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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주님은 직업과 외모를 보지 않고 믿음만을 보신다
장코뱅 추천 4 조회 346 24.09.14 08:32 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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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9.14 08:40

    첫댓글 세리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 스스로 의롭다 여기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세리들을 죄인과 이방인과 같이 부정하게 여겼다. 눅 19:2에는 세리장 삭개오가 언급되어 있다. (-세금)

    <--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 24.09.14 10:24

    세리 레위도 그렇고 회개하는 죄인은 주님께 횐영을 받습니다^^

  • 24.09.14 11:48

    @노베 아멘!

  • 작성자 24.09.14 08:44

    이 백부장은 이방 출신으로서 아마 헤롯의 용병(傭兵)이었던 것 같다(Bruce). 여기서 백부장은 수하에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중급 지휘관이었다.
    -----------------------------
    <호크마 주석>, 마8:5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 4:13에 이어 예수 선교의 중추지였던 가버나움이 두번째 언급되고 있다. 이는 결국 4:13에 언급된 1차 갈릴리 사역이 5-7장에 언급된 산상수훈으로 중단되고 제 2차 갈릴리 사역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로마의 군단급(1군단은 700명의 기병을 포함한 3000 - 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은 아니지만 팔레스틴의 분부왕 헤롯 안디바의 보조 부대가 주둔(stationing)했던 곳이었다. 팔레스틴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는 타국에서 징집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비유대계열, 여기서는 사마리아 정도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Pulpit Commentary), 레바논 또는 시리아와 같은 이방 지역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쨋든 그들은 이방인들임에 틀림없다.

  • 작성자 24.09.14 08:45

    한 백부장이 나아와 - 가버나움이 헤롯의 관활지에 있던 것으로 보아 이 백부장은 이방 출신으로서 아마 헤롯의 용병(傭兵)이었던 것 같다(Bruce). 여기서 백부장은 수하에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중급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서(눅 7:2 - 10) 이 사람이 유대인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 24.09.14 10:27

    @장코뱅 로마 군대 소속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 용병인 이방인이군요.

  • 작성자 24.09.14 08:53

    백부장은 자신의 부모, 혈육이나 상전(上典)이 아닌 일단 무시해도 좋은 자를 위해 굳이 와서 간구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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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크마 주석>, 마8:6

    주여 - 예수를 향한 백부장의 돈독한 믿음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말이다(7:21 참조). 내 하인이(* , 팡스). 아들 또는 하인에 해당하는 '파이스'란 헬라어는 신약성경 중에 약 24회 등장한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계급이나 신분상 수하에 있는 자, 또는 피지배인을 가리키고 있는데 여기서도 하인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 백부장은 자신의 부모, 혈육이나 상전(上典)이 아닌 일단 무시해도 좋은 자를 위해 굳이 와서 간구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하인은 당시 사회 구조상 천민이었으나 백부장과는 특별한 우정이나 애정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쨋든 자신의 수하 친병(親兵)을 위하여 체면과 만사를 제쳐두고 이처럼 간청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인간성(humanyty)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어쩌면 그가 이처럼 자상한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는 로마인이면서도 유대인인 예수에 대하여 선입관을 갖지 않고

  • 작성자 24.09.14 08:50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24.09.14 10:31

    @장코뱅 이신칭의의 결과가 성화이지만, 위 백부장은 일반은총으로서 좋은 인간성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 작성자 24.09.14 08:52

