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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육개월에 천만.
적사진인 용환에게 있어 건곤신패 민웅철의 죽음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같은 무영이었지만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도 없을뿐더러 친하지도 않았다. 인간적으로 친해진 계기가 된 것은 연우강의 추격었다. 추격의 와중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분을 쌓게 됐다. 더구나 민웅철은 대야벌 백대고수 서열 십일 위와 무영 십일 호였고, 용환은 백대고수 서열 십 위와 무영 십 호였다.
대야벌과 무성에서 앞뒤 서열이라는 별것 아닌 공통점이 더욱 친밀감을 높였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가 죽은 것이다.
“ 거참!”
용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사월림의 칠영 두 명과 동귀어진 했다는 말 때문이었다.
민웅철과 자신은 연우강이 무공을 익히고 있는지 그걸 확인하고자 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따라다닐 이유도 없고. 무공을 익힌 사실이 확인되면 그때 나설 생각이었다. 사월림의 칠영이 연우강을 공격하는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민웅철은 대얍러 백대고수 서열 십일 위면서 동시에 무영 십일 호다. 연우강이 감시가 처음도 아닌 그가 기척을 들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사 실수로 미세한 기척을 냈다고 해도 환영이나 마영이 그의 기척을 감지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 민웅철이 발견된 곳은 여기고, 칠영의 우두머리인 월영이 발견된 것은 여기, 그리고 분뇨 집하장은 여기.”
용환은 눈앞의 평평한 곳에 그림을 그렸다.
주로 화장실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 때문에 숯으로 만든 필기구를 항상 준비해 놓고 있었다.
“ 분뇨 집하장에서 월영 일행이 죽은 곳까지 거리는 백 장, 월영이 죽은 곳에서 민웅철이 죽은 곳까지 거리는 삼십 장.......”
그림을 그려나가던 용환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은 집하장과 월영 일행이 죽은 곳으로 향했다.
칠영은 연우강을 없애기 위해 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그들이 분뇨 집하장에서 백 장이나 떨어진 숲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 칠영이 이곳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연우강이 먼저 숲으로 들어갔다는 뜻이고, 연우강을 따라간 그들의 실력으로는 삼십 장이나 떨어져 있는 민웅철의 기척을 감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맙소사.”
용환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녀석이....”
용환은 부정하듯 고개를 강하제 저었다.
다른 변수가 없다고 가정하면 칠영을 숲으로 끌고 들어간 사람은 연우강이고, 환영과 마영에게 민웅철의 위치를 알려준 사람이 또한 연우강이란 말이 된다.
놈은 기척을 흘려 환영과 마영에게 민웅철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린 다음 돌아가서 월영 일행을 없앴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결국 연우강은 처음부터 칠영이 쫓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민웅철의 존재까지도 알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옥에서 죽은 야효와 풍천마인 그리고 백옥수에 당한 추소백까지, 전부 녀석의 짓이 되는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들을 전부 없애기 위해서는 과거 묵사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 암기!”
용환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야효와 풍천마인이 암기에 당해 죽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놈이 노리는 건 우리 무영이다!”
용환은 급하게 바지를 틀어쥐었다.
한가하게 이곳에 앉아 볼일을 볼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용환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난제를 풀자 마음이 편해진 듯 맹렬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먼저 소변이 쏟아져 나오고 대변이 뒤를 이었다.
용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호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래쪽에 죽음의 사지가 와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몽요의 만화은신사형이 워낙 대단한 무공이기도 했지만 이번 사건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그가 가장 안락하게 생각하는 화장실.
‘ 개자식!’
아래쪽의 몽요는 죽을 맛이었다.
은신술을 펼칠 때 사용하는 복장을 했다고 하지만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지 두 시진째다. 지독한 냄새에 코는 이미 마비되어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한다.
복면이라고 뒤집어쓰긴 했는데 방수 기능도 없을뿐더러 머리며 몸은 이미 분뇨로 목욕을 한 상태다.
‘ 내가 미친 년이지. 이미 잠까지 잤으면서 그놈의 목욕시중을 받으면 뭐 하겠다고....’
하지만 몽요는 투덜거리면서도 용환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노리는 시점은 용환이 볼일을 끝내고 일어나려는 순간이다. 그 순간엔 일어나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주게 되고, 손은 바지를 추켜올리기 위해 허벅지로 향해 있다. 더불어 볼일을 보고 난 후라 마음은 극도로 느슨해진다.
손발이 묶이고 마음은 느슨한 상태.
살수들이 노리는 최적의 상황인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는 눈을 떴다.
볼일을 끝낸 용환이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을 준 채 엉덩이를 세우며 바지춤을 잡았다.
‘ 지금이닷!’
분뇨 속에 들어 있던 몽요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솟구쳐 올랐다.
“ 헉!”
막 몸을 일으키던 용환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는 지금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중이다. 머릿속으로는 보고할 사항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리에는 힘을 주고 양손은 바지춤을 잡았다. 내공을 끌어올릴 수도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빌어먹을!”
용환은 눈을 감고 말았다.
항무에서 시작한 화끈한 기운은 아랫배를 지나 가슴까지 치고 올라와 뒷목으로 빠져나왔다.
“ 크아악!”
용환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개구리처럼 튀어 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몽요는 무기를 놓고 곧바로 몸을 빼냈다.
화장실 뚜껑이 있는 곳으로 온 그녀는 극성의 만화은신사형을 펼쳐 허공으로 녹아 들어감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 무슨 일 있습니까?”
“ 왜 그러십니까?”
멀리서 묵야련 무인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 크! 냄새!”
코를 감싼 몽요의 움직임 더욱 빨라졌다.
“ 진인께서 암살당했다!”
“ 진인께서 살해당했다!”
무인들의 놀란 외침이 연이어 터졌다.
“ 흥!”
몽요는 차갑게 웃으며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그녀 앞에 널따란 호수가 나타났다. 얼마 전 생사림 무인들과 나머지 무인들 사이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당호였다. 그녀는 지체 없이 당호로 뛰어들었다. 물속 깊숙이 잠수해 들어가 그녀는 몸을 세우고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녀의 몸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몸에 붙어 있던 오물들이 떨어져나갔다. 일 각 동안 분뇨를 씻어내고는 호수를 나와 다시 몸을 날렸다. 그녀가 연우강의 처소에 도착한 것은 다시 일다경이 흐른 후였다.
연우강의 부엌에서는 수증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부엌문을 벌컥 열었다.
“ 와!”
