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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이왕가(李王家)로 편입된 조선왕족 중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일본의 왕가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家)의 마사코(方子) 부부의 저택으로, 원래 롯본기(六本木)의 도리이자카(鳥居坂)에 머물렀다가, 현재의 아카사카(赤坂) 기오이쵸(紀尾井町)에 있었던 기타시라카와노미야(北白川宮)가 타카나와(高輪)로 옮겨감에 따라, 그 터 2만평을 하사받아 지은 저택이다. 도쿄도 내, 종전 이전의 왕실 건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이 건물 이외에 그랜드 프린스 호텔 타카나와(グランドプリンスホテル高輪) 부지 내에 있는 구 다케다노미야 저택(旧竹田宮邸), 도쿄도 정원미술관(東京都庭園美術館)이 된 구 아카사카노미야 저택(旧朝香宮邸), 성심여자대학(聖心女子大学) 구내에 있는 구니노미야 저택(久邇宮邸)의 4 동 뿐이다. 2011년에 구 이왕가 저택(旧李王家邸)으로 도쿄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치요다구( 千代田区) 기오이쵸(紀尾井町) 일대는 에도성(江戸城) 소토보리(外堀) 근처에 자리하고 있어, 다이묘야시키(大名屋敷)와 일본 왕족의 저택 등이 밀집해온 역사가 있으며, 현재는 아카사카(赤坂) 미츠케 역(見附駅), 나가타쵸 역(永田町駅)이 위치해 있으며, 주위에는 대규모 고급호텔이 밀집해 있다. 에도시대 기슈도쿠가와 가문(紀州徳川家)의 다이묘야시키(大名屋敷)를 비롯,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 나카야시키(尾張徳川家中屋敷), 히코네 이이 가문 나카야시키(彦根井伊家中屋敷) 등이 있었고, 메이지시대인 1884년에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가문(北白川宮家)에서 거주했었으며, 영국 건축가 죠시아 콘더(Josiah Conder, 1852-1920)의 설계로 지어진 벽돌조 2층 건물의 고딕 건축물이 있었지만, 1894년의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1912년에 기타시라카와노미야 가문(北白川宮家)이 타카나와 미나미쵸(高輪南町)로 옮겨간 이후, 1930년 옛 궁내성 나이쇼료(旧宮内省内匠寮) 공무장 기타무라 코우조우(北村耕造, 1877-1939)와 기사 곤도 요우키치(権藤要吉, 1895-1970)가 영국 튜더 양식 건물로 설계하고, 시미즈구미(清水組)가 시공하여 이왕가(李王家) (英親王) 이은(李垠) 부처 도쿄 저택(東京邸)이 지어졌다.
전후 1955년에 31실의 객실을 갖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赤坂プリンスホテル)로 개업했고, 이후 1960년 5층 별관, 1983년 신관을 신축하였고, 시설 노후화로 2011년 호텔 영업을 종료하고, 신관은 철거되었다. 이 즈음 발생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대규모 피난민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2011년 3월 24일, 도쿄도청(東京都庁)은 후쿠시현(福島県) 피난민의 수용 시설로 신관을 활용한다고 발표했다. 4월 9일-6월30일까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재민을 받아들이면서, 건물 해체는 7월 이후로 미뤄지게 되었다.
2013-2016년에 걸친 기오이쵸(紀尾井町) 일대 재개발 당시, 호텔 시설은 인근 부지가 '도툐가든테라스 기오이쵸(東京ガーデンテラス紀尾井町)에 더 프린스 갤러리 도쿄 기오이쵸(ザ・プリンスギャラリー 東京紀尾井町)로 편입되었으며, 지하부분에 연결된 사무실-호텔 건물 지반 공사를 위해 저택 전체를 레일에 올려 유압 잭으로 2번에 걸쳐 30-44미터 가량 예인하였고, 내부 인테리어는 창건 당시의 자료를 바탕으로 주요 부분을 복원하였다. 이후 저택은 2016년 결혼식장 아카사카 프린스 클래식 하우스(赤坂プリンス クラシックハウス)로 리뉴얼 후 개장하였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은 대한제국(大韓帝国) 황제 고종(高宗, 1852-1919)과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 1854-1911) 사이에 난 7남으로 1897년 태어나, 원래는 계승순위에서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에 서열에서 밀렸지만, 당시 내명부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던 엄 귀비의 영향력 탓이었는지 1907년 황태자가 되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을 지근에서 보필했던 공과 함께 1902년 의친왕 추대를 획책했던 일심회 사건으로 당시 미국 로어노크 대학 유학중이었던 의친왕이 경원시되었을 정황을 감안하면 의친왕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당시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1907년 강제 퇴위당했던 고종황제가 이에 대한 항의로 황태자를 영친왕으로 책봉하였지만, 이 역시,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주도로 당시 일본 왕세자였던 요시히토(嘉仁, 1879-1926)를 조선으로 초대하여,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영친왕을 유학보내기를 주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해 12월 일본으로 유학하였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의도적으로 친근한 할아버지로 어린 영친왕을 곁에 두면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식시키고자 하였다. 이은(李垠)은 1910년 이후 왕세자, 일본의 왕족에 준하는 왕족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이후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学校)를 졸업하고 육군보병중위(陸軍歩兵中尉)로 임관하였으며, 영친왕에게는 이미 민갑완(閔甲完, 1897-1968)이라는 약혼자가 있었지만, 일본의 왕가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家)의 마사코(方子)와 결혼하였다.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왕세자빈은 1901년,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모리마사 왕(守正王)과 이츠코 비(伊都子妃)의 장녀로 태어났는데, 쇼와 일왕(昭和天皇, 1901-1989)의 혼인 간택 후보이기도 했던 마사코(方子)는 가쿠인 여자중등과(学習院女子中等科) 재학중이었던 15세 때, 나시모토노미야 가문(梨本宮家)의 오오이소 별장(大磯別邸)에 머물던 중에 무심코 읽었던 신문기사로 자신의 약혼사실을 알고 충격받았다고 한다. 이은(李垠)과 마사코(方子) 간의 결혼은 내선일체(内鮮一体)를 노린 정략결혼이었다.
