하동대로, 남해고속도, 고속화도로 등을 타고 무위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경이었지요. 가는 도중 남도의 풍광을 주차간산(走車看山) 격으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덥기까지 했던 어제의 화창함과는 달리 가랑비가 진눈깨비마냥 사륵스럭 내리는 무위사로 들어서자 우리 일행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백구였습니다. 유홍준은 『나의문화유산답사기 1』(창작과비평사, 1993)에서 “변함없는 것은 오직 무위사의 늙은 개뿐이었다.”고 하고 있는데요. 아마도 이 개는 20여 년 전 미술사학자 유홍준이 본 송아지만한 늙은 개의 후손일 거라고 짐작해보았습니다. 이 백구는 능청스럽게 관람객이 버린 휴지조각을 줍고 다녔는데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말을 떠올리며, “초목국토(草木國土)가 모두 불성이 있다(有佛性).”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를 이 개를 통해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였지요.
초파일 뒤라 그런지 무위사 역시 어수선하였습니다. 불사 중이라 이곳저곳이 파헤쳐지고, 온갖 자재로 무슨 개발현장을 들어서는 기분이었지요. 많은 이가 극찬한 무위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는 애초 글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위사의 주불인 극락보전에 이르러서 그 기우가 딱 가셨습니다. 유홍준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소담하게 단장된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을 반도 전하지 못할 것이라 했는데요.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 모습처럼 되어보렴.”하는 조용한 충언을 새기며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였습니다.
박부민 시인의 안내를 받으며 가는 도중 차밭에서 사진을 찍고, 곧바로 월남리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점심때였습니다. 무엇보다 한눈에 들어오는 월출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우리 일행을 반겼지요. 그리고 폐사지 월남사의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탑은 월출산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전탑의 역사와 함께 주변 풍광은 감탄의 연속이었습니다.
어제 술로 놀랜 배를 재첩국으로 달랬기 때문에 여간 배가 고픈 게 아니었지요. 마을 입구에 한적하게 지어진 한옥 펜션 식당으로 향했는데요. 그곳에 박부민 시인이 미리 주문한 한방오리백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술과 곁들인 음식은 담백하면서도 맛깔스러웠습니다. 거기에 푸짐한 남도의 반찬과 묵은지와 매실장아찌까지 맛보았지요. 비안개를 두른 월출산과 월남리 마을을 바라보며 걸림 없는 아름다움을 즐기는 시간이었습니다.
넉넉한 느티나무 한 그루/옛길에서 미소를 띤다/여기로부터 시작된 질긴 사랑이/낮은 돌담들 목을 헹구는 냇물을 따라/월출산 경포대의 깊은 가슴으로 흘러/눈송이 몇 데리고 올라간다/햇빛이 그리워 찾아드는데/너무 눈이 부셔 고개를 못 든다/부끄러움 접어 동백 숲에 숨겨보라/동백이 두근두근 빨개져서 먼저 숨는다/구름 한 자락 조용히 마실 나와/세상의 향기인 설록(雪綠)의 첫 모금/슬며시 기슭에 뱉어 놓고/치마끈을 풀며 남(南)으로 스며든다/내려오는 것들은 저리도 따뜻하다/다시 두 아름의 느티 아래서/겨울을 온전히 바래다주지 못한 아픔은/바람에 뼈를 부비며 애써 늙고 있지만/잔정이 새순처럼 돋아나/누구든 연초록에 미리 젖고 말겠다/억새풀 비벼 넣어 황토밥 쪄 먹고/송천댁 가마솥 연기로 세수하고 나면/천황봉이 눈묻은 어깨를 툴툴 털고/껄껄대며 내려온다, 여기가 봄이다
―박부민, 「월남리」, 『등불이 있는 마을』(시와문화, 2010)
박부민 시인은 박종권 시인(작고)과 박호민 시인의 동생으로 얼마 전 박몽구 시인의 소개로 제가 운영하는 계간 『시에』(2010, 여름호)에 「벌교역」 외 1편을 게재하면서 <시에문학회> 식구가 되었지요. 이런 연유로 통화를 몇 차례 한 후 이날 첫 만남을 갖게 된 것이고요. 그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는 아마도 제가 (주)실천문학사에 재직하고 있을 때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그의 맏형 박종권 시인의 유고 시집 『찬물 한사발로 깨어나』(실천문학, 1995)를 출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종권 시인과의 인연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가 민예총 살림 살던 시절인 1980년 말부터였는데요. 그는 인간문화재 김명환 선생에게서 판소리고법을 전수받은 이력으로 술자리에선 언제나 가객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지요. 아직도 그의 「춘향가」를 비롯한 판소리 장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쑥대머리」는 우리의 애간장을 태우기에 부족함이 없었지요.
