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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6) 부모는 아이와 하느님 사이의 소개팅 주선자
자녀들에 오시는 주님 감지하고 마음의 문 여는 능력 키워줘야
“아이가 신앙심을 갖길 바라는 마음으로 유아세례를 받게 하고, 어려서부터 열심히 성당에 데리고 다녔어요. 그런데 아이에게 성당은 그저 엄마가 가라고 하니까 가야 하는 곳인 것 같아요. 아이 친구가 복사를 선다고 제대 위에 있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거든요. 그렇게 저희 아이에게도 깊은 신앙을 갖게 해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작은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숲속 한가운데 멋진 아름드리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큰 나무 아래 쉬어가는 많은 동물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 나무를 창조하신 걸 무척 자랑스러워하실 거야!”라고 말이죠. 그 나무 옆에는 새로 심은 작은 묘목도 있었습니다. “나처럼 작고 어린 나무 곁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구나.” 묘목은 큰 나무와 자신을 비교하며 움츠러들곤 했습니다.그때 달팽이 한 마리가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잠시 네 그늘 아래에서 쉬어가도 될까?” 묘목은 기뻤지만 소심하게 대답했지요. “하지만 내 가지는 볼품이 없어서 어쩌지? 미안해….” 그러자 달팽이는 대답했습니다. “묘목아, 너는 작고 연약하지만, 너도 어엿한 나무란다.” 달팽이의 대답에 묘목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도 나무라는 것, 그리고 언젠가 자신도 아름드리 나무처럼 크게 자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종교학자 존 웨스터호프(John H. Westerhoff III)는 “신앙은 나무와 같다. 작은 신앙도 신앙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의 횟수, 공동체 활동의 정도, 미사참례 여부에 따라 신앙을 가늠하고 비교하곤 합니다. 하지만 작은 묘목도 나무이듯, 작고 연약하고 부족한 신앙도 신앙입니다. 이처럼 아이들이 지닌 작은 신앙 역시 어른들의 눈에는 신앙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미미해 보이지만 엄연한 신앙입니다.
신앙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거나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나무와 같이 긴 시간 정성 들여 키워내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당신 섭리를 통해 여러 방법으로 우리 마음의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그 씨앗은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라나고, 은총에 응답하며 점차 아름드리 나무와 같은 큰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실천적 의지의 상호작용 속에서 신앙은 성장합니다. 이 성장은 때로 멈추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하느님을 놓지 않는 것을 우리는 신앙 여정이라고 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신앙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이때 부모인 우리가 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녀들의 영혼 안으로 들어오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노크를 감지하고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녀가 자기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과 우정 어린 관계를 맺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이렇듯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내면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하느님과 관계를 형성하도록 동반하며 자녀의 영적 성장을 도울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지닌 신앙의 스타일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신앙’(Experienced Faith)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신앙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 특별히 부모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부모가 일상생활과 전례 안에서 보이는 태도와 행동 양식을 모방하며 성장해 나갑니다. 유년기의 아이들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사제·수도자와 동일시 되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교회와 신앙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도록 교회를 향한 애정 어린 태도를 보여주고, 가정의 문화를 통해 자녀들이 신앙의 습관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처럼 자녀와 하느님 사이에서 조정자, 중개자의 역할을 하는 부모는 마치 소개팅 주선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괜찮은 소개팅 주선자라면 무턱대고 만나라고 권하지 않지요. 일단 서로가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상대에 대한 장점을 넌지시, 자주 전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둘 사이에 약속을 잡을 때에도 좋은 분위기가 되도록 마음을 쓸 것입니다. 그리고 몇 번 더 만나며 서로의 매력을 충분히 나누게끔 돕기도 하고, 둘의 관계가 성숙해질 수 있도록 책임을 갖고 살필 것입니다. 그렇게 둘이 잘 된다면 술 석 잔은 덤이고요.