이은(李垠)이 이 저택에 살았던 것은 1930년 준공 후 1952년까지였으며, 종전 전까지는 유복한 편이었는데, 이는 이왕직을 승계한 지위 뿐 만 아니라, 현역 육군 중장이기도 했기 때문이었고, 일본 입장에서 이용가치가 있었을 뿐 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일본 왕실에 편입된 왕공족이기 때문에 군인이긴 했지만, 안전이 보장된 후방 보직에 있기도 했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동경, 향수, 고독이 그를 괴롭혔는데, 어느 날 이방자 여사가 공기에나 쓸 새하얀 조약돌을 발견해서, 다 큰 어른 방에 있을 듯한 물건이 아니라 물어보니 그가 머뭇거리다 "어릴 적 고향이 너무 그리워 한국으로 창덕궁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조약돌을 전해줬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 뒤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조약돌을 계속 바라보고 만졌다고 한다. 고종, 엄귀비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며, 순종 사후 이왕직을 승계하고 나서야 종묘를 들를 수 있었으나, 그나마도 기간이 짧아 제사를 지내지 못했으며, 나중에 자신의 집에 위패를 세워 간이 종묘를 만들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 붕어(崩御) 후 하루 뒤, 순종의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 지위를 계승하여, 이왕직 내부에서는 '사왕 전하(嗣王殿下/しおうでんか)'라고 불렀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을 도쿄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동경(東京) 이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이쇼 일왕과 어린 시절에 만나 친분이 있었으며, 훗날 지방에서 요양하다 죽기 직전에 영친왕을 찾아오기도 했다. 다이쇼 일왕은 영친왕과 한국어로 대화하고 싶어서 황태자 시절부터 꾸준히 한국어를 배웠지만 당시 그는 뇌일혈로 말이 어눌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지내던 이복 여동생인 덕혜옹주가 조현병으로 의사표현을 못하자 이복오빠로서 후견인이 되어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을 허락했지만 자신의 생계가 어렵던 시절에도 정신병원에 돈을 대주는 등 나름 열심히 동생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는 일제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두루 친분을 맺었다. 관동 대학살 당시 영친왕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궁내성 제 2대기실 앞에 쳐진 텐트 속에서 1주일 동안 피신해있었다고 하며, 이방자 여사의 말에 의하면 조선인 학살 소식을 들은 영친왕은 슬픔과 분노로 목소리를 떨고 있었으며 1주일 내내 눈물을 글썽이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왕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일본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았으며, 1917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9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군생활을 시작, 1923년엔 일본 육군대학을 35기로 졸업하고] 일본군의 육군참모본부에 배속되었고, 1935년 대좌로 진급, 이후 1938년 육군 소장, 1940년에는 육군 중장에까지 올랐다.
