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 중 3년 동안 대구고등학교는 경북중학교의 외면 속에 여타 중학교 3년 수료자만을 상대로 모집하여 운영되었다.
경북중에서는 3년제 중학을 졸업하는 학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경북중도 3년제 중학교로 되고 그 중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대구고등학교로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왜냐하면 원래 계획대로라면 경북중학교 캠퍼스에 대구고등학교(이미 이 학교는 그 캠퍼스를 벗어나 있었다.)가 아닌 전통을 공유하는 진짜 경북고등학교를 신설 개교해야 했지만 전쟁 중이라 신설 공립 고등학교를 세울 채비가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경북중학교와 전통을 공유하는 고등학교가 없으므로 부득불 대구고등학교로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 대구고등학교의 그해 신입생 중 거의 9할 가까운 학생이 경북중 출신으로 채워지는 현상을 빚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3년간의 경북중학교와 아무 상관없는 학교처럼 운영되던 학교가 그때부터 실속이 경북중과 대구고는 이어지는 한 학교 같은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아예 교명도 ‘경북’로 바꾸게 된다. 그것은 이 고등학교를 경북중과의 일체감을 갖게 하는 속내의 일환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1953학년도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학생과 학부모들이 기대하는 내심일 뿐 학무 당국은 생각이 달랐다.
학무 당국은 비록 전란으로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경북중학교 안에 전통을 같이하는 진짜 경북고등학교를 신설할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해 대구고 교명을 경북고로 바꾸어 주지 않을 수 없는 환경 또한 조성되어 있었다.
서울을 비롯하여 수도권에서 피란 와 있는 명문 중학교들이 이미 그보다 2년 전인 1951학년도에 모두 중-고 분리를 단행해서 전통을 같이하는 중-고가 병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경북중 관련자 특히 동창회에서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피란 와 있는 서울과 수도권 중학교는 법령과 달리 자연스러운 중-고 분리가 가능했을까?
그런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피란 중인 수도권 중학교들은 학제 변경 시행은 법령대로가 입시를 치름으로써 개방된 입시를 실시할 경황도 없었지만 그것을 실시할 수 있는 학생들 상황이 불가능하게 했다.
이유의 첫째는 일단 서울에서 피란 내려온 재학생이 절반도 못되었다. 대부분이 피란하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러 적 치하에서 고난의 세월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재학생들을 두고 무슨 입시를 치러 고등학교 신입생을 뽑겠는가?
그냥 피란 와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로써 고등학교를 개교하고, 현재 출석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사-오-륙학년 재학생들로 하여금 고등학교 일-이-삼학년 학생으로 편제해버리는 것으로 처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