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상류가옥의 주거생활
경북 청송 송소고택(松韶古宅)
김 광 언(인하대 명예교수 민속학)
우리네 옛집의 대부분은 조선시대 중기인 17세기 무렵에 세워졌다. 유교가 우리네 생활 구석구석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 때였다. 따라서 그 덕목을 익히고 실천하는 일이 평생의 과업이었던 사람들이 유교의 틀에 맞추어 집을 지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집은 조상숭배, 남녀유별, 장유유서 따위의 이른바 수신제가를 위한 도장(道場)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상류가옥에 사당을 세우고, 안채와 사랑채를 떼어 놓고, 행랑채가 들어선 까닭이 이에 있다.
효는 유교사상 가운데 최고지선(最高至善)의 개념이었다. 자손은 부모 생전에 효도를 다 하고, 죽은 뒤에는 제사를 정성껏 받들었다. 우리가 죽은 조상에 대한 제사권을 상속의 요건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실질적인 재산권을, 일본이 호주의 지위 계승권을 첫 손에 꼽은 것과 대조적이다. 또 중국에서는 아들딸 구별 없이, 부모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고, 일본에서는 특정한 자식이나 데릴사위가 물려받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재산을 맏이가 받았다. 그가 조상의 제사를 받들기 때문이다.
조선조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사당 건립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없는 귀족은 벌을 받았고, 심지어 승려에게도 유교식 상례를 강권하였다. 시대가 지나면서, 사당의 비중이 더욱 높아진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조상숭배 관념이 낳은 공간이 사당이다. 집을 지을 때 사당 터를 먼저 잡았고, 절대로 헐지 않았다. 풍수설에서 말하는 이른바, 명혈(名穴)도 사당 터에 있다고 믿었다. 남향집에서 사당을 동북쪽에 세운 것은, 뒷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정기를 제일 먼저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사당은 대체로 3 칸이며, 담을 두르고 문을 붙인다. 주위에 기화요초(琪花瑤草)를 가꾸는 것은 물론이고, 단청을 입히기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리 손씨네는 3 칸 반의 문(神門)을 따로 세우고, 6 칸의 제청(祭廳)까지 마련하였으며, 앞에 화단을 꾸몄다. 사당 구역은 집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이쯤 되면 손씨 집은 살아 있는 사람의 집이라기보다, 죽은 조상을 받들기 위한 공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당을 얼마나 지나치게 꾸몄으면, 실질에는 힘쓰지 않고 겉치레만 번드르르 하게 꾸미는 것을 '사당치레 하듯'이라 일렀겠는가?
사당에 조상이 살아 계신 듯이 여겼다. 아침마다 사당에 문안 인사를 올렸고, 천신례(薦新禮)라 하여, 계절마다 새로 나는 과일이나 곡식을 바쳤다. 관례 따위의 중요한 일은 사당 앞에서 벌였고, 혼인 해산 취직 여행 군 입대 따위의 비일상적인 일도 보고하였다. 안동의 의성 김씨네는 지금도 문중의 큰일은 종가의 사당 앞에서 논의한다. 이로써 조상을 모신 자리에서 결정한 일을 반드시 지킨다는 마음을 다지는 것이다.
사당에는 4 대 선조의 위패를 왼쪽(향해서)에서부터 나란히 놓으며, 대가 지나면 고조의 위패는 그의 무덤 앞에 묻는다. 따라서 사당에는 언제나 4 대의 위패 8 개가 있으며, 사대봉사라는 말은 이에서 왔다. 4 대 이전의 조상 제사는 대체로 10 월(음력)에 무덤에서 올린다. 불천위(不遷位)도 있다. 큰 공로를 끼친 인물을 기리기 위해 국가가 지정한 위패이다. 불천위라는 말처럼 자손들은 위패를 없애지 않고 영영 토록 제사를 받들었다. 사당이 없는 집에서는 마루 뒷벽 위쪽에 붙인 작은 사당벽장(壁龕)에 위패를 모신다.
조선시대 상류층의 여인들은 평생을 제사에 묻혀 지낸 셈이다. 8명절을 쇠었던 옛적에는 그 때마다 제사를 올렸고 그 위에 기제사까지 겹쳤다. 무덤에 가서 지내는 묘사도 제물은 집에서 마련하였던 만큼, 그 번거로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회 충효당 안채 기둥에는 지금도 조상 제삿날을 적은 널판이 걸려 있다.
한편, 서민들은 쌀을 담은 조상단지를 장손의 집 안방 시렁 위에 얹어 두었다. 단지는 위패처럼 조상 수대로 마련하거나, 한 대에 한 개씩 모두 네 개를 갖추기도 한다. 사당 안에 위패를 모시는 형식은 조선시대에 널리 퍼진 유교식이고, 본디는 이처럼 쌀 단지를 조상으로 받들었을 것이다.