1928년 근위보병 제2연대 휘하의 대대장, 1935년 우쓰노미야 보병 제59연대 연대장, 1941년 제 51사단 사단장을 역임한 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육군 중장으로서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일본 육군 제1항공군은 1942년 4월 13일 창설된 부대로 주로 미국의 일본 본토 폭격에 대응하기 위한 본토방공을 책임지는 아주 중요한 부대였다. 사령관은 일본육군 중장, 사령관을 보좌하는 참모장은 일본육군 소장이 보임되었다. 부대 창설 이후 1945년 종전시까지 총 4명의 사령관이 있었는데, 다른 3명은 재임 기간이 길어봤자 1년도 안될 정도로 짧았지만 제3대 사령관인 영친왕은 거의 2년 가까이 사령관 자리에 있으면서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재일조선인은 공식적으로 무국적이 되었으며, 1947년 왕실전범(皇室典範)이 시행되면서, 기존 왕가의 예우를 받았던 일본 왕실 내 11 친왕가(親王家)가 평민이 되었다. 연합국 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의 지침에 따라, 방계 왕족이었던 후시미노미야(伏見宮) 요시히토 친왕(栄仁親王, 1351-1416) 후손, 즉 후시미노미야(伏見宮)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 칸인노미야(閑院宮), 야마시나노미야(山階宮), 키타시라카와노미야(北白川宮), 나시모토노미야( 梨本宮 ), 쿠니노미야( 久邇宮 ), 카야노미야( 賀陽宮 ), 히가시후시미노미야( 東伏見宮 ), 아사카노미야( 朝香宮 ), 히가시쿠니노미야( 東久邇宮 ), 타케다노미야(竹田宮) 가문 출신이 평민이 되었고, 재산이 국고에 귀속되었다.
이 때 이왕가(李王家)도 평민이 되면서 거액의 재산세가 부과되어 경제적으로 궁핍해졌으며, 생계를 위해 저택의 절반을 참의원(参議院) 의장 공사(公舎)로 임대해주다가, 결국 저택을 매물로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어, 1952년, 세이부그룹(西武グループ)의 전신인 고쿠도케이카쿠코우교우(国土計画興業) 부동산회사에 건물을 매각하였다.
매각 이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주일 한국 영사관 부지로 이왕가저를 매입하려 했던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평판은 더 나빠졌다. 이 시기에 따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영친왕은 이방자 여사의 친정 구 나시모토노미야 가문과 몇몇 재일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근근히 생활했다고 한다.
평생 일본에서 살았으나, 한국어가 유창했으며, 1950년에는 "A First Book of Korean"이라는 제목의 한국어 교본을 레지널드 호레이스 블라이스(Reginald Horace Blyth)와 함께 영어로 직접 집필하기도 했다. 이형근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조선인 동기생 생도들과 함께, 명목상, 조선의 상징 그 자체였고, 그 당시 식민지 출신으로 심정적으로 기댈 만한 어르신이었던 영친왕을 찾아갔는데, 당시 영친왕은 조선인 생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실내에 조선인밖에 없는데도 일본어로 격려를 해주어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천황의 항복 선언 다음 날, 다시금 영친왕을 찾아갔을 때 굉장히 유창한 한국어를 쓰는 것을 보고 더 놀랐다고 한다. 주변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자가 없었단 걸 생각하면, 한국어를 전혀 잊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철저히 냉대했으며, 국내에는 친일 황족이라며 증오하는 여론도 있었는데, 의열단 출신으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을 역임한 박건웅의 경우, "동경의 이왕은 민족 반역자인데 왜 광복 후 자살하지 않았느냐."고 발언하기까지 했고, 영친왕도 이 발언을 들은 직후 큰 충격을 받고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영친왕은 1945년, 1948년 두 차례에 걸쳐 귀국 요청했지만, 처음에는 미군정이, 두번째는 이승만 대통령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대한제국 당시 고종이 전제왕정을 선포해 황제 독재를 지향했으므로 대한제국으로의 복귀는 민주공화정을 위협할 수 있으로 공화주의자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 이승만 개인적으로 1947년까지 일본의 최고위 왕족으로서 풍족히 살던 직계 황족들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의견이 있고, 1899년 고종의 퇴위를 꾀하고 공화정을 세우려고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받은 바 있어 구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고,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배타적인 입장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어떤 세력도 용인하지 않으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 영친왕이 재일 미군정 주최 만찬에 참석했다가 이승만을 우연히 만났는데 영친왕이 넌지시 자신의 영구 귀국을 논의해보려 했으나, 이승만은 영친왕을 외면하며 "오든 가든 마음대로 하시구려."라며 약간 무시하는 것처럼 홀대했다고 하며, 영친왕은 나중에 이 일화를 기록하며, "대단히 실망스러운 날이었다"고 표현했다.
