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치않은 남자 vs 생각없는 남자
라이언 고슬링은 2017년 골든골로브상 시상식에서 사실혼 파트너인 에바 멘데스의 무급 노동에 감사를 표하면서 멘데스의 희생이 없었다면 자신이 상을 받지 못했을 것라고 말함으로써 흔치 않은 남자가 되었다.
<케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2020), 보이지 않는 여자들, 황가한(역), 웅진지식하우스, 108>
우리 집 두 남자는 주말마다 시내에 나가 쇼핑을 다닌다. 이번 겨울엔 의료기상에서 전신마사지 기계를 체험하곤 다녔다. 이윽고딱 엄마(당신)것이 있다고 성화를 대었다. 통증은 물론이고 환상적으로 시원해지는 기계가 있다는 것이다. 수 백만원 짜리 기계에 대한 만족감이 한달내내 이어지는 높은 신뢰성을 보였다. 안방에 들인 기계에 내 몸을 기대려는 순간 어째 거부반응을 보였다. 발을 맞추면 골반과 척추가 뜨고, 골반과 척추를 맞추면 발이 뜨는 것이다. 우리 셋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머쓱해진 분위기가 이어졌다. 성인-남자 기준으로 제작된 세계의 디폴트 작동방식을 깜박 또 잊은 것이다.
작년에는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꼬박 열흘 동안을 지독하게 앓았다. 항암제, 마취제, 항생제를 쏟아 부은 몸은, 해당 수용체가 아예 작동하는 방법을 모르고 소멸된 것인지 무슨 약이든 듣지를 않는다. 그러나 스테로이드는 여전한 신비의 묘약이 되어주고 있다. 몸과 반응을 일으키고 시간을 들이면 면역세포가 꾸역꾸역 일어나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생이 주어진다.
생이 별 것이 아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루머이고, 먼지이고, 거품이고, 한 바탕 꿈이고 흔적인지도 모르겠다. 그 사흘 전 섭씨 39도의 발열 상태를 보인 혜정이가 마주한 얼굴에 뿜어 댄 바이러스는 지독했다. 허구헌날 친구들과 떼지어 몰려와 갖가지 통증을 호소하고 징징대던 혜정이를 끙끙 앓게 한 바이러스는 나로 하여금 거의 생사를 넘나들게 했다. 방학은 얼마나 감사한가! 마음껏 아플 수 있는 특권이여! 지구촌 모든 일하는 인간에게 방학이 주어지길!
올해 겨울 방학 또한 통증으로 까부라졌다. 병원을 오가고, 황토방에 지지고, 코로나 속에서 목욕탕을 오가며 냉온탕 자극을 주어도 운신은 어렵고 긍정적 신호는 오지 않았다. 한 날 절망감이 엄습했다. 느닷없이 울트라 초긍정 행복전도사 최윤희가 떠올랐다. 통증을 견딜 수 없다며 자살한 것을 이해했다. 당사자가 아니면 알수가 없는 것이다. 자살하지 말고 살자며 방송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그녀의 모순성에 대한 저항감을 내려놓게 되었다.
3학년 졸업생에게 마지막수업에서 들려준 말도 생각났다. 인생 별거 없다, 그냥 놀아라, 많이 쉬어라 했던 말은 예상에 어긋난 발언이었던지 아이들이 숙인 고개를 들었다. ‘할 수 있다’, ‘성취하라’, ‘깃발을 높이 들어 꽂아라‘ 라는 격려가 청소년 발달단계와 학교의 이념지향과 일치할 터, 다소간 엉뚱한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의 처진 어깨와 풀 죽은 표정이 나로 하여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도록 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얼마나 잘하려고 하는지, 얼마나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지 병이 날만큼 애쓰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무기력과 절망감조차 그러한 표현의 다른 방식인 것이다.
정말 나는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는가? 처음으로 아이들 입장에서 나에게 물었다. 나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고통과 상심으로 말하는 방법조차 잃어버린 말문 막힌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과 연대감으로 큰 소리 내어 웃는 것 마저 언제부터인지 경계하고 살았다. 아픈 아이는 혼자 온다. 창백한 얼굴과 식은 땀을 흘리는 몸으로 그냥 있다. 말문이 막혀 있다. 말이 없는데 몸이 말한다. 아프다고 소리지르고 악을 써대면 몸이 풀려지는 신호이다. 괜찮아 지는 것이다.
전신 마사지 기계가 나에게 맞지 않아도 두 남자에게 환상적이니 기쁘다. 너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너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모든 인간사회에서 최고로 중요한 위계질서가 하나 존재한다. 바로 성별이다. 사람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 여자를 구분했고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유발하라리, 2015). 그러나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흔치 않는 남자가 생기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의 지난한 세계를 깨닫고 함께 하려는 남자들이 갑작스럽다 싶을 만큼 늘어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발달의 비약적인 발돋음은 늘상 경이롭다.
참고문헌
유발 하라리(2015), 사피엔스, 김영사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2020), 황가한(역), 웅진지식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