남녀유별의 덕목은 부부를 별거시켰다. 상류가옥의 공간 배치가 남자가 기거하는 사랑채와 여자가 생활하는 안채로 나뉘고, 이들 사이에 담을 치고 문을 달아 완전히 떼어놓은 것은 이 때문이다. 안채의 중문을 닫으면 아무도 들어가지 못 하였다. 안채에서 마련한 끼니는 아랫사람들이 사랑채로 날랐고, 의복 또한 내다 입었다. 아내와 남편이 함께 있는 모습이 식구의 눈에 띠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안채의 부인도 중문 밖 걸음을 삼갔다. 근친(覲親)과 친부모의 상례를 위해 친정으로 가는 것이 거의 유일한 나들이였다. 정읍의 김씨 부인은 혼인 뒤 17 년 만에 친정 발걸음을 하였을 뿐, 그 뒤로 다시 가지 않았다. 경주의 노부인은 한번도 외출하지 않아서, 환갑을 넘겼음에도 시장에 가면 어지럼증이 도진다고 하였다. 이 별거 생활은 자녀들 대에도 이어졌다. 사내아이는 대여섯 살이 되면 사랑채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훈도를 받았고, 딸은 안채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랐다.
청장년기의 부부가 따로 지내면 성생활이 문제가 된다. 더구나 시집을 가서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 여성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던 시대임에랴? 이를 위해 집집마다 비밀 통로를 마련하였다. 앞의 정읍 김씨 집은 안채 담을 조금 터놓은 까닭에 가재걸음으로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간다. 또 며느리의 건넌방 오른쪽에 퇴를 놓고 외짝 문을 달았다.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 꼴인 영남에서는 흔히 사랑방 뒤의 골방 한쪽 벽에 안마당으로 통하는 작은 쪽문을 붙였다. 깊은 밤중에 이 길로 아내 방에 들어갔던 남편은 이른 새벽에 되돌아 나왔다. 이 때문에 나이 비슷한 형제가 여럿 있었던 집의 한 부인은 새색시 시절, 이들의 모습이 비칠 때마다 "저 가운데 내 남편은 누구일까?"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집을 살 때도 안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2 백여 년 전 경상북도 영천의 정씨네는 사랑채를 보고 집값을 치렀으나, 안채가 하도 낡아서 집값만큼을 더 들여 고쳤다. 이밖에 중문에 내외 벽을 치거나 내외 담을 쌓아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막았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여성 전용(?)의 일각문을 따로 두기도 하였다.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보다 낮았지만, 살림을 이끄는 안방마님의 권한은 신성불가침이었다. 남편은 안살림에 관해 입을 떼지 않는 것이 관례였고 일상의 대화에서도 아내에게 존대어를 썼다. 안채 지붕마루도 안주인의 권위를 위해 집안의 어떤 건물보다 높게 올렸다. 안채보다 사랑채가 높으면 “사랑채가 안 대들보를 누르는 집”이라 하여 흉가로 여겼다. 안채 대청을 높게 앉힌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루 끝에 서 있는 안주인의 발끝이, 마당에 선 사람의 머리 위에 이르는 집도 있다. 안방에는 살림을 주관하는 시어머니가, 건넌방은 며느리가 쓰고, 노마님은 아랫방으로 물러앉는다.
예컨대, 경상도를 제외한 다른 지방에서는 시어머니가 생전에 살림권을 며느리에게 물려주지 않으며, 임종도 안방에서 맞는다. 뿐만 아니라, 그네가 죽은 뒤에도 3 년 동안 혼이 있다고 하여, 며느리는 안방으로 들어가기를 꺼린다.
그러나 영남의 관행은 이와 대조적이다. 며느리가 살림을 알만한 시기가 되면 살림권을 넘겨주고 방도 바꾼다. 며느리가 큰방으로 들어가고, 시어머니는 머리방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머리방이 큰방 농 들어낸다"는 속담 그대로이다. 비슷한 시기에, 사랑채의 아버지도 권한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아들방으로 물러난다. 안팎의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창녕의 신용문(1980년쯤 작고)은 34살에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한을 물려받는 동시에 방을 바꾸었다. 그의 아내도 이때 큰방을 차지하였다.
남향집에서는 남자의 사랑채를 동쪽에, 여성의 안채는 서쪽에 두는 것이 원칙이다. 사랑채(사당도 마찬가지)를 동쪽에 두는 것은 양(陽)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동에서 해가 솟듯이 행복이나 상서로움이 동쪽으로부터 들어온다고 믿은 것이다. 대문이 동쪽에 있어야 좋다는 생각도 이에서 왔다. 해가 지는 서쪽은 음(陰)이고 어둠이며 불길하다고 여긴 까닭에 안채의 자리가 된 것이다.
