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출처: 사회방 원문보기 글쓴이: 소립
좋은 글이 있길래 복사하였습니다.
김구선생님에 대해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구의 사상과 행동의 재조명 백기완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79 1. 몰이해에 대한 반론 "황소 백 마리가 와서 나를 끌어 당겨도 우리 동포끼리 담판하여 통일독립을 쟁취코저 하는 나의 결심은 한치도 무너뜨릴 수는 없다."고 남북협상 반대시위대 앞에0서 산악같은 신념을 내 보이던 백범 김구를 백주 대낮에 총탄으로 참살한지 어언 30년, 백범의 침몰로 말미암아 평화적이며 또한 양성적 의미의 민족의 자주통일독립운동은 사실상 좌절되고 말았는 데도 불구하고 백범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또한 몰이해가 아직까지 난무하고 있는 것은 기가 막힌 사실이다. 우선 백범을 기념하는 커다란 동상이 남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마다 그가 참살 당한 날은 예외없이 추모제를 갖는다. 또한 요즈음의 고등학교 교과서엔 '나의 소원'이라는 유명한 백범의 말씀을 새겨 넣고 있을 정도로 백범에 대한 추모는 보편화된 느낌이다. 하지만 백범의 전생애를 통한 피나는 싸움의 내력을 더듬어 볼 때에 이것은 사악한 간지가 농하는 위장된 추모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씻을 길이 없을 것 같다. 백범은 한마디로 누구인가.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는 태어나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그의 전생애를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항일투사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추모란 그의 뜻이 이 역사적 현실에 실현된 부분에 대한 실천적 계승과 평가라는 뜻이 있을 때에만 제 값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범이 가신지 4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한일관계는 연간 무역역조 35억불(78년 현재)이 웅변하듯이 구조적인 불평등관계로 접어 들었다. 따라서 이러한 물질적 관계는 분단된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안보를 동일시하는 군사적 관계에로의 발전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단적인 증거로 탈냉전이라는 근본적인 동북아정세 변화의 조짐이 짙어가는 이 때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일본의 군사책임자가 내한(1979년 7월 말경)할 정도로 한일관계는 밀착되고 있다. 백범은 일찍이,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한 자는 파시스트 强盜群 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1948년 2월 13일 『백범어록』 라고 갈파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대목은 백범은 일찍부터 2차세계대전 전의 일본과 2차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을 동질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 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고 선언한 것은 과거의 일본은 일본제국주의의 자기 모순에 의하여 전쟁을 직접 도발하였던 것이지만 2차대전 이후의 일본이란 전쟁도발의 구조적 잠재요인으로 존재하고 따라서 일본이야 말로 전쟁이 아니면 자기 존립을 지속할 수도 전쟁의 잿더미로부터 부흥할 수도 없다는 것을 명쾌하게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일본의 역사적 존재, 이러한 일본의 복잡다단한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인식논리를 그의 전생애를 통한 항일투쟁경험으로 하여 한 마디로 농축시킨, 고도의 논리적 인식이 직관화된 교훈이라고 할 것이다. 이 교훈은 백범의 교훈이자 동시에 오랜 동안 외침에 맞서 싸운 우리 민중이 흔들릴 수 없는 지혜요 행동강령이다. 오늘날도 참다운 이 땅이 민중이 이 지혜와 행동강령으로 하여 싸우고 있음은 유구한 민족사의 합리적인 발전과정이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백범을 한갓된 추모의 대상을 섬기고자 하는 것은, 이를 어설피 이야기하면 백범의 참모습에 대한 왜곡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요, 또 이를 곧바로 지적하면 백범에 대한 제2의 타살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같이 백범에 대한 요즈음의 추모행사는 오랜 동안 민중이 터득한 지혜를 거역하고 따라서 <긴밀한 한일관계>라는 일찍이 반도적 조건 하에서 있는 것과 함께 아주 첫판부터 백범에 대한 인식을 잘못하고 있는 측면이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백범의 항일투쟁 노선과 그의 자주평화통일 노선에 대한 부정적 견해이다. 물론 백범의 항일투쟁노선은 그대로 그의 일생을 관통한 명제이긴 하였지만 거기에도 항일투쟁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방법과 사상적 지향점에 있어서 참으로 민중적이 못되는 부분과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8·15해방 후의 그의 투쟁노선은 후술하긴 하겠지만 사실상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그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던 반제국주의 항일 민족투쟁시기에 그야말로 창백한 지식인으로서 물 위에 떠 다니는 기름처럼 비록 자기자신 싸우지는 못하나 반드시 행방의 그날은 올거라며 일제때 유행하던 이른바 시국론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백범을 다만 역사 발전의 합법칙적인 방법론에 입각하여 평하려 드는 고압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필자가 바로 이 시각에도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사는 어느 지식인으로부터 들은 사실이거니와 백범의 자주평화통일노선은 사실상 과오와 불철저로 일관했다는 지적이었다. 물론 필자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이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이론적 반론을 펴내려 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8·15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민족자주통일운동의 주체적 맥락 속에 하나의 실천의 주체로서 뛰어들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싸움의 현장은 물론 이 각박한 분단의 현실이다. 분단을 최고의 가치로 조직화한 현상과 질서다. 분단된 현실을 안정화하려는 물질적 제 관계와 분단장치를 철저화하려는 국내외의 제 물리적 작폐 내지 분단을 위요해 어느새 굳어진 현상유지정책, 그 속에서 몸부림치는 생명들의 저항들을 분단의 안정화에 대립하는 것으로 억제하는, 이 참담하게 항폐된 자유의 영역이 곧 실천하는 주체의 싸움터다. 여기서 백범처럼 생명을 내대고 싸우는 자라야만 감히 백범을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그는 백범처럼 생명을 내대기는커녕 촌치의 실천도 없이 역사의 필연적인 발전지향만 믿으며 분단을 방벽으로 하여 분단의 방벽으로 하여 분단의 상황 속에서의 합법적 지위를 구가하고 있는 이가 아닌가. 또 백범은 항일투쟁 당시 몸에 박힌 총탄을 그대로 평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그 아픔을 내색하지 않았거늘, 백범을 평하는 그는 자식놈이 감기만 들어 있어도 싸우는 역사의 현장을 외면하고 한낮에 집으로 달려가야 하는, 사실상이 분단의 현실에 통합된 소시민이 아닌가. 그러한 이가 백범을 함부로 평함은 백범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 무모한 배신에 속할 뿐이며 따라서 역사의 진행과 함께 한없이 발전하는 민주의 역사에 대한 신뢰의 포기로서 형해화된 인식논리가 가져다 주는 파국적 허무주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 파국적 허무주의로는 백범의 실체를 올바로 조명할 수도 또는 제대로 부각시킬 수도 없는 것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백범을 이 각박한 분단의 현실속에서 다시 조명하는 의미란, 민족자주통일의 화신인 백범의 너울을 쓰고 백범의 노선과는 정반대로 분단의 현실을 더욱 조이는 사람들의 정체를 규명하는 작업의 뜻과 함께, 민족사 발전에 기여하는 통일논의 그리고 민족통일의 실체란 과연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작업의 하나가 되어야만 의의가 있을 것이다. 2. 항일노선과 그 반성 주지하는 바, 백범은 1876년 7월 11일에 세상에 태어나서 1949년 6월 26일 분열주의자의 하수인에게 무참히 저격됨으로써 불행하게도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싸움의 문턱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 파란만장의 일생은 그대로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전부 포괄한다. 백범이 세상에 태어나던 1870년대로 말하면, 일본제국주의가 그의 제국주의 출발의 기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1853년, 동경만에 침입한 미국 군함 페리호에 굴복하던 치욕을 한 민족에게 강요하던 시기이며, 또 그가 값진 생명을 빼앗기던 1949년은 한민족에 대한 일제의 직접적 지배는 끝났으나 또 다른 외세에 의한 조국분단이 국내적으로는 남과 북에 각기 이념상으로 상반하는 정부의 수립으로 귀결되고 이로써 국제적으로는 강대국이 주도하는 냉전의 전력 단위로서 부각되던 시기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그대로가 침략과 항쟁 그리고 해방과 좌절 그리고 또 항쟁의 내력이었다.