자녀를 신앙으로 이끄는 부모의 역할도 비슷합니다. 자녀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오고,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는 것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자녀들이 마치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나기 전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고 말하던 그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도록 부모는 애써야 합니다. 여기에 자녀의 성향과 상황에 맞는 슬기로운 도움이 더해진다면 자녀들의 신앙은 점차 두터운 나이테를 키워 나가며 하느님 안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의 노력 속에서 자녀와 하느님의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 때 부모에게는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 삶의 결정적 순간을 하느님 안에서 식별하는 자녀를 보게 되는 것, 부모의 임종 때 사제를 초대해 병자성사를 받게 하는 자녀를 두는 것. 이러한 은총의 술 석 잔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부모는 이렇게 하느님을 자녀에게 소개할 떠들썩하지 않은 조용한 주선자, 과도하지 않은 침착한 중개자, 때를 구분하는 지혜로운 중개자여야 합니다.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7) 가정 안에서 사춘기 자녀와 중년기 부모 충돌
사춘기와 중년기 모두 삶의 변곡점, 변화에 따른 긴장과 내면 혼란 느껴
“저는 중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엄마입니다. 저희 아이는 신앙생활, 가정생활 모든 면에서 제가 잔소리할 것도 없는 성실한 아이였는데…, 요즘은 매일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제가 알아서 할게요”에요. 잘 모르는 친구들과 다니면서 학원을 빼먹고, 귀가 시간도 제멋대로에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열심하던 복사단도 그만두겠다고 하더니, 성당도 안 나가고…. 사춘기가 와버린 이 아이가 저와 또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들의 근심과 걱정, 복닥거림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큽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아 내면이 난리를 겪는 자녀를 마주하는 것도 어려운데, 부모 자신도 중년을 겪어내기까지 해야 하는 이중고에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의 발달과정에 있어서 사춘기와 중년기는 삶의 큰 변곡점이기에 자녀는 자녀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변화에 따른 긴장과 내면의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과 혼란은 쉽게 둘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사춘기의 자녀와 중년기의 부모가 갈등을 빚게 되는 영역을 다음의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체성과 관련된 갈등입니다. 사춘기의 자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숙제를, 중년기의 부모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숙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부모와 자녀는 서로 다른 숙제의 답을 찾기 위해 각자 인생 어느 때보다 많은 고민을 하고, 내면에서 극도의 긴장을 느낍니다. 그렇게 각자가 가진 첨예한 긴장감은 쉽게 둘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두 번째는 몸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갈등입니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신체의 급격한 성장과 변화 속에서 자신들이 누구보다 젊고, 건강하고, 강하다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신체를 맹신해 음주, 흡연, 게임에 몰두하거나, 부적절한 성관계 등을 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발생할 신체적 희생과 대가에 대해서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해 부모님들을 걱정하게 만듭니다. 반면 중년의 부모들은 노화가 시작되고 건강과 체력의 한계를 체감하면서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의 중요성을 자녀들에게 강조합니다. 이렇듯 자신의 신체에 대해 서로가 느끼는 인식이 달라지면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갈등을 맞이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독립과 관련된 갈등입니다. 사춘기 자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부모로부터 독립하기를 갈망하고, 부모와 연결되어 있던 것들을 하나씩 끊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부모들은 오히려 자녀들에게 더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밀어내고 떼어내려는 에너지와 당기려는 에너지는 충돌하고, 둘 사이는 자주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마지막은 친구와 가족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오는 갈등입니다. 