여전히 온몸에서 분뇨 냄새가 난다는 사실도 잊고 그녀는 감탄사를 흘렸다. 푸른빛으로 가득 들어찬 공간에 뿌연 수정기가 춤을 추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연우강이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 준비 끝났습니다. 몽요.”
연우강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손으로 욕조를 가리켰다.
“ 몽환적이네요.”
몽요는 활짝 웃으며 욕조 앞으로 걸어갔다.
“ 상상한 것 정도는 되는 모양이죠?”
“ 상상 이상이에요. 우강, 아주 좋아요.”
그녀는 웃으며 옷을 벗었다. 바로 앞에 연우강이 서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야행복을 벗어 던지자 곧바로 알몸이 드러났다.
“ 먼저 안으로 들어가세요.”
“ 고마워요.”
몽요는 거리낌 없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식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는 뜨거운 물속으로 멀가지 담갔다. 몽요가 전신을 물 속에 담그고 있는 사이 연우강은 술을 준비했다.
살행 결과에 대해서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은밀막부의 가주일 뿐 아니라 만화은신사형을 완성한 그녀는 설사 사월림 림주 사월 양도욱이라고 해도 상대가 아니다. 만일 그녀가 마음을 먹는다면 대야벌 백대고수라고 해도 그녀의 비수를 피할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번에 들어온 오백 명 중 가장 많이 성장한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몽요였다.
“ 푸아!”
숨을 참고 있던 몽요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 술 한 잔?”
“ 독하지 않는 걸로 줘요.”
“ 그럼 이 녀석이 딱입니다.”
연우강은 유리잔에 붉은 액체를 따라 몽요에게 내밀었다. 목이 달린 듯한 특이한 술잔을 받은 몽요는 코로 가져가 먼저 냄새를 맡아보았다.
“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무슨 술이죠?”
“ 포도라는 과일 알아요?”
“ 알아요. 그럼 포도로 담근 술?”
“ 그렇습니다. 몽요. 일단 마셔봐요.”
“ 맛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몽요는 빙그레 웃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 와! 달코하면서도 좋네요. 어떻게 구한 거죠?”
그녀는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중원의 술은 대부분 증류주라 맑은 색을 띄기는 하지만 주정이 많이 포함돼 있어 독하다. 그런데 포도주는 달콤하고 부드러울 뿐 아니라 주정도 그리 많이 포함돼 있지 않은 듯 편하게 넘어갔다.
“ 투르판이라고 알아요?”
“ 비단길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 아닌가요?”
“ 맞습니다. 몽요. 그 투르판에는 지금은 멸망했지만 고창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고창국도 몽요의 모국을 멸망시켰던 소정방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 고창국의 특산물이 바로 포도와 포도줍니다.”
“ 그 고창국 사람들이 마시던 술이 포도준가요?”
“ 그렇습니다. 달콤하면서도 독하지 않고, 부드럽게 술술 넘어가기 때문에 몸이 피곤할 때 한잔씩 마시면 아주 좋습니다.”
“ 앞으로 이 술을 무척 즐겨 할 것 같네요.”
몽요??? 다시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모국과 같은 운명을 걸었다는 생각을 하자 공연히 포도주가 정겨워졌다. 그녀는 조금씩 맛을 음미하며 술잔을 비웠다.
“ 이젠 물을 한 번 빼야겠습니다.”
연우강은 커다란 천을 가져와 욕조 앞에서 활짝 펼쳤다.
“ 시종이 있으니까 좋기는 좋네요.”
몽요는 빙그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천으로 몸을 감싸고 나오자 연우강은 욕조 아래쪽에 있는 손목 두께의 나무를 뽑아냈다. 그러자 욕조 안의 물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물을 전부 뽑아낸 뒤 깨끗한 물을 가져와 욕조를 씻어내고는 다시 물을 채우고 석탄을 집어넣어 화력을 높였다.
몽요는 포도주를 따라 마시며 연우강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아직 식초가 필요해요?”
연우강은 선반으로 가며 물었다.
“ 잠깐만요.”
몽요는 어깨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식초 냄새 외에는 악취는 나지 않았다.
“ 식초보다는 녹차가 낫겠어요.”
“ 알았습니다. 그럼 녹차 잎을 잔뜩 넣도록 하겠습니다.”
“ 괜찮겠어요?”
욕조 턱에 걸터앉은 몽요는 욕조 안에 녹차 잎을 떨구고 있는 연우강을 지켜보고 있었다.
“ 뭐가 말입니까?”
“ 용환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우강이 무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알아낸 것 같아서 그래요. 그를 죽여 입막음을 하긴 했지만, 다른 자들 또한 금세 알아차릴 거예요.”
“ 산전수전 다 겪은 자들인데, 지금까지 속인 것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하지만 자들이 어쩔 겁니까?”
“ 무슨 소리죠?”
“ 오는 족족 이렇게 만든다는 거지요.”
연우강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스윽 그었다.
“ 그럼 그 무성패는 무영들을 찾아오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넣은 건가요?”
“ 이젠 무영들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요.”
“ 그 무성패를 보면 연공자의 정체를 알 수 있나요?”
“ 확신을 심어주면 큰일납니다. 그들은 내가 민웅철을 죽였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 하지만 용환은 우강이라고 확신했어요.”
“ 칠영을 없앴던 사건을 단순하게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파고들어 가면 그곳엔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그들은 그자를 의심하게 될 겁니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날 찾아오게 될 거고요.”
“ 우강과 함께 있었던 사람은 저잖아요.”
“ 몽요는 현장에 있었으니까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지만 그들은 시체들만 보고 상황을 짐작해야 하잖아요. 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그때 상황을 그려낸다는 것은 쉽지가 않죠.”
“ 그들이 간접적으로 우강을 압박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 연씨 세가를 말하는 거예요?”
“ 네.”
“ 며칠 있으면 황실에서 사람이 올 겁니다.”
“ 누가 온다는 거죠?”
“ 과거에 친한 척 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오면 당분간은 금릉 연씨 세가는 안전할 겁니다.”
“ 벼슬이 높아요?”
“ 오군도독부의 한 곳인 후군도독부의 이인자입니다.”
“ 후군도독부의 이인자면 도독동지잖아요?”
몽요는 깜짝 놀랐다.
도독동지면 종일품 품계고, 명 제국 병권의 최고 권력층이라고 할 수 있다. 연우강이 그런 자와 친분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 그렇습니다. 물 다 데워진 모양입니다. 들어가요.”
연우강은 손을 내밀었다.
연우강의 손을 잡은 몽요는 천을 풀어놓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 포도주 한 잔만 더 부탁해요.”