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싸움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별다른 길이 또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근대사를 보면 숱한 열혈아가 반침략전쟁에서 몸을 일으켰으나 그러나 끝간데까지 가지를 못하고 중도에서 혹은 회의하고 혹은 한 가정의 안일 때문에 전선으로 향하던 말머리를 돌린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오직 백범만은 싸우는 숱한 민중과 함께 곧바로 나아갔다. 백범의 일생을 특징짓는 묏덩어리는 제1기 동학혁명기, 제2기 중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거점으로 하는 항일무장 유격전시기, 그리고 제3기 8·15해방 이후 귀국하여 조국분단의 강요에 저항하여 싸운 반외세통일운동시기 등으로 헤일 수 있다. 여기서 8·15이후 민족분열을 강요하는 외세와 맞서 싸운 그의 민족자주통일노선은 민족혁명가로서의 그의 성장의 본질과 따라서 그의 투쟁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그의 인간됨과 민족형명사상의 발전을 집중적으로 표현할 것이니, 아직도 분단의 현실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들로서는 당연히 그의 민족자주 통일노선을 분석·평가·논의의 중심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나 그 모든 것이 동학에서 몸을 일으켜 계속된 항일투쟁의 연면성에서 이어지고 발전된 것이므로 그의 민족자주통일노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거의 투쟁의 제1기와 제2기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범을 생각하면 우리 근대사엔 백범 외에도 항일민족투사로서 평가되어야 할 지도층이 여럿이 있다. 하지만 백범처럼 동학에서 몸을 일으켜 8·15이후까지 민족의 역사와 함께 싸운 이는 드물지 않을까 한다. 이와같이 백범이 동학에서 몸을 일으킨 점은 그의 초기사상을 평함에 있어 가장 주목할 점이 된다.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 자생적인 근대화의 기점이라고도 할 동학은 보는 이의 역사적 입장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동학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하나의 지향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는 19세기 중엽을 전후해서 조선왕조는 내부의 격심한 부패와 자생적인 자본주의의 맹아의 태동으로하여 이러한 체제의 동요와 민심의 동요를 틈타 구미제국주위 침략에 앞서 기독교가 밀려 들어왔는데 이에 대한 정서적 대응으로서 일종의 민족종교 형태의 동학이 일어 났다. 그러나 이것은 동요하는 봉건 질서와 점증하는 구미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한 위기의식에 대한 형식적 반응일 뿐 봉건적 질곡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민중의 혁명적 의식은 날로 고조되었고 동시에 구미제국주의 침략세력 앞에 무기력했던 당시의 봉건왕조에 대한 불신은 반봉건의 혁명의지를 전 민중적으로 팽배시켰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정서적 반응과 혁명적 대응이 동학에 있어서의 두 개의 얼굴이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얼굴은 결국 하나의 지향으로 통일될 수 밖에 없었으니 반봉건에의 혁명적 요구와 간악한 제국주의침략에 대한 저항을 종교적 대응관계 만으로는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폭발한 것이 1894년의 동학혁명이며 이때 백범은 황해도 해주접주로 싸웠다. 그러나 동학 혁명이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이라는 역사적 한계에 부딪혀 동학혁명의 수령인 녹두 전봉준은 공주 효봉산에서 그리고 백범은 황해도 구월산에서 처참하게 패퇴한다. 그러나 이 패배를 경험으로 백범은 두 개의 민중적 본질을 부여받게 되었다. 일찍이 백범은 그의 아버지가 중환에 들어 신음하실 때 자기의 살을 베어 입에 넣어 드리고 그래도 병환에 차도가 없자 또 한 점을 때내려다가 그만 아픔을 참지 못해 중단한 것을 자기 효심의 부족으로 자탄하리 만치 봉건적 가족주의 윤리관에 깊이 빠져 있던 그였으나 동학에 몸을 담으면서부터는 민중의 역사의 발전과 함께 그의 인식과 사상을 발전시켜가는 인간상으로 변했다는 것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항일·반제투사로서 무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범이 동학혁명에서 참패한 그 다음 해부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즈음 백범은 비록 병사를 잃은 소년 장군(접주)이었으나 동학에서 불붙여온 적개심으로 왜놈장교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의기의 남아로 폭발한 것이 그것이다(『백범일지』, pp. 78-86). 여기서 백범이 왜놈장교를 맨손으로 때려 눕히고 그의 칼을 빼앗아 그의 가슴에 꽂고 거기서 흘러 나오는 피를 빨아 먹은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것이다. 필자 자신 어릴 적 밸범일지에서 이 대목을 읽고서는 크게 놀랐던 적이 있었으며 지금 이 순간 이 백지를 그 당시의 전율할 정도의 이야기로 메우자니 어딘가 멈칫거려지고 섬짓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민중의 성향이 아닌 반민중적 문화경험의 파리한 자기노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민중의 참다운 복수심은 적의 피를 직접 빨지 않으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던 사실은 비단 백범 개인에게만 해당하질 않았다. 그것은 차라리 온 민중적 성향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문화사적 실질이 얼마든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전통문화인 탈춤의 전투적 춤사위가 그것이며 안중근의 동지이며 항일투사인 우덕순의 '복수가'에서는 일본제국주의를 향하여 "네 뿐인줄 아지마라. 너의 동포 오천만을 보난대로 내손으로 죽이리라"(『항일민족시집』, p.100)고 공공연히 외쳐대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이때 이와같은 전투적 복수의 대상인 적의 존재란 지배계층의 권력갈등의 차원에서 창출된 허구의 적대적 존재는 아니다. 민중이 자기 경험에 의하여 파악되는 자기존재에 대한 가해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적극적 복수심은 폭력으로서의 합목적성이 있으며 따라서 민중자신의 진보의 기본적인 동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젊은 날의 백범의 이와같은 적극적 항일투쟁 노선은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적극적 복수심의 전개라는 측면에서는 민중적이었으나 민중의 보편적인 염원을 조직화한 것이 아니라 항일의 병투쟁이 고조되던 그 당시에 한낱 일개 개인의 적극항일투쟁으로 시종했다는 것은 젊은 날의 백범의 항일의식의 한계였으며 백범의 의식의 발전이란 이러한 자기의식의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었다. 3. 임시정부와 무장유격전 백범은 토전을 도살한 사건으로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교묘한 술수로 탈옥에 성공한다(1898. 3. 9.). 이 때 백범의 필생의 동지 김주경과의 관계는 우리 근대사에 있어 최고의 차원을 장악하리만치 파란만장한 열혈인들의 동지애로서 기록된다. 그후 백범은 한 때 마곡사에 몸을 숨기기도 하였으나 몇 해를 전전 끝에 황해도에서 문화교육사업에 투신했다가 다시 安明根사건으로 투옥되고 다시 옥을 나온 후로는 상해 망명길에 오른다(1919). 여기서부터 백범은 그의 항일노선의 제2기에 해당하는 상해 임시정부시기를 맞는다. 주지하는 바, 상해임정은 3·1 봉기 이래 더욱 강화된 식민지 착취로 말미암아 제국주의침략의 잔인성을 자각한 소작인, 근로자, 학생 등 이른바 근대적 사회층이 국내투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단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의 민족의식은 아직은 성숙과정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네들의 의식을 통합하고 격려할 근대적 의미의 민족적 동질성의 고취가 요청되었는데 임시정부는 국권의 지속성을 과시한 점에서 국내세력의 성장과 민족의식의 고취에 도움을 주었다. 둘째, 한일합방은 주권의 박탈임과 동시에 한민족의 대외신장력에 대한 파괴였다. 이리하여 당시는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됨에 따라서 반제·반식민지 투쟁이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던 시기이므로 이러한 세계적 반제, 반식미지전선과 연결될 효과적인 형식과 방법이 제기되어야 할 역사적 시점에 있었다. 바로 임시정부는 이러한 세계사의 진운에 부합하였다. 예컨대 중국의 혁명가 손문이 이끄는 광동 비상정부와 러시아 혁명정권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이 이 점을 입증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모든 인간해방투쟁이 그러하지만 특히 민족해방투쟁의 경우, 식민지 상황이라는 전선의 현장을 잃었을 때엔 해방 투쟁의 질량이 쇠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종당에는 참담한 파국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국내 지반을 빼았겼던 인사들이 주축이던 임시정부는 날이 갈수록 이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이승만 등의 분파주의와 비주체적 독립노선은 임정의 마지막 기강마저 흔들어 놓았고 안창호 등의 수양주의 노선은 그 소박한 본의와는 달리 식민지 현장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투쟁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것은 1920년대 말 일본자본주의의 경제불황에 의한 손실을 식민지에서 보상하려는 가혹한 착취가 자행되고 이어서 일제의 대륙 침공을 앞두고 한국을 병참기지화 하려는 식민지질서의 강화는 여기에 따른 피해대중의 양적 확대와 함께 피해 민중의 격분을 사게 됨으로써 모든 국내투쟁이 전투화하는 단계로 돌입한 사태였다. 