이 시기 자녀들은 친구들과의 관계와 친밀감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친구들과 보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마련하기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오히려 가족의 친밀감과 소중함을 깨닫고 가족의식을 강화하고자 하는 욕구를 이전보다 더 크게 느낍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일상 안에서 잦은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사춘기 자녀와 중년기 부모는 자주 충돌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가는 자녀를 보는 부모의 마음은 걱정되고 괘씸한 마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갈등이 빚어내는 심리적 긴장 속에만 빠지다 보면 자녀를 갈등의 원인으로만 보게 되고 그 안에서 성장통을 겪고 있는 자녀의 모습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사춘기와 중년기는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아프게 하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성장 과정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기다릴 때, 자녀도 부모 자신도 자신이 내딛는 세계 위에 더욱 굳건히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갈등을 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신뢰하며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해 노력할 때, 지금은 나와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자녀가 이전과는 다른 성숙한 사랑과 신뢰의 바탕 위에서 나와 함께 걸어갈 둘도 없는 친구가 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1장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은 우리를 새로운 묵상으로 초대합니다. 잘 읽어보면 이 장면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광야로
나간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신 장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안전한 곳이 아닌, 험난한 시련의 장소로 내모셨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광야를 통해 자신을 단련하고 마침내 사명으로 나아가셨던 예수님의 삶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속 하느님의 모습은 사랑하는 아들을 내둘러 키우시는 짓궂으신 하느님입니다. 그러면서도 자비롭고 넓으신 눈으로 지켜보시는 하느님이시지요. 그런 하느님께서 참사랑으로 우리를 광야에 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적인 방황과 외적인 갈등을 겪으며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 죄와 하느님의 것 사이에서 유혹을 겪고 이겨내며 마침내 스스로 설 수 있게 될 것을 믿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중년기와 자녀의 사춘기를 함께 겪고 계신 부모님들 모두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지나온 광야의 시간을 돌아보고 그 안에서 은총을 발견하며 앞으로 삶의 관문을 열어갈 자녀들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기다리면서 응원해주십시오. 저도 여러분을 응원하겠습니다.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8) 냉담 중인 다 큰 딸의 신앙 회복은?
부모와 자녀 간 유대감 토대로 자녀 스스로 마음 열도록 다가가야
“신부님 저는 29살 딸에게 유년시절 신앙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딸에게 세례는 주었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성당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때 성당을 왜 다녀야 하는지 이유를 다섯 가지만 말해주면 다니겠다고 했었는데, 제가 답변을 못해 준 것이 아직까지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주변에서는 때가 되면 다니게 될 것이라 말하지만, 유년시절의 신앙생활의 추억이 없고, 이제 독립을 앞둔 딸에게 어떻게 신앙을 전해줄 수 있을까요?”
자녀 교육의 모든 면이 그렇듯 신앙교육에도 중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 시기는 바로 자신과 주변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유아기부터 자의식의 형성이 완성되는 청소년기까지입니다. 이 시기의 신앙체험은 자녀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으로 각인되기 때문입니다.먼저 유아기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밝혀 두었던 촛불의 따스함, 성찬의 전례 때 맑게 울리는 종소리처럼 오감을 통해 신앙의 분위기를 인식하지요. 아동기에 이르러서는 주일미사, 식사 전 후 기도, 아침 저녁기도 등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통해 신앙의 습관을 익혀 나갑니다. 그리고 성당에서 친구들과 놀고 함께 미사에 참여하면서 공동체의 기쁨도 알아갑니다. 청소년기는 친밀한 성당 친구들과의 관계에 몰입하는 시기로, 친구들과의 역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신앙체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공동체와 함께하는 캠프, 피정, 나눔, 교리시간 등을 통해 회심의 순간도 만납니다. 이렇게 한 아이와 하느님은 끈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끈이 단단하게 묶인다면 훗날 하느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때가 오더라도 다시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도 높지요.
