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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에 관한 논쟁
김경일(상명대)교수의 저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이후 '유학논쟁'이 치열하였다.
문화일보에서 <유교는 과연 죽었는가?>라는 제목으로 1999.7.9부터 7.16일까지 6회에 걸친 집중 기사를 게재하였다. 다음은 그것을 요약 재편집한 내용이다.
▲ 유교(=유학)를 근대화의 장애물로 인식
19세기 중반, 동아시아 문명권이 서구 열강들의 기술과 무기에 굴복하면서 봉건적인 구습으로 전락했던 유교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도 근대화의 장애물 신세를 면치 못했다. 상하의 위계를 강조하는 유교의 가치체계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자유시장에서의 이윤추구에 걸림돌이 된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룬 것이다.
특히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유교의 현세적응 윤리가 개신교의 현세초월 윤리와 정반대로 기능하면서 아시아 근대화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됐다고 규정할 정도였다. 중국의 5.4운동이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유교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이 제기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일본에 이어 한국, 싱가포르, 홍콩, 타이완 등 동아시아의 유교권 국가가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룩하게 되자, 유교 국가의 교육열과 엄격한 노동윤리, 그리고 유교적 전통을 이어받은 엘리트 관료의 국가관리 능력이 성장의 동력이 되고 있다는 유교 자본주의론이 대두하였다.
유교적 인문정신이나 노장의 자연주의 사상 등이, 인간성과 공동체 윤리를 파괴하고 환경문제 등을 초래한 서구 문명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유교자본주의론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초래된 1997년 11월을 고비로 급격히 기세가 꺾인다. 환란의 주요원인이 유교문화권 특유의 정실자본주의와 이로 인한 부패라는 격렬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김경일(상명대)교수에게 들어본다.
유교는 역사적으로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여성차별,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본질, 부패 등의 역기능을 노정해 왔다. IMF가 초래된 것도 이 때문일 수 있고, 이에 대해 철저히 반성을 하자는 것이다.
유교 이데올로기를 담은 논어는 어디까지나 상류 엘리트, 기득권자를 위한 텍스트였다. 유교는 상류사회나 남성, 기득권자의 덕목을 설명할 때는 이를 데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전체 사회에 적용될 때는 대단히 부패한 것으로 다가온다.
이익을 분배하거나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정(情)이 개입해 데이터를 왜곡시키고, 끼리끼리의 이익을 도모하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전체의 경쟁력을 저하시킨다. 이같은 역기능을 막기 위해서는 혈연․지연․학연에 관계없이 모든 정보를 평등하고 투명하게 공개하고 공유하는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유교의 이른바 덕치도 그 가치체계는 가치를 스스로 제공하고, 실행하고, 감독하는, 그래서 제어장치가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유교문화 체제에서 부패를 거를 만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 유석춘 교수(연세대 사회학) 유교자본주의론(긍정적)
나는 오히려 '유교자본주의란 정치와 경제가 유착을 하는 것이고, 정당하게 유착하면 효과적이다'고 말하고 싶다. 포항제철이 정당한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간이 주도해서 과연 포항제철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가능했겠는가. 부패를 막을 안전장치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상소제도 같은 것으로 절대왕권을 제어해 왔다. 1980년대에는 학생운동, 요즘에는 언론과 시민단체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유교를 버리고 그 대안인 서양문명은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고 있나, 서양사회에서 공동체가 남아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혈연․지연․학연만 해도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미국식 경제논리에 따르면 1%의 승자와 99%의 패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혈연과 지연관계 속에서는 가족과 친구와 선․후배가 서로 패자를 돌봐주지 않는가.
공개하는 것이야말로 유교적인 개념이다. 공사(公私)를 구별해서 공을 우선해라, 선비는 청렴하게 살아라는 등의 개념은 유교의 특징이다. 유교의 수직적인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비판하지만, 유교의 이상적인 모델은 성인, 군자, 선비이다. 누구나 열심히 수양해서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그릇이 크고 작으니까, 수직적 인간관계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면에서 모든 사람에게 가능성을 열어두는 가장 인간적인 시스템이다.
조선을 이야기하면서 관찰자의 시점을 현대로 둬서는 안 된다. 서양 중세와 조선을 놓고 보면 조선이 훨씬 발전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도 중세에 나쁜 일을 많이 했다. 그런데도 서양에서는 이를 완전히 부인하지 않고 개신 기독교가 나와서 근대를 열었다. 우리도 개신 유교를 해서 동양사회를 중흥하자. 문제는 어떻게 개신하느냐는 것이다.
▲ 유교민주주의 의미( 연세대 함재봉 교수)
민주주의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등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성격, 문화, 전통에 맞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가치이면서도 각 나라의 문화적 특수성에 맞게 수용될 때 꽃을 피울 수 있는 가치요 체제다.