국내 도처에서 벌어지는 소작쟁의, 광주학생 봉기와 6·10 만세사건, 노동자에 의한 원산총파업쟁의, 그리고 한만 국경지대에서 벌어지는 독립군의 무력항쟁 등 삼천리천하가 온통 불바다가 되고 있을 즈음에도 임정은 낡은 파쟁과 권위주의에만 안주하고 있었다. 이 파국의 절망에서 백범은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1926년 6월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백범은 즉각적으로 임시정부를 항일무장 유격전의 본거지로서 임정을 근본적으로 개편해갔다. 1922년 여운형 등과 조직한 韓國勞兵會 활동의 부실을 통감한 백범은 나석주 등과 1927년 의열단을 강화하였으며 1932년에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와 같이 본격적인 항일무장 유격전을 힘차게 일으킴으로써 모든 국내외 투쟁이 전투화해가는 물결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따라서 백범은 국외에서의 유격전이 국내 저항의 진원 즉 일제에 대한 피해대중의 보편적 염원에 접점을 이루고자 1931년 생산수단의 국유화(토지)를 골격으로 하는 균등사회 건설에의 이상인 三均제도의 건국 원칙을 천명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이상주의적 환상이 있긴 하였지만 이로써 백범은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던 임시정부를 국내의 피해대중의 기대치로 끌어 올리려고 하였다. 이와같이 백범에 의하여 새롭게 지도되는 임시정부의 노선은 여러 가지로 긍정해야 할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무장유격전노선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시되어야만 하였다. 첫째, 빅뱀의 무장 유격전은 독특한 항일투쟁방법의 개발인 것 만큼은 틀림 업었다. 하지만 무장유격전이란 본시 적의 심장부 파괴라는 특수임무 수행과 교착된 전선의 돌파, 특히 대중봉기를 촉매하는데 의의가 더해질수 있는데 백범의 무장노선은 지나치게 파상적인 유격활동에 의존하고 있었고 따라서 모든 항일운동을 무장 테러 유격전이라는 편협한 틀속에 얽어매는 인상을 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필시 백범이 젊은 날 치하포에서 일제 장교를 맨손으로 때려잡던 혁명적 개인주의 체질과 사고방식이 백범이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1930년대까지 혼쾌하게 극복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따라서 국내지반을 상실한 임시정부요원들의 한계의 표시였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둘째, 백범의 1930년대의 무장유격전을 1930년대의 우리 독립투쟁의 전반적 상황에 투영했을 때엔 어떤 평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백범의 무장유격전은 항일반제 민족전선에 있어서 하나의 전략단위로 평가할 수는 있어도 주체적 맥락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1930년대의 식민지적 상황은 식민지적 갈등 즉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피압박 상태에 있었던 우리 민족과의 대립·모순이 그 어느 j때보다도 첨예화하여 피압박민족의 실체인 농민 노동자 그리고 의식 대중인 학생층이 주동이 된 광주학생봉기, ·10 만세, 원산총파업 그리고 무장한 소작쟁의가 일고 있었으며 한만 국경지대에서는 1920년대 이래로 조직적인 무장항쟁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란 제국주의 구조의 핵심인 자본의 끊임없는 자기증식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은 자본의 자기운동법칙에 따라 자본을 장악한 사람마저 장본의 자기증식운동에 종속시키며, 모든 사람, 모든 물질, 모든 사회를 자본의 자기운동법칙 속에서 역사의 비주체적 존재양식으로 소외시킨다. 따라서 인간은 이 소외로부터 자기를 찾으려는 싸움의 전개가 필연적이지만 자본의 증식운동은 이러한 사람들의 자기 생존의 기본욕구와 정당한 발전지향마저 자본의 자기증식운동법칙에 흡수 통합하지 않으면 자본 자체가 파탄하고 만다. 여기서 자본의 자기증식운동법칙의 최고발전 형태인 제국주의는 군사화하지만-그래서 식민지지배전쟁이 불가피하지만-식민지지배는 날이 갈수록 철저화하고 모든 식민지지배 대상을 군사적으로 조직화 한다. 이러한 식민지지배 양식의 비인간화는 불가피하게 식민지에 대한 한갓된 저항이랄까, 몸부림 같은 것을 역사진행의 주체적 맥락으로 수용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모든 반항의 최고형태를 요구한다. 그것은 곧 식민지지배의 군사적인 조직에 대항할 저항의 조직화, 조직된 저항의 전면적 전투화를 의미한다. 1930년데로 접어들던 당시는 바로 항일 민족해방전선의 이러한 전환을 요구하였기에 백범의 장엄한 애국 무장유격전은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좌우간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백범의 임시정부에 있어서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진다. 그것은 백범이 임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부터 임정을 임정이 가졌던 임정수립 초기의 권위 즉 국권의 동일성 내지 지속성의 유지라는 낡은 擬制(의제)와 법통의식의 특에서 탈피시켜 무장유격전의 본거지로 전환시킴으로써 비로소 1930년대가 요구하는항일 민족해방전선에서의 전략적 지위를 획득케 한데 대한 정당한 응보였다. 그러나 일제는 1941년 드디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킴으로써 항일민족해방전선을 둘러싼 세계정세는 일면하고 말았다. 세계의 모든 피압박 민족이 우리의 우군이 되는 밝은 전망이 제시되었다. 반면 이것은 동시에 우리의 항일민족해방 투쟁이 단순히 일제를 쳐부수고 나라를 찾는대만 머무를것이 아니라 세계혁명의 성격을 띠지 않으면 안되다는 문제가 제시되었다. 따라서 항일민족해방 전선에 있어서의 일대 전기를 요구하였다. 첫째, 모든 항일전선의 본격화와 함께 적의 심장부인 국내에서의 전면적 유격적인 전개가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일제는 1931년부터 대륙참공에 나섰다가 41년만에 다시 태평양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주력전선이 이분화되었고 따라서 국내에서는 식민지 착취가 가중되어 우리 민족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는 조건이 형성되었고 그러면서도 적의 병력은 분산되어 있어 사실상 군사적 공백이 이 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40여년 동안 받아온 일제의 반식민지 내지 식민지 지배를 우리의 힘으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의 성숙은 동학혁명의 명제인 반제·반봉건의 씨앗을 일찍부터 배재한 백범의 의식과 그의 항일투쟁노선에 대한 일대 시련이요 도전이었다. 둘째, 일제에 의한 태평양전쟁의 도발은 백범을 비롯한 모든 임정요인들에게 중일전쟁 당시의 항일투쟁의 개념과 범주를 청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임정의 중일전쟁 당시의 항일투쟁 개념이란 다름이 아니라 중국 국민당정권과 임정과의 관계다. 임정이 중국상해를 활동거점으로 삼으면서부터 임정과 국민당 정권과의 관계는 여하간 항일 전선에 보탬이 된 바 있다. 그러므로 양자 사이의 관계는 객관적으로 보아 우리의 항일투쟁에 유익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의 혹심한 부패는 나날이 중국국민의 지지기반을 잃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국민의 항일의식은 곧 중국의 종국적인 혁명이라는 명제와 동질의 것으로 발전해가고 있는 반면 국민당정부의 항일의식은 일제로부터 국민당의 이익 즉 국민당 정권의 이익을 지킨다는 목표로 축소되어 가고 있는 징후가 농후했다. 이는 중국혁명의 본질에 대한 배반일 뿐만 아니라 항일전쟁을 함께 수행해 나아가야 할 한·중 양국민의 항일통일 전선에서의 실질적 이탈이나 다를 바 없었다. 때문에, 임정에게 있어서 중일전쟁 당시의 항일개념을 파기 내지 청산한다는 의미는 임정 자체를 중국에서 탈출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 안에서 중국국민과 함께 직접 항일전투에 참가하는 것이다. 셋째, 일제에 의한 태평양전쟁의 도발은 일본, 독일, 이태리 등 당시의 추축국가들에 대항하는 반파쇼통일전선을 형성케 했는데 이러한 통일 전선을 우리의 항일투쟁에 창조적으로 적용시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과 동시에 그 통일 전선이 자본주의 국가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세력을 대표하는 소련의 동맹이니만치 종전후에 제기될 양대세력의 대립 즉 양대세력에 의한 세계 분할의 필연성을 미리 예측하고 여기에 대처할 국내항일세력의 대단결 , 통합을 모색해야 한다는 문제 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과제를 앞에 놓고 일평생을 일제와 싸운 백범은 어떻게 대처 했을까. 우선 전술한 첫째의 과제에 대응한 듯, 백범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941년 12월 9일 바로 일제가 전단을 일으킨 다음 날, 다음과 같이 즉각적으로 대일선전을 포고하였다, 우리는 3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영·미·가·호·화·오 기타 제국의 대일전이 일본을 격패케 하고 동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하하여 자에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하노라. 1. 한국민 전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단위로서 추축국에 선전한다. (중략) 대한민국 23년 12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도왜실기』, pp.51-52) 이 선전에 이어서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국민당 정권 사이에는 한국광복군 설립에 관한 협정이 성립되어 대일선전포고에 따른 임정의 전투태세를 보여 주었다(『한국독립운동사』제 5권, p.67).