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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2025년 1월 25일 (토)
2. 날씨: 맑음
3. 경로: 광나루역 - 어울림광장 - 고구려정 - 해맞이공원 - 제1보루 - 제3보루(아자산 정상) - 제4보루 - 용마산(왕복) - 대성암 - 워커힐 - 광진교 - 한강공원
4. 거리: 13.3km
5. 소요시간: 3시간 40분
6. 걷기정보 및 여행포인트: 아차산, 용마산, 아차산성, 아차산보루군, 대성암
7. 지역: 서울시 광진구
8. 트랙:
9. 지도
긴 구정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연휴첫날 겨울 답지 않게 날씨가 포근해서 마실을 나섰네요. '고구려역사길 탑방'인데, 아차산 구간과 풍납토성 구간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오늘 원샷으로 끝낼 생각입니다ㅎ. 먼저 1코스인 아차산 구간은 광나루역에서 시작하여 아차산을 돌아나온 후 광진교 남단까지 이어집니다....
광나루역에서 광장동 동네길을 따라 올라오면 아차산 입구의 '자생식물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아차산 여가센터, 숲속도서관 등의 건물이 보이고, 아담하게 식물원이 조성되어 있네요. 겨울철이라 별 볼 것은 없지만^^...
자생식물원 윗편에 '어울림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2025년 해맞이 축제' 관련 조형물도 보입니다. 어울림광장 서쪽이 '홍련봉 보루' 인데, 현재는 유적전시관 공사중이라 출입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아차산 입구에서 바라보면 우측이 '아차산동행숲길'인데, 나무데크 뒷편으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네요. 정면에는 '아차산 종합안내'가 보이고, 아차산 정상에 세워져 있어야 할 듯한 표지석이 입구인 이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실제로 아차산 정상에는 정상석은 없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표지석 인증은 이곳에서 해야 겠네요^^. 아차산은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온달장군에 대한 전설도 전해오고 또 '아차'라는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들도 많습니다...
[아차산]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95.7m이다. 예전에는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이라고도 하였고, 마을사람들은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경기지(京畿誌) '양주조'에 보면 화양사(지금의 영화사)가 악계산(嶽溪山)에 있다고 되어 있다.
아차산의 한자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는데, 옛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지역과 용마봉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성계의 휘(諱)가 '단(旦)'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신성하게 여겨서 '旦'이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고치면서 단(旦)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자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씨를 고쳐 썼다고 한다
그밖에 산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선 명종 때 점을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한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명종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하고 사형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이 죽어버렸고,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온달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오는데,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m짜리 공기돌바위와 온달샘 등이 있고 아차산성(사적 234)에서 온달이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려 때는 광나루와 함께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으며, 은석사(銀石寺)·범굴사(梵窟寺)·영화사(永華寺) 등 여러 사찰이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 일대가 목장으로만 개발되어 인가가 드물고 수풀이 무성하였으며, 호랑이, 늑대 같은 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어 임금의 사냥터로 이용되었다.
근대 이후 산기슭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고, 뛰어난 조망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세워졌다.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일대에 아차산공원·용마공원·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였고, 산자락에 주택가와 워커힐 호텔앤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국가유산은 삼국시대에 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250여 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아차산성(사적 234), 아차산 봉수대지(서울기념물 15),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화사(永華寺) 등이 있다. 그밖에 고구려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보루 유적이 있고, 대성암 뒤에는 의상대사가 수련을 했던 곳으로 알려진 천연 암굴 외에 석곽분, 다비터, 강신샘 등 유적이 많다. 구리시 아치울에서는 해마다 온달장군 추모제가 열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전시간인데 운동겸 산책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삼삼오오 등산복 차림도 보이고, 가벼운 옷차림도 많이 보이네요. 곳곳에 아차산과 관련한 안내판들이 많아서 눈은 심심치 않은데 자꾸만 발걸음은 늦춰집니다...
고구려정 정자를 앞두고 상당히 넓은 바윗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경사도가 높지 않으니 크게 힘들지는 않지만, 이것도 부담스러우면 바윗길 우측으로 우회하는 등산로를 이용하면 된답니다. 고구려정에서는 눈 아래로 광진구와 송파구의 시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날씨가 포근해서 양지바른 곳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도 보이고...
