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渤海,698년~926년)
길림성 돈화현 동모산 발해가 2대무왕 대무예 때 산동성 등주를 공격하여 세력권에 넣고
상업 활동 세력을 구축하고 돌아가자 중원의 물자가 발해로 수월하게 공급된다.
이후 발해인들이 등주로 진출하여 대발해무역의 전진기지로 삼는다.
산동백제의 후예들이 다수 살고있었기 때문에 제나라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산동성 제남시는 춘추시대 제나라가 일어서는 곳이며, 전국시대 때 산동성 공자의 노나라,
산동성 추성시 맹자의 추나라를 복속하고 하남성, 산서성 실크로드 종착지 지방으로
세력을 넒히는 기반이기도 한 곳이다.
길림성 동모산 발해가 산동성 등주지방을 세력권에 넣게 되자,
이 사실은 청해성에 남아있던 말갈족, 고구려 망인들에게도 알려진다.
그래서 이들이 산동성 등주시, 동영시, 제남시 일대로 대발해 무역을 하기 위해 모여들게 된다.
청해성에 남아있던 말갈, 고구려 망인들은 교역 물자를 청해성으로 가지고 간다.
이것 때문에 청해성 발해설이 등장하는 것이다.
당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해서 중원의 모든 것을 통제할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판이다.
청해성에 남아있던 이들은 발해 건국에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
왜냐하면 교역세를 받아 동모산 발해로 가져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리, 철륵, 우르말갈, 사모, 군리, 굴열, 월희, 막예계 말갈은 당을 도와 발해를 치는데 협력한다.
철리부, 철륵부 등은 발해에 복속된 원한을 갖고 당을 돕는다.
발해 건국에 협력한 말갈족은 속말갈, 안거골, 안호거, 호실, 불열, 백똘, 백산 부족이다.
이들이 발해, 신라 교역을 독점하여 타부족의 부러움을 사면서 당에 협력한 부족과
싸우게 되는 것이다.
동모산 발해가 철리, 철륵부를 복속하게 되는데, 이 복속지역은 감숙성 남부, 청해성 청해호 동북부이다.
길림성 동모산 발해가 어떻게 해서 중원 서쪽 끝에 있는 철륵, 철리부를 복속하느냐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동모산 발해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철륵, 철리 등 말갈인들이
산동성 등주로 와서 교역을 하면서 교역세에 불만을 갖고 세를 내지 않고
청해호, 감남지방으로 가져 가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발해는 황하강을 건너 이북지방 루트로 황하강 연안을 타고 청해호, 감남지방으로 출격하여
대표 불만세력인 철륵, 철리부 등을 복속한다.
[비단길, 초원의 길에서 들어오는 물류는 고구려, 백제의 멸망으로 내몽고 루트를 거쳐
하북성 북경, 산동성 등주시, 제남시, 요녕성 조양, 심양 등으로 곧장 들어왔다].
현재 철륵족 자치주는 감남지방에 현존하고 있다.
명명백백한 역사적 증거가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발해 역사에 알려져 있기로는 철리, 철륵부는 우르 말갈 지역으로
흑수 말갈지역에 있었던 사할린 동북 최북단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것은 치명적인 지명 오류사고를 낸 역사적 사건이다.
철륵족 자치주가 중국 감숙성 남부, 청해성에 현존하고 있으므로 거부할 수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므로 인정을 해야만 한다.
[연해주 동북단의 철리, 철륵족은 감숙성 남부, 청해성에서 일부만 이주해와서 붙는 이름임.
연해주의 철리, 철륵족을 발해가 복속하고 그 동족인 청해성의 철리, 철륵족이
산동성 등주에서 교역물자를 청해성으로 가지고 가려했기 때문에 다시 치는 것임].
산동성에서 대발해 무역을 위해 상업활동을 하던 세력도 점차적으로
동모산 발해에 보내는 물자가 줄어들게 된다.
즉, 자본주의 세력의 확산으로 보내는 물자가 줄어들면서 발해는 점차적으로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동모산에 남아있던 세력도 중원에서 들어오는 물자가 부족해지자,
산동성으로 이주해버리거나 교역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횟수가 증가하면서
감숙성의 여진족에 밀려난 거란의 요녕성 조양 (동단국/야율배) 침공으로 쇠퇴의 길을 가게 된다.
그 이후 북경에서 일어난 안록산의 난 여파로 고구려 엘리트 유민 이정기가
고구려 유민군 2만과 당에 불만을 품은 당나라군 2만을 하남성에서 이끌고 산동성 등주로 들어가
세력권에 넣고 치청천국을 세우고 아들 이납은 후제를 건국하여 강동 9주를 손에 넣고
대운하를 통제하게 되면서 당현종과 양귀비를 공격하여 파천케 만들었다.(이사고>이사도로 이어짐)
발해와는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