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2월이 되면 일본 후쿠오카의 한 공원에서는 싸늘한 새벽바람을 가르며 정갈한 시어(詩語)가 흐르곤 한다.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獄死)한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일본인들이 우리말로 읊는 시 낭송의 목소리다.
시인의 조국 한국 땅에서는 별 뚜렷한 기념행사 없이 지나치는 바로 그 시간에 저들은 한국어로 윤 시인의 시를 읊으며 눈망울에 붉은 물기를 어른거린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별 헤는 밤’) 시인이 하나 둘 별들을 헤어가며 고난의 현실을 초월하려 했던 하늘은 제국주의의 총칼에 핏빛으로 물든 슬픈 하늘이었고, 그 하늘 아래의 시인은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일 수밖에 없었다.(‘무서운 시간’) 끔찍한 고독이다.
식민지의 지식 청년에게 저항정신은 운명처럼 거역할 수 없는 넋이었을 터… 깊은 고독과 번뇌와 참회, 그리고 슬픈 소망의 시어(詩語)들을 각혈(咯血)하듯 토해낸 시인은 마침내 사랑과 괴로움과 넘치는 슬픔에마저도 거짓말처럼 저항한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불어’)
참여문학이 아니었지만 그의 시들은 순수한 저항정신을 강렬하게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저항에는 가혹한 희생이 따랐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무슨 약인지도 모르고 맞은 주사는 다름 아닌 생체실험용 세균이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처럼 굳어있다.
무장독립투사에게나 가해질 법한 가혹한 고문과 처절한 죽음은 총칼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윤동주의 몫이 되었다. 자신의 시어처럼 그는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처럼 스물여덟 해의 삶을 무엇엔가 저항하듯 짤막하게 거둬들인다.
시인의 죽음은 식민제국주의에 저항한 전인격적 희생이었고, 그 희생은 하나의 진실을 일으켜 세웠다. 군국주의 폭력에의 꺾일 줄 모르는 저항이라는 진실을…
시인에게 일본 식민통치의 폭력은 자유와 사랑과 신앙, 그 모든 생명가치에 대한 반명제(反命題)나 다름없었고, 그 반명제에 대한 저항은 자유를 갈구하는 타는 목마름이었으며,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향한 사랑이자 생명의 호흡이요 영원한 신앙이었다.
약소민족의 희생 위에 무력으로 자국(自國)의 이익을 꾀하는 식민제국주의의 폭력이 젊은 시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 점 부끄러움도 없기를' 기원하며 시인이 우러르곤 했던 하늘은 이제는 오염된 대기와 구멍 뚫린 오존층으로 별빛도 달빛도 흐르지 않는 슬픈 허공으로 변했다.
군국주의만이 폭력의 쇠사슬인가? 아니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역동성을 짓누르는 교조적 이념의 도그마, 신의 이름으로 인간성의 다양한 가치들을 폐쇄적 신조(信條) 아래 얽어매는 종교적 근본주의 따위도 시인이 피 흘리며 저항해 마지않은 폭력의 족쇄나 다름없을 터이다.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던가? 예언이라도 하듯 시인은 제 몸뚱이를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는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면서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붉은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
시인의 소망대로 십자가가 그 자신에게 허락되었다. 감옥 안에서 독주사를 맞고 뼈와 살이 맞붙은 시인은 불과 6개월 뒤면 울려 퍼질 광복의 종소리를 듣지 못한 채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갈급했던 자유혼, 그제야 자유로워졌을까? 괴로웠던 사나이, 그제야 비로소 행복해졌을까? 예수 그리스도처럼…
여러 범죄의 전과(前科)가 있는 터에 또다시 10여 개의 범죄혐의로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다음 대통령 자리에 가장 가깝다고 하는데, 현직 대통령도 감옥에 갇힌 피고인이 되어 형사재판과 탄핵심판을 기다리는 중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국무총리도 탄핵소추되어 '대행의 대행'이라는 기막힌 이변(異變)에까지 이르렀다.
거리와 광장은 격렬한 시위군중으로 뒤덮이고, 대학과 종교와 언론도 두 쪽으로 갈라져 서로 눈을 흘기며 으르렁거린다. 참으로 괴이한 세상이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초현실적 혼란이 엄중한 현실로 나타난 디스토피아(dystopia)에서 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가고 있다.
현해탄을 건너, 8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몹시도 괴이한 시대를 살았던 윤동주 시인은 저항의 붉은 피 토하며 시.공간을 넘어 다시금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념의 도그마가 자유의 이념을 핍박하고 민주주의 깃발 아래 민주정신이 고통 받는 괴이한 시절, 저 허구의 도그마와 위선의 깃발 앞에 윤 시인은 지금도 시뻘건 저항의 핏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붉은 피를.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출처] (너머의 길녘 22) 괴이한 세상, 초현실의 디스토피아|작성자 leegad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