자녀가 태어난 순간부터 각 시기에 맞는 방법으로 하느님과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님들이 이 역할을 놓치곤 합니다. 신앙을 이어주는 방법을 몰라서, 공부를 우선순위로 두어 ‘성당을 끊게’ 하면서, 신앙의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지 않아서 등 때를 놓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요. 그런 뒤늦은 후회를 하는 부모들을 만날 때마다 참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다행히 하느님께서는 자녀가 다 자란 후에도 몇 번의 기회를 더 주십니다. 그 기회를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자녀들의 몫입니다. 이때 부모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녀 간의 신뢰와 친밀한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부모와의 애정 어린 신뢰와 친밀감은 자녀가 부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수용하는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초대는 이성적인 가르침이나 계율을 전달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녀의 마음 속 도화지 위에는 이미 많은 것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가장 깊은 자리에는 이미 다른 것이 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뒤늦게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면 자녀는 부담스럽겠지요. 마음의 도화지 위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한편으로 밀어내야 하니까요. 따라서 이 시기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이어주기 위해서는 자녀 스스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섬세하고 부드럽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미 성장한 자녀를 하느님과 연결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는 바로 자녀의 결혼입니다. 결혼을 준비할 무렵부터 하느님 앞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자녀를 잘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너희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여는 것이 엄마의 평생소원이야”처럼 혼인성사의 의무를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로 바꾸어서 초대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미리 사제, 수도자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제 경험에도 사제, 수도자의 친절함과 환대, 그리고 가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조언을 통해서 신앙을 회복한 젊은 부부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기회는 바로 자녀가 아이를 낳았을 때 유아세례를 받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수호천사를 정해 주는 것은 부모가 없을 때라도 하느님의 천사가 아이를 보호해 줄 수 있게 연결하는 의미를 가졌음을 이해시키면 어떨까요. 유아세례는 아기뿐 아니라 그들의 젊은 부모가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자녀를 신앙 안에서 기를 때 그 가정이 어떻게 하느님의 보호와 은총 아래 놓이게 되는지 경험을 통해 알려 주셔야 합니다.
세 번째 기회는 가족의 중대사가 있을 때입니다. 자녀가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거나, 세상을 떠났을 때 자녀가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지금 너의 기도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우리 함께 기도하자. 하느님께서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은총의 기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카이로스(Kairos)인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일상의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는 자녀를 구원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실 것이고, 자녀의 삶 가운데 마음을 유연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기회를 다시 포착하고 하느님과 연결하는 것은 부모의 시선과 노력을 통해 가능한 일입니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한 그 자녀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니카 성녀가 아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방탕함을 걱정할 때 암브로시오 성인이 해 주신 말씀입니다. 조금은 먼 길로 돌아왔지만 인생에서 자녀를 구원할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이를 식별할 수 있는 눈과 초대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청해 봅니다.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9) 손자 유아세례 주기 망설이는 아들 부부에게
수호성인에게 자녀 맡기게 돼 냉혹한 세상에서 보호할 수 있어
“손자의 유아세례 건으로 신부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손자가 태어난 지 9개월에 접어들었음에도 아들과 며느리가 아직 손자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이유를 묻자, 아기가 성장해 제 의지로 종교를 선택하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3대째 가톨릭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꼬마 때부터 주일학교에 나가고 혼배성사로 혼인했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동주는 별안간 엄마 곁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러더니 엄마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엄마의 머리 냄새를 킁킁거리며 한참을 맡더니 만족한 얼굴로 다시 친구들에게 돌아가 신나게 어울려 놀았습니다. 아이에게 이 ‘엄마 냄새’는 세상을 향해 가는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 주고, 친구들과의 작은 투닥거림에 위로를 주는, 그야말로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는 특별한 표지인 것이지요.
