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 엄마의 16세 때 사진이다.
아버님이 19세 아버님 말씀에 거류산 아래서 우리 엄마보다 이쁜 색시가 없었다고 하셨다.
엄마는 통영 우루깨(지금 평림동) 약국의 딸로 외삼촌 개인 서재에 훈장 선생님을 모시고 계셨고
70년 전 양단 치마 저고리에 꽃신을 신고 찍은 이사진은 외가의 부유함을 말해주고 있다.
당동 공기조씨가 우리 고모부였는데 왜정 때 순사로 발령을 받은 곳이 우루깨였고 그곳에서
제일 큰 집이 외가였기에 외삼촌 서재 한 칸에 요즘 말하는 하숙을 하면서 이쁜 엄마를 자기 처남인
우리 아버지와 중매를 하면서 무식자인 아버지와 한글을 깨우친 엄마가 부부가 된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보다 무엇이든 뛰어났고 아버지는 엄마를 힘으로 누르려 하다보니 아버지는 엄마 잡
는 킬러였고 우리 6남매는 그 속에서도 아버지의 애정 엄마의 섬세한 사랑을 맛보며 자랐다.
자식들에게 항상 '정직, 정직하라고 하셨던 아버지는 언니의 눈이 안좋다고 쇠고기 간을 사오시고
엄마는 쌀이 아까워서 튀밥 한번 안튀겨 줘도 엄마 몰래 튀밥을 튀겨서 서까래 아래 걸어 두시고
당동 선창에서 선동까지 그 추운 겨울날 해삼은 사기그릇에 담아야 싱싱하다고 도랑사구에 담아 오시던 모습..... 커다란 몽돌을 빙 둘려 딸을 셋을 앉히고 동타리 삶아 망치로 꽁지 따서 차례로 주시던 아버지. 시집와서 맞이한 아버지 환갑 날 옷 한벌 해갔더니 김서방 바다에서 고생하는데 내가 니가 사온 옷 입고 춤추겠나... 가져가서 사돈드려라 하시던 분....
어느 날 친정을 다녀온 후 어머님이 전화를 하셨다. 아가 다음부터는 용돈 내 주지 말고 아버지 줘라 하시기에 왜냐고 했더니 아버님이 "고 놈의 새끼가 내가 버스머리서 세 번이라 잘 가라캐도 고마 가더라." 하시면서 서운해 하셨단다. 그 날 많이 울었따. 아버지가 힘이 없고 늙어 버린 것 같아 울었따. 우리 아버지는 평생 딸의 돈은 안 쓰실 줄 알았는데 마늘 한 꼬타리라도 며느리는 큰 거 주시고 딸은 작은 거 주시더니........
용돈 안준다고 하시고 1년이 못되어 돌아가셨다. 정말로 제대로 용돈 한 번 못드리고 떠나 보낸
내 아버지.....
엄마 너무 똑똑하신 우리 엄마
내가 어릴 때 한글을 가르쳐 주셨고 아버지가 당동에 논을 사 모을 때 부산 연산동에다 미나리 밭을 사라고 하셨으며 방학 때 당동 큰 집에 오면 엄마는 나를 데리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어떤 집은 송아지에 어떤 집은 큰 소를 보여 주며 "점덕아 이 소가 다 우리 소다. 이 소 팔면 논도 사고 오빠들 등록금도 하끼다."하시며 웃는 모습, 그 때 어머님 말씀대로 연산동에다 밭을 샀다면....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시대를 잘 만났으면 큰 손이 될 만한 분이셨다.
내가 중학교를 갈 때 엄마는 나를 앉혀놓고 "점덕아 여자나 남자나 꼭같은 사람인데 여자친구는 비밀을 안지켜도 남자친구는 비밀을 지켜준다. 남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친구라고 생각하고 남자친구들과 잘 사겨라." 하셨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꼭같은 생각을 하신 것이 하나 있는데 남자든 여자든 우리 집에 친구들이 찾아오면 환영해주셨다. 내 남자친구들의 이름을 알고 6남매 친구들이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날 찾아오면 덕석을 깔고 놀게 하셨고 어떤 날은 우리 사촌들과 오빠의 여자 친구들이 모였는데 아버지가 당동 종립이 점빵에 가서 풍선껌, 산도, 건빵, 머리핀, 제리, 종류대로 한가지 씩 사가지고 오셔서 제비뽑기를 시키셨다. 각가지 제목마다 벌칙에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밤을 세웠는데 그 때 내가 뽑은 풍선껌에 벌칙은 큰 오빠 업고 방 한 바퀴 돌기였다.
86년 살아온 세월의 기억을 거의 잊고 계시면서도 공기조 그 놈 때문에 속아 시집 왔노라는 어머니는 아직도 아직도 속아서 왔따고 하신다. 병나시고 20일만에 돌아가신 아버님. 우리엄마 소원이 아버지 없이 5년만 살다가 죽는 것이라고 하시더니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포기하는데 엄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무 것도 못넘기는 아버님의 입에다 수박을 짜서 넣으시며 어찌할 바를 모르시던 어머님
아버님 떠나신 지 십오년 지금 막내 딸 집에 계시며 동네 사람들에게는 사위가 아들이라고 하시고 우리가 가면 사위라고 하시며 예쁜 김약국의 외동딸 자존심을 지키고 계신 엄마
살아 계신 것만도 감사한데 지척에 엄마를 두고 자주 가지 못하는 나는 나는 불효녀이다.
세월을 더해 가는 엄마의 모습
첫댓글 점덕이" 그래 옛날엔 봉남이라않고 점덕이라 불렸지,,훌륭한 부모님 아래 태어난 친구가 부럽네,,많은 세월이 흘러서 나도 부모가 되보니 좀더 지성으로 효도하지 못함을 후회한다네~ 언젠가는 떠나시겠지만 살아생전에 자주찿아보세나!!!
목련화의 그늘아래 시를 읊은 나의 5월은 어디로 가고 내가 그 모습으로 변하여 가는 것이 세월의 이치에 맞아 참 행복하구나 맞장구를 쳐줄것 같은 봄나리님! 지금은 늦은 밤이가? 오늘은 영암월출산에 등산가느라고 아침 5시에 일어나 산행 마치고 도착하여 사워 하고 네글을 보노라니 웬지 눈물이 핑하구나 모두들 그러히 변하여 감에 아쉬움이 많아서 겠지.지금도 늦지 않으니라 모두에게 주어진 삶에 대하여 작은것에 족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니? 이세상 사람들 누구나 다 그렇게 회한속에 살아가고 그순간들이 지나면 그리워하느니라. 나리님의 역사를 몇백년을 거스려서 보는것 같구나.깊은 뜻이 보이구나.강녕하심을 빌어본다
모두가 불효자들이제~~~점덕이 넌 불효녀는 아닌것 같다~~~난 두분이 다 계시는데도 자주 못찾아보고 용돈은 크녕 도로 용돈 주시니 이게 더 큰 불효자식이제......마음은 안그런데 살아가는 형편이 아직도 ~~~눈물 날라고하내..........돌아가셨던 아직 살아계시던 모든 부모님들게 큰절 올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