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60강 창 2:1~7 생령이 되니라 57.05
26.08.28(금)
지난 시간에 우리 윤석진 교수님으로부터 전문 우주 학자가 본 창세기 1장에 대한 특강을 들었습니다.
혹자는 과학의 이름으로 신은 죽었다. 신은 없다고 단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과 과학이 결코 상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 믿음은 더 구체화되고 더 심화된다는 좋은 본보기의 시간이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마치 시인이 기분이 좋아서 아무 계획도 없다가 즉흥적으로 시 한 수를 짓듯이 혹은 소리꾼이 갑자기 신이 나서 육자배기를 한번 뽑듯이 순식간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시고 태양을 만드실 때까지 이 지구를 만드실 때까지 무려 100억 년이 걸렸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무계획하게 지구를 지으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치밀하게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실행하시고 우리를 만드셨다고 하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온 몸이 감전되는듯한 감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윤 교수님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과학자들 여러분의 말을 인용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주의 생성과정을 보건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구가 우주의 목적임이 분명하다 굉장히 중요한 말이죠.
위치적으로 지구가 우주의 한 가운데 있는 건 아니란 말이죠. 광활한 우주가 있고 거기에 많은 은하단이 있고 지구가 속해 있는 은하단 속에서도 지구는 그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 위치해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지구가 우주 속에 위치하고 있는 이 위치가 아니면 절대로 이 땅에서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고 그 랬습니다.
따라서 지구가 만들어진 그 시점에서 그 이전으로 창세기 1장 1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이 지구를 만드시고 그 지구에 사람을 두시기 위해서 저렇게 우주를 광활하게 만드시고 은하단을 두시고 그 은하단을 외곽 부분에 지구를 미치게 하심으로 우리를 존재하게 하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위치적으로는 중심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중심 속에는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들어있다.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 광활한 우주에서부터 지구로 그리고 그 지구 속에 있는 인간에게로 계속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지구를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이 땅에 존재하시기 이전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신 뒤에 인간을 이 땅에 존재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으면 자기 좋은 것을 일단 먼저 하고 봐요. 일읕 저지르는 거죠. 그래서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습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사람이 좋아서 사람을 먼저 지으셨다면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은 얼어 죽었거나 굶어 죽었겠지요. 그죠.
그런데 태양을 만드시고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시고 먹을 것을 다. 준비하신 뒤에 인간을 있게 하셨단 말이죠.
창세기 1장의 결론이 그거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처럼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있게 하셨다는 거예요.
왜 창세기 1장이 그 사실을 강조할까요.
그것을 믿는 것으로부터 참된 믿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존재하기도 전부터 나를 위해서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준비하셨음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지 않습니까?
여러분 100세에 아들을 얻은 사람을 기쁨을 짐작하시겠습니까?
저는 첫 아이를 37살에 봤거든요. 전 이대 독자여요. 그런데 37살에 큰 아이를 봤는데도 제가 감격해서 울었습니다. 눈물이 핑 돕니다. 그런데 37살에 비하면 그분은 100살이에요.
얼마나 그 아들을 낳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그 아들이 얼마나 그에게 귀했겠어요. 그런데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치시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는 모리아산으로 가지 않습니까 같이간 하인은 산 밑에 내려두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사를 드리기 위한 불도 내가 지금 들고 가고 장작도 지고 가는데 하나님께 바칠 수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창세기 22장 8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어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모리아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한 양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제단 위에 결박시켰습니다. 칼을 뽑았습니다. 그때 양의 튀어나왔습니까? 아니에요.
칼을 하늘로 들어 올렸습니다. 그때 양이 나왔나요. 아니죠.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 잡기 위해서 칼을 내려치는 순간입니다.
그때 히브리서 11장이 뭐라 그랬죠
이 아들 죽어도 산다는 거여요.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나한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아들에게 하셨기 때문에 죽어도 산다. 그 이야기는 뭐예요. 무슨 경우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는 걸 믿는 거예요.
그 칼을 내려서 이삭의 심장을 찌르려고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내가 이제 너의 믿음을 봤다.