오스트리아의 발달심리학자 로렌츠(Konrad Lorenz)는 인공부화로 갓 태어난 새끼오리들이 태어나자마자 처음 보는 연구자를 어미 오리로 여기며 졸졸 따르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로렌츠는 이 현상을 보며 양육자와 아이가 심리적인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양육자와 맺은 관계가 이후 아이가 자아를 발달시켜나가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힘이라는 것도 밝힙니다. 이 관계를 ‘애착’이라고 합니다. 학자들은 갓 태어나서부터 세 살까지 부모와 건강한 애착 관계를 형성한 아이는 자아존중감, 자아정체성, 가족정체성을 찾아갈 힘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어린 시절에도 ‘하느님 냄새’와 같은 표지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과의 ‘영적 애착’을 가진 아이는 세상의 어떤 냉엄함 속에서도 꿋꿋이 헤쳐 나가면서 다친 마음을 하느님 품 안에서 침묵 중에 위로받고 힘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심리적 애착이 3세 이전에 형성되듯이 제 경험으로는 영적 애착 또한 빨리 맺을수록 더욱 단단하게 맺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유아세례는 한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때에 하느님과의 단단한 영적 애착의 고리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아세례를 통해 하느님과의 단단한 고리를 갖게 된 아이는 어려움과 마주하는 순간 하느님의 냄새를 기억하고 곧장 그분 품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또한 그 안에서 무한한 사랑을 충전하고 다시 하느님 자녀로서 삶을 살아가겠지요.
교육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이 세상에 강제소환했으니, 스스로 세상을 헤치고 살아갈 수 있는 기술, 즉 의식주를 해결하는 법,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법 등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인생의 여정 중에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위기, 허탈감, 상실감, 좌절감 등을 헤칠 기술을 연마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홀로 머뭄이고, 침묵이고, 영적훈련입니다. 그 첫 단추가 ‘엄마 냄새’ 같은 ‘하느님 냄새’를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자녀가 어릴 때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저는 두 가지 의미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의 냉엄함 속에서 자녀가 천사의 보호 속에 놓이도록 맡겨드리려는 것입니다. 부모는 어린이집에서, 학교에서, 또 아이가 마주할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언제나 자녀의 보호자로 현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0)하신 말씀처럼 세례명을 줌으로써 수호성인에게 아이의 삶을 맡기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부모가 어찌할 수 없는 위험의 순간, 세상의 죄에 노출되는 그 순간 악이 감히 접근할 수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례 때 사제는 물로 세례를 베푼 후 이마 위에 크리스마 성유를 십자 모양으로 바름으로써 성령의 인호를 새깁니다. 이것을 과거에는 불도장을 새긴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악의 존재가 감히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느님의 것’이라는 표식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아세례는 부모의 부재에서도 자녀들의 현재와 미래를 하느님의 보호 속에 놓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자라서 신앙을 이해하고 스스로 세례를 청하기를 바라야 할까요? 하지만 이것은 성령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아기에게 세례를 주면 성령이 그 아기 안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께서는 아기가 훗날 꽃피우게 될 그리스도인의 덕성들을 키우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모두에게 특히 모든 아기들에게 기회를 주어야만 합니다. 이들의 삶 전체를 인도해주실 성령을 맞아들일 이 기회를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세례 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손자에게 하루빨리 세례를 주고 싶으신 마음을 자녀 내외에게 잘 전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신자의 의무를 강조하기보다 수호천사를 붙여주고 성령의 인호를 새겨주고 싶었던, 자녀를 키우면서 느꼈던 그 마음을 전달하면 어떨까요? 자녀 내외가 손자에게 세상의 무엇보다 가장 귀한 것, 바로 신앙을 이어줄 마음을 갖도록 부모님 자신의 나눔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님께서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 안에서 키우려고 했던 그 이유와 그 안에서 발견했던 성령의 도우심을 말입니다. 결국 자녀들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의 자녀에게도 가장 먼저 해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10) 신부님, 요즘 청소년들이 얼마나 바쁜지 아세요?
삶의 중심이 되는 가치와 신앙 확립, 인생의 고비에서 회복 탄력성 높여줘
“저는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2학년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저희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까진 열심히 성당에 다녔는데 첫째가 중학교에 올라가 친구들과 관계가 소원해지더니 성당에 안 다니겠다고 하더라고요. 둘이 매주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둘째도 성당을 안 다니겠다고…. 결국 저희 부부는 둘만 주일을 지킨 지 오래입니다. 가끔은 이래도 될까 생각하다가도, 주말마다 있는 큰 아이 학원 특강 시간을 생각하면 졸업 때까진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앙교육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고2가 사실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고, 대학교 가서 신앙생활 잘하는 청년들도 있잖아요? 신앙생활을 강요하는 것이 더 역효과 아닐까요?”