욕조 안으로 들어간 몽요는 배시시 웃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 일단 나도 들어가고요.”
술잔을 받아 한편에 놓은 연우강은 옷을 벗었다.
연우강을 지켜보는 몽요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하지만 부엌을 가득 채운 푸른 광채가 붉게 변한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 사람과 어떻게 친분을 쌓게 됐죠?”
가빠지는 숨을 애써 참으며 몽요는 입을 열었다.
“ 군에 있을 때 상관이었습니다.”
연우강은 한편에 둔 술잔과 술병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술병이 둥실 떠올라 뉘어지더니 술잔으로 술이 떨어졌다.
“ 그럼 그때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네요?”
몽요는 신기한 눈으로 술병과 술잔을 보았다.
어떤 기운도 감지할 수 없는데, 살아 있는 것처럼 술병이 떠오르고 술잔에 술이 채워진다. 마라천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엔 술이 채워진 술잔이 둥실 떠올라 몽요 앞으로 날아왔다.
“ 고마워요.”
몽요는 술잔을 그러쥐며 방긋 웃었다.
“ 원래 친한 척 하는 사이는 오래 가는 겁니다.”
“ 친한 척 하는 사이는 어떤 사이죠?”
“ 만날 때도 크게 부담 없고, 떠나도 아쉽지 않은 그런 사이를 말합니다.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가볍게 만날 수 있죠.”
“ 그럼 저와 우강도 친한 척 하는 사이네요.”
“ 친한 척 하는 사이는 이렇게 알몸으로 함께 목욕은 하진 않습니다.”
연우강은 몽요를 번쩍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로 앉혔다.
“ 그럼 어떤 사이죠?”
몽요는 연우강의 눈에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 중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 중간?”
“ 친한 척 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 우강은 어떤 사이를 원하죠?”
그녀는 얼굴을 연우강 앞으로 천천히 가져다댔다.
“ 포두주는 심심해서 싫은데, 포도주보다는 독한 술이.....”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포도주를 가득 머금고 있던 몽요의 입술이 그의 입ㅇ르 막아버린 탓이었다.
몽요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포도주를 나눠 마시던 두 사람의 입맞춤이 격렬해지고 허리를 안고 있던 연우강의 손이 몽요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몽요는 눈을 뜨면서 입술을 뗐다.
그녀는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 우리 사이는.....”
“ 그 대???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 들을게요.”
몽요는 연우강의 말을 끊고 다시 입술을 맞추며 혀를 쑥 밀어넣었다.
벌컥!
“ 연 공자!”
바로 그때 부엌문이 열리며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 응?”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이편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남궁운화였다.
“ 어맛! 미, 미안해요. 연 공자만 있는 줄 알고.”
남궁운화는 급하게 문을 닫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 재도 자주 왔어요?”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던 몽요는 따지듯 물었다.
“ 오늘 처음입니다.”
“ 정말?”
“ 거짓말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나저나 뭔가 가져온 것 같았는데.”
연우강은 부엌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부엌문이 열리고 아래쪽에서 뭔가가 둥실 떠올라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두 사람 눈앞으로 다가온 그것은 다름 아닌 책자였다.
“ 불괴수호신공?”
몽요는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그녀는 내가 흑철마신만 익히고 있는 줄 알고 있잖아요.”
“ 그러니까 이건 외공 무인이 익힐 수 있는 호신공이란 말인가요?”
“ 그런 것 같습니다.”
“ 정말 한 번도 안 왔어요?”
몽요는 의심스럽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 얼마 전에 어떤 일을 시키면서, 그 일이 끝나면 욕조를 공짜로 개방해 주겠다고 했거든요.”
“ 그럼 목욕하러 왔던 모양이네요.”
“ 그런 것 같아요.”
“ 어떻게 할래요?”
“ 뭘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연우강은 다시 몽요를 끌어당겼다.
“ 가만 있어봐요.”
몽요는 연우강을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가려고요?”
“ 지금 그 아이를 마난지 않으면 난 나쁜 년이 돼요, 우강!”
“ 무슨 소리에요?”
“ 아무튼 여자들에게는 그런 게 있어요. 오늘 목욕은 하지 않은 걸로 해요.”
“ 하지 않은 걸로 하자고?”
“ 다음에 다시 하자는 말이에요.”
몽요는 연우강의 코를 쥐고 가볍게 흔들더니 욕조 밖으로 나갔다.
“ 그렇다고 그냥 가면...”
“ 제 옷 어딨죠?”
몽요는 천으로 몸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방안에 있습니다.”
몽요는 방과 연결된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빠르게 옷을 걸친 그녀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서는 연우강의 입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 이거 가져가도 돼죠?”
입맞춤을 마친 그녀는 포도주 병을 가리켰다.
“ 좋을 대로.”
“ 잘 마실 게요.”
몽요는 싱긋 웃으며 만화은신사형을 펼쳐 밖으로 나갔다.
“ 역시 백수가 최고야. 이건....”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연히 눈물이 흘렀다.
그도 성인이고 몽요 언니도 성인이다. 그런 그들이 욕조에서 함께 목욕을 하고 입맞춤을 한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부인이나 남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 처녀 총각이 아닌가.
그런데 알몸으로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 속이 상했다. 그래서 도망치듯 그곳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 휴!”
눈앞에 널따란 호수가 나타나자 남궁운화는 한숨을 쉬며 멈춰 섰다. 확 트인 호수를 보자 비로소 진정이 됐다.
“ 운화야, 운화야. 넌 도대체 어떻게 된 게 그 모???이냐? 그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녀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동안 연우강을 만난 건 손가락으로 꼽고,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건 승천비고에서 책을 볼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떤 감정이 생긴다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다. 그런데 공연히 몸이 달아 있었던 것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 바보 같은 년!”
남궁운화는 픽 웃었다.
“ 여기 있었네?”
그때 뒤편에서 몽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남궁운화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부엌에서 보았던 몽요가 도자기로 만들엊ㄴ 병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 앉아도 돼?”
“ 아, 앉으세요.”
남궁운화는 자리를 약간 옮겨 앉았다.
몽요는 남궁운화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앉자마자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 마실래?”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난 몽요는 남궁운화 앞으로 술병을 내밀었다.
“ 난 술 못해요.”
“ 이건 독한 게 아니라서 술을 못하는 사람도 마실 수 있어.”
“ 무슨 술인데요?”
공연히 어색하여 물었을 뿐 술을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 포도로 담근 술인데, 아주 오래 전에 존재했던 고창국의 사람들이 마시던 술이래.”
“ 연 공자가 전쟁터에 있을 때 마셨던 술인가 보네요.”
