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李荇)의 함안유배문학 「소라고동 술잔(螺杯)」 소라술잔에 회포를 풀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소라고동 술잔(螺杯)」은 조선전기 거제시 상문동의 유배인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이 1505년(을축년)에 경남 함안에서 지은 오언고시 유배 작품이다. 이행(李荇) 선생은 을축년 1505년 봄 정월 함안 귀양지에서 '소라고동 술잔(螺杯)'으로 묽은 술을 마시며, 침통한 유배객의 회포를 다음과 같이 상기했다.
「바다에서 놀다가 풍파에 백사장에 내팽겨쳐진 소라 고동을 어부가 주워 껍질을 갈고 닦아 광채 찬란한 소라고동 술잔을 만들었다. 술잔에 묽은 술을 따라 초택(楚澤, 유배지)의 고결한 굴원(屈原)처럼 마시며,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감회에 젖는다. 천하의 이치란? 굴원처럼 쓸모 있는 사람은 모함을 받아 칼질을 당하고 만다면서, 유배당한 자신의 처지를 투영한다. 그리곤 “3천 년 묵은 신령한 거북이가 죽어서 뼈를 남겨 존귀하게 되는 편보다는 살아서 진흙탕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겠소(塗中曳尾)”라는 장자(莊子)의 전고(典故)를 인용해 ‘마음 편히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고향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서술해 놓았다.
참고로, 이후 1550년대 거제시 고현동 거제유배객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은 거제도에서 전복껍데기(鰒甲)에 술을 가득 채워 매일 시름을 달랬다. 덧붙여 먼 옛날 거제도에는 고위관료를 제외한 대부분은 바닷가에서 산출되는 각종 어패류 껍데기를 술잔으로 사용했음이 여러 문헌에서 전한다.
이 글은 『용재집(容齋集)』 제5권 『남천록(南遷錄)』에 수록되어 있다. 『용재집(容齋集)』은 본집 10권, 외집 1권 합 7책의 목판본이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 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 [좋은 소라 술잔] 소라 고동 술잔(螺杯)은 바다에서 소라를 얻어서 술잔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배(螺杯)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재료와 모양에 따라 술잔(盃)의 이름이 다양했다. 좋은 술잔(玉爵)을 금굴치(金屈巵)라 하는데, 그 외 규화배(葵花盃), 옥배(玉杯), 수정배(水晶杯), 앵무배(鸚鵡盃), 나배(螺杯) 등이 있다. '규화배'는 접시꽃 모양, 앵무배는 바다의 앵무조개, 나배는 소라껍데기로 만든 것을 말한다. 소라는 안이 구불구불하여 술이 안에서 절로 잘 부어지고 잔이 넘어져도 술이 다 쏟아지지 않는다.
또 좋은 술(佳酒)을 뜻하는 아황주(鵝黃酒) 압록(鴨綠) 미주(美酒) 지주(旨酒) 명주(名酒) 방준(芳樽)을 좋은 술잔(玉爵)에 부어 좋은 안주(嘉肴)를 곁들이면 칭탄(稱歎)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나배(螺杯)는 "창해 바다 속에 보물이 감춰있는데 한 손으로 용의 굴 뒤져 가져와서 아황과 압록 술을 따르라 명하니 친구들이 자리에 참석해 즐거이 놀고나"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나각(螺角)은 ’소라 나팔인‘데 옛 거제는 나각을 이용해 '야간통행금지'와 '위급한 일'(왜구, 도적)에는 반드시 소라나팔을 불었다. 또한 나룻배나 전선이 출발할 때, 수군진영 훈련에도 어김없이 사용했다. 또한 소라 술잔은 오랜 세월 거제도민과 희노애락을 함께 해 온 소중한 유산이다.