이승만 정부에서 귀국을 거부한 표면적인 이유는, 영친왕이 일본 황족으로 살았던 것 자체가 일본 국적을 취득한 셈으로 보았고, '영친왕은 일본인이 되었다'고 유권해석하였고, 또한 일본 정부에서도 호적 기준으로 영친왕 부부를 재일 한국인으로 해석하여 일본 국적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부부가 모두 무국적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 정부의 조치가 모순이 있었으며, 1948년 5월 11일 제정된 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11호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에서 조선인을 부친으로 둔 사람에게 조선 국적을 부여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조선 국적이 대한민국 국적으로 일괄 변경되었던 조치와도 맞지 않은 해석이었고, 다소 감정적인 대응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왕가)의 재산 상당부분을 국고로 귀속시켰지만, 한국 동란 이후 남은 구 황실의 사유 재산은 사동궁, 창덕궁 낙선재 등이 전부였으며, 이런 상황 속에서 영친왕은 아내 이방자에게 "나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라며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또한 GHQ의 황실전범 시행후 평민 신분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로 귀국도 못한 상황에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면서 점점 고독해졌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오는 사람들도 사기칠 궁리만 하여, 결국 큰 사기를 당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도 잃고 물질적으로 더욱더 궁핍해졌다. 이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방자 여사를 만나러 온 한 여인이 집에서 누군가가 뒤돌아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영친왕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친왕은 누가 왔는지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앉아 있었으며 그녀가 나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하며, 그녀는 영친왕에게서 지독한 쓸쓸함을 느꼈다고 한다.
한편, 영친왕의 의사와 관계없이 제정복고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는데, 1952년 7월 12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이유립, 이용하 등의 주도 하에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고, 당시 일본에 있던 영친왕을 국가 원수으로 모시는 등의 계획 하에 일을 꾸몄으나, 사전에 적발되어 체포되었으며, 5년 후에 무혐의 처분이 되었지만, 비록 영친왕이 직접 관련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이승만 정부가 더욱 영친왕을 경계하는 명분이 되었다.
1957년, 미국 유학 중이었던 아들 이구를 보러 미국으로 가려고 했을 때 발생한 여권 문제 때문에 영친왕이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국내 여론이 악회되었는데, 영친왕의 말에 따르면, "국적 같은 것은 나중에 다시 쉽게 회복할 수 있을 줄로 알았다"고 술회하며 일본 국적 취득이 온전한 자신의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아무래도 오랜 왕공족으로서의 생활에 따라 근대법 체제 등에 무지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이다.
1955년에는 조현병 환자인 덕혜옹주의 의사 결정 능력이 전무했기에 영친왕 부부는 후견인 자격으로 여동생인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간의 이혼에 합의해주었다. 1958년 뇌일혈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다고 하며, 1961년에 아들 내외 이구 부부가 있는 하와이를 들렀다가 일본으로 돌아오던 중 뇌일혈이 재발하여, 실어증이 생겼다고 한다.
5.16 쿠데타 이후 영친왕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수장이 된 장도영에게 편지를 보내 5.16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명하였고, 이후 박정희는 이승만과 달리 영친왕에 대해 호의적인 자세를 보여 영친왕은 한국 국적을 다시 회복하였고, 일본에 유학이란 명분으로 인질로 끌려간지 56년만인 1963년 뇌혈전, 뇌연화증 등으로 혼수 상태인 채로 귀국하였다. 박정희는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의 귀국은 불허한 대신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상당한 호의를 보였다. 1년간의 서울 명동성모병원 병상 생활 후 퇴원하여 이방자 여사와 함께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일반주택과 창덕궁 낙선재에서 국고 보조금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자신과 덕혜옹주의 병원비 300만 원 가까이 밀리는 등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7년 후인 1970년 향년 72세로 작고했다.
5월 9일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영친왕의 시신을 모신 재궁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부왕인 고종, 형인 순종이 안장된 홍유릉 능역으로 운구하여 '영원(英園)'이란 이름이 붙은 조선/대한제국 왕릉 최후의 능원에 안장했다. 신위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으로서 종묘에 모셨다. 그는 대한제국 황태자이었지만, 생전에 황제였던 적은 없었고, 대한제국 시대 황태자릉의 전례가 없어,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문조의 수릉을 전거로 삼아 조영되었다. 이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그를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이라는 사시(私諡)로 추존했다. 영친왕과 이후 사망한 이방자 여사의 신위를 마지막으로 종묘의 정전 및 영녕전의 제실(祭室)이 정확하게 채워졌다. 영친왕의 장례식 때 일본 황족들이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조문했는데,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부인이자 이방자 여사의 이종 사촌 여동생인 세쓰코(勢津子) 비,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부부 등이 빈소에 왔다.
한편, 이방자(李方子)는 이후에도 한국에 머물며, 당시 한국에서는 실행되지 않았던 장애아 교육에 힘썼고, 재한 일본인 아내들의 모임을 만드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는데, 지적장애아 시설 '명휘원(明暉園)' 등의 시설을 건립하였는데, 명휘(明暉)는 이은(李垠)의 아호이다. 장남 이진(李晋)은 생후 8개월에 급사했고, 차남 이구(李玖, 1931-2005)는 2005년 예전의 자택이었던 호텔 객실에서 머물던 중, 타계하였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영친왕의 직계자손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