15년 세월을 훌쩍 넘어 뜻밖에 찾아온 박부민 시인과의 만남은 이런저런 연유로 살갑게 정을 나누며 살던 지난날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박부민 시인의 「월남리」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반가운 시편이지요. 그는 이 시에서 사람다운 삶의 아름다움을 월남리의 자잘한 세목을 빌려 노래해주고 있습니다. 시인의 따뜻한 성품만큼이나 “넉넉한 느티나무 한 그루/옛길에서 미소를” 띠고 있었지요. 마지막 자리 “여기가 봄”이라고 단정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가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월남리 <남도햇빛교회>에 들러 가볍게 시인의 식구들과 인사를 나눈 후 영랑생가를 찾았습니다.
강진 읍내에 위치한 영랑생가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영랑생가 옆 낮은 영랑아파트였지요. 그곳에 차를 주차하고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재현하듯 구부러진 돌담을 지나니 「모란이 피기 까지는」 시비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모란은 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는 늦은 봄날, 당대의 남도 방언과 서정이 무르녹아 있는 향토성 짙은 마당을 밟으며 빗속에서도 잠시 행복했지요. 그러나 당대현실을 외면한 그의 시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민중의 서정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석꾼의 영랑생가가 아닌 초가로 복원된 집 역시 보여주기 위한 문화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을 지울 길이 없었지요.
만덕산 백련사로 가는 길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보리밭과 밀밭, 마늘밭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진경을 만끽하면서 탄성을 질렀지요. 거기에 비까지 뿌리고 있었으니 수채화 같은 그 절경을 어찌 표현할 수가 있겠는지요.
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차와 동백의 백련사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아마도 이곳을 들러 다산초당으로 가는 관람객들이 함께 뒤섞여 더욱 그런가 봅니다. 그러나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는 느긋하게 빗소리를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만경루 아래 예전 창고로 사용했던 곳에 ‘만경다설’이 개설되어 있었는데, 목백일홍 사이로 얼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여연 스님이 내준 햇차를 마셨습니다. 참 좋은 차를 맛보게 되었다며 모두 흐뭇해하며 다산초당으로 향했지요. 거세지는 빗발만 아니라면 다산이 해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길을 열어놓았던 옛 길을 걸어서 다산초당에 다다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뒤로 한 채 차로 움직였습니다.
다산초당 가는 길도 붐비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산초당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음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가슴이 막히는 것만 같았지요. 그런데도 이처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연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지방마다 문화를 관광상품으로 내세워 큰 인기를 얻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강진이 아니겠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는지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뿌리가 맨살을 드러내주고 있는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이 이를 증거합니다. 힘들게 올라간 다산초당은 적잖은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초당이 아닌 와당이 그것이었습니다. 영랑생가에서 받은 인상이 고스란히 겹쳤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다산의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절절한 애국·애민사상을 숭배하며 구강포의 강진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천일각에 힘들게 오르고 나서 이런 생각을 깨끗이 지우기로 했지요. 어떤 이유로도 다산을 불경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저녁이 되면서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남진에 도착했을 때에는 몸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비바람이 세찼는데요. 바닷가를 거니는 것을 포기하고 마량항으로 바로 차를 돌렸지요. 마량항에 도착하자 모두 이구동성으로 풍광을 극찬하기 바빴습니다. 황구하 시인은 이재무 시인의 마량 관련 시편을 이야기하면서 과연 마량항답다며, 삼류 시인과 함께 거친 바람에 우산 쓰기를 포기하고 비를 맞으면서도 바닷가를 거니는 것이었습니다.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조석으로 부두에 나가/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시치미 뚝 떼고 앉아/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이재무, 「좋겠다, 마량에 가면」, 『저녁 6시』(창비, 2007)
마량은 그야말로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가 확실했습니다. 그만큼 마력이 있었지요.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이었습니다. 까막섬과 아름다운 항구에 넋을 놓을 즈음, 이재무 시인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어디여.” 비 탓인지 술이 얼큰한 목소리였습니다. “마량인디.” “누구랑 간 거시여, 세월 좋구만.” 은근슬쩍 여친네와 같이 왔다고 농을 치다가 가족과 함께 왔다고 돌려치고 말았지요. 혼자 술을 마시는 형을 더 안쓰럽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형은 “김선태한테 전화하지.”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목포가 지척이었지요. 김선태 시인은 바로 마량으로 달려올 태세였습니다만, 재무 형한테 돌려댄 것처럼 다음 기회 같이하자며 전화를 끊었지요.
박부민 시인이 안내한 횟집은 자연산 회와 푸짐한 남도의 찬으로 차려진 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동과 강진을 처음 와봤다는 울산의 임윤 시인을 비롯 같이한 문우들은 여기 오길 잘 했다며, 가지 말자고, 언제 다시 또 올 수 있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이 또 한 순배 돌고 배가 부를 즈음, 광주에서 박응식 시인이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모든 걸 버리고 이재무 형의 바람처럼 이곳에서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돌아다니다가 그것도 시들하면 “갯벌 같은 여자와/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며 살았으면 싶었습니다. 저녁바다가 깊어질 무렵 우리는 여행의 여운을 내려놓고 월남리 마을회관으로 들었지요.