○ [저자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이행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 · 창택어수(滄澤漁水) · 청학도인(靑鶴道人)이자, 그는 조선 전기에, 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한 문신이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1505년 정월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병인년) 봄 정월에 거제도(巨濟島)로 이배, 2월에야 비로소 배소에 당도하여, 고절령(高絶嶺) 아래 가시울을 둘러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해 가을 또 서울로 압송하여 죽도록 곤장을 치라는 명(命)이 떨어져 길에 오르려던 차에 성상(聖上)의 즉위(중종반정, 9월 2일)가 이루어졌다. 거제도 읍치로 사면서가 도착하여 거제도 견내량을 건넌 이날이 바로 9월 10일이었다. 그는 관노(官奴, 유배자)의 신분에서 우의정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입지전적인 학자였다.
용재(容齋) 이행(李荇) 선생은 자신의 환경이 바뀔 때마다 시집 외에 삶의 기록을 한권의 시고로 엮었다. 남달리 현실사회의 비리와 비행 때문에 고심하였던 시인이다. 유배자의 노비신분에서 좌의정에 이르기까지 각양의 인생을 체험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인생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의 인생역정은 '죽음의식'과 '현실인식' '애민의식'이 선생의 근간을 이루는 화두이며 철학이었다. 또한 선생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학인(文學人)의 한 사람으로, 그의 시문집은 관각 문학의 전형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그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웠지만 그 형식만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깊은 의격(意格)을 체현(體現), 혼연히 일가(一家)를 이루어 조선조 굴지(屈指)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한편 그는 정치적으로는 훈구 관료(勳舊官僚)에 속했으면서도 친구 남곤(南袞)과는 달리 사림파에 대해 온건한 자세를 가졌으며, 그의 사상적 성향 역시 오히려 사림(士林)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정희량(鄭希良)은 젊은 시절의 용재를 두고, “학문은 모두 정주(程朱)의 그것이었다.”고 칭찬하였거니와, 그가 말년에 지은 화주문공남악창수집(和朱文公南岳唱酬集)에는 과연 도학적(道學的) 의취(意趣)가 분분하다.
● 다음 ‘支’ 운목(韻目)의 오언고시 「소라고동 술잔(螺杯)」 44구(句)는 조선전기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함안 유배 작품이다. 이 글은 대략 3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단락에선, 아득한 바다에 소라 고동이 헤엄치며 자유로이 놀다가 풍파에 백사장에 팽겨쳐 버렸다. 어부가 소라를 주워 껍질을 갈고 닦아 광채 찬란한 술잔을 만들었다. 둘째 단락에선, 소라 술잔이 나에게로 와서 초택의 고결한 굴원(屈原)처럼 어찌 묽은 술을 따라 마시랴. 천하의 이치란 쓸모 있는 사람은 칼질을 당하고 만다면서, 유배당한 자신의 처지를 투영해 놓았다. 셋째 단락에선, 먼저 장자(莊子)의 전고(典故)를 인용하여 마음 편안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선비가 되고 싶다고 언급한다. 그러다니 외진 변방으로 귀양 와서 소라 술잔을 보니 호해(湖海)를 함께 유람하던 벗이 생각나 눈물이 난다면서, 들꽃 떨어지고 산새들 우니 술에 취해 눈썹을 숙인다며 마무리했다.
*「소라고동 술잔(螺杯)」* / 이행(李荇 1478~1534) 1505년 作
"아득한 동해는 커서 그 끝이 보이지 않는데 아, 너(螺)는 그 물속에서 헤엄치며 자유로이 놀았지. 고래랑 큰 자라랑 함께 살아 외환 따위는 걱정이 없었는데 풍파가 홀연 뒤흔들더니 너를 백사장에다 팽개쳤구나. 지척 앞 바다에 가지 못하여 개미들도 너를 잡을 수 있었지. 어부가 이 꼴을 보고 괴이쩍어 맨손으로 너를 주워 가서는 네 속살을 파내어 먹어 버려서 속절없이 남은 구불텅한 껍질 갈고 또 닦으니 광채가 나서 휘황한 그 빛에 아이들 놀라누나. 깎아서 술잔으로 만들었더니 유리잔 따위야 비교가 안 되네.
