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한 옛날]
세계 최고의 검색엔진은 알타비스타였고,
구글은 변방의 듣보잡이었던 시절.
알렉스 프로야스가 크로우로 데뷔를 하고
노지마 신지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괴작헌터 구봉봉]
악평으로 점철된 흥행 폭망작만 수집하는
평범한 하이텔 네임드, 구봉봉 군.
봉봉은 그날도 동네 비디오샵 구석에서
먼지 쌓인 비디오 테잎들을 관찰하다가
강렬한 괴작의 냄새를 풍기는 테잎을 발견했다
- The moon is a dream of the sun
[흙 속의 진주]
그리고 100분 후,
VTR 앞의 봉봉은 배신감에 떨고 있었다.
흥행과 평론의 그랜드 폭망작을 기대했던 봉봉은
상상도 못 한 걸작을 영접한 배신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
이게 데뷔작이라고? 이런 누와르 걸작이?
망작이 아니라 시대를 앞선 걸작이었다.
너무 앞섰기에 관객이 받아들이지 못한 비운의 걸작..
하지만 C 감독의 근황은 알 수 없었고,
업계 퇴출 후에 폐인이 되었단 소문뿐이었다.
[5년 만의 희소식]
C 감독의 신작이 공개된다는 소식이었다.
이번엔 제작사도 빵빵해서
포스터도 간지나고 캐스팅도 화려했다.
쌩초짜 배우들로 찍은 저예산 영화도 그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 나오는 걸까?
그리고 100분 후,
객석 맨 앞줄의 봉봉은 배신감에 떨고 있었다.
[Trio]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다.
이제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적극적인 소극성 탓에
모두 눈치만 보는 침묵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때 객석 맨 앞줄에 앉아있던 관객이 손을 들었고,
사회자는 그에게 마이크를 쥐여주었다.
감독님! 실망이 너~무 큽니다.
어떻게 5년을 투자했는데,
이런 졸작이 나오게 된 겁니까?
C 감독의 얼굴은 빨갛게 변했고,
사회자는 진땀을 흘리며 봉봉에게서 마이크를 뺏었다.
[흑역사]
2연속 폭망으로 업계의 재기 불가 판정을 받지만,
3년 후 C 감독은 다시 돌아와 영화를 만듭니다.
- 공동경비구역 JSA
2002년 복수는 나의 것,
2003년 칸영화제 대상을 받은 올드보이,
그 뒤로 친절한 금자씨, 박쥐, 스토커, 아가씨...
그렇습니다, 시사회 공개 망신을 당했던 C 감독이
바로 지금의 박찬욱 감독입니다.
그리고 그때 박 감독에게 깽깽대던 애송이는
지금 여기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업계의 현실]
만약 인테리어 업자가 주문을 무시하고
자기 취향대로 집을 고친다면 어떨까요?
그 업자는 쌍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겠지요.
(이름만 멋있지) 영화감독도 다를 게 없습니다.
영화의 주인은 돈을 낸 제작자고요,
감독은 걍 하청을 받아서 일하는 겁니다.
고객의 니즈를 만족시키는 거지,
자기 입맛에 맞추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지금보다 실패에 더 가혹했던 때에
한 번 말아먹은 감독 처지가 오죽했겠습니까?
그 굴욕의 세월을 5년이나 버티고
간신히 다시 도전했건만 또 폭망.
거기다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족보 없는 하룻강아지가 확인사살까지 했으니...
[팩트의 배신]
우리는 한 순간, 한 면밖에 못 봅니다.
그걸로 총체적인 진실을 파악할 순 없어요.
그때는 모두 사실이고 모두 진심이었어도,
세월이 가면 다 틀린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확신하지 마세요. 말은 어렵습니다.
방심하는 순간 다치는 사람이 나옵니다.
구봉봉의 진실이 박 감독을 상처입힌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