    예수는 이런 벽을, 즉 상대적인 편견과 증오의 벽을 절대적인 사랑과 정의로써 허물어 버리려고 한 것이다. 동시에 예수는 자신의 구원 사역이 유대인을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호크마 주석>, 마8:7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 , 에고 엘돈 데라퓨소 아우톤) - '고쳐 주리라'의 원어 '데라퓨소'는 개역 성경대로 미래 서술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가 가서 고쳐주랴 ?'라는 뜻의 의문문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헬라어에서는 동사가 주어의 인칭과 수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흔히 인칭 대명사 주어가 생략되며 또 이것이 생략되더라도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지만 본문에는 주어인 1인칭 단수 대명사 '에고'(* )가 특별히 쓰이고 있다. 즉 본문에서는 주어인 '내가'란 말이 강조된 것이다. 어쨔든 예수의 치유 기적 장면을 보면 주로 병자들이 예수께 찾아오거나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 하여 치유되었지 예수께서 직접 병자를 찾아가시겠다고 제안한 것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예수는 여기서 굳이 가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작성자 24.09.14 08:52

    물론 여기 백부장은 헤롯 용병으로서 그의 혈통적 배경은 로마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일 수 있다. 심지어는 유대인 출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단 로마 식민 체제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로마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 당시 피지배자인 유대인은 점령자인 로마인을 착취자 내지 종교적 이방인으로서 경멸하였고 또 로마인은 유대인을 편협하고 위험한 피지배자로 멸시하였다. 예수는 이런 벽을, 즉 상대적인 편견과 증오의 벽을 절대적인 사랑과 정의로써 허물어 버리려고 한 것이다. 동시에 예수는 자신의 구원 사역이 유대인을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설사 예수가 병자에게 가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쨋든 예수는 이상의 방법을 동원해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보이셨던 것이다.

  • 24.09.14 10:36

    @장코뱅 외모는 물론 일체의 인간이 만든 편견을 무시하고 이방인이든 누구든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 24.09.15 07:10

    @노베 아멘!

  • 작성자 24.09.14 08:56

    자신의 죄악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인지(recognition)했음을 반영하는 진술로서 백부장의 겸손한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 이 백부장은 분명 예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그의 요구는 그가 예수를 전능한 절대자로 믿었음을 증명해 준다. ... 그는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은 때문이며 이것은 그가 예수께 대해 신적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
    <호크마 주석>, 마8:8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이때 요한은 자신이 예수께 세례 베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백부장의 이 같은 겸손한 행위를 예수는 유대인이고 자신은 이방인이라는 민족 차별적 통념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나 만약 이러한 이유에서였다면 이 백부장은 예수께 이런 요청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치가 않다. 또한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감당치 못하다'란 어구의 원어인 '우크 하키노스'(* * )는

  • 작성자 24.09.14 08:56

    영적, 도덕적 충족성이 몹시도 결여됨을 고백한 말로서(3:11) 어떤 권위 있는 대상에 대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된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죄악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인지(recognition)했음을 반영하는 진술로서 백부장의 겸손한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겸손한 영혼에게 주의 다함없는 은혜가 필시 수여될 것이다(시 147:6).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이 백부장은 분명 예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그의 요구는 그가 예수를 전능한 절대자로 믿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실 예수께서 병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말씀으로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기록은 요 4:46 - 53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휘귀한 경우였기에 백부장의 믿음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한편 만약 그가 예수를 어떤 비상(非常)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을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 능력 있는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기도나 안수 등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 작성자 24.09.14 08:57

    믿은 때문이며 이것은 그가 예수께 대해 신적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 24.09.14 10:41

    @장코뱅 백부장이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 작성자 24.09.14 09:00

    백부장이 예수를 인본주의적 통치자인 황제 이상의 존재, 즉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신본주의적 통치자로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앙의 지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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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크마 주석>, 마8:9

    본절은 개역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지만 앞 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가르'(* )란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이 예수께 다만 말씀만 해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 이유가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 * , 안드로포스 휘포 여수시안) - 이것은 권세(여수시안) 아래에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여기서 권세란 것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국가에 속한자란 모두 국가 권세의 정점(頂點)인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 질서 체계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인으로서 황제로부터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자기 수하에 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 같은 명령체계와 그 개념은 너무도 명확한 것이었을 것이다.