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에 자리 잡은 임정의 공식선언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42년에 성립된 광복군 설립안은 일제가 패망하던 바로 그해(45년)에야 발효되는 과정속에서 (『임시정부문서집랍』, p.527) 오로지 광복군 훈련에만 열중하다가 8.15해방 맞았을 뿐 백범의 전래의 유격전술은 국내에서 불을 당기지는 못하였다. 한편 민족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으려는 몽양 여운형이 국내에서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비밀리에 결성하여 대일무력항쟁도 불사하리라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따라 전국 도처에서 특히 경기도 가평일대와 항해도 은율일대에는 애국청년들이 비밀리에 사제 무기를 만들고 무장항쟁의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목은 마르고 가슴은 찢어지고 그러나 물마저 빼앗겨 목숨이 넘어가는 상황. 그것은 마치 당기기만 하면 삽시에 불바다가 될 그러한 극한적 조건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해외에 있는 백범도 실지로 불을 당기는 실행은 못하고 오늘 내일 하며 준비만 하다가 본격적인 국내유격적을 전개해보지 못한 채 8.15 해방을 맞으며, "올 것이 너무 일찍 왔구나"하고 땅을 치며 우는 정도였다.(『백범일지』, p.348). 다음 백범의 이러한 실패는 중국에서의 백범의 실패의 연속이었으며 그 연속된 자신의 실패에 대한 탄식이나 매한가지였다. 즉, 백범은 중국에서 중국 국민당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광복군의 성장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광복군의 질과 양에 개의치 말고 중국국민과 함께 항일전선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만약 그리만 되었으면 백범은 우리의 항일의식과 거의 동질의 것으로서의 중국국민의 항일의식의 본질 즉 혁명의식을 동시에 체험하여 그것을 우리 국내 육격전에 창조적으로 적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광복군을 육성만 하려다가 중국국민의 싸움의 현장을 같이하지 못하는 바람에 중국인의 싸움의 현장도 잃고 조국에서의 싸움의 현장도 동시에 잃어 이른바 연합국에 의한 타율의 해방을 맞고야 말았다. 끝으로 반파쇼통일전선을 모범으로 한국내 항일세력의 통합과 종전이후에 연합국에 의한 세계분할에 대처하는 문제인데 이 점에 있어서는 백범의 노력을 상당히 평가해야 할 것이다. 백범은 당초 항일투쟁에 가담하는 기본태도가 심부름꾼의 자세다. 쌍놈의 신분을 감추지 않으려는 백범이라는 호가 그러하고 임시정부에 가담하는 기본 동기가 그러했다. 백범이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 맹렬한 무장유격전을 전개하려 할 때 그러한 무장투쟁에 가담할 살신성인의 동지를 수없이 규합 할 수 있었던 것은 백범의 이러한 인간적 본질이 가져다 준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화같은 열정, 인간적 성실성, 한번 정하면 흔들릴 줄 모르는 신념과 결단력, 여기에다 깊고 뜨거운 인간애와 애국심은 금세기 최고의 관용과 양보, 포용과 통일의 주체다운 면모가 있었다. 1935년의 오당통일회의, 이 동녕·이 시영 등과의 한국국민당 결성, 1937년 임시정부 외각단체를 연합하여 한국 광복전선을 형성한 것, 1938년 조선혁명당·한독당·한국국민당의 통합운동, 1940년 광복전선과 민족전선통합 등을 맹렬히 전개한 것도 백범이 주도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세력들의 통합이 과연 통합으로서의 어떤 가치가 있겠느냐는 반문이 성립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그들이 단순한 해외망명 세력일 뿐 국내지반과 연계가 전적으로 애매하니 항일전선의 양적 확대 외에 무슨 효용이 있었겠느냐는 반문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전반적으로 위급한 단계로 돌입하던 식민지 상황하에서 그나마도 임정을 정점으로 한 이와같은 통합 노력은 어느 모로든지 필요했던 것이며 이는 전적으로 백범의 인간됨과 애국심의 작용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참으로 필요했던 통합대상은 국내외의 광범위한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항일세력, 그중에서도 무장항힝일세력을 중점 대상으로 삼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통합방법도 임정을 정점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항일·반제라는 기본목표에 입각하여 형식상으로는 연합, 내용상으로는 통일을 가져다주는 신축성의 모형을 지향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만 실행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유럽과 중국사람들이 선행한 반파쇼통일전선 형식보다 훨씬 월등한 통일의 모형이 되었을 것이며 또 그 힘에 의한 자주적인 방법으로 주국해방전략을 수행하여 종전후에 강대국에 의한 세계분할 계획을 미리 예측했을 것은 물론 그 분할 계획의 한반도에서의 귀결(38선)을 막고 자주통일독립쟁취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통합운동을 위한 국내외의 조건은 얼마든지 제시되어 있었다. 우선 국내에서는 일제가 그들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서 소수의 친일파, 민족반역자만을 제외하고는 전민족을 가혹한 착취와 징발의 대상으로 하고 있어 이에 대한 저항감이 폭발직전에 있었다. 또한 임정외에도 세계 도처에서 무장항일 세력이 활약하고 있었고 이들의 당면목표, 기본적 이념은 하나같이 항일·반제투쟁에 있어서의 승리였다. 이 최후승리를 향한 전 민족적 또한 전인적 노력의 바탕을 이루는 동질성은 모든 통합운동의 정당성을 부여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백범은 그의 항일·반제민족 투쟁사상 가장 중차대한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왜 못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관용과 통일의 주체로서의 백범이라는 개인과 백범이 자리하고 있었던 항일투쟁의 구체적 기반과의 갈등을 헤아리는 지혜를 동원해야 할 줄 안다. 즉 백범이 자리하고 있었던 중국 그중에서도 중국국민당 정권과의 관계는 그것대로 임정 존립의 한 조건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 조건이 바로 관용과 통일의 주체로서의 백범의 시야와 활동 범위에 제약을 주었고 E라서 임정 자체의 구성인자와 전통젖ㄱ 분위기도 동학에서 몸을 일으킨 백범의 본질을 올바로 발전시킨 토양은 못되었다. 또한 백범이 자리하고 있는 이러한 조건들은 항일이라는 당면목표에서 백범의 의식을 단순화시키고 항일노선에 대한 신조를 민중항쟁의 실제에서 보다는 임정요인과의 관계에서 다지려는 지조주의로 흐르게 한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백범의 불찰이자 항일전선과 항일투쟁의 내실의 커다란 손실이었다. 아니 분단의 해방으로 귀결된 8·15의 비극을 주체적으로 막지 못한 모든 항일세력, 모든 항일 투쟁의 뼈아픈 반성의 차원으로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이다. 4. 민족해방, 좌절과 다시 일어남 1945년 8월 15일, 기어코 일본 제국주의는 스스로의 모순에 의하여 야기시킨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말았다. 일본제국주의의 성장과정이 한반도에 대한 침략과 한국민의 희생으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우리의 근대사의 참다운 줄기는 이들 일본제국주의와의 싸움이었으니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은 곧 우리민족의 항일·반제투쟁의 승리요 세계사 전진의 혁혁한 성과를 우리민족이 쟁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항일·반제투쟁의 우군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38선을 경계로 하여 진주하는 괴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은 잘 아는 일이다. 우리에게도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있었고 또한 우리민족으로 구성된 여타 무장군대가 있었으므로 마땅히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된 조국 땅엔 우리 군대가 진주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진주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역사상 미국이 한반도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구한 간섭의 역사를 더듬으면 미국이 한국에 이익을 가져다 준 실례는 최소한도 8·15전까지는 한번도 없었다. 병인양요로 통칭되던 때엔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명백한 침략자로 등장했다. 또한 한일합방은 사실상 미국의 극동정책의 소산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사실을 들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미국은 미국의 국익에 따라 일본제국주의를 한반도에 올려 놓았다가 또다시 일본을 밀어내고 스스로 한반도 위에 자기 군대를 올려 놓았다. 그것도 오랜동안 극동진출의 야망을 갖고 있는 소련과 합작해서 38선을 경계로 해서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것은 그 당시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의미했던가. 우리에게 과연 이익을 주자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이 또다시 일제의 대타자로 나타났다는 것인가. 대단히 까다로운 문제인 듯 하였으나 백범에게는 아주 선명한 해답으로 나타났다. 