“ 그럴 수도 있겠네. 마셔볼래?”
“ 한 모금 정도는...”
남궁운화는 술병을 바다 입으로 가져갔다. 술은 향긋한 포도 향을 풍기며 부드럽게 넘어갔다.
“ 괜찮지?”
“ 그, 그렇네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어 모금을 더 마시고 술병을 건네주었다.
“ 충격 받았지?”
술병을 받은 몽요는 그제야 조금 전 상황을 꺼냈다.
“ 충격까지 아니고 조금 놀랐어요.”
“ 그거 알아?”
몽요는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며 흘리듯 말했다. 남궁운화는 호수로 시선을 주며 몽요의 말을 기다렸다.
“ 남자는 힘들고 외로울 때 위로 상대로 어머니를 찾지만, 여자는 사내를 찾는다는 말 말이야.”
“ 정말 그래요?”
“ 내 경험상으로는 그래.”
“ 왜죠?”
“ 여자도 남자처럼 부모님을 찾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 네.”
“ 글쎄.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어쩌면 거리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 어떤 거리를 말하는 거죠?”
“ 아들은 가난한 집이나 부잣집이나 그 집안의 기둥으로 키워지는 경우가 많고, 딸은 훌륭한 사위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키워지는 경우가 많잖아.”
“ 부모님과의 거리란 말인가요?”
“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내게 했던 말이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였거든. 딸인 나에게는 먼저 가서 미안하다든가, 행복하게 살라거나 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오직 남동생 걱정뿐이었지. 더 웃긴 건 난 그분들의 말씀대로 지금껏 살아왔다는 거야.”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는 말이군요.”
“ 그런 것 같아.”
“ 난 언니는... 참! 언니라고 해도 되죠?”
“ 그래주면 난 고맙지. 남동생보다 여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거든.”
“ 언니도 힘들고 외로워요?”
“ 내가 편해 보여?”
“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빼어나고, 무공도 강하잖아요.”
“ 한 가문의 가주가 가문을 떠나 이런 곳까지 와 있는 것 자체가 불행한 거야.”
“ 언니도 가주라고요?”
“ 몰랐어?”
“ 네.”
남궁운화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가솔들의 반란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불행한 가주지.”
“ 그건 나하고 같네.”
“ 넌 남궁철상이 주화입마에 들어 폐인이 됐으니까 걱정없잖아.”
“ 남궁철상이 끈이 아니라고요. 남궁철상을 가주로 앉히려고 했던 그들이 문제지.”
“ 아무튼 큰 짐 하난 덜어낸 셈이잖아.”
“ 그래서 연 공자에게 기댄 거예요?”
“ 기댔다고 하기보다는 힘들고 외로울 때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그는 잘생겼잖아.”
“ 그가 뭐가 멋지다고 그래요. 입만 열면 돈, 돈, 돈 그저 돈밖에 모르잖아요.”
“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 사실이 그렇잖아....”
남궁운화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세상엔 말이야. 뭔가에 미친 듯이 열중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 그 열정이 식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 알아?”
“ 어떻게 되는데요?”
“ 자살.”
“ 정말?”
“ 그렇다니까.”
“ 연공자도 자살할 거라는 거예요?”
‘ 이런 등신 같은 년.’
몽요는 내심 아차했다.
연우강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한 듯했던 남궁운화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또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 같았다.
“ 그가 자살을 왜 해?”
얼른 바로 잡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 술 좀 줘봐요.”
“ 못 마신다며?”
몽요는 술병을 뒤로 뺐다.
“ 그건 달고 맛있어서 술이 아닌 것 같아서요.”
남궁운화는 배시시 웃으며 손을 뻗었다.
“ 안 된다니.... 얼레?”
술병을 뒤로 감추려던 몽요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 남궁운화의 손이 교묘하게 움지읻니 어느새 술병을 빼앗악간 것이었다.
“ 뭐냐 그건?”
“ 대연십삼식이라는 남궁세가의 비전 금나수야, 언니.”
남궁운화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마치 물을 마시는 것처럼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그것도 많이 마시면 취해, 이것아.”
“ 헤! 아주 좋은데, 뭐.”
벌써 취기가 도는 듯 남궁운화의 목소리가 꼬여나왔다.
“ 그만 가자.”
몽요는 남궁운화를 잡아 일으켰다.
“ 아직 술이 남았어. 이거 다 마시고 가요.”
남궁운화는 몽요의 손을 뿌리치고는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번에도 역시 그녀가 사용한 수법은 대연십삼식이라는 금나수였다.
‘ 내가 가장 많이 발전한 줄 알았는데, 진짜는 운화였구나.’
그녀는 감탄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들어오는 날부터 그녀를 보았다. 그 당시만 해도 그녀는 햇병아리라고 불러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손의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다. 취중에 저 정도 실력을 발휘할 정도면 맨 정신일 때는 대단한 것이다.
이곳에 들어와 장족의 발전을 이룬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운화였다.
“ 다 마셨어, 언니.”
남궁운화는 술병을 홱 던져버렸다.
“ 걸을 수 있겠어?”
“ 당연히 걷지. 내가 바본가.”
풀썩!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남궁운화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 어! 이거 왜 이래. 언니. 혹시 진식 펼친 거야?”
자리에서 일어났던 남궁운화는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 술이라는 진식이다. 이것아.”
몽요는 툴툴대며 남궁운화를 들쳐 업었다.
“ 와! 언니 등판 되게 넓다.”
“ 이것아,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등판이 넓다는 건 욕이야, 욕!”
“ 헤헤, 그래도 넓고 좋은데, 뭘. 그런데 이건 무슨 냄새지?”
“ 냄새 나?”
“ 화장실 냄새가 심하게 나, 언니.”
“ 정말?”
“ 킥! 목욕은 안 하고 딴 짓만 했구나.”
“ 아냐, 식초에 푹 담가서 분뇨 냄새를 없앤단 말이야.”
몽요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연우강이 적극적으로 나오기에 몸에서 냄새가 없어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분뇨 냄새로 떡칠한 자신의 몸에 그는 입맞춤을 했던 것이다.
“ 원래 그는 남에 대한 배려가 심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쉽게 오해하게 만들기도 해요.”
몽요의 마음을 알아차린 남궁운화는 마치 자기만 아는 비밀인양 말했다.
“ 그, 그런 거야?”
“ 좋은 사람이니까 놓치지 말라는 거야. 언니.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 나보다 네가 후회할 것 같은데?”
“ 나는 원래부터 운이 없었던 아이야. 언니. 그런 행운이 올 리가 없다.... 쿨!”