그 순간에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한게 고개를 쳐드는 겁니다. 고개를 쳐드니 바로 그 자리에 수양이 가시덤불에 걸려 있습니다.
믿음대로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네 자신마저도 내게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뭐라고 그래요. 자기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는 것을 확인한 그 땅 이름을 뭐라고 했죠. 여호와 이레라 불렀더라
여호와 이레 뜻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바로 사랑하는 아들 이삭에게 가장 위대한 신앙 교육을 시켜준 것이죠.
너는 너의 일평생 하나님 말씀만 쫓으면 하나님께서 너의 모든 것을 준비하신 그분이 책임져 주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사람만 아브라함과 같은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의 심령속에 각인시켜 주시는 것이죠.
이제 2장 1절 보시겠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천지 만물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천지 그 만물을 의미하죠. 다 이루어졌다.
10:03
그러니까 마치 저절로 있게 된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루어지니라고 번역된 히브리 말이 칼라여요.
그런데 이 말은 성취되다. 완성되다. 마감되다는 의미의 히브리 동사로서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하 만물이 다 성취되어졌다는 거여요.
하나님에 의해서 무엇을 강조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다가 중간에서 그만하지 하고 멈추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 당신께서 계획하신 대로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완전 무결하게 창조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2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
우리 그렇게 알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일곱째 날에 대한 설명인데 이 첫째 날 둘째날 셋째 날 하는 그날의 길이가 우리가 지금 말하는 하루 24시간을 길이와 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윤 교수를 통해서 들으셨습니다마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넷째 날 태양이 만들어질 때까지만 100억년이 걸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의 하루는 24시간이지만 이때의 하루는 다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랬죠. 시간 속에서는 우리에게는 24시간과 100억년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차이지만 시간 밖에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100억년이나 24시간이나 똑같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길이는 우리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며칠 동안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까?
엿새 동안 하셨다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죠.
1장 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사람을 지으신 것으로 창조는 우리는 다 끝났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2장 2절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
일곱째 날에 끝났다고 지금 말씀합니다.
대체 무슨 의미인가 2절 하반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뭘 하셨다고요. 안식하시니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하나님의 안식을 구별해서 생각해요. 그래서 여섯째 날 동안은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 행위와 안식을 구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합쳐서 창조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 그 자체는 엿새 동안에 끝났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안식일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큰 창조의 개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나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이나 그 중요성은 똑같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죠.
3절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일곱째 날 안식하신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거죠. 그렇죠.
그런데 그 안식일의 재정 자체도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
복되게 공표하시고 거룩하게 공표하고 우리 줄을 한번 연결을 해 보십시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인가 거룩한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시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거룩하다. 이것은 카다시라고 하는데 깨끗하게 한다. 구별한다. 이런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진정 복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거룩하게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구별하는 사람입니다.
왜 자기를 거룩하게 구별할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음을 믿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나를 거룩하게 구별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복된 사람으로 당신의 도구로 쓰시지 않을 까닭이 없겠죠.
3절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셨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것은 엿세에 걸친 창조 행위 자체를 마치시고 안식한 것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을 큰 창조는 완성되었다. 하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일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러면 그날만 거룩한 날인가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그 안식일을 포함해서 앞으로 엿세까지의 일 모두를 다 합쳐서 창조의 완성이라고 우리에게 이렇게 오시지 않습니까?
따라서 마지막 날을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는 것은 그 안식일을 중심으로 그 앞의 모든 날까지도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속에서 거룩한 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자 여기에서 아주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됩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샤바트라는 말인데 안식 그 말 자체로 쉰다. 하던 일을 내려놓는다. 멈춘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어떤 질문이 제기됩니까? 하나님은 인간처럼 안식이 필요하신 분이신가 하나님은 인간처럼 쉬어야 되시는 분인가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쉬시지 않으면 하나님도 피곤해지시는 분이신가 왜 하나님이 쉬려고 하셨느냐 말이에요. 중요한 질문이잖아요.