즉 해외 망명 생활 30년만에 그리던 조국땅에 돌아오려는 백범에게 당시 미국은 임정간판을 앞세우고는 환국할 수없다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첫째,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항일·반제투쟁 당시의 우리 민족의 승리의 기득권을 전연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끝으로 한국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상태로서의 문제이지 자주적인 해방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민족의 독립의 연속성이나 자율성을 인정할 수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임시정부가 식민지상황 하에 있었던 한민족의 각계 각층의 저항투쟁을 총체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임정의 법통은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선상의 최소한의 전략단위로서 수용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따라서 극 법통에 대한 평가 그리고 그 기능을 8·15 후의 민족사 전진에 수렴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민족의 자결권에 속하는 문제였지 외세가 간섭할 문제는 분명히 아니었다. 사리가 이러함에도 임정의 간판을 떼라 말라는 것은 임정에 대한 간섭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민 전체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었다. 바로 여기서 백범은 미·소에 의한 조국 분할의 깊은 사연과 미국의 세계전략의 전개과정을 헤아리는 날카롭고 포괄적인 관찰이 필요했다. 그러나 ·15 이후 백범이 당한 이 최초의 시련, 이 가장 중차대한 시련에 직면해서 백범의 판단과 대응이 석연치 않았던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백범은 미국의 강요에 의하여 임정의 옷을 벗고 조국에 돌아온 이후 이른바 임정환국 환영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 국토를 구분 점령하고 있는 미·소 양군대는 우리 민족을 해방해 준 은혜 깊은 우군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잘 협조하여 왜적의 잔재세력을 철저히 숙청하는 동시에 그들이 회국(回國)하는 날까지 모든 편리와 수요를 제공해야 합니다. (1945년 12월 19일, 『'백범어록』, p.49) 백범의 이 말씀 중에서 "미·소 양군대는 우리 민족을 해방해준 은혜 깊은 우군" 운운한 것은 어떤 전략적 발언이거나 혹은 외교적인 언사로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이 비록 임정의 옷을 강제로 벗기기는 했지만 우리의 주적이었던 일본을 몰아낸 해방우군이니 "그들이 돌아가는 날까지"하고 미군의 한반도진주를 수동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이러한 언사는 백범의 해방 직후의 인식논리 즉 외세에 의한 조국분단의 실태를 정확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단적인 증거다. 그것은 38선에 의한 조국의 분단이 미국의 내재적인 요구가 규정한 세계전략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었다는 말로 되풀이될 수 있겠다. 무극의 내재적인 요구란 무엇인가. 태평양전쟁은 일제가 먼저 전단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강대국 상호간의 전쟁은 각기 강대국의 자기모순의 극대화과정에서 부딪치는 어쩔 수 없는 충돌이라는 것은 근대의 사회과학이 논리적으로 입증한 중심과제의 하나다. 전쟁과 그 발단에 대한 인식을 이와같이 강대국상호간의 구조적인 모순 관계에서 구하려 할 때, 전쟁 이후의 모든 전략, 그 모든 전략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의 재편성도 전쟁과 전후라는 한 사회체제의 주기적인 운동법칙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차대전중 미국은 그의 국민총생산력의 3분의 1을 군사관계와 군사비에 충당하고 있었다. 미국의 군인출신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그의 대통령 퇴임 당시 (1961)에 개탄한 이른바 군·산복합체제의 맹점이 아이젠하워가 한참 2차대전중 야전장에서 피투성이의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이미 극도에 달해 있었다는 증거이겠다. 이것을 아이젠하워는 그 당시에는 제대로 모르다가 전후에 대통령직을 거친 다음에야 깨달은 셈이다. 좌우간 이러한 미국의 사회경제적 요인이 그것도 2차대전중 적에 의한 폭격은 고사하고 총 한방 맞지 않고 고스란히 남게 되었으니 이렇게 군사회된 경제의 지속적인 생산력과 체화를 소화해줄 유효수요의 창출이라는 과제를 전후 세계전략의 기본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내재적 요구가 세계분할을 유도했으며(얄타밀약)세계분할의 또 한편인 소련을 대상으로 가상 전쟁이라는 유효수요를 창출해 갔다. 미국에 있어서 필요악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적 규모로는 냉전시대의 개막이요 그 냉전구조가 한반도에서 두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로 귀결되었으니 이것이 정확히 말해 38선이었다. 38선을 기점으로 한 미국의 냉전논리는 한반도 점령정책에서 가차없이 노출되었다. 맨처음에는 미군정포고령 제 1호로 나타났다. 미군정포고령 제 1호는 "한반도에 있는 일본 사람에 대해서는 한국 사람은 하나도 손을 대어서는 안된다"는 대목이 특히 주목되었다(「남조선 민중 각위에 고함」, 『광복 30년 중요자료집』, p.22). 한반도에 있는 일본사람들이란 누구인가. 일제 침략자였다. 그것도 단순한 침략자가 아니라 한반도에 있는 모든 재산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고 전 한민족을 대상으로 전시체제, 징용, 징병, 정신대, 심지어는 국민학교 어린이들까지 강제동원하던 침략의 촉수들이다. 또한 이들이 차지한 재산은 남한의 전 재산의 80%를 넘고 있었다. 애당초 총과 칼만 차고 쳐들어온 그들이 이런 정도의 재산을 빼앗었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의 싸움은 얼마나 처절하였겠으며 희생 또한 얼마나 컸겠는가. 그런데 이들에 대하여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은 일본을 내세워 북방세력을 견제한다는 전통적인 미국의 극동전략이 언젠가는 다시 가동할 것이라는 예시였으며 38선 이남은 이러한 전략의 범위 내에 들어간다는 포고나 다름 없었다. 또 하나는 미군정의 국내 항일세력 탄압으로 나타났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꾸준히 항일투쟁을 지도해온 것은 몽양 여운영을 필두로 한 이미 세상에 표출된 민족주의세력과 똑같은 민족 세력이면서도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인물은 역시 몽양이었다. 왜냐하면 몽양은 이미 표출된 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만치 활동에 제약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러면서도 1944년경부터 지하조직인 농민동맹과 건국동맹을 조직해서 싸웠고 특히 그의 대중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와같이 몽양외에 지하민족세력이 또 있긴 있었으나 참다운 지하조직의 역사적 가치는, 적이 결정적으로 후퇴할 시기(일제말)는 총을 들고 나와 조직적인 유격전을 벌려 대중에 대한 신망을 얻고 동시에 항일운동의 적극적 지위를 과시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제말 투옥된 애국투사의 80%이상을 점령한다는 소극적 기록만 남겼을 뿐 역사의 중한 소임은 다하지 못했다. 이래서 몽양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몽양을 평가해야 할 기준은 그가 민족해방ㅇ르 주체적으로 맞기 위하여 8·15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건준을 가차없이 해체시키고 말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8·15 이후에 새로운 체제를 구성함에 있어서 국내에서의 모든 자율적인 운동을 미군정에 종속시키든가 그리되지 않으면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냉전의 기본구조로서의 분단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세력은 첫판부터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미군정포고령 제 1호와 밀접한 연관하에 자행된 것으로서 해외세력으로서는 임시정부 그리고 국내에서는 몽양을 정점으로 한 건준을 차단한 정치적 공백 위에 친일 부화뇌동세력을 채우자는 속셈이었다. 여기서 그 총수로서 이승만이 태동한 근거가 있었다. 이 때문에 백범은 일찍이 건준의 해체에서 국내세력과의 상관관계만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분단을 매개로 한 미국의 세계전략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대응할 자세 그리고 애당초부터 미국에 의한 조국의 위임 통치론자로서의 이승만의 본질을 신속히 규정·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백범이 이 점에서 석연치 않았던 것은 지금 생각하더라도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으며 사실 이때부터 백범은 이승만 일파에게 참혹한 변을 당하고 있었던 거나 다름 없었다. 5. 탁치문제와 백범 해방 이후 백범 앞에 들이닥친 제2의 도전은 신탁통치 문제였다. 신탁통치 문제는 1945년 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통일독립을 가져다 줄 목적으로 결의된 것으로 통일 독립의 유예기간으로서 미·소가 5년 동안 위임통치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삼상회의 결의안은 명목은 위임통치이나 실질 내용에 있어서는 아직 냉전구조가 확정되기 전인 그 당시의 국제정세 변화의 가능성의 한면을 찌른 것으로서 분단상태로서가 아닌 전한반도에 대한 위임통치라는 점이 있었다. 이는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점령군 정책이 이중화의 여지를 보인 것이다. 즉 독일에 있어서는 패전 독일이라는 조건 그리고 특히 대게르만 민족의 통합을 반대하는 유럽 제 민족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 독일의 분단을 유럽 정세 안정의 발판으로 하려 했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통일정부도 고려될 수가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중립화는 이러한 구상의 한 단면에 속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위임통치라는 이름 하에서라도 분단의 장벽은 넘어설 수 있다는 선택의 문제가 제시된 것이다. 