몸은 피곤한데도 일행 중 누구도 쉽게 잠자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박응식 시인이 가져온 홍어를 곁들여 다시 술자리가 이어졌는데요. 늦게 발동이 걸린 박응식 시인의 판소리와 민요가 마을회관을 압도할 즈음 하나둘 곤한 잠속으로 빠져들었지요.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서울서 내려온 전건호 시인과 삼류 시인이 돌아갈 길을 서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틀 연속 두세 시간밖에 잠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모두들 덩달아 일어나 가는 사람을 배웅하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며 월출산을 두른 보리밭에서 사진을 찍었지요. 보리밭 타령을 하던 유순예 시인이 샘을 낼 게 분명했습니다.
박응식 시인은 “원래, 광주서 서울행 케이티엑스를 타면 좋을 텐디, 왜 순천까지 간다요.” 하더니 저와 임윤, 황구하 시인보고 광주로 가자고 자꾸 꼬드기는 것이었습니다. 박응식 시인의 간절한 청을 아쉽게 뿌리치고 박부민 시인과 인사를 나눈 후 순천을 향해 차를 몰았습니다. 순천에 도착할 무렵 서울팀은 오전 8시 30분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은 후였지요.
이번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공부했습니다. 자연이 주는 많은 것이 감사하고 또 하나의 풍경이었던 문우들이 감사했습니다. 여행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새삼 절감했지요. 문학을 한다는 것만으로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아울러 이번 여행은 문화유산답사가 아니라 문우들과 마냥 즐겁고 행복했던 사람으로의 여행으로 오래오래 추억하고 싶습니다.
오마이 겐이치는 『내 생애 최고의 여행』(에디터, 2008)에서 “내 사전에 ‘다음 기회’라는 단어는 없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다음 기회에…하고 매사 넘겨버리기 쉽지만 정작 그 기회가 다시 찾아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매순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인생의 순간순간이 선명하고 확실해진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아네스안은 『여행길에서 찾은 지혜의 열쇠』(위즈덤하우스, 2007)에서 “여행이란 일상에서 영원히 탈출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좀 더 새로워진 나를 만나는 통로이며, 넓어진 시야와 마인드 그리고, 가득 충전된 에너지를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라고 했지요.
정말 뜨거운 사람들과 생을 다시 얻는 환한 봄날 아름다운 여행이었습니다.
양문규
충북 영동 출생.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등.
―『시에티카』 2010년 하반기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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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화사한 봄날, 그날이 그립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생을 다시 얻게 해준 김용길 시인, 박부민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같이 여행했던 문우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박부민 시인님께서 박종권 시인님 동생분임을 알고 깜짝 놀랬습니다. 사연 많은 시인 형제라는 사실에서 감동이였습니다. 그리고 양문규 선생님의 진솔한 여행후기에 여행의 맛이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많은 시인들이 고 박종권 시인을 추억합니다.
여기에 글을 다시 올리니 좋은 것이 있네요. 사진을 칼라로 볼 수 있다는 것...
그렇습니다...저도 책에 실린 것 읽고 다시 여기서 칼라로 사진을 보면서 다시 읽어보는 소감은 맛깔스럽다고 할까요? 아무래도 흑백이 주는 느낌은 고전적인 느낌이 있고 더 오래 된 듯한 아득함이 있지요... 어쨌든 부럽슴당ㅎㅎ
풍경은 아무래도 칼라로 봐야 풍경 같네요.
정말 좋았겠어요 여행도 하고 보고싶은 벗도 만나고 시도 읊고 노래도 하고 너무 행복한 시간,복을 많이 쌓아야겠습니다 함께할수 있는 그 복을........
좋고 말고요. 그러니 행사 무조건 참가 기쁨 같이 누리길 바랍니다.
앗! 놀라워라... 그날의 노래가 생생하게 클로즈업 됩니다. 저로서도 큰 영광이었습니다. 가을에는 밤 줍기 한번 할까요?
그날이 아직까지 생생, 좋은 추억으로 오래 함께 하겠지요.
살아있는 문학기행!!! 함께하지 못했던 아쉬움과 그날의 아픔들이 되살아나서......
우리만 여행하게 돼 나회장님께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여행 같이 했으면 합니다.
生을 다시 얻을 만큼, 멋진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역시 여행은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비우기도 하지요. 비운만큼 얻는 게 많은 여행,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환한 봄날 아름다운 여행"입니다. 그 풍경, 그 시간은 함께했던 분들의 이름만으로도 뜨겁습니다.
악양, 강진 참 좋았습니다. 내년에도 또다시 이 길을 시에문학회와 함께 갔으면 합니다.
칼라사진을 보며 읽는 맛이 책과는 또다른 느낌입니다. 못가봐서 아쉽습니다...
여행 잡히면 같이 갑시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문학 좋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