남궁운화는 몽요의 어깨에 고개를 푹 떨궜다.
“ 넌 글도 운이 좋은 거야. 나는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남자와 잤고, 그 남자를 내 손으로 죽였어. 아마....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곳에서 포기했을지도 몰라. 그가 처음 보는 내게 말을 걸었던 건 그런 나를 알아봤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가 고마워. 그것뿐...”
몽요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갑자기 오른편 어깨가 축축해져 온 것이었다.
“ 안 잤어?”
“ 푹 자고 있어, 언니.”
“ 그래 푹 자. 어둠이 짙을수록 태양은 더 밝게 뜨고, 추운 겨울을 견딘 매화가 더 아름답다고 했으니까.”
그녀는 시를 읊조리듯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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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로 인해 오해를 사면 화가 나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 증상이 점점 심해지면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고 몸에서 열이 난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리에 눕게 되는데 보통 그 상태를 일컬어 화병이라고 한다.
지금 양도욱의 상태가 그랬다.
아직 화병까지 진행이 되진 않았지만, 그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이렇게 끙끙 앓는 이유는 적사진인 용환의 죽음 때문이었다. 용환은 화장실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 수법이 오살의 일원인 지살의 수법과 흡사했다.
아니 비슷하다는 건 지살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다른 사람이 보기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다.
만일 용환이 무궐 소속이 아니고 다른 세력 소속이었다면 벌써 공론화 돼 지살은 율령궁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있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대야벌 공적으로 사월림이 지목될 수도 있는 큰 사건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무궐의 궐주인 검천제 공손정우의 입을 먼저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운자준을 무궐로 보냈고 지금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 접니다. 림주님.”
피곤에 절은 듯한 목소리와 함께 운자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 어떻게 됐는가?”
양도욱은 운자준이 앉기도 전에 상황을 물었다.
“ 답이 안 나오는 잡니다.”
“ 답이 안 나온다는 건?”
“ 그날 지살은 사월림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질 않습니다.”
“ 증인이 있다고 하지 그랬는가?”
“ 그 증인 자체를 못 믿겠답니다.”
“ 그런 미친 놈이 있나. 우리가 뭐가 아쉬워 용환을 없앤단 말인가?”
“ 저도 그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용환과 민웅철은 상당히 친분이 두터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 친분이 두터운 것과, 그의 죽음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칠영과 민웅철이 동귀어진한 걸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 그러니까 그자는 우리가 칠영의 복수를 하기 위해 용환을 죽였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 또 있는가?”
“ 청부 금액을 올리기 위해 용환을 선택한 거 아니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더군요.”
“ 그러니까 우리가 암살대전에서 청부받을 때 금액을 늘리기 위해 용환을 시범적으로 죽였다고 하더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 허허!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월영, 귀영, 사영, 풍영을 죽인 범인도 아직 찾아내지 못했는데.”
양도욱은 황당한 얼굴로 운자준을 보았다.
“ 그 부분에 대해서도 따졌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을 듣더니 그들 넷을 죽인 범인으로 용환을 지목한 것이 아니냐면서 더 따지고 들었습니다.”
“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나?:”
“ 다행히 무궐 전체로 소문은 퍼지지 않았습니다. 용환의 가족과 그곳에서 일하던 몇 명만 이번 일을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 돈을 달라는 말이군.”
“ 그렇습니다.”
“ 얼마나 달라고 하던가?”
“ 이번 암살대전에서 잠룡들의 호위로 용환을 내보낼 참이었답니다.”
“ 일반 무인을 호위로 고용하게 되면 백만 정도 소요되니까 최소 그 두배는 달라고 했겠군.”
“ 아닙니다.”
“ 그럼.”
“ 용환의 갖ㄱ에게 이백만 정도를 줘야 하고, 입막음하는 데 백만 정도가 필요하답니다.”
“ 합이 얼마란 말인가?”
“ 오백만 냥을 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보겠답니다.”
“ 개자식! 무인이라는 새끼가.....”
급기야 양도욱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무궐의 궐주 검천제 공손정우는 겉으론 구파일방을 위해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벌주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자 중의 한 명이다.
이번의 잠룡강호행이라는 해괴한 교육 과정을 의결할 때만 해도 그랬다. 청부를 맡아야 하는 사월림의 입장에서는 잠룡들이 강호로 흩어지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 일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려고 하였는데 친 벌주파를 비롯한 공손정우 같은 자들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통과되고 말았다.
“ 일단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고 해 두었습니다.”
“ 여유 자금은 어느 정도 있는가?”
“ 삼백만 정도 있습니다.”
“ 이백 만이 부족하다는 소린데....”
“ 오는 중에 부전에 들렀습니다.”
“ 돈이 걱정돼서 들렀던 건가?”
“ 그렇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청부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 어떤 청분데 그런가?”
“ 이겁니다.”
운자준은 첩지를 꺼내 내밀었다.
청부금액: 은 일천만, 이백만, 백만.
청부기간: 육 개월, 일 년, 일 년 육개월
계약금: 일백만.
대상 사초 연우강.
특이사항: 실패했을 경우 배상에 대한 구체적인 보증이 필요.
청부자 : 미상.
“ 또 연우강인가?”
양도욱은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칠영이 죽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연우강에 대한 청부다.
더불어 그 일로 인해 이번엔 오백만 냥이라는 거금을 날리게 생겼는데 놈에 대한 청부가 또 들어왔으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 금액을 보십시오. 림주님.”
“ 무슨 뜻인가?”
“ 양도욱이 금액보다는 청부 대상을 먼저 언급한 것은 세 가지로 적혀 있어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육 개월 안에 처리하면 천만 냥을, 일 년 안에 처리하면 이백 만 냥을 준다는 뜻입니다.”
“ 삼 년 연공이 끝날 때까지 끌면 백만이라는 소린가?”
“ 그렇습니다.”
“ 그런데 특이사항이란 뭔가?”
천만 냥이란 말에 환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양도욱은 애써 참았다. 방금 유지웅이 오백만 냥을 요구했다는 말을 듣고 욕을 했던 게 떠올라서였다.
“ 이번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 이번이라고 했다면 전에도 우리에게 청부를 넣었다는 말이 아닌가?”
“ 얼마 전에 남궁세가에서 밀고 있는 남궁철상이 주화입마에 들어 폐인이 되었습니다.”
“ 그럼 이 청부도 남궁세가에서 한 거란 말인가?”
“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 이미 청부를 했던 자들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또다시 청부를 넣는 게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 이상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얼마 전에 남궁세가에 대해 조사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 어떤 사실 말인가?”