유교는 우리의 과거만 규정하는 사상이 아니다. 유교는 그 이상과 이론에 있어서 민주주의와도 충분히 조화될 수 있는 사상이다. 현대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시민은 확실한 자아관에 기반한 자신감과 함께 건전한 가족관, 확고한 국가관, 그리고 세계시민으로서의 개방성과 포용성 등 네 가지 자질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유교는 분명 확고한 자아관(修身)과 함께 건전한 가족관(齊家), 강력한 국가관(治國), 그리고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平天下)을 개개인으로부터 요구한다. 개인과 가족, 국가와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민족과 국가, 사회는 나름대로의 사고방식, 가치관, 사상에 따라서 균형점을 찾는 작업을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고유의 문화와 전통이 생성된다. 따라서 이 작업을 포기하는 민족이나 국가, 사회는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을 가장 중요시한다. 가족과 국가, 세계는 개인을 위해서 존재하고, 따라서 가족과 국가, 세계라는 공동체는 개인들끼리 맺는 계약의 결과라고 본다.
또 사회민주주의는 계급을 가장 중요시한다. 개인과 가족, 국가, 세계를 모두 계급간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본다.
그렇다면 유교민주주의는 어떤가. 유교는 가족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러나 이는 천박한 혈연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유교가 말하는 가족이란 인의예지의 가치가 실현되는 공동체다.
개인대 개인의 관계는 물론 국가와 세계라는 커다란 공동체 내에서도 인의예지라는 가족적 가치관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 유교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가 개인적 권리를, 사회민주주의가 계급이해를 가장 중심적인 가치로 삼는다면 유교민주주의는 인의예지를 추구하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서구사회는 고유의 문화유산인 시민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늘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군자 또는 선비라는 유가의 이상적인 인간형을 민주주의와 결합시켜 구현하려는 것은 이보다 더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작업이다.
세계화와 국제화, 정보화와 자본주의화는 획일적인 세계의 도래를 의미한다. 거대한 세계사의 조류를 거부하는 신쇄국주의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조류에 휩쓸려버릴 수 있는 맹목적인 신개화주의에 빠지지도 않으려는 문제의식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자아관과 가족관, 국가관, 세계관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이다. 유교민주주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화두다.
▲ 버려야할 유산 부정적 덕목(한경구 교수)
유교는 여러 가지를 의미하고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주군(主君)과 가장(家長)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라는 의미에서 충(忠)과 효(孝)가 강조되고 중국에서는 보다 보편적인 덕목인(仁)과 의(義)가 강조된다. 국가나 기업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을 유교적이라 하기도 하고, 부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전투를 중지하고 귀향하는 것도 유교적이라 한다. 자신의 본업에 힘쓰는 것도 유교적이라 하며, 돈벌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경서를 읽으며 마음을 수양하는 것도 유교적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유교가 우리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논의할 때 먼저 어떠한 유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유교의 가르침을 통속적으로 해석하여 단지 가족을 중시하고 자녀의 교육에 힘쓰는 것이나 어른을 공경하고 신의로 벗을 사귀는 것을 유교라고 한다면 유교의 역할은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가 아랫사람에게 양보와 침묵, 그리고 복종을 강요하고 아랫사람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해버리는 권위주의적인 태도, 또한 후배나 제자, 부하의 노력의 착취를 장유유서(長幼有序)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해왔다면 유교는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전세계가 일본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예찬하고 또 일본을 모델로 우러러보던 1980년대 초반에, 경제학자 모리시마 미치오(森嶋通夫)는 '왜 일본은 성공했는가?' 를 써서 일본적 유교자본주의가 연공서열과 종신고용을 지주로 하는 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하면서도 일본의 성공에 인용부호를 사용함으로써 일본의 성공에 대하여 일정한 회의를 표시한 바 있다.
일본적 유교자본주의는 발전의 대가로 착취와 이중구조, 그리고 파시즘을 결과하였으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정신의 황폐, 산업과 금융의 황폐, 그리고 교육의 황폐로 나타나고 있으며 일본은 결국 몰락할 것이라는 것이 그가 최근 저술한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의 요지이다.