고구려정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해맞이 공원'인데, 매년 연초에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해맞이 하기 좋을 만큼 조망이 좋은 곳이지요.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해맞이 공원 바로 윗쪽이 아차산1보루입니다.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의 상류부분이 잘 조망되는데, 자연과 멋지게 어우러진 서울의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아차산1보루 뒷편의 5보루는 발굴조사중인지 유적보호를 위해 현재는 출입이 금지되고 있네요...
아차산 중간이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행정학적으로 지역을 구분하고 있지만 산은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듯 그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차산4보루까지의 능선길은 '전망이 좋은 숲길'로 지정되어 있는데, 약간의 암릉과 바위와 소나무 그리고 멋진 전망대 등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중간에 3보루(아차산 정상)도 지나고...
3보루 북쪽 끝에 '아차산 정상'이라는 안내판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왕이면 아차산 관련 정보가 좀 더 자세하게 적힌 큼직한 안내판이 하나쯤 더 세워져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아차산은 주변의 용마산과 망우산을 함께 부르는 표현이었지만 요즘은 주변의 산과 구분하여 아차산, 용마산, 마우산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여 아차산3보루 지점을 '아차산 정상이라 말한답니다. 3보루는 둘레 450m, 면적 6500m2의 크기로 주변 보루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지만 일부 구역만 발굴 조사 되었으며, 접시, 몸통긴항아리 등 토기 약 400개, 무기, 마구, 농기구 등 철리도 약 185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 서울시 광진구와 노원구와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보루(작은성)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아차산 보루를 비롯하여 용마산보루·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망우산보루 등 17여개의 보루로 이루어진 유적으로 판명되고 있다. 그 중 일부를 제외한 10여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보루로 추청된다. 현재 이 보루군은 중랑천과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고구려 보루로 추정되는 10여개의 보루는 현재 남한 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고구려 관련 유적으로서 발굴 등을 통해 고구려 군사시설의 면모가 규명되고 있어 고구려 관련 고고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3보루 다음은 4보루 입니다. 복원한 모습이긴 하지만 외형적으로 그나마 성벽의 모습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4보루의 성벽은 둘레 249m인데, 고구려 성 쌓기의 전형인 퇴물림 형식이 잘 나타나 있으며, 성벽 안쪽의 건물터는 병사들의 생활에 필요한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항아리, 명문접시, 시루 등의 그릇과 투구, 찰갑, 창, 도끼, 화살촉 등의 무기 그리고 낫, 쇠스랑 등의 농기구와 재갈, 등자와 같은 말갖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역사둘레길 1코스인 아차산 구간은 4보루를 끝으로 다시 광진교로 되돌아 가야 하지만, 이곳에서 약 0.8km(왕복 1.6km) 떨어져 있는 용마산을 가보지 않을 수는 없지요. 아차산에 왔는데 용마산을 가지 않으면 고향에 갔다가 옆집 친구집에 들러보지 않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ㅎㅎ
용마산 입구에는 나무데크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네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다니기 때문에 인공적이긴 하지만 안정과 편의를 위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제2헬기장, 제3헬기장과 용마산4보루를 지나면 긴고랑길과 잠실이 보이는 멋진 조망터가 있습니다. 남쪽으로 약간 경사가 진 곳이라 햇살도 좋고 바람을 막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용마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체육단련시설이 있는데, 이곳까지 운동하러 오신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용마산 등산은 그냥 워밍업이고 실제 운동은 이곳에서ㅋ...