“ 남궁세가 수뇌들은 남궁철상과 남궁운화를 혼인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혼인을 통해 자연스럽게 가주 자리를 남궁철상에게 넘겨주도록 할 셈이었다는 건가?”
“ 그런데 그 의견이 남궁세가 전체의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수뇌들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그러니까 남궁세가 수뇌들 입장에서는 폐인이 된 남궁철상이라도 상관이 없단 말이군.”
“ 어차피 허수아비 가주 아닙니까? 살아 있기만 하면 문제 될 리가 없겠지요.”
“ 그럼 그들은 세가인들의 눈이 무서워서 이번엔 익명으로 청부를 넣었다는 말이 되는가?”
“ 그런 것 같습니다.”
“ 그럴 수도 있겠군.”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제가 의견을 내기엔 너무 큰 건입니다. 림주님.”
“ 연우강만 없애면 끝나는데 뭐가 큰 건이란 말인가?”
“ 그렇긴 합니다만.....”
운자준이 기껍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번 청부가 오백만냥이라는 거금이 필요한 시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공연히 찜찜하여 선뜻 좋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번 사건을 무마하려면 거금이 필요한 데 청부를 받지 말자고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 청부를 받게, 보증은 우리가 가진 땅과 주점, 객잔, 표국의 문서로 대체하게. 그걸로 부족하면 내가 각서를 써준다고 하고, 그리고 유자웅에게도 오백 만을 주겠다고 하게.”
“ 그렇게 하겠습니다. 림주님.”
운자준은 고개를 숙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군을 통수하고 있는 오군도독부 중의 한 곳인 후군도독부의 이인자가 느닷없이 들이닥치자 대야벌 수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둘러 손님 맞을 준비를 했지만 그마저도 양성일의 거절로 인해 취소됐다.
그리고 연회 다음날 양성일이 찾은 곳은 황실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황궐과 금황련이었다.
하지만 이번 방문엔 성대한 잔치도, 감미로운 주악도 없었다. 쓰디쓴 화주와 잘게 찢은 육포가 전부였다.
“ 턱살도 늘어지고, 뱃살도 출렁이는 걸 보면 살 만한 모양입니다.”
“ 원래 도독동지라는 자리가 뇌물이 많이 들어오는 자리 아니냐.”
“ 뇌물의 뇌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녀석에게 시켰겠지요.”
“ 그렇게 사시다간 말년이 불행해질 수도 있어서 드리는 말입니다.”
“ 금릉 연씨 세가 장남인 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 제가 여기 들어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감히 개독새를 건드릴 생각을 하고.”
“ 전 전장의 개독새일 뿐입니다. 여기선 똥지게에 불과하고요.”
“ 하하하! 네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다. 반갑다. 녀석아.”
“ 저는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장군님. 아무도 모르게 오시라고 했지. 이렇게 요란스럽게 오라고 한 적 없습니다.”
“ 도독동지를 은밀하게 오라는 놈이 잘못됐다는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은밀하게 할 말이 있으면 네가 움직여야지. 녀석아.”
“ 빌어먹을 자식들이 얼마나 싸대는 줄 아십니까. 얼마나 바쁘면 조수까지 두고 일을 하겠습니까?”
“ 반면에 장군님은 시간이 남아도는 분 아닙니까. 당연히 노는 사람이 움직여야지요. 앉으십시오.”
“ 그러자꾸나. 그런데 정말로 준비한 건 이게 다냐?”
“ 매월 수만 냥의 거금을 벌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건 헛소문인 게냐?”
양성일은 연우강의 손에서 병을 낚아채 갔다. 그러고는 연우강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두 사람은 동시에 술잔을 비우고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 아무튼 언제든지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너라. 네 자리는 만들어 줄 테니까.”
“ 그럴 줄 알았으면 격식을 차려서 요란하게 방문할 걸 그랬구나.”
“ 아닙니다. 지금 상태가 가장 좋습니다. 규모가 크면 빈수레라며 오해하고 오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더 큰일이 납니다.”
“ 은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란하지도 않는 상태가 상대방에게 더 두려움을 심어준다는 말이냐?”
“ 더는 부하들 죽음에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더 미안합니다. 최소한 사람으로 죽게는 했어야 했는데, 전 그러지 못했습니다.”
“ 절 욕하는 건 장군님 얼굴에 침을 뱉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녀석이 들어오자마자 고참 열 다섯 명을 죽여 없앴느냐?”
“ 물건만 자르고 끝내려고 했는데 녀석들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된 겁니다.”
“ 난 방금 네가 말했던 것처럼 턱도 늘어지고 배도 나왔다.”
“ 아닙니다. 장군님. 변하려면 외모가 아니라 머릿속이 변해야 하는데 장군님은 그대롭니다. 변했다면 정천호 놈이 부른다고 삼 년 굶은 과부처럼 이렇게 뛰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양성일은 피식 웃고 말았다. 말로는 어떻게 해볼 녀석이 아니었다.
“ 흐흐흐! 전 이놈의 주둥이 때문에 황실로 못 간다는 겁니다. 장군님.”
“ 두보관이라고, 전에 패천림의 림주였던 잡니다. 지금 천옥에 있습니다.”
“ 림주까지 했던 자가 천옥에 갇혔다면 보통 죄를 지은 게 아닌 것 같은데....”
“ 아버진 지옥에 갇혀 있어서 가뜩이나 심란한데, 마누라가 바람을 피웠던 모양입니다.”
“ 그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구하지 못해 화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 죽은 놈들은 마누라와 바람 핀 놈과 같은 패거리였답니다.”
“ 그들을 패 죽이고 일부러 감옥에 들어갔단 말이구나. 그런다고 제 아비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 친군 바보 중의 바보구나.”
“ 생긴 것도 바보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빼내면 두작군은 잘살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 알았다. 부탁은 해보겠다만 담대만승이 빼주지 않으면 나도 방법이 없다.”
“ 그는 빼낼 줄 수밖에 없으니까 장군님은 정중하게 부탁만 하시면 됩니다.”
“ 좀 많아서 인편에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인편으로 보내면 정말로 뇌물이라고 할 것 같아서 오시라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 그들은 자식들이 흑랑기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느냐?”
“ 그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장군님. 이기적이라고 하겠지만 제 편하고자 이러는 겁니다. 아침마다 이명으로 돌려오는 기상나팔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양성일은 깜짝 놀랐다. 연우강이 잠룡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는 말은 이곳에 와서 들었다. 그런데 그 금액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 그렇습니다. 장군님. 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저보다 더 똑똑한 놈들이 넘치는 황실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그보다 얼마나 찾았습니까?”