이사야서 40장 28절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치 않으시며 곤비치 않으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피곤해 하시지도 곤비해 하시지도 않는 분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피곤하시다 곤비해질 때가 계신다 큰일 나는 거죠.
그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믿겠어요. 내가 하나님을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하나님 불렀던 야나 피곤해 이러시면 어떻게 그분을 우리가 믿겠느냐 말이에요.
안 피곤하신 날만 찾아다녀야 되잖아요.
시편 121편 4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뭐도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피곤하심을 느끼지 않는 분이라는 거여요. 피곤하면 졸아야죠. 하나님에게는 쉼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왜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이 하나님 당신의 안식을 위함도 아니여요. 안식일이 하나님 당신을 위한 날을 날로 삼으시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안식하시고 안식일을 제정하셨는가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안식일이요. 안식인가 이제 본문을 계속 살펴보십시다.
4절 지금부터는 하나님께서 이제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만드신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는데요.
20:01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사람 만드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총론 총괄적인 표현이라면 지금 4절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구체적인 내용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4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야기를 하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때부터 쭉 설명을 했는데 창세기 1장과는 달리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뭐가 달라졌습니까?
여호와가 붙었어요.
창세기 1장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이라는 호칭밖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말로 엘로힘이에요.
그런데 지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여요.
5절 여호와 하나님
7절 여호와 하나님
8절 여호와 하나님
9절 여호와 하나님
전부 여호와 하나님
성경에서 엘로힘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파워 권세 힘을 강조할 때 엘로힘이라고 씁니다.
그런데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할 때는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강조할 때는 여호와라는 호칭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체적으로 만드시기
시작하시는 이야기를 할 때부터 여호와라는 호칭이 더합니다. 이건 얼마나 중요한지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 우주를 지으시고 온 이 세상 만물을 지었을 때는 엘로힘 하나님이면 돼요. 하나님의 전능하신 파워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드시고 나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파워만 강조하시는 엘로힘으로만 존재하시면 어떻게 돼요.
이 인간이 잘못하면 당신을 파워로 하루 아침에 깨버리실 거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을 만드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당신의 언약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호칭이 병기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못하고 쓰러질 때에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당신의 호칭으로부터 보여주는 겁니다.
15절 보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두시면서 애야 그것 지켜라 하나님과 언약하시는 분이시잖아요. 그죠.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동산에 있는 그 모든 것 다 너 마음대로 해 언약을 주신 거죠. 그러나 하나 이 나무 열매마는 먹지 말거라 이 나무의 먹으면 열매를 먹으면 넌 죽는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어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 엘로힘으로만 끝났더라면 인간은 끝난 거지요. 그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인간이 잘못할 때에 처음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3400년 전에 모세가 창세기를 쓸 때 이런 걸 알고 썼겠습니까? 성령님께서 당신의 영광으로 모세로 하여금 이 성경 말씀을 쓰게 하시지 않았던들 어떻게 모세가 이런 용어의 차이를 자기가 알고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이런 히브리 단어 한 단어 한 단어가 갖고 있는 그 의미를 알고 창세기 1장부터 보면 창세기 1장부터 정의의 연속임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다 지으시고 지금 사람을 만드시기 직전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여섯번째 날에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여섯째 날 직전의 이야기예요.
땅을 갈 사람도 없었다.
5절 마지막입니다.
그때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직전에 들과 밭에는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상해지지 않습니까?
자 1장 13절 보십시다.
1장 11절에서 1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 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이는 셋째 날이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셋째 날 땅으로 하여금 풀과 채소와 온갖 과목을 내도록 다 명령하셔서 다 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시기 직전에 들과 밭에 풀도 없고 채소도 없었다는 거예요. 초목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럼이 말이 서로 상반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셋째 날 땅으로 하여금 식물을 내게 하셨다라고 하실 때에 사용되어 있는 단어는 아레츠 일반적인 땅을 의미해요.
