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땟목’
메두사호의 땟목은 제리코가 1819년에 제작한 그림이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소장한 이 작품은 당시의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하고 있다. 구도는 당시의 평면적 전개를 피하고 피라미드형으로 짜여져 구조의 희망과 감동의 초점이 멋지고 강하게 그려져 있다.
이 대작은 당시의 사건을 그리고 있다. 1816년에 범주 전함(帆走戰艦) 메두사호는 식민지로 향해 가는 관원(官員)과 함께 약 4백 명을 태우고 출범했으나, 아프리카의 암초에 걸렸다. 배를 버리고 승원은 구명정(救命艇)에 분승(分乘)했으나 나머지 149명 때문에 커다란 뗏목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양에 나와 밧줄이 끊어져 뗏목 위에서는 한모금의 물과 음식물 때문에 피로 물든 싸움이 벌어졌다.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는, 생존자는 15명, 모두 빈사(瀕死) 상태였다. 이 보도는 세론을 들끓게 했는데, 제리코는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의 흥분된 순간을 잘 묘사하고 있다.
1816년 프랑스 언론에는 떠들썩한 기사가 났다. 메두사호에 탑승했던 생존자가 사고 경위를 말한 내용이 실렸는데 온 프랑스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메두사호가 좌초된 후 뗏목으로 탈출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기술하면서, 서로를 죽이고 심지어 동료의 시체까지 뜯어 먹었던 일들을 공개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육을 먹었다는 쇼킹함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밝혀지는 강자의 약육강식, 그리고 국가, 사회 지도층의 부조리에 계속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충격에서 낭만주의 미술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메두사호의 뗏목"이란 작품이 완성되었다. 제리코는 제작에 임하여 생존자를 남김 없이 방문, 같은 모양으로 뗏목의 모형을 만들고 시체를 화실로 가져다가 그 경직(硬直) 상태를 조사하고, 병원을 방문하여 빈사의 인체를 연구하였다. 한 눈에 잔인하고 난폭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낭만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동요하는 영혼들, 공포에 질린 표정과 죽음을 예견하는 섬뚝한 분위기는 당시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 되었다.
밧줄로 묶어 땟목을 끌고 가던 보트의 선장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밧줄을 끊고 달아나 버린다. 아르고스 함대에 의하여 구출되기까지 12일 동안 땟목을 타고 있던 사람은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렸다. 구조선이 도착했을 때는 149명의 승선자 중에 겨우 15명만이 살아 있었다. 생존자 중의 2명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책으로 출판함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제리코는 소용돌이치는 움직임과 감정을 증폭시키는 엄청난 에너지가 넘치는 붓질과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 낭만주의 미술 양식을 잘 구현했다.
제리코는 이 사건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서 생존자를 만나고, 분위기를 만들고, 또한 이 사건 뒤에 숨어 있는 인간들의 이중성을 꼬집었다. 비평가 미술레는 이 작품이 프랑스의 정치적 침몰을 상징하는 참여 미술의 특징을 띠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는 혁명 등의 사회 불안으로 식민지 진출이 늦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다. 제리코는 이 작품을 1819년에 살롱전에 발표했다. 예상대로 이 그림은 엄청난 반응을 불러왔다. 그러나 정부는 이 사건에 미온적이고, 작품도 구입하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심망한 제리코는 블록이라는 기획자를 통해서 이 작품을 세계 곳곳에서 전시했다. 1820년에는 런던에서 전시했고, 이어서 더블린에서 전시했다. 세계 각지로 순회 전시를 하면서 작가에게는 약 2만 프랑이라는 수익을 안겨 주었다. 작품의 평도 호의적이었다. 프랑스 정부도 이 작품을 구입하여 지금은 루불 미술관에 수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와 카바라조의 영향을 받아서 전통적이며 아카데믹한 표현 기법을 구사했다. 비평가들이 지적하듯이 이 작품의 가치는 화가보다는 저널리스트에게 더 어울리는 주제를 현대적으로 표현했다. 주제가 되는 사건에 대해 섬뜩할 정도로 현실감있게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