이것은 궁중에서도 지켰다. 창덕궁에 있는 임금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의 경우, 대청에 딸린 좌우 양쪽 방 가운데, 동쪽방을 동온돌이라 불러 임금이 쓰고, 왕비는 서쪽의 서온돌에서 기거하였다.
아랫사람들을 위한 행랑채는 집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에 세운다. 대체로 이 건물 한 가운데에 대문이 있고 좌우로 여러 공간이 늘어선다. 여러 개의 방과 마구간, 청지기방, 헛간, 곳간 따위이다. 살림 규모가 커서 노비가 많고 행사나 제사 따위가 끊이지 않는 집의 행랑채는 매우 길다. 그 대표가 24칸에 이르는 강릉시 선교장이며 버금가는 구례 운조루는 18칸이다. 이들이 줄행랑이다.
행랑방에서 기거하는 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주인집의 일을 도왔다. 여자는 안채 마님 분부에 따라 허드렛일을 하였고, 남자는 집 안팎 청소를 비롯하여 주인의 잔심부름을 맡았다. 식사는 주인은 이들에게 사철 옷을 해 입히고 겨울과 여름 그리고 추석에 세찬(歲饌)을 주었을 뿐이다. 어린 노복은 큰 사랑방 옆에 딸린 작은 방에 기거하였다.
이를 호남에서는 복직이방, 충청도에서는 수청방이라 일렀다. 아산시의 이씨네는 수청방을 큰사랑과 작은사랑 사이에 두고 수청방에서 드나드는 문을 따로 내어 부자가 함께 부렸다.
노비는 남녀유별과 무관하였다. 이들은 내외법을 지킬 자격조차 없다고 여긴 것이다. 식사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부엌에 모여 어깨를 나란히 하고 먹었다. 다른 공간보다 상류층 가옥의 부엌이 너른 것은 이들의 식당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주인은 혼기에 이른 노비에게 짝을 채워서 담 밖의 작은 집에 거주시켰다. 이들은 집에서 잠만 자고 날이 새면 주인집에 일하고 끼니를 먹었으며 어두워진 뒤에 돌아왔다. 영남에서는 이들의 집을 가랍집, 호남에서는 호지집, 평안도에서는‘마가리집, 황해도에서는 윳집이라 부른다. 이렇게 주인집 주위에 두면 부리기 쉽고 살피기도 편하지만, 주인집 보호에도 유리한 까닭이다.
정읍의 김씨네는 호지집을 대문 좌우에 2 채, 왼쪽 담 중간에 한 채, 뒷담 밖에 3 채, 사당 오른쪽 밖에 한 채 등 모두 7 채를 세웠다. 어떤 곳에서나 노비의 집은 대문 좌우 쪽이나 후미진 뒤 담 밖에 둔 까닭에 좌향을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북향집이 적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안채 마루에도 장유유서의 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 마루를 툇마루ㆍ마루ㆍ높은 마루의 3단계로 꾸민 것이다. 아래 사람은 마루에 올라오지 못하고 퇴 앞에 서서에서 주인과 대화하며, 마루 뒤쪽의 높은 마루는 오직 상노인만 오르내린다. 며느리라도 이곳에는 발을 딛지 못 하는 것이다.
뒷간도 마찬가지이다. 안채와 사랑채에 각기 주인과 노비 뒷간을 따로 둔 것이다. 거주인원이 많아 뒷간을 더 갖추면 편리하지만, 안채나 사랑채에서 요강을 쓴 것을 생각하면 4 채의 뒷간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양반 사이에도 가문이나 출신, 벼슬의 높낮이 또는 나이에 따라 엄격히 반영되었다. 2칸의 안방이나 사랑방은 흔히 장지로 가운데를 막으며, 안채에서는 윗간(아랫목 쪽을 아랫간, 반대쪽을 이렇게 부른다)에 몸종을 재운다. 이 장지의 문턱이 신분상의 경계선 구실을 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분이 낮은 이는 주인이 앉은 아랫간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윗간에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더 낮은 이는 윗간에 앉지도 못하고 두 손을 맞잡고 선 채로 주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자리를 함께 하더라도 아랫사람은 주인과 마주 앉지도 못하고, 반드시 모로 꺾어 앉는 것이 예의였다. 따라서 한 방 안에서도 주인이 위아래 어느 간에 두고 상대하는가에 따라 그에 대한 예우(대접하는 음식)가 달랐다. |
출처: 나무과자 원문보기 글쓴이: 순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