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콜 오브 와일드]는1903년에 출간 된 잭런던의 소설 [본능의 부름]을 영화로 만들었다.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러일전쟁 특파원으로 일본국을 따라 조선을 방문하고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를 출판한 이력이 특이하다. 서양인이 조선인을 보는 보편적인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라고 한다. 영화 [콜 오브 와일드]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인간의 삶을 개에게 투영한 '벅'과 노인 '존'의 교감을 감상할 수 있고, 야성과 이성, 협력과 경쟁, 상생과 탐욕을 담아낸 2020년 디즈니 영화이다. 본능에 따르는 선택은 때로 위기 속에 몰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 직감이 고유의 삶 속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벅은 판사의 집에 애완견으로 티없이 맑고 밝은 천방지축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골드러쉬로 이동 수단인 썰매견이 되어 우여곡절을 겪고 야생의 삶을 선택한다.
벅은 관계하는 대상에게 적절한 공감을 해 주거나 딱 필요한 것을 찾아주는 능력을 가졌다. 목마를 때 동료 개들에게 얼음을 깨서 물구덩이를 파준다거나 노인이 찾던 소중한 물건을 찾아준다거나 썰매견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러한 능력은 야성을 찾고 야생으로 돌아가 무리를 이루는데도 발휘된다. 어떤 야생동물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감각과 체력을 이용하여 그 무리의 위기를 넘게 해줌으로써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기회를 잡는다. 개가 이런 위대한 리더의 행위를 한단 말인가? 과연 동물에게도 德덕이 있을까 동물을 키워보지 않아서 몹시 궁금해지는 장면들이 있었다.
벅을 안락한 판사의 집에서 먹이로 유인해 썰매견 시장에 내몬 사람의 손에는 권력의 몽동이가 쥐어져 있다. 크게 한 방 맞은 개는 두려움으로 몽둥이의 위력을 넘어설 용기가 생기질 않는다. 핵무기가 보유가 그렇고 미국의 총기 소유도 마찬가지다. 무기는 권력이다. 모든 사람에게 무기를 허용하는 것이 평등일까? 핵우산으로 더 이상의 핵확산을 막고 있고, 선진국은 중진국이 한발도 진입 못하도록 경제를 무기로 경계선을 긋고 있다. 벅은 권력의 몽둥이를 강력한 이빨로 물어버린다. 영화처럼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벅에게 따뜻하게 함께 할 새 주인이 나타나길 영화내내 기대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벅이 새 주인을 찾고 있다고 확신마저 헸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온 몸이 느끼고 있었거나, 관습처럼 스몄을 것이다. 길들여진다는것 ! 소설 어린왕자에도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표현이 나온다. 길들여진다는 것, 폭력에, 안락함에, 적응한다는 것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법칙이 아닐까. 운명공동체거나 목적공동체거나 공동체를 유지하기위한 질서, 최소 규칙 역시 길들여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벅은 그 질서의 몽둥이를 물고 휘두르지 못하게 막는다. 길들여진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폭력으로 길들이거나 안락한 먹이로 길들이는 인간 주인을 거부하고 야성의 부름에 귀기울이고 야생, 들개의 모험을 떠난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타인의 인생 차를 얻어타고 편하게 갈 때인가. 내 차로 내가 운전을 할 때인가. 동승자를 태울 것인가. 때론 혼자 때론 같이 경비를 나누며 색다른 재미를 찾을 것인가. 매순간 벅처럼 선택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