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 있는 유토피아 / 김정화
≪헤테로토피아≫
미셸 푸코∣ 문학과지성사∣ 2014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 그러나 누구나 꿈꾸는 완벽한 사회. 그곳을 우리는 유토피아라 부른다. 유토피아는 장소라는 뜻의 그리스어 ‘토포스Topos’ 앞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우Ou’를 붙여 만든 ‘장소 아닌 곳’, 다시 말해 ‘장소 없는 장소’를 뜻한다. 그것은 1516년에 토머스 모어가 쓴 소설책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중세문학에서 인용된 파라다이스나 제임스 힐트가 명명한 샹그릴라나 허균이 건설한 율도국과 도연명이 그린 무릉도원과도 일맥상통한다. 종교적으로는 천국이나 극락이 존재하며, 신화적으로는 잃어버린 제국 아틀란티스와 아서왕이 잠든 아발론 등이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 공간을 넘어선 이상향의 세계이다.
반면 “우리 시대의 칸트”라고 불리는 위대한 철학자 미셸 푸코는 공간의 구획을 하나 더 추가한다. ‘일상 공간’과 ‘유토피아’, 그리고 유토피아에 맞서 부르고자 하는 ‘헤테로토피아’이다. 그에 따르면 헤테로토피아는 상상의 공간이자 현실의 공간이며, 탈주의 공간이자 전이의 공간으로서 차이를 생성하고 통합해낸다. 즉, 상상할 수는 있지만 현실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와는 달리, 여기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헤테로토피아인 것이다.
이에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의 다양한 장소들을 설명한다. 먼저 원시의 헤테로토피아에는 신성하거나 혹은 금지된 장소들이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청소년, 달거리 중인 여성, 임신 중인 여성에게 허용되는 장소인데, 특히 신혼여행지에서는 부부로서의 신성한 의식을 치르게 되는 곳, 처녀성의 상실을 한 시공간과 출산의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은 산실 등이 속한다. 오늘날에는 원시의 헤테로토피아가 점차 사라지면서 박물관과 도서관 같은 영원성의 헤테로토피아가 강조되고, 시장과 휴양지로 대표되는 축제의 헤테로토피아가 인기를 얻는다. 그것은 나아가 술집, 극장, 놀이공원 심지어 매음굴까지도 환상의 헤테로토피아로 이어질 수 있다. 현실이든 상상이든 인간이 평생 보낼 수 있는 공간이라면 결코 유토피아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헤테로토피아는 한시적으로 유효하며, 그 공간은 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목요일 오후-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 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뛰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 (13∼14쪽)
이제 도시에는 다락방이 없는 아파트가 난무하고, 텐트를 세울 마루나 마당도 거의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아이들 역시 자신만의 헤테로토피아를 찾아서 옷장 속이나 침대 밑이나 이불 속에서도 굴을 판다. 그리고 자신의 왕국을 꿈꾼다. 숙제도 시험도 잔소리도 사라진 완벽한 세상을. 어른이라고 다를 바 있으랴. 내가 아는 해숙씨 남편도 아파트 거실에 텐트를 치고 산다. 책을 좋아하고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해숙씨와 마라톤을 취미 삼고 여행을 즐기는 그녀의 남편은 매사가 맞지 않는다. 다행히 서로 큰소리 내는 법 없이 이십 년간 함께 살지만, 그들의 집에는 각자의 구역이 존재하고 그 공간을 인정해준다. 그러나 최근 아이들의 성화에 해숙씨 남편의 텐트가 베란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은 매우 안타깝다. 하지만 헤테로토피아는 일시적인 공간이니 찬 바람이 불면 그도 베란다의 텐트를 접게 되겠지.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단순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거울 이미지라면 귀를 기울일 만하다. 다름 아닌 거울의 물질성에 대한 인식이다. 내가 거울을 보고 있다고 가정해보라. 요컨대 거울 속에 내 모습은 존재하고 있으나 거울 속에는 공간이 없다. 나를 보도록 허락해준 거울 속에서 나는 부재한다. 반대로 이번에는 내가 거울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 속의 내가 실재하는 나를 보게 된다.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현실의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나에게로 돌아오고, 자신을 다시 구성하기 시작”한다. 거울은 현실이지만 동시에 가상공간과도 연결되어 있으므로 헤테로토피아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이를 문학에 적용시킨다면 현실의 재현인 문학 작품이 유토피아라면 실제로 읽고 쓰는 장소인 작가의 방은 헤테로토피아로 존재한다. 그러기에 문학이라는 거울 앞에서 작가는 얼마나 겸손해야 할 것인가.
몸이 헤테로토피아로 기능한다는 푸코의 이론도 흥미롭다. 우리는 눈이라는 두 개의 창문을 통해 세상을 내다본다. 그러므로 몸이라는 공간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에 있으며 몸을 거치지 않고서는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없다. “나는 꿈꾸고 말하고 나아가고 상상하며, 제자리에 있는 사물들을 지각하고, 또 내가 상상하는 유토피아의 무한한 힘에 의해 그것들을 부인한다. 내 몸은 태양의 도시와도 같다. 그것은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것으로부터 실제적이든 유토피아적이든 모든 가능한 장소가 시작되어 뻗어나가는 것” 또한 몸이 된다. 푸코는 갇혀 있고 닫혔고 봉인된 몸을 여는 방식으로 ‘사랑’을 권장한다. 사랑을 나눌 때 마침내 스스로를 되찾은 감각적인 몸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는 이론이다. 마치 유토피아가 생성된 다음 다시 헤테로토피아가 재구성되는 거울의 환영처럼.
헤테로토피아의 가능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공간이 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헤테로토피아가 되기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하이데거가 “깊은 겨울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에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을 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라며 대부분의 연구와 저술을 한 전기도 수도도 없는 슈바르츠발트의 산장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갈 수 있는 토함산 아래의 외딴 민박집도 각자에게 헤테로토피아로 존재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이 스산한 계절에 자신을 위로해 줄 당신만의 헤테로토피아는 과연 어디인가.(*)
- 김정화 리뷰에세이 ≪말 이상의 말, 글 이상의 글≫에서

오늘나만의 헤테로도피아를
만들어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