물론 위임통치의 제의를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내재적 요구에 따라 움켜쥔 38선을 쉽사리 내놓을 턱이 없었다는 사정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신탁에 대한 찬반의 문제보다는 냉전구조의 실질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속에서 민족의 통일적 이익을 찾는 것이 최선의 길임은 두말 할 여지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강대국의 한반도 분할이란 종전 후에 ?또 다른 전쟁상태 즉 냉전질서 편성의 서막으로 단행된 것이라면 어떻게 이에 대응해 나아가야만 우리민족을 이 냉전구조의 희생으로부터 구해내고 끝내는 통일독립을 쟁취할까 하는 문제였다. 이야기를 전진시키면 반탁을 하든 찬탁을 하든 그것의 기본성격이 이 땅에 다시 들어온 외세를 물리치고 외세에 의한 조국의 분단을 막는 작업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 탁치안은 제시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 탁치안은 우리의 자주 통일 독립이라는 우리 민중속에 뿌리깊이 박힌 염원 다시 말하여 오천년 왕조사를 통해서도 한번도 나라의 주권이나 민족의 자율성을 ?빼앗긴 실례가 없었다는 역사적 확신에 입각한 자주 독립에의 염원, 그리고 8·15 직후 전 민중적으로 팽배한 해방의 기쁨과 건국의 흥분 등과는 교묘히 상반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만약 이 탁치안에 대응하는 우리 민족의 의사가 단일화되지 않으면 그것이 찬탁이 됐던 반탁이 됐던 당시의 미·소 양군의 전략적 대상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왜냐하면 38선에 의한 조국분단의 기본성격은 근본적으로 강대국의 내재적 요구가 규정한 전후 세계전략(냉전적 전쟁상태의 유지)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내재적 요건이 혁명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강대국에 의한 세계전략이 변할 리 없고 따라서 세계전략이 변하지 않는 한 전후적인 전쟁상태 즉 냉전구조의 제일선으로 획정한 38선이 우리의 자주적인 싸움으로 극복되도록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여기서 애국자가 선택해야 할 길은 <탁치문제>를 앞에 놓고 어떤 일이 있어도 민족의 분열을 막는 것이었다. 따라서 탁치안을 앞에 놓고 이에 대하여 흑백논리로 빠져들어간다는 것은 조국의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의 함정이라는 것을 38선 획정의 기본논리에 따라 터득하는 것이다. 항일·반제투쟁의 역사적 경륜이 필요한 상황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중차대한 고빗길에서 백범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탁치안에 대한 전면적 반대 입장으로 기울었다. 백범은 일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싸운 애국자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그리고 셋째도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이라고 대답할 것임을 신조로 하고 있는 분이었으므로 그의 이러한 신념 그리고 그의 격렬하는 독립주의 노선은 형식논리로 보아도 이러한 탁치안과는 일치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백범이 반탁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의 애국적 자의식 속엔 그의 탁치반대 의사가 외세의 간섭에 대한 저항으로 느껴졌겠으나 외세를 배척하는 또 하나의 방법인 외세를 이용하는 전략은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따라서 가장 뼈아픈 치명타는 일찍부터 관용과 포용, 통일의 주체로서의 백범이 탁치안을 놓고 담당해야 할 과제 즉 탁치안을 앞에 둔 모든 항일세력의 단합을 도모할 지반을 스스로 파괴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물론 백범의 신조는 단 하루의 탁치도 용인할 수가 없으니 반탁의 기치 아래 모이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탁운동의 핵심적 기수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의 반탁은 그 근본 동기에 있어서 백범의 직선적인 반외세투쟁의 성격과는 전연 달랐다. 하지만 반탁이란 구호는 이승만의 일생을 관통하는 그의 실지 생존과정에서는 도저히 획득할 수 없는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닌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해외망명 생활을 했다고 하나 독립운동은커녕 미국에 의한 한국의 위임통치를 주장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이 때문에 상해 임정에서도 축출될 정도로 항일운동 전선에서는 대중의 인기가 없던 사람이다. 이러한 자기의 허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승만인지라 반탁이라는 구호가 손에 잡히자 누구보다도 광적으로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그가 반탁 운동에 가담하는 명분 뒤엔 해방후 그의 일관된 정치 논리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의 해방후의 정치논리의 기본구조는 ·15이후의 분단을 우리민족의 통일적 발전에 대한 파괴로 보질 않고 그것대로 수용할 전진기지로 보는 미국의 군정적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치행각은 미 군정의 틀을 이어 받으려는 이른바 분단 수용주의 노선이 있었음이 그의 활동에서 속속 나타나고 있었다. 첫째, 그는 해방후 환국하면서 그 첫 마디가 민족의 대동단결이었다. 이 때 대동단결의 중심 대상이 각계 각층의 항일·반제투쟁세력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겠다. 그러나 이승만은 입으로만 대동단결을 운운하면서 백범처럼 좌우합작운동의 실제에 뛰어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의 항일 노선에 대한 그 자신의 도덕적 확신의 결여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치켜든 대동단결론은 긍극적으로 민족통일의 동질성을 확보할 그야말로 항일세력의 통합이 아니라 분단적 조건하에서만 자기 생존을 구할 수 있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리고 정치권력에만 눈이 어두운 분열주의자들만 거두어 들이자는 것이었다. 둘째, 이승만의 항일세력의 형해화를 위한 노력이다. 크게 보아 이 땅의 항일세력은 국내에서의 비타협 민족세력과 해외에서 돌아온 항일무장세력이다. 이미 이들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은 전술한 바 임정의 해체와 건준의 파괴로 나타났지만 친일관료의 재등장(군정의 참여) 그리고 남한 재산 80%에 육박하는 물질적 토대를 이들 관료와 연관된 분자들에게만 나우어 줌으로써 친일파나 또는 군정세력이 아닌 어떠한 세력도 해방된 민중속에 뿌리를 내세울 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점령책이었으나 동시에 목전의 정치권력만 장악하려는 이승만의 전략이었다. 이승만의 반탁운동전략은 바로 이러한 자기운동 원리를 밀고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그 단적인 증거로 백범이 한창 반탁운동의 미몽과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의 통일로 민족진로의 방향을 잡으려던 시기인 1946년 6월 3일 한국의 남단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은 불가피하다"(『백범어록』p.89)는 폭탄적인 선언을 해버린 것으로 뒷받침 되었으며 이러한 이승만의 발언은 또 이 발언이 있기 한달전 "미군정 당군은 남조선만에 의하여 조선 정부수립에 착수하였다"는 AP보도 (46.4.6)가 뒷받침하듯이 미국의 점령정책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던 시기였다. 이것으로써 백범의 반탁전술은 누구에게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효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명 백백히 입증되었다. 따라서 백범을 비롯한 모든 항일민족 세력은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고비로 민족통일전략을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었으며 또한 백범에게는 당장에 이승만과 결별해야할 것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이승만의 분열주의 노선에 대해 호된 반격을 가해야 할 단계였다. 이 계기는 또 어떠한 독립도 완전한 것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우리 민중의 역사 감각에서 점화되어 타고 있는 민중의 불길을 전 민족 통일의 열정속으로 수렴할 천재일우의 기회로 주어진 거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백범은 이와같이 해방후 가장 중차대한 고빗길에서 석연치 못하였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있은지 석달만에 좌우합작을(이것은 미군정이 종용한 바도 있다.)종시 지지할 섯이라는 백범의 성명 한 장으로도 명백했다. 1. 좌우합작의 목적은 민족통일에 있고 민족통일의 목적은 독립자주의 정권을 수립함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좌우합작 공작의 성공을 위하여 시종 지지하고 협조한 것이다. (중략) 3. 나는 신탁통치를 철두철미 반대하는 바이어니와 좌우합작 원칙 작성에 몸소 노력한 김규식 박사도 장래 임시정부 수립 후에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해석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7원칙 중에 신탁반대의 표시가 없다고 해서 신탁에 대한 점이 모호하다고 불 수는 없다. (하략)(1946년 9월 3일, 『백범어록』, P.80) 그러니까 백범의 반탁투쟁의 궁극적 목적은 항일 세력의 통합으로 외세에 의한 분단을 극복할 것이라는 데 있음을 이 성명 한 장으로 재확인하고 있으면서도 백범이 갖는 대중적 영향력은 반탁전선을 빙자하여 단독정보를 수립하려는 이승만의 계략권 즉 분단의 함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이것은 백범을 고쳐 생각해도 해방 이래 백범이 걸어간 길의 또 한번의 실패였다. 6.. 