우리와 서구의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는 것도 좋고 서구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경유착이나 연고주의, 또는 권위주의까지 유학이나 한국적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결국 우리의 선택을 제한하고 구속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 세계화 시대에 유교사상의 메시지 <송영배 서울대 철학과교수>
마르크스가 일찍이 『공산당선언』에서 말했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확대재생산이 모든 봉건적인, 요컨대 분할적인 사회관계의 종말을, 심지어는 동서양의 해체를 통한 하나의(세계)시장에로의 통합을 가져오리라는 예언은 바로 지금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실감나게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유통과 획득은 세계 국가들 간의 공간적인 제약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사실 이런 세계화의 거센 물결 앞에서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세 이전에 생겨났던 인류의 다른 위대한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물론 유교사상에는 여러 면에서 전근대적 사회의 특징적인 사회질서의식들, 예를 들면 가족중심주의, 가부장적인 권위질서, 남녀의 불평등 등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페미니스트나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님을 비난하는 것이 현실의 문제의식을 과거에 투영시켜서 억지로 재단해 내려는 시대착오적인 무리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면, 유교사상이 안고 있는 시대적 제한을 오직 유교 자체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유교적 가르침의 초시대적인 보편적 메시지는 무엇일까?
공자(BC 551~479)는 물론 2천5백년 이전의 구식 인물이다. 그리고 사실 그의 생존 당시를 전후로 한 고대중국사회, 말하자면 BC9~3세기에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종래의 크고 작은 수많은 봉건국가들이 하나의 대규모 관료주의적인 중앙집권국가의 형성을 지향하며 변화․발전해 나간 엄청난 사회적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공자는 그의 당대의 이런 사회적 변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공자에 의하면, 더 이상 세상에는 질서가 없었다(天下無道․천하무도).하지만 이런 혼란스런 대변혁의 와중 속에서 공자가 파악한 인간의 본질은 고전교육을 통한 자기계발의 가능성에 있었다. 공자는 바로 배움(학․學)이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키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개개의 인간들은 이런 배움을 통한 자기계발의 정도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구분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배움의 과정은 한편으로 고전들, 즉 시(詩), 서(書), 예(禮), 악(樂)등을 익히고 배움으로써 자기인격을 계발시킬 수 있는 도덕적 인격을 닦아나가는, 즉 수기(修己)의 과정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을 갖춘 군자(君子․이것은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인격을 갖춘 선도자<先導者>, 또는 경영자<經營者>가 될 것이다)로서 자기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지도․계발해줌으로써 이기주의에서 출발하는 개인적, 또는 사회적 갈등들을 될수록 조화와 화합으로 이끌어서 안정된 태평세를 이루어 내려는 것이라고 풀이해 볼 수있다.
이러한 유교의 이상은, 전문용어로 말하면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실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개개인의 인격의 완성을 통하여 그런 성숙한 인격자들이 이상적 태평세를 이루어 내야하는 원대한 꿈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사상의 핵심은, 학문과 도덕계발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인격의 계발과 동시에 주위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 속에서 그들을 지도하고 깨우쳐서, 그들과 더불어 조화로운 안정된 사회, 유교적 용어로 말하자면 대동(大同)사회의 실현에 있다. 따라서 개인윤리와 사회윤리가 하나로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유교사상은 말하자면 인위적 사회 속에서 자연적 공동체의 조화로운 이상을 구현해 내려는 인문주의적인 이상세계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 당대의 자신의 문제를 풀지 못하는 부담을 결코 공자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유교사상 그 자체는 그 나름대로 훌륭한 인문주의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반민주 반인권 조장하는 유교 <정영태 인하대교수>
헌팅톤은 '동아시아 유교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저해요인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유교의 사상체계에서 어떤 요소가 가장 핵심적인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지배적인 해석은 민(民)에 대한 충성이나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인정하는 부분보다는 군주나 가부장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민(民)으로부터 복종을 얻어내는 방법과 관련된 요소, 즉 반민주주의적인 요소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경험으로 볼 때도 지금까지의 유교는 민주주의나 인권을 제대로 옹호한 적이 없으며, 폭정에 항거하는 민(民)을 오히려 역적으로 몰았던 경험을 보더라도 반(反)민주주의와 반(反)인권을 조장하는 요소가 유교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근대화프로젝트도 미완인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개인보다는 집단을, 자유보다는 권위를, 권리보다는 책임을 강조하는 유교는 기존 질서를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
▲ 유교와 여성 [김종락 기자]
여성주의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유교에 대한 반대론부터 보자.
전통 유교 이념에서 남녀 차별과 여성 예속 이데올로기의 근원으로는 보통 오륜(五倫) 중 하나로, 남녀 관계를 규정한 부부유별(夫婦有別)이 거론된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부부유별은 내외법(內外法)에 따라 구체화하는데, 내외법에 의한 남녀간의 생활과 사회적 공간 분리 규범은 여성이 안사람인데 비해, 남성을 바깥양반으로 규정했다.