그런데이 5절 하반절에서 들과 밭이라고 되어 있는 번역된 이 두 용어는 다 히브리 말 한 단어인데 사대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반드시 경작해야 되는 토지라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경작하지 않아도 되는 이 땅에는 다 온갖 풀과 초목이 나게 하셨는데 인간이 정작해야 될 땅은 인간이 수고하고 애쓰도록 그대로 남겨 두셨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인간을 당신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신 것 가운데에서 무위도식하라고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 속에서 준비해 두신 모든 것 속에서 땀 흘리고 수고하고 애쓰면서 사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아도 되는 삶은 절대로 복된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삶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의 인간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수고하고 애쓰고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간다움을 지켜 나갈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6절 말씀입니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히브리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안개가 땅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온 지면을 적셨다.
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경작해야 될 토지 들과 밭은 인간이 경작하도록 그대로 두셨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냥 사막처럼 그냥 내버려 두신게 아니란 말입니다.
땅에서 알맞은 습기가 올라와서 인간이 수고하고 애쓰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 땅이 경작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끔씩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황무지를 개간했다고요. 여러분 정말 황무지면 인간이 개간한다고 거기에서 곡물이 재배됩니까?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황무지처럼 보일 뿐이죠.
그것을 인간이 개간해서 땅이 경작물을 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 물을 준비해 주시고 필요할 때 태양을 준비해 주시고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30:0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으로 하여금 무위도식하지 않고 수고하고 땀 흘리며 성실하게 살도록 하시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죠.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준비해 주신 그 은혜를 내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이제 드디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19절 보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 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짐승과 새도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지난 주일 예배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흙으로 지음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에 관한 사람과 짐승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죠.
자 그 다음 또 보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짐승에게는 없는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은 흙으로 먼저 빚으신 뒤에 그 빚으신 흙으로 된 그 사람 모형의 코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어요.
히브리말로 니시마츠 하임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생명의 기운 생명의 숨 생명을 호흡 이런 의미입니다. 생명력을 주셨다는 거예요.
근데 이 표현을 잘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어떻게 하셨다고요.
불어 넣으시매
만약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넣어 주셨다.
이러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또 흙이 아니라 다른 재료로 생기를 만드시고 그 생기를 한 손에 드시고 한 손으로 코를 벌려서 집어넣어 주었다. 그런 표현이 될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주셨다는 거예요. 후 불어 넣어 주셨다는 거예요 누구 거를 주신 거예요. 당신 것을 주셨다는 것이어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셨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도 이 사실은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죽은 사람을 가리켜서 뭐라 그래요. 숨을 거두었다. 누가 거둔 거야
누군가 거두는 분이 있는 걸 알았던 겁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을 주시기에 우리가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고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숨을 거두시면 우리의 생은 끝나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인간이란 이름으로 짐승처럼 살아가느냐
인간답게 살아가느냐 그것은 우리 각자의 문제죠. 우리의 책임이죠. 하나님께서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뭐가 됐다고요.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생령이라는 말 앞에 숫자가 2자가 있습니까? 예 이번에는 통일되었습니까? 없는 성경은 없지요. 제일 밑에 보니까?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쉼표하고 생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원전에는 생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라고 히브리 말로 네세츠 하야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생물이라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주심으로 인간이 내 네체츠 하야 생물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 성경은 생령이라고 번역했는데 정말 탁월한 번역이죠.
인간이 하나님의 숨결을 지닌 자라면 단순한 생물을 넘어서 살아있는 영적 존재다. 그런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히브리 원전보다 더 좋은 번역인데 자 그러면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짐승하고 사람이 있는데 재료는 똑같아요.
그런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숨결이 생기가 더해지므로 사람이 생령이 되어 있습니다. 그죠.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피곤치도 아니하시고 곤비치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안식하시고 안식일을 만드셨는가 해답을 얻었죠.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이어요
인간이 안식일 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므로 짐승과는 달리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생명 다운 생의 삶을 살게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안식일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하면 십계명 제 4계명에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누가 썼다고요. 사람이 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약 1500년에 걸쳐서 약 40명의 사람을 동원하셔서 당신의 영감으로 성경을 쓰게 하셨어요.
