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과 콤바인 / 곽주현
날씨가 흐릿하지만 비는 오지 않을 것 같다. 농사일을 하려면 일기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가을 중순이 지나면 이것저것 수확할 작물이 많다. 오늘은 들깨를 베려고 농장으로 향한다. 도착하자마자 창고에서 연장 두 자루를 꺼낸다. 낫은 여전히 농작물을 거두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농기구다.
먼저 낫을 숫돌에 간다. 위아래로 문지르다가 잘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엄지손가락으로 날을 살짝 대 본다. 잘못하면 손을 벨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미끌미끌한 느낌이면 더 갈아야 하고, 까끌까끌하면 날카롭게 잘 선 상태다.
벼나 보리 등 곡식을 베는 도구가 오직 낫뿐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농부들은 그것을 더 소중히 다루고 관리했다. 추수철이 되면 먼저 상태부터 살폈다. 녹이 슬어 있으면 닦아내고, 날이 너무 무디면 대장간에 맡겼다. 농번기가 오기 전에 낡은 것은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골 오일장마다 두세 곳씩 대장간이 있었다. 소문난 곳은 농기구를 사려는 농부들로 북적였다. 품질이 좋은 것은 웃돈을 줘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최고 등급의 낫은 쇠막대를 뜨거운 열로 달군 뒤 망치로 수백 번 두드려 만들어진다. 제조 과정은 복잡하지 않다. 풀무질로 쇠를 달구고, 망치로 두드려 모양을 만든 뒤 찬물에 담그면 끝이다. 그때는 그 단순한 과정조차 심심찮은 구경거리여서 행인들의 발길을 붙들곤 했다. 지금도 고향 오일장에 들를 때면, 벌겋게 달군 쇠막대와 망치질 소리가 떠올라 두리번거리게 된다.
벼나 보리를 추수할 때면 주로 남자 어른이 무뎌진 낫을 간다. 낫이 잘 들어야 힘이 덜 들고 일의 능률도 오른다. 새참 시간이 되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가 공손하게 부탁한다. 날을 잘 세우는 사람은 같은 일을 해도 대접받는다. 숙련된 일꾼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저게 그렇게 어려운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자 내가 직접 갈아보겠다고 나섰다. 숫돌을 잡고 씨름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쳐다보더니 “애가 겁도 없네.” 하고 눈을 부릅뜬다. 잘못하면 손가락이 잘릴 수도 있다며 험한 목소리로 나무란다. 그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났다. 아마 초등학교 6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어느 해 가을이었다. 우리 집 벼 베는 날이다. 일꾼이 일곱, 여덟 명쯤 있었고 남자는 나를 포함해 둘뿐이었다. 내기라도 하듯 모두 열심히 낫질해 논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논두렁 끝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 일꾼이 집에 급한 일이 생겨다며 그만두고 가 버렸다. 새참 시간이 되었다. 이때 낫을 갈아야 하는데 그럴 사람이 없어 난감했다. 결국 내가 나서서 그분이 하던 대로 숫돌에 물을 적시며 갈기 시작했다. 모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조심해라.”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혀를 차고 주변을 서성거렸다. 다시 벼 베기가 시작되었다.
“낫이 제법 잘 드네. 아이고, 모생이 댁(전라도에서는 시집 온 여자를 '댁호'라는 이름으로 고향 이름을 붙여 이렇게 부른다), 이제 고생 다 했구먼.”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 이후로 나는 낫 잘 가는 선수로 통했다. 해보니 별것 아니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생생하던 들깨가 벌써 누렇게 변했다. 아직 초록 잎이 붙어 있는 것도 있지만, 더 두면 때를 놓칠 것 같아 모두 벤다. 참깨는 익으면 알곡이 잘 쏟아져 묶어 세우는 등 관리가 귀찮지만, 들깨는 그냥 눕혀 놓아도 손실이 거의 없어 훨씬 편하다. 낫이 잘 들어서 네 이랑을 금방 끝냈다.
잠시 쉬자며 아내와 농막으로 갔다. 가지가 휘어지게 달린 단감 몇 개를 따서 쟁반에 담았다. 커피를 마시고 감을 한입 베어 무는데, 옆 논 끝에서 부르릉부르릉 소리가 들린다. 두 대의 콤바인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달려온다. 그것들이 지나가면 벼들이 깨끗하게 정리된다. 짚은 땅에 가지런히 놓이고, 알곡은 기계에 매달린 자루에 담긴다. 한 단지(1,200평)를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내고 다른 논으로 향한다. 올해는 유난히 가을비가 많아 논바닥이 질퍽한데도 도로를 달리듯 나아간다. 낫으로 추수하던 때였다면 10여 명이 하루 종일 해야 겨우 끝낼 수 있는 일을 이렇게나 빨리 해치운다. 해마다 보는 풍경이지만, 어려운 시절을 살아 그런지 늘 신기하다.
낫 한번 잡지 않고도 추수가 끝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무인 에이아이 농기계가 씨뿌리기에서 수확까지 모든 과정을 도맡을 날도 멀지 않다고 한다. 일은 편해졌지만,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농민들의 볼멘소리는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첫댓글 어릴 때 논바닥 구석구석 꼼꼼히 훑으며 벼이삭 줍던 기억이 납니다. 남자 없이 많은 농사를 지으며 힘들어하던 할머니도 떠오르고, 이웃집 아저씨께 낫 갈아 달라고 심부름 다니던 생각도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낫 잘 갈면 상일꾼인데 선생님은 일찍 상일꾼이 되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하하! 저는 낫 질도 잘하고 숫돌에 갈아보기도 했지요. 옛 생각 나네요.
저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들이라 마치 단편문학소설을 읽는 듯 재밌게 읽었습니다!
낫을 보면서 어린시절을 회상하셨군요. 전통 낫이 무게도 있어 믿음이 갑니다. 부지런한 선생님의 성품을 글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편리함이 커질수록 마음 한켠엔 허전함이 남습니다.
그래도 편한게 좋아보입니다.
그때의 수고와 손맛, 이웃 간의 온기는 따라올 수 없지만...
선생님, 낫을 가는 과정과 그 낫으로 벼를 베를 장면이 우리가 글을 쓰는 과정과 닮아 한참을 서로 비교하며 읽었습니다. 재미난 이야기에 공부거리까지 담아 주시니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참 예리하세요.
뭐든 진지해서 다 잘할 것 같은 곽 선생님, 역시나 낫도 숫돌에 잘 가셨네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를수도 있거든요. 저는 어렸을때 부터 많이 봐 온거라 더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글 재밌어요 선생님.
어릴 때 본 들녁 풍경이 선생님 손끝에서 살아나네요. 글만 잘 쓰시는 게 아니라 낫 가는 일도 선수이군요. 재주 많은 선생님!
글 중간 어머니의 "조심해라" 는 말이 나오자 내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낫에 베였다." 라는 문장이 나올 줄 알았어요. 하여튼 선생님은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