두 개의 한국 반대투쟁 그러나 이것으로써 백범의 애국자로서의 입장과 주장이 벽에 부딪힌 것은 아니었다. 과연 백범만이 애국자이구나 하는 기가막힌 탄사가 아니 나올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전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싸움속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은 자못 눈물겨운 일이다. 이는 백범이 해방 후 최초로 맞은 시련 즉 미군에 의한 임정의 해체 그리고 탁치문제에 이어서 마지막으로는 단독정부수립의 음모와 싸우는 그의 통일 노력으로 직결된다. 백범의 통일 노력과는 달리 단정수립의 역풍이 강하게 몰아치던 1947년 및 1948년은 국내외의 상황이 급선회를 긋고 있었다. 미국이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과 마샬원조안으로 냉전전선을 유지하려는 정책의 테두리를 잡은 것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전쟁에서 돌아온 장병과 400여만의 실업자의 증대, 전시산업들로부터 평화산업으로 전환해야만 하는 산업으로 전환해야만 하는 산업의 재편성과 통화팽창은 미국내의 심각한 불안의 변수로 작용하게 됨에 따라서 대소전면전이 불가피하다는 허구조작으로 다시 경제에 있어서 유효수요를 창출하고 또 사회불안의 변수인 평화운동과 노동운동을 억압할 양으로 이른바 매카시선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특히 1948년경 극동에 있어서 중국 공산혁명의 성공으로 미국은 일본의 군수재벌의 해체와 전범세력의 견제라는 종래의 일본 민주화 계획을 수정하여 군수재벌과 전범자집단(자민당)의 재건을 통해서 일본의 반공방파제화를 공식으로 들고 나왔다 (미육군장관 로얄 발언). 이에 따라서 소련의 동구권에 대한 지배권은 거의 패권주의로 흘렀고 모든 혁명전선의 소련화 또는 소련에의 귀속을 노리는 국가주의적 좌경화가 벌어졌다. 한편 우리 국내에서는 이러한 국제정세의 아류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예컨대 이승만의 허울좋은 대동단결론의 거짓을 폭로하려고 하면 그것은 곧 미국식 매카시선풍의 대상이 되는 적색으로 몰리는 것이며 따라서 탁치를 에워싼 찬반 흑백논리에서 창조적 입장에 서려고 하면 이를 반역자로 몰았다. 그래서 백범이 반탁의 명분으로 이승만과 연결되는 한 그는 이승만의 우군이었지만 만약 반탁의 진의가 외세의 배격 또는 항일세력의 단결을 의미했을 때엔 그는 영락없이 냉전논리의 중핵인 적색이었다. 이리하여 단정을 반대하고 통일된 독립정부만을 가져오려는 백범의 노선을 이승만은 소련의 앞잡이로 몰고 갔다. 그것도 백범의 애국항일 노선에 대립됐던 친일파들이 감히 사나운 발톱을 드리대며 백범을 할퀴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백범의 단정반대운동에 대해 이런 모략이 연일 터져 나온다. 남북회담이 열린 무렵의 일이다. (전력) 저 남북협상이란 무엇입니까. 남에서의 주동자는 홍명희, 김규식, 김구의 3씨인데 그들이 북에 가서 얻어온 것이 무엇입니까. 신탁통치 조항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수년간 결사 반대하여서 격파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다시 얻어오지 않았습니까. …(중략)…그러나 홍명희, 김규식, 김구 등의 제씨가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홍명희씨는 본래 조선공산당이었고 김규식씨 역시 공산당 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한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는 바이고 김구씨는 한독당의 토지정책이 국유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 경제 정책이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는데다가 …(하략) (1948년 5월 1일 한민당성명, 백기완, 『항일민족론』, P.176) 그러니 백범은 공산당이라는 논법이었다. 이에 대하여 백범은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 (전략)미국 주둔의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지각한 도배들은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정부수립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중략) 그런데 불행히도 미군정의 앞잡이로 인정을 받는 한민당의 영도하에 있는 소위 韓協(한협)은 나의 의견서에 대하여 大妄小悟한 듯이 비애국적 비신사적 태도로써 원칙도 없고 조리도 없이 辱만 가하였다. 한민당의 喉舌이 되어 있는 동아일보는 임영신이란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 가지고 나를 모욕하였다. (후략)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백범어록』, PP.140~142) 명쾌한 언어로 된 백범의 이 성명이 뜻하는 것으로 보아 그때 백범에 대립되는 적은 단순히 한민당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그 한민당의 전신인 친일지주세력 및 해방후의 모든 분열주의와 그들이 떠받들고 있는 미군정체제를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좌우간 이러한 공방전으로 말미암아 외세에 의한 조국 분단의 현실은 비로소 국내세력의 민족 노선의 쟁점으로 드러난 셈이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백범의 생애로 보아 그의 마지막 싸움이자 항일전 보다 더 격렬한 대결이었다. 그렇다면 그때의 백범의 사상적 지향과 전략적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셋으로 요약된다. ① 군사통치의 배격 ② 반외세 반제국주의 투쟁 ③ 두 개의 한국반대 즉 통일의 쟁취 등이다. 여기서 군사 통치라 함은 직접적으로 미·소 양군에 의한 점령군 통치를 지칭한다. 그러나 이 뜻의 진원을 캐면 미·소에 의한 세계 분할과 그 분할전략을 규정한 강대국의 자기생존 논리로서의 동서냉전의 이원론적 이데올로기다. 따라서 그 이데올로기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되는 군사화된 경제 그것의 밖으로의 표현인 일체의 군사통치를 배격하자는 것이다. 백범의 이러한 논지는 "미·소양군은 철퇴하라"(백범어록, P.142)는 딱부러진 말로 적시되었으며 이 점에서 백범의 노선은 2차대전 이후 동서냉전에 대립한 최초의 아세아적 표현의 하나였고 따라서 그의 품격은 이승만 정도가 왈가왈부할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질서의 태동이라는 측면에서만이 올바른 평가를 가져다 줄 수 있었다. 둘째로, 백범의 통일을 위한 싸움은 그대로가 반제국주의 투쟁이라는 세계사적 차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글 전장에서 인용한 바도 있지만 백범은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한 자는 파시스트 강도군 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 뿐이다"라고 할 만치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으나 미국에 의한 일본 점령정책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정확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백범은 이러한 인식논리를 미국과 소련에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한 인식논리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해방우군이라고 믿는 바람에 정확한 논리에 앞서 동맹자라는 현실적 이해와 심정적 파악이 조국을 두동강 낸 강대세력을 적으로 설정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것이 앞에서 지적한 바 민족해방 이래의 백범의 의식을 점한 혼돈이었다. 그러나 단정반대 전선에 임하는 백범의 태도는 달랐다. 미국이 그들이 강요한 조국의 분단을 단독정부 수립으로 귀결시키려는 명백한 증거에 의하여 미국을 파시스트 강도 일본과 동일의 성질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싸웠다. 따라서 소련이 단정의 옹호로 우리 민족의 통일적 발전의 계기를 박탈하고 있는 한 미국과 똑같은 침략자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생각이 원래 백범의 항일의식의 저변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자료는 이러하다. (전략)과연 무엇을 가리켜 좌라고 하며 우라 하며 또 누구를 가리켜 애국자라고 하고 바역자라 하는가. (중략) 그러나 나의 흉중에는 좌니 우니 하는 것은 개념조차 없다. (중략) 건국 강령의 요소에 있어서는 좌니 우니 하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중략)인류 5천년 역사를 통하여 봉건적 악폐에 시달려 온 우리로서야 누가 또 압박자와 착취자와의 집단체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동경하고 구가할 것이냐?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동포의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서는 삼천만이 단결하여 일로 매진할 뿐이다. (후략)(『백범어록』, PP.75-76) 이것은 당시 조선공산당 서기국에서 「분단책임자를 추방하라」(1946년 7월 1일, 『백범어록』)는 성명으로 백범을 공격한데 대한 백범의 반응이다. 여기서 "좌니 우니 하는 것은 개념조차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고자 함인가·형식논리에 의하면 이 점을 가지고 백범을 애매모호한 사상적 방랑자로 규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봉건적 악폐에 시달려 온 우리로서야 누가 또 압박자와 착취자의 집단체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동경하고 구가할 것이냐"는 말은 형식 논리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자생적인 진보지향이 있음을 헤아릴 수 있게 한다. 