“ 절반 정도는 찾았다. 그런데 이 돈은 어떻게 썼으면 좋겠느냐?”
“ 땅도 사주시고, 서당도 지어주시고, 장군님이 적당히 알아서 해 주십시오.”
“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황상을 속이는 건 용서가 안 된다. 만일 그 일이 밝혀지는 날이면 나나 너는 물론이고 가족들도 전부 살 생각을 버려야 한다.”
“ 그건 걱정 마시고 진급할 생각이나 하십시오. 황실로 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종일품입니까?”
“ 이 녀석아, 종 일품이면 최고자리야. 위엔 정일품 한 품계밖에 없다는 것도 모르느냐?”
“ 긴장하지 않으시니까 턱살과 뱃살이 늘어지는 거 아닙니까, 육십도 안 된 분이 그게 뭡니까?”
“ 다음에 뵐 때는 무사안일에 젖은 도독동지 말고 첨목장군 양성일 장군님을 보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화주로 시작했던 술자리는 팔려고 숨겨두었던 고급술까지 전부 나오고 나서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잠룡강호행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은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조를 편성하는 날이 다가왔다.
훈련장에 모여 있는 잠룡들의 얼굴엔 그동안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눈 아래가 검ㄱ 그늘진 자들은 물론이고 입술이 부르튼 자들까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나가는 잠룡강호행은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시점까지라고 돼 있다.
그 말은 곧 이전까지의 성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마지막 평가는 오직 잠룡강호행으로 한다는 의미였다. 조를 선택하는데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올라오자 사오십 명의 잠룡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환영했다.
묵야련 련주 묵연도노 유자웅이 담대만승을 향해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공적인 자리라고 하지만 자식이 다른 잠룡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대만승은 흐뭇한 얼굴로 담대무궁을 지켜보았다.
윤허의 인기는 담대무궁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얼마나 함성이 요란한지 그는 손을 들어 저지해야 했다. 잠룡들이 함성을 그치자 윤허는 말을 이었다.
잠룡들의 호응이 담대무궁보다 훨씬 높자, 조금 전 담대만승이 그랬던 것처럼 무궐 궐주와 구중련 련주를 비롯한 두 세력 소속 무인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윤허가 물러나자 차가운 인상의 율한천이 앞으로 나와 자신을 소개했다.
“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한 말을 여러분도 아실 거요. 하지만 우린 양민이 아니고 무인이오. 무인은 길이 아니면 만들어서 가야 하는 자들이오. 단.....”
잠시 동안 잠룡들을 보던 그는 내공을 실어 강하게 외쳤다.
“ 무인이 만드는 길은, 최고의 자리로 통해 있어야 하오. 최고가 되고 싶은 잠룡은 나를 따르시오!”
다섯 번째로 나선 자는 다라밀영 이리파였다. 포달랍궁 출신인 그는 중원에 특별한 연고가 없어 열렬한 환영을 받지는 못했지만 차분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자신감 넘치는 북리태우의 연설에 잠룡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북리태우란 자를 쳐다보고 있던 연우강은 이지약 옆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 말투로 봐서는 북쪽 출신인데 특별히 알려진 정보는 없어요.”
“ 알려지지 않은 자와 무공이 비슷하다고 나무라는 거예요?”
북리태우가 뒤로 물러서자 이지약은 단상 중앙으로 나갔다.
나직했지만 내공이 가득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훈련장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바로 앞에 있던 잠룡들은 물론이고 후미에 있던 무인들도 이지약의 내공에 깜짝 놀랐다.
“ 난 내세울 게 별로 없어요.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데 최선을 다할 거라고 약속은 할 수 있어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잠룡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이지약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오자 회색 무복을 걸친 사내가 중앙의 단상으로 걸어갔다.
연우강은 이번엔 나천후라고 하였던 사내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지약을 향해 물었다.
“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사람의 기운이 어떻게 건물과 비슷해요.”
“ 난 천리추혼객 하정일이오. 앞서 많은 분들이 좋은 말을 전부 가로채 가서 난 특별히 할 말으 없소. 다만......”
“ 손바닥에 침까지 발라가면서 사정없이 후려칠 겁니다.”
“ 어떤 분이 내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정상 주변은 물론이고 아래쪽까지 전부 살필 수 있다고요.”
“ 이 소저는 정상으로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쪽은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자 이지약은 전음으로 버럭 소리쳤다.
“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연 공자 차례 아닌가요?”
많은 잠룡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로 향해 있자 이지약은 눈썹을 씰룩했다.
지금껏 긴장한 얼굴로 조장들의 말을 기다렸던 것과는 달리 잠룡들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 묵사를 발견한 현장에 있었다고 하던데 묵사가 어떤 검인지 알고 싶소. 연 공자.”
담대만승에게서 묵사를 어떻게 빼앗아가나 몹시 고민스러웠는데 방금 잠룡의 질문으로 인해 해결책이 떠오른 것이었다.
“ 아주 좋은 질문이네. 친구. 하지만 친구는 묵사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가 없네.”
두 사람의 말투가 느닷없이 반말과 공대로 바뀌었지만 너무 자연스러워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혹시 얼마 전에 다녀간 양성일 도독동지 기억하는가?”
“ 전우라고 하긴 그렇고, 아무튼 전장에서 함께 싸운 건 맞네. 그 양반과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꼭지가 홱 돌 때까지 마셔버린 모양이네.”
“ 술이 깨고 나서 양성일 도독동지께서 느닷없이 묵사에 대해 묻더구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룡들은 물론이고 후미에 있던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담대만승에게로 향했다.
분명 도독동지는 묵사에 대해 언급을 했고 보여주기까지 했다. 묵사를 본 양성일은 명검을 보았다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어떻게 찾았느냐며 묻기는 했다.
하지만 곧바로 천옥에 수감 중인 두보관에 대한 말을 꺼냈을 뿐 묵사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묵사 때문에 새로운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묵사의 신물을 함부로 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담대만승은 고개를 돌려 만우량을 보았다.
[ 묵사는 대야벌이 아닌 무성의 지존신물입니다. 그런 물건을 대야벌에서 신성시한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연우강에게 줘버리는 게 낫습니다.]
[ 무성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저들에게 보여주자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더불어 묵사가 대야벌 외부로 나가면 보물 쟁탈전까지 벌어질 것입니다. 그럼 무림을 혼란스럽게 하고자 하는 벌주님의 목적도 더 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연우강이 주으면 상단 만드는 걸 포기해야 하네.]
