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 적은 없지만 이상하게 대구, 경북 지역을 여행한 적이 거의 없다. 심진 스님의 비슬산이란 노래에 꽂혀 그 멀리 비슬산까지 가서도 유가사에서 점만 콕 찍고 통도사로 점프했다. 선거가 끝나면 농담처럼 동쪽으로는 향우 이십년간 여행을 가서 돈 쓰지 말잔 얘긴 했어도 일부러 피하진 않았다.
그러니 사주에 역마살을 세 개나 갖고 있음에도 소원 하나씩은 꼭 들어준다는 그 유명한 팔공산 갓바위도 아직 못가봤다. 팔공산 갓바위의 효험과 십 원짜리 동전에 부처님을 새겨 온 국민의 손에 부처님의 가피를 전해 대통령에 당선됐단 전설는 있는 갓바위 부처님께는 결정적인 소원을 빌러 가야겠다.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던 곳인데 석가탄신일 삼사순례에 봉암사, 은해사 백흥암, 거조암, 팔공산 동화사 답사 프로그램에 떴으니 이게 왠 떡이냐 하며 한 달 전에 신청. 시간도 모이는 전철역도 엉터리로 기억해 버스를 못 탈 뻔했다. 폭우가 콸콸 쏟아졌지만, 자갈밭에서도 사금을 줍는다는 각오로 집을 나섰으니 폭우쯤이야. 봉암사 말고는 다 처음 길이라 거조암과 백흥암에 엄청 기대를 하고 있었다.
초파일 절집을 돌아다니며 비빔밥 먹는 재미는 해 본 사람만 안다. 아침은 문경 봉암사에서, 점심은 은해사 백흥암에서 저녁은 동화사에서... 푸짐하고 다 공짜다. 떡도 싸주고 과일도 양껏 먹을 수 있다. 생일날에도 이런 밥상 받아 본 적이 없는듯하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의 대표 선수가 보물로 지정된 극락전과 수미단이라면 비공식적으로는 비구니들이 수확한 온갖 나물과 여승 특유의 섬세함으로 가꾼 아기자기한 암자 풍경. 햇빛을 받으면 정사가 되고, 달빛을 받으면 야사가 된다고 했던가. 난 달빛 받은 이면의 이야기에 언제나 더 끌린다.
은해사와 백흥암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여러 개 남아있다. 보화루의 산해숭심山海崇深, 진영각의 십홀방장十笏方丈 편액과 6개의 주련이 모두 추사의 글씨이다. 십홀방장은 홀笏을 열개를 이어놓은 길이, 곧 사방 1장(10척) 되는 작은 방을 의미하는데, 산중의 어르신 큰 스님이 쓰는 방을 가르키는 말이다.
산해숭심山海崇深의 산해란 산해혜자재통왕여래山海蕙自在通王如來의 약칭으로 부처님의 높고 깊은 마음을 의미하는데 바로 추사의 글씨이다. 운무 낀 보화루 풍경도 아름답지만 보화루의 반들거리는 마루에 앉아 누각 눈을 열고 바라보는 오월의 신록 또한 절경이다.
영천 미나리가 워낙 유명하기도 하지만 백흥암은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도 나오는 유명한 미나리 맛집(?)이다. 경북 지역의 마당발 치과의사, 의리의 경상도 사나이 초석님이 백흥암에 미리 기별을 넣고 큰등도 달아 백이십명의 인원이 행복한 점심 공양을 받을 수 있었다.
초파일 점심 공양을 잔뜩 준비해 놨는데, 폭우가 와서 사람이 없어 도리어 맛있게 먹어줘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의 지역을 찾아온 손님들께 최선을 다하는 미풍양속을 고스란히 실천하시는 초석님에게 다시 감사. 5,6년전 진도 답사에서 뵙고 오랜만인데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반가워하신다.
여러 곳의 사찰 음식을 먹어봤지만 비구니 절의 정갈함에 격식까지 갖춘 사찰 음식을 제대로 먹어보기는 처음이다. 콩자반부터 시작해 연근 부침, 다시마 튀김, 두부조림, 온갖 나물....그 새 잊었다. 손이 너무 많이 가는 음식이라 웬만한 곳에선 할 수 없는 음식들이 다 있다. 사찰 음식을 전수하고 배우는 비구니 절이라 가능한 일이라 한다.
일년에 딱 이틀, 초파일과 백중날에만 산문을 여는 곳이니 내년 초파일에도 백흥암에 가야겠다. 구석구석 손이 가지 않고 예사롭지 않은 곳이 없다. 백흥암의 네추럴 사찰음식과 극락전의 수미단, 봄꽃에 홀려 보화루의 산해숭심 말고는 편액을 하나도 찍지 못해 아쉬웠다.
1日1寺(하루에 한 절만)의 원칙을 지키지 못한 1日 3寺의 바쁜 일정이었으나 즐거운 산사 순례였다. 그래도 봉암사 툇마루에 앉아 희양산 꼭데기의 하얀 화강암 사이로 콸콸 쏟아지는 검은 빗줄기를 구경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2011.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