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장군 동상 엽서
글 : by 장세영 (a member of FIP Postal Stationery Commission)
광복후 우리나라 첫 정쇄엽서로 발행한 기러기 도안 5환권(953.12.31.)은 약 1년간 사용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 동상 엽서 5환권이 1954년11월27일 뒤를 이었다.
(기러기 엽서도 계속 병용). 이 엽서를 살펴보면, 인면 도안은 ‘강박’씨의 솜씨로 청동색(靑銅色) 단색이며, 「광주 상무대에 있던 을지문덕장군 동상」.(왼손으로 큰 칼을 쥐고 오른 손을 펴서 높이 들고 있는 자세)를 그렸다. 엽서의 인면이 22mm x 28mm로 제일 크고(그림1), 엽서의 크기는 가로 9cm x 세로 14cm.(약간 좁은 것도 있음)로 이 크기는 1970년 까치 5원권까지 유지되었다.(현재 엽서크기는 95mm x 150 mm).
세로쓰기 형으로 우측 상단에 「수신인」, 좌측 인면 아래쪽에 「발신인」그리고 점선으로 5줄을 넣어 주소 이름을 내려쓰기에 편하게 하였다. 엽서는 한국조폐공사에서 평판옵셋으로 인쇄하였고 발행량은 60만장으로 되어있다.(고시 제128호, 11.27.). 점선의 수를 비교하여 변종이나 실용판의 차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필자는 인쇄잉크의 명암에 따른 변화로
본다. 또 실용판은 하나, 인쇄도 1회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엽서가 발행된 같은 해 1954년말까지 잠용가쇄엽서, 해방기념엽서에 500원우표 첩부한 것․ 멸공통일 첨가쇄 엽서․ 거북비 500원권(청색)우표 첩부한 엽서들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였는지 기러기 5환권 엽서의 1954년 사용 실체는 귀한 편이고 을지문덕장군 동상 5환권 엽서의 1954년 사용 실체는 더욱 귀하다.
용지는 백상지로 기러기엽서보다는 두터우나 매우 누르스름하다. 5환권은 표면이 거치른 편이다.
용지의 두께는 0.2mm. 10환권(국호:‘우편’엽서는 0.24mm). 인면의 국호에는 「대한민국우정」이나 우측에는 “우편엽서”로 제품 명칭을 표시하고 있다. 요금 인상에 따라 발행한 4종의 을지문덕장군 동상 엽서가 있다. 처음의 5환권, 두 종류의 10환권, 그리고 미발행인 20환권.
필자는 오래전부터 “을지문덕장군 동상”이 왜 상무대에 있는지, 누가 조각을 하였는지 매우 궁금하였다. 상무대가 속한 동사무소 직원도 개막 행사에 참석한 것은 기억하고 있으나 연도는 아지 못했다. 우리 우취인들은 엽서를 누가 도안했는지가 더 관심사일 것이지만 광주에 살고있는 필자에게는 동상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런 숙제를 푸는 데는 발달된 internet 검색이 공을 세웠다.
“을지문덕장군 동상”을 조각하신 분은 卓鍊河(탁연하씨외 2명)로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조각가로 한국조각가협회 산하 서초미협의 고문이시다. ( 현재 76세, EBM열린포럼, 서초포럼과의 인터뷰 기사 참조). 일부를 인용하면,
“ ......당시(한국전쟁 후)에는 주재료인 석고를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육군병원에는 기브스용 석고가 많았어요. 그래서 재료인 석고를 얻을 궁리로 장성들 흉상을 만들기 시작하게 된 것이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장성들 흉상이 꽤 인기가 많았어요. 서로 자신도 해달라고 소문이 났고, 해군에서 진해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육군에서는 을지문덕 장군 동상을 만들게 되었지요... ”
군인신분이었지만 민간인이었던 분들이 장성들 흉상을 만들었던 경험으로 큰 동상 제작에 도전-성공한 것으로
11월28일 제막식에는 부통령이 참석했다고 한다.
