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포구(蘇萊浦口)
소래역사관
차이나타운 입구!
짜장면박물관도 있습니다(입장료 1,000원 : 65세이상 무료)
국내 최초의 짜장면집 "공화춘". 1908년 무렵에 지어진 2층 건물
청. 일 조계지 경계 계단.
1884년 각국 공동조계가 형성되면서 일본조계와 각국조계 사이에 건립되었고 현재 까지도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있습니다!(좌측은 淸國石燈 우측은 日本石燈)
자유공원(1888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내 맥아더장군 동상!
제물포구락부[舊濟物浦俱樂部]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및 기타 외국인과 소수의 중국·일본인들이 친목을 돕는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01년에 지었습니다.
벽돌로 된 2층 건물로 지붕을 양철로 덮었으며 내부에는 사교실·도서실·당구대 등을 마련하였고, 따로 테니스 코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14년 외국인 거주지역인 각국조계(各國租界)가 철폐되고 일본 재향군인회관, 부인회관, 광복 후에는 미군이 사용하였습니다. 1953년부터 1990년까지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이용하였고,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인천문화원으로 사용되었으며, 2007년 제물포구락부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삼국지 벽화거리!
소래포구(蘇萊浦口)
바다 건너 시흥쪽으로 가는 작은 도선장이었던 소래포구 지역은 1930년대 염전이 생기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수원과 인천 사이에 협궤철도(狹軌鐵道, 수인선)를 부설할 때, 천일염을 수탈하기 위해 소래역을 만든 이래로, 소래포구는 작업인부와 염분를 실어 나르는 배들이 정박하면서 더욱 활성화되었습니다.
1974년 인천내항 준공 이후, 새우잡이 소형어선이 정박 가능한 소래로 포구를 옮기면서 새우 파시로 발전하여 수도권의 대표적인 재래어항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지리적 근접성, 수인선 협궤열차와 소래철교 등의 요소가 어우러져 지금은 연평균 300만 명의 소비자와 관광객이 찾는 곳이 되었습니다. 소래포구역은 염전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수인선 이용객이 급감함에 따라 1994년 9월에 소래역이 폐지되었고 1995년 12월에는 수인선 영업이 전면 중지되었습니다. 그 이후 수인선 개통요구가 증대되어 2012년 6월 수도권 전철인 수인선이 개통되고 역 명칭은 소래포구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후 온갖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건설했습니다. 일반 철도보다 폭이 좁은 협궤선은 1931년 12월에 수여선(73.4km)과 1937년 8월에 수인선(52km) 2개 노선으로 개통되었습니다. 수여선은 이천과 여주 지방의 곡식을 서울로 나르기 위해 건설됐으며, 수인선은 수여선을 인천항까지 연결하여 군량미와 경기만 염전지대에서 생산된 소금을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설되었습니다.
인천 차이나타운!
1883년 開港(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개항--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이후 인천은 청나라를 비롯한 열강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었습니다. 1884년엔 청국 조계지(租界地)가 설정됐고 이후 러시아, 미국,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이 몰려들었습니다. 1888년엔 최초의 서양식 공원 ‘자유공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1914년 일제강점기에 조계제도가 폐지되기까지 인천은 한반도의 출입구였습니다.
조계는 폐지됐어도 사람들은 남았습니다. 1920년대 ‘청관거리’라 불리던 이곳 차이나타운에 공화춘, 중화루가 들어섰습니다. 이후 1967년 ‘외국인 토지소유권 제한조치’가 실행돼 장사하기 힘들어진 중국인들이 해외로 떠나가기 전까지 차이나타운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북적이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조계지(租界地)---조계란 국내로 들어온 외국인들이 법적으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정해 놓은 구역. 인천항 주변에는 미국, 영국, 청나라, 독일, 일본 등의 조계지가 있었습니다.
첫댓글 역사적인 자료 잘 즐감했습네다.
그리고 수고도 많이하셨네요
인천에 이런 명소가 있었군요. 부산 풍경하고 비슷한점이 많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