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신앙인들_ 보헤미아의 진리의 옹호자 얀 후스
얀 후스는 1370년 보헤미안 후시네크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의 길에 들어서서 프라하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였다.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던 동기는 그 당시 농부의 아들들이 그랬듯이 안정된 생활기반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신학수업 과정에서 철저한 변화를 경험하고 열정적인 진리의 탐구자요 신학자로 거듭났다. 결정적으로 후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존 위클리프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에 입각해 기존 교회질서에 준엄한 비판을 가하고 철저한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위클리프는 개혁에 불을 붙여서 교황권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무지에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제롬에 의해 소개된 그의 교리는 보헤미아까지 퍼졌으며 당시 겸손하게 나귀를 탄 예수님의 모습과 삼 층 면류관을 쓰고 화려한 장식을 한 교황의 행렬을 비교하는 두 그림을 통하여 프라하에는 큰 동요가 생겼다. 그러자 프라하의 대주교는 교황으로 하여금 위클리프의 저술을 읽지 말도록 하는 교황 칙령을 받아내고 아울러 보헤미아어로 설교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이때 후스는 교황의 칙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유롭게 학교나 강의실에서 설교하였다. 교황은 1410년 후스가 교황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혐의로 로마로 소환 명령을 내렸다. 후스는 교황의 소환에도 응하지 않자 교황은 1411년에 파문을 선포한다. 오히려 후스는 교황이 교회를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의 사익을 위해 행동하는 교황이 과연 교황으로서의 권위가 계속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성경이야말로 교황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포함하는 궁극적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즉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교황에게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또 교황 요한 23세가 전쟁 비용에 쓸 목적으로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죄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인데, 면죄에 관한 신성한 것을 매매하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후스의 반대 주장에 따라 많은 보헤미아인은 교황청의 착취행위에 대하여 공개 시위를 벌였다. 이때 그는 자기로 인하여 자기 조국 전체가 복잡한 신학 논쟁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프라하와 강단을 떠나 친구의 성채에 은거하면서 '교회론'(De Ecclesia)을 저술한다. 이 논거는 주로 위클리프 사상과 비슷하였다.
이 무렵 콘스탄스에서 종교대회가 소집된다. 당시 콘스탄스 회의는 전 유럽에서 5천여 명이나 참석하는 새 시대의 개혁을 열망하고 교회의 내분을 화해시키고 이단을 뿌리 뽑는 대대적인 회의였다. 이에 그는 이설을 퍼뜨리는 자로 대회에 소환되었지만, 황제의 통행허락으로 자유로운 몸이었다. 그런데 후스가 1414년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죄수 취급을 받고 독방으로 감금되면서 이단 사상 철회를 요구당했다. 그는 만약 누구든지 자기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만 하면 기꺼이 응하겠다고 하며 자기가 이단 사상을 철회한다면 자기가 과거에 이단이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회의자들 앞에서 공정한 판결을 받을 길이 없음을 알고 담담하게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공의로우시며 유일한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소하리라. 나는 그분의 손에 처분을 맡긴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 증인들이나 오류에 가득 찬 회의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진리와 공의 위에서 모든 개인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후스는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다. 많은 이들은 후스에게 회의의 권위만 인정하면 방면될 것이므로 그렇게 하도록 권면하였다. 그러나 “그렇다면 내가 하늘과 순결한 복음을 전한 이들을 무슨 면목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의 구원을 나의 목숨보다 더 귀중히 여긴다”며 거절하였다. 마침내 그는 악마가 그려 있고 이단자라는 글자가 쓰인 고깔을 뒤집어쓰고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마지막으로 오류를 취소하라는 권고에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한 것과 전파한 것은 모두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진리를 나의 피로써 확인하기를 매우 기뻐한다” 그리고 "주 예수님, 바로 당신을 위하여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아무런 불평 없이 감당합니다.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을 본 원수들까지도 그의 태도에 감동을 하였다. 후스의 몸이 다 타버린 다음에 그 재와 흙을 모아서 라인 강에 던져 이단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몇몇 체코인들은 후스가 사망했던 자리의 훍을 파서 체코로 돌아가 콘스탄스 종교회의가 행한 죄악을 기념했다. 그리고 보헤미아 모든 사람은 만장일치로 콘스탄스 종교회의를 거부하고 자격이 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음을 선포하여 후스의 신앙에 동조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했다.
후스의 순교는 전 보헤미아 국민들을 똘똘 뭉쳐 저항케 하고 커다란 개혁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는 이미 가고 없으나 그가 생명을 바쳐서까지 옹호한 그 진리는 결코 멸절될 수 없었다. 그의 신앙과 충성의 모본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고문과 사망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후스의 생애와 사상은 한마디로 진리에 대한 탐구와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화형되기 전 남긴 글은 그가 전 생애를 통해 추구했던 진리가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그것은 진리가 너를 죄와 악마와 영혼의 죽음과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후스의 처형 뒤 보헤미아인들은 그 후에도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이들의 정신적 유산은 종교개혁의 꽃을 피우고 후스의 사상과 뜻을 이어받은 강력한 신앙공동체인 ‘모라비안 형제단’이 형성돼 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복음이 체코 민중의 가슴에 심어졌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경건주의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의 아방가르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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