즉 백범은 동학에서 몸을 일으켜 항일투쟁으로 이어진 생애를 살았다. 다시 말하면 반봉건·반제 투쟁으로 일관된 것이니 이를 관념적인 이원론으로 개념규정하지 말라는 강한 항변이었다. 이러한 백범의 사상적 본질이 단독정부 수립을 목전에 둔 중대한 고빗길에서 터져 나왔으니, 우리 민족의 통일적 발전과는 일치할 수 없는 일체의 외세, 일본제국주의와 여타의 제국주의는 모두 물러가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백범의 단정 반대투쟁은 그의 군정 반대투쟁과 함께 동서양극질서에 반기를 든 선도적인 민족투쟁으로 기록되었다. 끝으로 거의 단정 반대론은 도대체 무엇으로 집중했던가. 한 마디로 말해서 두 개의 한국반대였다. 그러면 왜 두 개의 한국을 반대했던가? ① 남과 북에 각기 단독정부가 들어서면 그것도 독립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명백히 말해서 원래가 우리의 자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분단을 합법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도적 조건하에 자기 삶을 마련했던 우리 민족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따라서 분단의 합법화는 반도적 조건하에서 수천년을 살아온 우리 민족의 진정한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물론 일시적인 편법이긴 하지만(당시의 명분)분단의 합법화는, 곧 민족의 자주통일 운동을 합법적으로 적대시할 조건으로 변한다고 판단했다. 조국의 분단이 기본적으로 외세가 자행한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면 통일만이 우리민족의 진보다. 따라서 동서 양극질서가 영원불변 절대진리가 아닌 바엔 동서 양극질서에의 귀속을 합법화하여 통일에의 열망이나 노력을 적대시하게 되면 분단의 합법화는 곧 민족사의 진보 그리고 세계사의 진보와 대립된다. 그렇다면 분단의 합법화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장치란 말인가. 불문가지로 분열주의자들의 이익에 속한다. 이 때문에 백범은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백범어록』, P.114)면서 단독정부 수립은 분열주의자들의 자기이익을 위한 정권 수립임을 명백히 하였다. ② 또한 두 개의 한국이 들어선다는 것은 동서양극 질서의 기조가 되고 있는 강대국 이데올로기가 내재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양극 이데올로기를 국가적 차원에서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생적인 진보지향을 당치도 않은 이분법으로 퇴화시키자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우리의 정신구조는 맹랑한 흑백논리가 지배하게 되고 따라서 사회 전체가 양극세력권에 편입되는 것을 막는데 있어서 무력해진다. 다시 말해 민족의 자율성은 없어지고 동서양극세력의 냉전 또는 열전의 노리개가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한반도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전쟁은 누가 원하는가? 백범은 "전쟁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파시스트강도 일본 뿐이다"고 일찌기 갈파했다. 아니 "일본은 전쟁이 아니고서는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일찍이 백범이 말한 것처럼 한반도의 끊임없는 전쟁상태는 민족의 자멸을 의미할 것이라는 점에서 백범은 동포여 단결할지어다"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死坑(사갱)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일 것이다" (『백범어록』, P.175)라고 외치며 단독정부를 반대했다. ③ 설사 단독정부가 그 당시 우리민족이 처한 역사적 한계라고 치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근거가 있는가? 백범은 백번 죽어도 단독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백범은 그의 단독정부 반대의 입장을 우리의 구체적 생활근거에서 찾았다. 그 당시 한국의 경제사정은 식민지종속경제의 파행적 구조로 남아 있긴 했으나 한반도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존속되고 그 기초 위에 하나의 정부만 들어서면 우리민족 전체가 평화롭고 균등하게 잘 살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38이북에는 중요 지하자원의 90%가 매장되어 있고 경제부흥의 핵심인 자주자족적 동력원인 수력발전시설의 100%, 중요공업의 90%가 있었다. 그러나 이남에는 경공업시설과 쌀생산을 주요 부분으로 하는 1차산업 밖에 파탄된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남는가. 분단 속에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살만한 조건이 분단으로 인하여 파괴되었으니 경제건설을 위한 자본과 기술 그리고 자원을 밖에서 구하게 되는 경제 구조의 예속화 내지 외연화가 이루어져 분단의 물질적 토대만 강화된다. 따라서 분단의 조건이 필수적으로 몰고 오는 경제의 예속화 내지 외연화는 민족경제 내지 민족경제의 실체인 민족대중과 충돌하면서 그 위기의 안정을 요구하고 그것은 곧 분단체제의 경제적 귀결이 된다. 말하자면 분단이 국가의 형태로 변하면 한반도의 사회 경제적인 조건으로 비추어 분단의 현실 자체가 개개인의 사생활 및 공동생활 속에 하나의 억압구조로서 내실화하게 된다. 이것은 민족실존의 허상이며 자유의 파괴이며 동시에 영원한 분단에로의 함정이지, 민족통일에의 전단계가 아니다. 그래서 백범은 한사코 두 개의 한국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1948년 백범은 두 개의 한국 반대투쟁에 마지막으로 뛰어든 심경을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 속에 이렇게 적고 있다. 1944년 연안에서 주신 혜찰을 배독한 이후 미구에 고국을 찾아 오게 되었나이다. 그때에 있어서야 누가 한 나라 하늘 밑에서 3,4년의 긴 세월을 경과하면서도 서로 대면하지 못할 것을 뜻하였으리까. 아아 이것이 우리에게는 해방이라 합니다. 이 가운데 묻히여 있는 쓰라리고 서러운 사정을 말하면 피차에 열루(熱淚)만 방타(滂 )할 뿐이니 차라리 일컫지 아니하는 편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중략)인형이여, 지금 이곳에는 38선 이남 이북을 별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중략)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 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행동으로 영원히 분할해 놓을 필요야 있겠습니까. 인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에 넘길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개걸하는 꼴이야 어찌 참아 더 보겠나이까. (후략) (『백범어록』, PP.148-150) 해방된 조국에 돌아 왔으나 "이 가운데 묻혀 있는 쓰라리고 서러운 사정", "피차에 열루만 방타할 뿐"인 현실, "38선 이남 이북을 별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연, "남이 분할해 놓은 것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과 행동으로 영원히 분할하려는" 기가 막힌 반역 등 이것은 마치 오늘의 현실을 강타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나 여기에 백범사상의 백미가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될 줄 안다. 그것은 우리가 몸을 반쪽에 넘길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는 대목이다. 경거망동한 혹자는 이를 민족허무주의의 소산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견해가 있다면 그것은 강대국의 세력권 정치가 자기위장 전술로 내놓은 세계주의 (자유세계)의 환상에 빠진 민족 반역자들의 망발이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 통일된 나라를 쟁취하려는 진정한 애국심 그리고 참다운 인간의 양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라는 것이다. 아니 항일·반제세력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일 때 그 생존과 생존의 발전이 있는 것이지 둘로 나누어지면 죽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통일의 대원칙을 놓고서는 이를 권력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통일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문제가 아니니 모든 양심세력은 다투어 나서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두 개의 한국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만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는 대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이 위대한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고, 따라서 그 죽음으로써 그는 오늘에 다시 살고 있음을 필자는 확신한다. |
첫댓글 백범자서전 백범일지 꼭 일독을 권합니다 너무 진솔하죠 ...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란 제국주의 구조의 핵심인 자본의 끊임없는 자기증식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은 자본의 자기운동법칙에 따라 자본을 장악한 사람마저 장본의 자기증식운동에 종속시키며, 모든 사람, 모든 물질, 모든 사회를 자본의 자기운동법칙 속에서 역사의 비주체적 존재양식으로 소외시킨다. 따라서 인간은 이 소외로부터 자기를 찾으려는 싸움의 전개가 필연적이지만 자본의 증식운동은 이러한 사람들의 자기 생존의 기본욕구와 정당한 발전지향마저 자본의 자기증식운동법칙에 흡수 통합하지 않으면 자본 자체가 파탄하고 만다. 여기서 자본의 자기증식운동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