[용마산] 서울시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48m이다. 서울시 광진구,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에 있으며 산의 능선이 북쪽 망우산(282m)까지 길게 이어지고 동쪽에는 아차산(295m)을 바라보고 있다.역사적으로 용마산과 아차산 일대는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250여 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현재도 아차산성과 관련 유적들이 남아있다. 용마산 서쪽 사면 중턱에는 광진구와 동대문구 등 서울의 동부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용마정이 있다. 그리고 인공시설로 용마폭포가 설치되어 있다. (두산백과)
용마산에서는 서울 중구의 시가지가 잘 내려다 보이고, 그 뒷편으로 북한산과 도봉산의 산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여 있습니다. 머지 않은 곳에 동서남북으로 명산들이 자리잡고 있으니 서울은 '명산에 둘러싸인', '명산이 품은' 명당이라고 해야 과언이 아니겠지요^^
용마산에서 다시 아차산으로 되돌아와 5보루 북단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범굴사로 걸음을 옯깁니다. 작은 언덕처럼 보이는 곳에 보이는 6보루 안내판을 읽어보니 6보루는 아차산3보루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둘레는 약 80m 정도 되는 작은 규모이지만, 3보루 조사 과정에서 독립된 보루라고 인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6보루 아래에 있는 2보루에서는 한강방향으로 뷰가 멋진 곳이네요. 이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산행중 망중한을 즐기고 있습니다. 2보루는 아차산 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어나온 작은 봉우리(276m)에 있는데, 둘레길이는 50m 정도 되는 작은 보루입니다. 한강 남쪽이 한눈에 관찰하기 좋고 동쪽은 암벽으로 형성되어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인데, 아직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며 고구려 토기의 전형인 몸통긴항아리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남쪽에는 치(稚)로 추정되는 성벽3단이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2보루 아래의 암벽길을 따라 범굴사를 찾아갑니다. 범굴사는 절벽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사찰로 의상대사가 개창하였다가 이후 나옹화상이 중창하여 대성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며, 현재는 대성암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대성암 앞 좁은 공간에는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이곳에도 역시나 여러명의 어르신들이 산행 왔다가 겸사겸사 체력단력을 하고 계십니다. 대성암이 숨겨진 비밀의 수도원 같다면 어르신들은 속세를 등진 구도자 같다고 하면 비약일까요ㅎㅎ. 이곳에도 우리나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쌀바위 전설이 전해오고 있네요. 아마도 옛날옛날 먹을 것이 없던 배고팠던 시절의 트라우마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성암] 워커힐 뒤편 동쪽 기슭에 남남동향으로 들어서 있으며 본래 이름은 '범굴사'이다. 한국사찰전에 수록되어 있는 봉은사본말지(奉恩寺本末志)와 대성암유적기(大聖庵遺蹟記)에 의하면, 범굴사는 봉은사의 말사로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개창하였다. 이후 고려 우왕(禑王) 원년(1375)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중창하여 대성암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하였는데 어느 때인가부터 폐사되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영조(英祖) 26년(1750)에 거사 방지성(方智性)이 그 자리에 초암 한 칸을 짓고 운악산 승려 전령(展翎)이 전각을 확장하였으나 임오군란 때 모두 불타버렸다. 1912~1913년에 문정념(文正念)이 그 자리에 요사 4칸과 극락전을 세웠으며, 1930년에는 중흥불사가 일어나 1936년과 1942년 두 차례에 걸쳐 중성전(衆聖殿)을 중건하고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다시 불타버렸고, 1954년 법당과 요사채를 재건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의 사찰은 이를 바탕으로 삼성각과 범종각을 추가한 것이다. 범굴사가 대성암으로 개칭된 시기는 여러 자료와 문헌사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1913년이 되어서야 관음보살 봉안처인 극락전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1750년 거사 방지성이 초암을 짓고 1882년 전소된 이후에 개칭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현재 대성암 법당 뒤쪽에는 암각 명문과 자그마한 바위 구멍이 있으며 왼쪽 모서리에는 우물이 있다. 바위 구멍의 오른쪽에는 범굴사 재산에 관한 기록인 '범굴사 불량권'과 '범굴사 불량시주기'가 남아 있으며, 그 앞쪽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가 있다.
[쌀바위 설화] 대성암을 창건한 의상 대사가 수도한 법당 뒷편에 쌀바위로 알려진 바위가 있다. 대성암을 창건한 의상 대사가 수도하던 바위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쌀이 나와 의상 대사에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사람들이 공양을 할 수 있었고, 그 쌀을 천공미(天供米)라 하였다고 한다. 후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구멍을 크게 뚫자 타 버린 쌀과 뜨물만 나오다가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던 바위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쌀이 나와 의상 대사에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사람들이 공양을 할 수 있었고, 그 쌀을 천공미(天供米)라 하였다고 한다. 후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구멍을 크게 뚫자 타 버린 쌀과 뜨물만 나오다가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굴사(대성암)을 나오면 암벽의 잔도를 따라 3보루와 5보루의 동쪽 아래를 우회하게 됩니다. 트랭글 코스북에는 안내가 안되어 있어 길이 없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네요ㅋ, 길은 짧지만 중국 어느지역의 잔도 같기도 하고, 유럽의 유명 트레킹 코스의 분위기도 느껴집니다^^. 발아래로는 한강이 멋지게 내려다 보이고...