탁연하씨와 전화통화에서 알게 된 사항으로 3명(차근호, 박제수, 탁연하)이 각각 도안을 제출하여 차근호씨의 안이 채택되었고 고증을 거쳐, 세 사람이 합심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다른 참고서에는 김찬식 김순득씨도 참여했다고 나와있다.). 김순득씨? 1960년대 체신부 우표 디자이너와 동일인 ?(UN군 한국전쟁 참전15주년 5종, 1차국백 200원권보살상,300원권 귀면와 등 도안) 1953년12월15일자<대한화보>를 보면 “을지문덕장군 동상”제막식 사진을 볼 수 있다.(그림2)
“을지문덕장군 동상”은 상무대 입구의 오른 쪽에 우뚝 서있다가 상무대가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로 이전할 때 함께 옮겨졌다. 그리고 주위에는 이순신 장군, 강감찬 장군, 김덕령 장군 심우신 장군, 안중근 의사, 김백일 장군 등 나라를 빛낸 군민들 13인의 동상과 함께 서 있다.(사진을 보실려면 ‘상무대 소개’ www.http://www.inftsch.mil.kr➡ 학교소개 ➡조형물 ) 이중에서 많은 수가 탁선생님의 작품이다. (을지문덕장군,상무대,탁연하씨의 얘기는 다음 기회에.)
상무대(尙武臺)란? 무용을 숭상하는 배움의 터전이란 뜻이고 명칭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1952년 1월 6일 부여한 것이며, 일반인에게 첫 개방은 1952년 3월 1일이었다.
안에는 군사우체국이 있었다.(개국 1966.6.10.) 상무대 이전사업에 의거 1994년 12월17일 행정구역상으로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로 이전하였다. 여기에서 학성리의 유래는 이 지역 일대가 학이 별을 안고 있는 형상의 지세인데서 유래되었다. 또한 임진왜란시에는 심우신 의병장이 의병을 훈련시켰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을지문덕 장군 동상 엽서 5환권 발행일 1954년 11월 27일.
사용 시기별 정리
1) 5환 시기 1954.11.27.~1954.12.31.
2) 5환 또는 10환 시기 1955.1.1.~1955.1.5. (그림3)
3) ‘제1차 10환 시기’ 1955.1.6.~1955.6.27.
‘제1차 10환 시기 전기(前期)’
4) ‘제1차 10환 시기’ 1955.6.28.~1955.8.8.
‘제1차 10환 시기 후기(後期)’
5) ‘제1차 20환 시기’ 1955.8.9.~1955.9.7.
6) ‘제2차 10환 시기’ 1955.9.8.~1956.12.31.
7) ‘제2차 20환 시기’ 1957.1.1.~1959.12.
1) 엽서 5환 시기 1954.11.27.~1954.12.31.
우편엽서료금 5환 시기는 1953년 2월15일 화폐개혁일부터 1954년 12월31일까지. (구 화폐로 500원(圓) 시기는 1952년 9월20일부터였으며 화폐개혁으로 5환이 되었음). 1955년 1월1일부터 엽서료금이 5환에서 10환으로 인상되었으므로, 발행일부터 우표 첩부없이 5환권으로 사용한 기간은 35일뿐임. 그리고 1955년 1월5일까지는 유예기간으로 5환권 우표를 첩부하지 않았어도 요금 부족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따라서 길어봤자 42일간. 연하 목적이 아니며 우표를 첩부하지 않은 실체는 흔하지 않다.
1954년 11월27일에 발행하여 1954년 실체는 매우 귀하다.
2) 5환 또는 10환 시기 1955.1.1.~1955.1.5.
