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와 사나이의 어원
우리나라 방언(方言)에는 남자를 사나해(斯那海)라 부르고 있으니, 사(斯) 자는 신(新) 자와 통용한다. 예를 들면, 신라(新羅)를 사로(斯盧)라 칭한 것과 같다. 양성 이씨(陽城李氏)의 조상에는 나해(那海)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고, 경상도에서는 여자를 가사나해(假斯那海)라고 부른다. 금나라가 우리나라와 접경(接境)이므로 그들의 방언이 혹 우리의 방언과 비슷할 수도 있다. 즉 가시아와 가사나해는 그 음훈(音訓)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나이'와 '가시나(가시내)'에 대한 어원을 설명하는 사료로 우선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등장하는 '가시나'의 어원이다.
이 기록의 원전인 '금사'는 1343~44년에 완성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년)의 정사서이다. 후비전은 '열전'에 포함되어 있다. 즉 14세기의 이 기록에 비빈궁에 있는 금나라 시녀들에게 남자복장을 하게하고 '가시아'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청장관전서중 [앙엽기]에 나오는 기록으로 이 앙엽기는 이덕무가 북경에서 듣고 본 사실들을 얇은 책에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한 1780년의 저서이다.
재밌는 사실은 양성 이씨의 조상 중 '나해'라는 사람이 있는데, 조선 방언 중 '사나해 (지금의 사나이)'라는 말의 '나해'과 같은 한자를 쓰며, 18세기 당시 경상도방언은 가시나를 '가사나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가사나해의 '가假'는 거짓 가. 따라서, 거짓 '사나해' 즉 남자인 척 하는 여자 (남자복식을 한 여자와 일맥상통)라는 것이다. 또한 사와 신이란 글자는 통용하므로 '가시아'는 '가신아'로 부를 수 있다는 것. 거꾸로 '가사나해'를 '가시나해'로 부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문맥에서 이덕무는 금나라의'가시아'(즉 후궁들의 남장 시녀들)을 경상도의 가짜 사나해 (가사나해)와 비슷한 어원으로 파악하며, 금나라와 한반도국가 (즉 금당대 고려)와의 방언교류를 추정하고 있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또 다른 예인 양성이씨는 시조 이수광'(秀匡)이 '송나라'출신이다. 1040년대 즉 북송말기에 고려에 넘어온 사람으로, 아시다시피 북송은 금나라에게 쫓겨나 남송시대를 연 왕조이므로 '금나라'와 묘한 접점이 있다. 양성이씨의 시조 이수광의 족보기록은 다음과 같다:
서기 1,040년대 송나라에서 特進金吾衛大將軍 上柱國(특진금오위대장군 상주국)의 爵位(작위)를 받으시고 고려에서 三重大匡輔國(삼중대광보국) 陽城君에 봉해짐으로써 득성(得姓)하였다. 秀匡은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에 와 文宗朝(1,047~1,083)에 벼슬하여 屢次 契丹(거란)에 使臣으로 派遺되여 出衆한 인품과 剛柔兼全(강유겸전)한 外交術로 상호 이해를 잘 타일러 슬기롭게 설득무마하여 그들의 東侵野慾(동침야욕)을 封鎖(봉쇄) 善隣友好關係(선린우호관계)를 맺으므로써 우리나라를 晏然(안연)케한 공을 세워 定難功臣제일로 策勳(책훈)되었다. 또한 出將入相하고 덕망이 높아 당시 사람들이 당나라 郭子儀(곽자의)에 比하였다. 송나라에 변란이있어 고려에 救援을 청해오자 왕명으로 원정, 한달에 세 번 勝捷(승첩)을 거두매, 송나라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친필로 "고려대신 이수광은 功冠天下요 名揚後世하리라"고 써주고 위의 벼슬을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榮貴公子(영귀공자)라 칭송 하였다.
여기 보면 이수광선생은 11세기중반 거란에 사신으로 파견된 국제인사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거란이라면 역시 발해의 피지배층에서 벗어난 말갈 (거란)인들이 세운 요나라가 전연의 맹 (1004년)이후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시기이자 동시에 비지배층이던 여진족의 금 태조 완안아골타(金太祖 完顔阿骨打, 1068~1123년)이 들고 일어나서 망해가기 직전의 시기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앙엽집에 나오는 배경시대의 인물인 금나라 최초의 폐위황제인, 폐황제 해릉양왕 완안량(海陵煬王 完顔亮, 1122~1161년)은 남송시대의 송나라를 밥 먹듯 공격하기 좋아했던 인물이란 점. 따라서 송나라가 여진의 금에게 공격받던 시점에 그가 고려로 넘어왔을, 귀화했을 가능성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또한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이 완안량이라는 인물은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호색가' (유부녀까지 다 취한)였다는 점이다. 이런 배경으로 보면 그가 '가시아'를 설치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커 보인다. 요는 양성이씨의 선조인 송나라인 이수광이 금의 '여진'과 자주 만났을 가능성이 여기저기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시나의 어원을 자세히 풀어 쓴 좋은 블로그 글이 있었다 (가시나의 어원 링크). 이 글을 보면 가시나라는 말이 병자호란 등에서 나왔다는 일설을 일축하며, 이미 석보상절 등 15세기이전의 고어임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시나 라는 말은 금나라 폐황제의 가시아라는 말이 고려의 북쪽과 교류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 하지만 경상도방언인 가사나해는 우연히 비슷한 단어로 어영부영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글 중 묘한 부분이 후반에 지나가듯 등장한다.
‘가시나’의 어원을 캐다가 어느 고승의 영상 법문에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해 봄에 입적하신 성수 스님(1923~2012)인데, 여러 법문에서 ‘가시나’의 유래를 강조하고 있다.
“여자를 ‘가시나’라 부르게 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였다. 선덕여왕이 원효대사, 의상대사, 자장대사 등 세 분의 큰스님을 불러 “삼국이 통일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여쭈자 의논 끝에 큰스님들이 ‘여자’를 ‘가신아(嫁信兒)’로 등장시키기로 했다. ‘가신아’는 원래 중국말(주: 즉 한자어)이다. (큰스님들이 규정한) ‘가신아’는 시집에 대한 믿음이 딱 서고 자기중심이 딱 잡히고 흔들리지 않는 여자를 말한다. 교육을 받아야지 아무나 가신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처녀로서 대인을 낳아서 키울 수 있고, 영웅을 낳아서 키울 수 있고, 아이를 낳아 군자로 키울 수 있는 여자가 돼야 가신아다.
할아버지들은 가신아를 (수소문해) 집안의 손자며느리로 데려왔고, 가문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후손을 얻기 위해 손자며느리의 방문에 대인, 영웅, 군자의 초상화를 붙여놓고 그 방문 앞에서 절을 하며 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라시대에는 가신아를 귀하게 여겨 험한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이때는 여자(가신아)가 제일 큰 어른이었다. 가신아가 없어서 나라가 이 꼴이다.” <성수스님 법문종합>
이 '성수 스님'의 법문의 근거가 되는 원전까지 파고 들지 않아 아쉬운데 후일 한번 살펴볼 만 한 것 같다. 즉, 성수스님 법문에 따르면 통일 전 구신라시대에 원효 등 대사들에게 선덕여왕이 자문을 구하자 '남자같이 씩씩하고 중심 있는 여자들' 즉 '가신아(嫁信兒)'를 등장시키기를 권고했고 이때 이 말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처음 소개한 [앙엽집]의 금나라어 '가시아'와 18세기 경상도방언인 '가사나해' (가짜 남자)와 묘한 접점이 만들어진다. 참고로 가시아의 시廝는 '하인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