아차산 곳곳에 산악클라이밍RC카들이 많이 보입니다. 아빠를 따라온 꼬마들의 신나고 천진난만한 표정에서 문득 어린시절이 그리워지네요. RC카는 놀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스포츠로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해맞이 공원 하단부 갈림길에서 다음 방향은 아차산성입니다. 아차산성은 백제시대때 축조되었는데, 396년에 광개토대왕이 이 성을 빼았았으며, 475년에는 백제 개로왕이 이 성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해옵니다. 성벽의 높이는 7m 가량으로 안팎 모두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백제가 축조하고 나중에 고구려와 신라가 이용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성벽과 시설물들은 7세기 이후 신라가 축조한 것이라고 합니다. 제일 높은 곳이 망대지 인데, 현재는 일반인들의 출입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아차산성] 1973년 5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0만 3375㎡이다. 아차산에 있는 이 산성은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이라고도 한다. 해발고도 200m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서, 둘레 약 1,000m 이상의 성벽이 구축되어 있으며 동쪽·서쪽·남쪽에 성문지(城門址)가 남아 있다. 산성의 형식은 테뫼식[鉢卷式]에 속하나 규모가 매우 크고 성안에 작은 계곡도 있어 포곡식(包谷式)으로도 보인다. 성벽 구조는 삭토법(削土法)으로 대체의 형태를 축조한 뒤 그 윗부분을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루(石壘)를 쌓은 듯한데, 지금은 성벽들이 무너져 토석혼축(土石混築)과 같은 모습이다. 성벽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 되며, 내부에서는 1∼2m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475년 백제의 개로왕(재위 455∼475)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한 3만여 명의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이 산성 밑에서 고구려군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또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559∼590)의 사위 온달(溫達) 장군이 죽령(竹嶺)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 초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산성은 고구려가 잠시 차지했다가 신라 수중에 들어가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차산성을 내려오면 워커힐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갑니다 명월관과 워커힐호텔을 보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ㅋ.
워커힐을 내려와 광진교로 곧장 가면 되지만, 광장동 제2경로당 뒷편에 있는 '상보암 석보살입상'도 둘러보았답니다. 상부암 석보살입상은 광나루를 오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인근 사찰에 봉안했던 상으로 추정합니다. 이 상의 중요한 특징은 보살상인데도 보살의 옷인 천의를 걸치지 앟고 부처의 옷인 가사를 걸쳤다는 점이며, 고려초기때 보살상의 특징이 있고 현재 양발과 발아래 사각 받침은 새로 조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광진교 북단에는 국내 아파트로서는 최고 분양가를 기록한 '포제스한강아파트'가 신축중이네요. 한강을 원없이 내려다 볼 수는 있겠지만, 서민으로 살고 있는 '똥눈의 눈'에는 그렇게까지 비쌀 이유가 있을까 싶네요^^;; 부러워서 하는 야그입니다ㅋ
광진교를 건너갑니다. 광진교는 광장동과 천호동을 연결하는데, 6.25당시에는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폭파 되었다가 1952년 미군에 의해 복구되었고, 시설물의 노후, 홍수 피해 등으로 1994년에 철거되었다가 2003년에 본교량에 이어 2005년 자전거도로와 접속도로를 현대식으로 다시 건설했다고 합니다. 2009년에는 녹지보행로를 조성하고 경관조명도 설치하였답니다...
한강을 도보로 건너는 기분도 괜찮습니다. 씽씽 달리는 차량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시간의 흐름이 천천히 느껴지는 기분입니다...
광진교 남단이 고구려역사길1코스의 종점이며 2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화장실 잠깐 다녀와서 1코스에 이어 곧바로 2코스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