  • 작성자 24.09.14 09:00

    그런데 여기서 국가 체계라는 인위적 차원에서의 상급자와 그 하급자 사이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질병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자연 세계에 적용시킨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는 결국 백부장이 예수를 인본주의적 통치자인 황제 이상의 존재, 즉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신본주의적 통치자로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앙의 지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하겠다.

  • 24.09.14 10:47

    @장코뱅 백부장의 큰 믿음과 영적 통찰력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 작성자 24.09.14 09:03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단순한 혈통적 순수성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겠기에 결국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셨다. ... 예수께서 말씀하신 11, 12절의 두 구절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구약의 사상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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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크마 주석>, 마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 호아 데 휘오이 테스 바실레이아스). 이는 '그 나라의 자손들'이란 뜻으로서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된 자, 즉 나라에 대한 합법적인 상속권을 가진 자를 뜻한다. 여기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유대 민족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3:9, 10), 당연히 천국에 속한 자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단순한 혈통적 순수성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겠기에 결국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셨다.
    바깥 어두운데 - 이는 멸망의 장소, 곧 미래에 '메시야의 잔치'가 배설되는 곳의 외부를 상징한다.

  • 작성자 24.09.14 09:04

    한편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는 불의한 자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다(밸후 2:17). 즉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항상 밝은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곳은 어두운 곳으로서 어두움의 권세인 사람이 지배하는 곳 내지 영영한 절망이 있는 지옥을 가리키고 있다(22:13). 결국 '바깥 어두운데'란 존재론적인 절대 소외와 영적인 절망 및 종말론적인 죽음과 형벌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실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빛을 내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요, 진리의 말씀이 없고 하나님의 빛이 없는 곳은 사단이 지배하는 어두움과 죽음의 세계임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는 지옥의 장면을 더욱 생생하고 무섭게 묘사한 표현으로서(Turner), '운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이를 간다'는 것은 심해(深海)의 절망을 의미한다(McNeil). 이와 같은 고통과 절망은 그들을 위해 찾아온 메시야를 거절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또 제거할 수 없는 영원한 눈물과 고통인 것이다.

  • 작성자 24.09.14 09:05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신 11, 12절의 두 구절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구약의 사상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은 장차 온 땅의 동서남북으로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구성된다(시 107:3; 사 43:5, 6; 49:12).
    (2)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사 45:6; 59:19; 말 1:11).
    (3) 동서남북에 있는 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 것이다(사 2:2, 3; 60:3 - 4; 미 4:1, 2; 슥 8:20 -23).

  • 24.09.14 10:59

    @장코뱅 풍부한 설명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래 말씀이 떠오릅니다.

    롬3: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아멘!

  • 24.09.14 11:03

    묵상 본문과 댓글 내용에서 깨닫고 배웁니다.

    사람이 갖는 편견은 율법주의 내지 율법주의의 잔재라고 생각합니다. 지역, 인종, 외모(심지어는 눈과 얼굴의 크기)로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인간의 치사한 본성과 달리, 하나님은 모든 자를 공평히 보시되,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여부를 따지심에 안심하고 위로를 받으며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 24.09.14 11:57

    아멘!
    매우 공감합니다.

  • 24.09.14 12:15

    제목과 내용 모두 일관성을 갖고 합당한 내용입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 24.09.14 17:44

    직업이 어떻든, 또 외모나 문벌이나 국적 등 육체적 조건들이 믿음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백부장의 믿음으로 증명해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 이방인도, 특히 로마 군인으로서 이스라엘에 주둔하는 사람인데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나 백성들보다도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종교지도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을 것 같군요. 세리, 창기, 이방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믿음도 갖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팽배했었죠. 과연 하늘나라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곳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위와 같은 편견들과 오해는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네요. 목회자와 교회 리더들은 항상 겸손하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신실한 삶의 태도와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묵상에 공감하며 감사합니다.

  • 24.09.15 07:12

    네, 좋은 댓글과 요약해 주신 내용에 공감합니다.

  • 24.09.17 16:38

    공감합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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