한 교사가 커다란 항아리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주먹보다 큰 돌을 항아리 속에 채워 넣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예”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테이블 밑에서 자갈을 한 움큼 꺼내 항아리에 집어넣고 흔든 후 다시 항아리가 가득 찼는지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번엔 “글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번엔 모래주머니를 꺼내 돌과 자갈 사이의 빈틈을 채우고 다시 항아리가 가득 찼는지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번엔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 한 주전자를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이 실험을 보여주었을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너무 할 게 많아도 노력하면, 새로운 일을 추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답을 들은 교사는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실험은 만약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을 넣지 못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설계하는 데 있어 우선순위와 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잠재력을 가진 우리의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자녀의 삶 안에 가장 먼저 넣어야 하는 큰 돌은 무엇일까요?
제가 30여 년간 만났던 수많은 청소년 중에는 수재인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그 친구들은 두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높은 자아존중감(self-esteem)이고, 두 번째는 삶의 중심이 되는 가치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리사회학자 에릭슨(Erikson)에 따르면 청소년기의 주된 발달과업은 바로 자아정체감(ego-identity)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아존중감을 바탕으로 현실적 자아(actual self)와 이상적 자아(ideal self)를 일치시키며 자아개념을 안정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고 일치할 때에는 스스로 목표한 것들을 잘 성취해 나갈 수 있지만, 부조화나 격차가 커지면 실망감, 우울, 불안, 두려움 등의 심리적인 부적응이 발생합니다. 특별히 이상이 높은 아이, 혹은 주변으로부터 받는 기대가 높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격차가 큰 경우가 많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 속에서 느끼는 심리적 긴장과 절망 등의 감정은 자아존중감을 흔들어 놓게 되어 올바른 자아정체감 형성을 방해합니다. 당연히 안정적으로 학습을 해나가는 데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지요.
우리의 삶은 좋을 때가 있다면 힘들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사회의 냉엄한 경쟁 안에서 불안과 두려움, 초조함을 느낄 때도 있지요. 이런 순간을 맞이했을 때 자아존중감이 높고, 깊은 신앙을 가진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과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고비 앞에서 이상만큼 해내지 못하는 현실적인 자아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중심에 있는 가치와 신앙을 꽉 붙들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서 자신의 페이스를 다시 회복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청소년기에 신앙이 주는 선물은 많습니다. 좋은 친구와 우정어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 언제든지 환대받을 수 있는 공동체, 자신과 타인의 존재에 대해 깊이 성찰할 기회, 그리고 훗날 빈 가슴을 채워줄 행복한 추억을 만들 기회도 있지요. 이러한 선물들은 특별히 청소년기의 혼란과 불안, 두려움 속에서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고 위기의 순간을 넘게 해줄 버팀목이 됩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선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경쟁이나 평가가 없는 제3의 공간(The 3rd place)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자녀가 신앙을 통해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을 받도록 돕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건물이 될 수 있도록 부모들에게 지혜로운 건축가의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인생에 어떠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는 자녀로 키우고 싶다면, 자녀라는 건물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아주십시오. “여러분은…하느님의 건물입니다…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코린 3, 9-11)
조금만 더 당겨주면 자녀가 더 많은 학업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 부모의 마음에는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은 초조함이 되어 부모의 시야를 좁게 만듭니다. 욕심이 자라나는 것을 감지했을 때는 바로 내가 아이에게 큰 돌을 넣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때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기초가 놓인 후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돌들을 먼저 채운 후에는 큰 돌은 영원히 넣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코헬렛 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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