[ 범 궁주가 연금석의 동생들과 접촉하고 있는데 일이 잘 풀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 쥐를 잡는데 고양이의 색을 따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 도독동지 양성일 장군도 기뻐할 것입니다. 벌주님.”
“ 굳이 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명색이 조장인데 잠룡들에게 포부 정도는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눴던 사내를 보았다.
아니 잠룡들뿐만이 아니었다. 귀빈석에 있던 수뇌들과 후미에 있던 무인들조차도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가 왜 정천호가 됐는지, 그 어린 나이에 천이백 명의 부하를 거느렸는지 비로소 알 수 있을 듯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잠룡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언변과 반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지 않는 저 모습이 바로 녀석의 진면목이었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은 듯, 연우강은 품속에서 책자를 꺼내 들었다.
잔뜩 얼어있다가 느닷없이 외상값 이야기가 나오자 한순간에 마음이 풀린 잠룡들은 저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내질러 버렸다.
“ 좋아, 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연우강은 손을 휘 저으며 자리로 들어갔다.
“ 외상값 말이지 뭐겠어요? 앞부분은 이거였는데 나중에 한 말 때문에 맥이 빠지고 말았어요.”
이지약은 엄지손가락을 위로 세웠다가 아래로 꼬꾸라뜨렸다.
“ 묘아 당신이 제일 많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바로 집에 연락해서 돈부터 준비하라고 해!”
연우강은 윽박지르듯 이지약의 얼굴 앞으로 머리를 디밀었다.
“ 당연히 그래야지요. 여기서 북경까진 그렇게 멀지도 않는데.”
“ 그런데 정말로 잠룡들이 오지 않으면 어쩔 거예요?”
그녀는 단상 아래쪽에 나란히 꽂힌 깃발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바로 그때 잠룡궁의 궁주 천기만리통 혁세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잠룡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잠룡 중 한 명이 움직이자 우르르 이동하기 시작했다.
“ 이봐! 내 말 못 들었어? 나랑 함께 다니면 죽는다고.”
연우강은 십 조 깃발 앞으로 모여든 잠룡들을 보며 소리쳤다.
“ 상관없습니다. 조장님. 우린 조장님과 함께 모험을 해보겠습니다.”
“ 외상값은 혼자 받으러 가야지 여럿이 함께 받으러 가면 건달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그녀들 뒤편으로는 수여설을 비롯한 호위들 소개시켜 주었던 잠룡들이 따르고 있었다.
“ 전쟁터에서는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겁니다. 그런데 자넨 웬일이야?”
거대한 덩치 사내가 다가오자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윤허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거철산이었다.
“ 안 되는 게 아니라, 윤허 그 친구를 따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 거지.”
“ 오! 묵사를 얻게 해준 장본인이 왔구먼. 이름이 뭔가?”
“ 장사덕이라면 외상을 한 번도지지 않았던 모양이네?”
“ 그렇습니다. 조장님. 집안이 빈곤해서 비싼 물건을 쓸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 앞으로는 빈곤 걱정 따윈 하지 않아도 된다. 장사덕. 죽지만 않으면 넌 부자가 될 거다.”
연우강은 빙긋 웃으며 단상 아래쪽으로 다리를 늘어뜨리며 걸터 앉았다.
“ 전쟁터에서 죽지만 않으면 장수를 누린다는 것고 같은 말 같습니다. 조장님.”
“ 죽지 않는 걸 장수했다고 하는 거 맞잖아. 그리고 앞으론 광랑이라 불러라.”
“ 장사덕 넌 지금 당장 남천문을 나가서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좋은 주루를 통째로 빌려라. 빌린 사람 이름은 야장 장주 무원, 인원 오십 명, 날짜는 내일 저녁이다.”
장사덕은 얼굴을 찌푸렸다. 잡종 이리라는 말에서 혓바닥을 내밀고 꼬리를 흔드는 똥개가 떠올랐다.
장사덕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날려 자리를 떴다.
“ 각 군장은 조원들을 선발하도록. 선발이 끝난 조는 해산해 내일 이곳에 다시 집합하도록 하고, 서로간의 인사도 물론 내일 할 거야.”
“ 난 작별 인사 할 사람이 많습니다. 몽요. 내일 보자고.”
“ 머잖아 널 도와줄 사람이 찾아올 거야. 그에게 많은 걸 배워라.”
“ 너와 형수씨의 혼인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열심히 하고.”
연우강은 막장의 어깨를 툭 치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도 연우강은 무원과 창노를 만나고, 다른 일꾼을 만나 인사를 하느라 바쁘게 다녔다.
그런 연우강이 떠나는 광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무성 서열 이 위이자 군마련 련주인 십절무적검 담대천호였다.
굳이 이곳에 나올 필요가 없는 그는 전마 사유성을 배웅 나온 것처럼 하여 나와 있는 이유는 연우강이 가진 묵사 때문이다.
형님인 담대만승에게 묵사를 달라고 몇 번이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더니 결국엔 연우강에게 줘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멀어지는 연우강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가 지옥의 무성에 도착한 것은 한 시진 후였다. 무성에는 이미 대부분의 무영들이 자리해 있었다.
묵사가 연우강의 손에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전날 회의를 소집해 두었다.
“ 나도 알고 있소. 삼 호. 하지만 지금 당장 묵사를 찾아오는 건 불가능하오.”
“ 일단은 감시만 하고 있어야 하오. 놈이 묵사를 가지고 강호로 나가는 순간 무인들은 벌떼처럼 달려들 거요. 그들과 드잡이를 벌일 때 우리가 나서야 하오.”
“ 지금은 그것보다 민웅철과 용환의 죽음에 대해 토의를 해야 할 때요.”
구 호가 검집이 비어져 나온 작은 보자가 히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육신은 이곳에 묻히지 못한다고 해도 무성패가 있으니까 후예를 거둘 수도 있을 거요.”
무성패가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지나 간 탓이었다.
허공섭물이 발휘되면서 보자기가 둥실 떠올라 담대천호 앞으로 날아왔다.
보자기가 탁자 위로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담대천호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보자기를 풀었다.
그리고 검 옆에 둥근 패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앞면은 여느 무성패와 다르지 않았다. 담대천호는 무성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성패를 잡아가는 그의 손이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렸다. 담대천호를 바라보는 무영들의 눈빛이 의아하게 변했다. 이 호가 저렇듯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무영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담대천호는 무성패를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뒤집었다.
무성패를 쳐다보는 담대천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곧이어 그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 안광이 향한 곳은 무성패 후면 중앙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