1955년 1월1일부터 엽서 요금이 5환에서 10환으로 인상되어 5환권 엽서(기러기 5환권 엽서 포함)에 5환에 해당하는 우표를 가첩하여 사용하였으나 연하목적인 엽서는 5환 그대로 발송하였고 5일까지는 부족(不足) 처리하지 않았다. 연하용 일부인은 철인(1호인)과 같은 크기(직경 24mm)로 빗형인데 아래쪽에 하정(賀正) 글씨를 해서(楷書)로 왼쪽에 쓰고 을미(乙未)년을 뜻하는 양(羊) 두 마리를 도안하였다.(그림). 언젠가 모 auction에서 이 엽서를 설명하기를 賀正을 읽지 못하고 ‘일어(日語)로 장난한 사제 일부인’으로 오해한 판매자가 있어 쓴 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윤종호씨도 우취가 이셨습니다.
3)‘제1차 10환 시기’ 1955.1.6.~1955.8.8.
1955년 1월6일부터는 5환권우표를 첩부하여 10환권으로 사용하였다. 을지문덕 장군 동상 엽서 5환권의 『우편엽서료금 1차 10환 시기』에 해당한 기간은 약6개월로 5환권 엽서의 역할이 필수적인, 즉 을지문덕 장군 엽서 10환권 발행일 1955년 6월 28일 앞까지(4288.1.1.~ 6.27.)를 편의상 ‘제1차 10환 시기 전기(前期)’라 나누고, 6월 28일부터 8월8일까지는 10환 엽서를 병용한 시기로 ‘제1차 10환 시기 후기(後期)’라 부를 수 있겠다. 8개월 이상 5환엽서에 5환어치 우표를 붙여서 사용했으나 실체는 흔하지 않다.(기러기 5환권 엽서 경우도 동일) (그림4)
한충언씨 소장
5) ‘제1차 20환 시기’ 1955.8.9.~1955.9.7.
1955년(단기4288년) 8월 9일 대통령령 1064호 법률 제365호에 의거, 엽서료금이 10환에서 20환으로 인상되었다. (1종 서장은 20환에서 40환으로 인상). 그러나 대통령 긴급명령 14호(1955.9.5),법률365호에 의하여 9월 8일자로 10환으로 인하(환원)되었다. 5환권 엽서에 15환에 해당하는 우표를 가첩하여 20환권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기간을 편의상 ‘제1차 20환 시기’라 나눈다. 이 기간에 사용된 실체는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더구나 이 기간은 을지문덕 장군 엽서 10환권(우정, 발행: 1955. 6.28.)을 사용하고 있어서 을지문덕 장군5환권의 20환 실체는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필자도 아직 소장하지 못했다. 요금 인상에 대비하여 준비했던 을지문덕장군상 엽서 20환권은 미발행으로 처리되고 있다.
6) ‘제2차 10환 시기’ 1955.9.8.~1956.12.31.
‘제1차 20환 시기’(1955.8.9.~1955.9.7.) 후 10환 시기를 거쳐 다시 20환으로 인상할 때(1957. 1.1.)까지를 제2차 10환 시기’라 나눴다. 작품정리할 때는 1955년과 1956년으로 나눈다면 리프 수를 늘릴 수 있다.(그림 5)
목포 1955.10.11. 발송---------서울 왕십리 1955.10.13. 도착
7) ‘제2차 20환 시기’
1957년1월1일 엽서 요금이 20환이 되었으며(법령428호(12.31.) 대통령령 제1203호) 이후를 ‘제2차 20환 시기’라 하겠다. 대개는 산업부흥우표 15환권 1장을 가첩하여 사용하였다. 현재 시중에 존재하는 대부분은 신문사에 응모하기 위해 보내는 것들이다.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는 1957년부터 1959년 사이의 실체들로 거의 다 신문사 퀴즈에 응모한 것들이다. 1960년에 사용한 실체는 찾지 못했는데 1957년에 발행한 <마패>엽서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가 1960년 초 또는 1959년말에 <기러기>엽서와 함께 사용을 금지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중 자료는 대개가 방송국이나 신문사로 보내진 것인데 이런 류가 아닌 것으로 수집했다면 의의가 더 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