그런데 그 성경이 성경 방대한 성경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직접 쓰셨다고 되어 있는 글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십계명이에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수로 당신의 손으로 직접 십계명을 쓰셨다.
그래서 찰턴 헤스톤 주연 그 십계 영화 보면 이 장면이 멋지게 나오잖아요.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불꽃으로 나타나시잖아요.
그래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림과 동시에 불꽃이 쫙 글을 쓰지 않습니까? 얼마나 중요하면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쓰셔서 인간에게 주셨는데 거기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인간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안 지켜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에요. 인간이 안식일을 안 지켜도 하나님의 거룩함이라고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생령으로 살 수 없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안식일을 주시고 안식일을 지키시라는 것이죠.
그 말씀이란 뭐하는 날인가 가만히 앉아서 쉬는 날인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낚시꾼은 뭘 해야 안식이 된다구요. 낚시를 해야 안식이 돼요.
참 여러분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보면 불가사의한 일이잖아요. 밤새도록 쪼그리고 앉아서 잠도 안자고 이것만 봐야 안심이 돼요.
그래야 월요일 날 또 출근할 수 있습니다.
그거 안 하면 몸살 나잖아요. 나지 않습니까?
골프강들은 골프 친다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니잖아요 여러분들 내가 돈 많은 드릴게요. 하루 종일 걸으세요. 누가 걷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걸어야 안식이 되고 몸과 마음이 풀린단 말입니다. 그 다음날 몸이 가뿐해져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안식일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육간에 안식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주일을 지키는가 또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겠죠. 그죠.
왜 그렇다고 그랬습니까? 이 안식일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가 계속 승화되어 갔습니다.
40:03
자 오늘 2장 3절 다시 보십시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라
첫 번째 안식일의 의미는 창조사적인 의미에요. 하나님께서이 안식일을 포함하셔서 당신의 창조를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천하 만물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처음 의미에 신명기를 한번 보십시다.
신명기 5장 12절에서 15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다. 신명기는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거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압 땅에서 주어진 말씀이죠.
내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신명기 5장에 십계명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조하시면서 지금 하시는 말씀이에요.
엿새 동안은 힘써 내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던 너희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안식하셨으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 출애굽의 구원이 있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셔요.
내가 내 강한 팔로 너희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내었으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창조 사적인 의미가 구속사적인 의미로 승화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의미가 창조사적 의미에서 구속사적 의미로 성화되었다면 안식일은 예수님과 불과분의 관계인 것이지요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시니까
그래서 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28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이죠.
왜 안식일의 의미가 구원의 의미로 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장 9절에서 10절은 이렇게 증거해요.
주의 날에 내가 성령의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쓰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주의 날에 주일에 이미 이때부터 안식일은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왜 안식일을 중심이 구원의 의미인데 그 구원의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날이 언제입니까? 주일이어요
그래서 이 구속사적인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의미로 완결되었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의 의미가 이렇게 승화되었다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의 예배가 어떻게 진전되고 승화되어야 되는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어 주어요.
안식일이 창조 사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우리의 예배는 어떤 의미가 될까요. 창조는 무에서 유를 있게 하는 거잖아요.
내가 빚이 있어서 내가 병이 들어서 내 가정이 어려움에 처해서 그래서 무에서 유를 있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매어 달려 보기 위해서 내가 예배당에 들어와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그런 동기로 드릴 겁니다. 아주 좋은 출발점이에요. 그 나쁜게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다 보니 나를 구원하신 그분의 구원의 은혜를 내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그때 경제적으로도 곤궁하게 하시고 내 육체도 연약하게 하시고 그때 그 문제의 지옥속을 거니게 하셨구나 그래서 내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처음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목적을 이루려고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예배가 거듭되다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로 내 예배가 성화됩니다.