어찌 왕후에게 바쳐지지 않고 유독 이 시인을 따라다니느뇨. 이 시인은 굴원(屈原)과는 달라서 초췌해도 묽은 술을 마신다오. 어찌 고목으로 만든 표주박이 금굴치(金屈巵)를 대신할 수 없으리요. 이 또한 내가 아끼는 물건이라 어느 게 더 좋다 할 수 없구나. 문득 생각건대 천하의 이치란 쓸모가 있으면 그게 큰 병이지. 생선이 썩는 건 고기맛 때문이고, 범이 죽는 건 가죽이 좋아서지. 너는 이 두 좋은 점을 갖췄으니 칼질을 당하지 않을 수 있을쏘냐.
나는 장주(莊周)의 말(言)을 높이 보나니 진흙 속의 거북(塗中龜)이 되고 싶어라. 고생하며 외진 변방으로 귀양 왔으니 오늘 여기에 이르게 한 건 누구인고? 평소 호해(湖海)를 함께 유람하던 벗, 그 사람은 만나 어울릴 수 없고 상종하느니 오직 이 물건뿐, 볼 적마다 눈물이 먼저 흐르누나. 비가 온 뒤에 들꽃은 떨어지고 날이 저물자 산새들 슬피 운다. 자질구레한 일들 다 털어 버리고 한바탕 술에 취해 눈썹을 숙이노라[茫茫東海大 未見有津涯 嗟爾於其中 潛泳自得宜 鯨鰲之與處 外患非所疑 風波忽漂蕩 播棄沙水湄 咫尺不能致 螻螘可制之 漁父見且怪 赤手如拾遺 刳腸登鼎俎 老甲空崛奇 琢磨出光彩 炫燿驚童兒 斲爲酒器用 下視琉璃卑 何不供王侯 獨與騷人隨 騷人異屈子 顦悴猶啜醨 豈無老木瓢 足代金屈巵 此亦余所愛 未可相姸媸 翻思天下理 有用乃大疵 魚爛以肉味 虎死由毛皮 汝身二美備 能不逢割劙 我慕莊周言 欲作塗中龜 艱難萬里遷 誰使今至斯 平生湖海游 其人不可追 相從唯此物 每見淚先滋 雨餘野花落 日暮山鳥悲 細故盡脫略 一醉聊俛眉]
[주1] 굴자(屈子)의 술 : 굴자는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어부사(漁父辭)에, 어부가 “뭇사람들이 모두 취했거든 어째서 술지게미를 먹고 묽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스스로 쫓겨나고 말았습니까?” 하자, 굴원이 “어찌 청결한 몸으로 더러운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湘江)에 가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내지, 어찌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 하였다.
[주2] 금굴치(金屈巵) : 좋은 술잔을 말한다. 당(唐)나라 맹교(孟郊)의 〈권주(勸酒)〉 시에, “그대에게 금굴치를 권하노니, 취한 얼굴 불콰하다 사양 말라.[勸君金屈巵 勿謂朱顔酡]” 하였다.
[주3] 진흙 속의 거북(塗中龜) : 초왕(楚王)이 두 대부(大夫)를 보내 장자(莊子)에게 벼슬을 주려 하자, 장자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초(楚)나라에는 신령한 거북이 있어 죽은 지 이미 삼천 년이 지났는데, 왕이 이 거북을 상자에 넣어 묘당(廟堂)에 안치해 두었다 하더이다. 이 거북이 죽어서 뼈를 남기고 존귀하게 되는 편이 낫겠소, 살아서 진흙탕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는 편이 낫겠소?” 하였다. 이에 두 대부가 “살아서 진흙탕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는 편이 낫지요.” 하니, 장자가 “가시오. 나는 장차 진흙탕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겠소(塗中曳尾).” 하였다. ‘진흙이나 갯벌에서 꼬리를 끌며 살아가는 것이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면서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고향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선비가 되길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