즉 바깥의 사회활동을 당연시한 남성과 달리 여성은 삶의 대부분을 외부 세계와 격리된 채 집 안에서 보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내외법은 또 남녀의 노동 분업에 더해 행동과 가치의 차이도 강조했는데, 여성은 약하고 부드럽고 순종적인 반면, 남자는 강하며, 여성은 천하고 남성은 귀하다(남존여비․男尊女卑). 여성이 부드럽고 순종적인 것은 일생 동안 강하고 주도적인 세 사람의 남성, 즉 아버지, 남편, 그리고 아들에게 순종하고 따라야 하는(삼종지의․三從之義) 이유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다 유교의 가족 중시 이데올로기와 혈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은 여성에 대한 정절 요구로 이어졌다. 결혼 생활중 간통, 또는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첩을 질투하는 등의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할 경우 여성은 가족으로부터 쫓겨났으며, 특히 일부종사(一夫從事), 불경이부(不更二夫)라는 억지춘향논리 아래 여성은 전 생애를 통해 오로지 한 남자만을 섬겨야 했다. 이에 비해 남자는 혈통을 잇기 위해 첩을 거느리는 것이 인정됐으며, 다른 여성과의 혼외정사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여성주의 관점에서 유교를 되살리는 것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다. 유교 삼경(三經) 중 하나인 주역(周易)에서 여성, 또는 여성으로 상징되는 땅, 음 ,암컷 등은 생성의 중요한 전제다. 여성은 남성, 또는 남성으로 상징되는 하늘, 양, 수컷 등과 짝을 이뤄 인간과 만물을 탄생시키고 길러내며, 이 탄생은 여성적 원리와 남성적 원리의 대등한 관계를 통해 이뤄진다. 남녀의 차이성과 다양성, 수동과 능동, 순응과 주도가 대등한 관계에서 교차되고 교환됨으로써 합일을 거쳐 생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역에서 말하는 생성이 생물학적 영역뿐 아니라, 사회․정치적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될 경우 남녀의 차이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평등의 사회를 꿈꾸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특히 주역뿐만 아니라, 유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인 논어(論語)에서도 여성 차별적인 문구는 거의 없는데, 이는 여성을 차별하는 내용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서구 다른 종교의 경전과 크게 대비된다.
유교체제하에서의 한국 여성이 동시대 서구 사회의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지 않다. 가령 한국 여성이 결혼을 한 뒤 자신의 성을 버리지 않는 것만 해도, 결혼 뒤 남편의 성을 따라가는 서구 사회의 여성보다는 훨씬 높은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조 율곡이 서얼차별 대우나 양자제 폐지 등과 같은 급진적인 주장을 펴고 있는 것도 유교의 본질은 남녀가 평등하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다. 유교의 여성 억압적인 태도는 조선조 유교가 가부장적 통치 이데올로기로 고착되면서 형성된 부정적 유산으로, 결코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 구체적 운용방식에 따라, 도움과 해악을 동시에 끼친다. (김종락 기자)
유교라고 하면 광의로는 공자 이후 송대 정주학(程朱學)을 거쳐 청말의 양명학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철학 체계에 동양의 문화․생활양식․삶까지 포괄하는 것인데, 그 범위를 확정하지 않은 채 이를 버릴 것인가 고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구체적으로 어떤 유교를 말하는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 질 것이다.
이를테면 함재봉교수의 경우 유교를 한국인의 재래식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사상으로 보고, 우리가 새로운 이상으로 받아들이고자하는 민주주의 체제와의 접목을 꾀했다. 당연히 그에게 유교는 과거만 규정하는 사상이 아닌, 그 이상과 이론에 있어서 민주주의와도 충분히 조화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결론이 가능했다. 유교적 가르침의 초(超)시대적인 메시지에 착안한 송영배교수도 공자사상의 핵심이 자기 인격의 계발과 대동사회의 실현에 있다며 유교 옹호론을 펼쳤다.
이에 비해 한경구 교수는 유교가 지난 50년간 한국의 정치사회 발전에서 어떻게 사용됐으며 앞으로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를 검토, 유교는 권위․족벌․연고주의를 부추기며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부정적 덕목이라고 결론지었다. 특히 정영태 교수는 유교 옹호론자에 의해 서구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는 민본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민본주의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상하, 수직관계를 전제로 한 통치방식의 하나로, 오히려 민주와 인권에 역행할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옹호론을 편 유석춘 교수는 다소의 부작용이 있다고 해도 유교를 완전히 부인하지 말고 개신(改新)과정을 거쳐 동양사회를 중흥하자는 것이었고, 반대론자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김경일(상명대)교수는 김교수는 유교를 철저히 재검토, 유교적인 것이든, 서구적인 것이든 21세기 한국사회의 발전에 유효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교 옹호론과 반대론의 편차는 그리 크지 않다. 결론은 지극히 평범할 수밖에 없다. 유교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나 사상 체계도 취하기에 따라 즉 구체적 운용방식에 따라, 도움과 해악을 동시에 끼칠 수 있는 것이다. ●
소답자한 30호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