그 예배를 드리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나를 위해서 부활하신 그분 안에서 내가 부활의 삶 옛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거야 이게 예배여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창조 때부터 그 예배를 통해서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다운 생명으로 늘 부활해 갈 수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당신의 창조 사역에 넣으셔서 그 안식일을 창조의 완성속에 포함시켜 우리에게 안식일을 선물로 주신 것이죠.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생명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새신자반 할 때 예배의 중요성을 세 단어로 정리했었죠. 예배가 무엇인가
첫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는 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컨택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대한민국의 참 교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뭐 몇만개 있다는데 서울시내만도 참 많겠죠. 교회가 그죠.
그런데 주일날 여러분들께서 주일 예배를 양화진 외진 곳까지 오셔서 100주년 기념교회에서 예배 드리신다는 것 자체에 이미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섭리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교회에서 예배드릴 이유가 없겠죠. 그죠. 이 성경 말씀이 얼마나 방대합니까?
그런데 지난 주일 날 우리 예배 시간에
사도행전 8장 4절에서 8절 말씀으로 우리 예배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각자들과 여러분들이 예배드리러 올 때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셔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하나님과 그 말씀을 통해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요지가 뭐였죠.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임했더라
근데 나은이라고 하는 헬라어 세라피오라고 하는게 영어로 큐어 육체가 치유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영어로 서비스라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서비스의 첫 번째 뜻이 뭐죠.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 그러니까?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 중에 육체가 낫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이 되므로 그 성이 기쁨이 충만했다
또 서비스의 다른 뜻은 사람을 섬긴다. 봉사한다는 의미라 그랬죠. 남의 도움 받는 것을 자신의 권리인 것으로 생각하던 그 병자들의 주님을 만난 뒤에 마음으로나마 남을 섬기려는 사람이 되면서부터 그 성에 기쁨이 충만했더라
사람이 그렇게 바뀌어지면 당연히 기쁨이 있겠죠. 그죠. 그 말씀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다음에는 그 말씀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굴복이 일어나는 것이요.
50:02
내가 예수 믿고 예배의 사람이 되어서
내 주위 사람에게 기쁨이 전해지고 있는가 내가 예수 믿고 나서 정말 마음으로 누구를 섬기려고 하기 때문에 나로 인해서 내 일터와 가정에 기쁨이 임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나를 돕고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나는 언제든지 내 권리인 것처럼 계속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 말씀 앞에서 내가 굴복하는 것이죠.
그래서 성령님의 은혜 속에서 내가 정말 예배의 사람이 되고 내가 정말 봉사의 사람이 되어 나로 인해서 큰 하나님의 기쁨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이 땅에 드러나게 되도록 내가 죽는 거죠.
그때 세 번째로 하나님의 가치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당신을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격려하실 사람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참 잘했어 격려 하여주시고
마치두 렙돈 바친 과부들아 네가 이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바쳤어 격려하시듯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쉼이 필요한 하나님께서 쉼을 주시는 것이어요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 하시고 예배하라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탈취해 주시기 위해서주간이라는이의 솜길 속에서 우리는 한 주간이라는 이 세상의 고개를 하나님의 생기를 품은 생령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타치를 우리에게 늘 주시기 위해서 그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정하시고 그 안식일을 지켜가는 가운데에 우리로 하여금
생명다운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얼마나 감사한지요.
바꾸어 말하면 그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으면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내가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직책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짐승과 구별되지 않는 것이죠.
아니 오히려 짐승보다 지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훨씬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이번 주일부터 정말 우리의 예배가 살아있는 자가 되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타치 속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생명 다운 생명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이 될 겁니다.
그 어떤 아름다운 예술품도 실은 다 죽은 거 아니에요. 그러나 내가 생령으로 살아간다면 나는 살아있는 예술품이 됩니다.
그 귀한 은혜를 늘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숨결을 넣어 주시고 생령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령이 생령답게 살게 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주님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 예배인지 예배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시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일날 예배당을 찾아올 때 종교 의식을 위해서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게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굴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타취를 받기 위해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그 예배가 거듭될수록 우리가 생명 다운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코에서 당신의 호흡을 거두시기까지 우리가이 땅에서 살아있는 주님의 예술품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다 함께 누리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54.29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