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바람이 머슴처럼 월정사 마당을 쓰는 초하루 일주문 넘은 수천의 발원들이 수광전에 모인다 까치가 댓바람에 물어온 화두는 행자가 깨먹기에 단단하다 요사채 주파수에 번뇌가 끼어들면 여여하라는 부처의 눈빛도 잡음이 된다 잘 때도 눈 못 감는 물고기라서 모르는 게 없는 소식통, 내 필생 울력은 청동죽비 되어 중생 홀리는 탐진치를 흩어버리는 것 옥분엄마 법당에 초 밝히고 귀 늘어뜨린 부처님께 큰 절 올린다 오십 년 전 저수지에 잠긴 막내아들, 그날부터 업보 천근 매단 그녀의 어깨는 폐가처럼 기울었다 불목하니 부뚜막에서 조왕경을 지피고 공양간 하얀 입김은 옥분엄마 진한 한숨을 달인 듯 법당 안은 중생들의 초발심이 별식이다 고향이 제각각인 발자국이 무량수전 섬돌에 파도처럼 머물렀다 흘러가면 오대산 전나무 숲이 꽃살문에 잔물결로 일렁인다 엄마 잃어버린 뒤꿈치가 제일 수다스럽다던데 허방 헛디딘 옥분엄마 막내아들은 얼음장 밑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꽃살문에서 하산하는 옥분엄마 등은 오래된 무덤 백팔 배에 졸아붙은 그녀의 뒤꿈치가 독경하는 처마 끝 내 뒤꿈치와 부딪친다 설해목 받치던 귀 밝은 눈이 헛기침한다
[심사평]
말의 어울림이 삶의 각성으로 이어지는 시 장년 이후 세대에게 새로운 문학 등용문으로 등장한 만추문예가 시나브로 사그러들었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다시 뜨겁게 지피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오늘날 ‘문학’은 실로 긴요한 생명수가 아닐 수 없다. 문학의 역할이 ‘즐겁게 하면서 삿됨 없이 교훈을 준다’는 것은 기원전부터 전승된 한결같은 지언(至言)이다. 한데 작금의 시대를 횡행하는 ‘향락적 문화’는 오로지 즐거움만을 주는 데에 맹종하는데, 그게 기쁨의 진한 향기를 세상에 드리우기는커녕 오히려 만족을 얻지 못하는 데서 터지는 별별 분노로 북새통을 일으킨다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그러니 바야흐로 “박제가 되어버린” 문학의 ‘천재’를 부활시켜야만 할 절박한 까닭이 있다. 이제는 즐거움을 곰곰이 되새기며, 깨달음의 알곡들을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이상·李箱)는 훈련이 필요한 때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심사 대상은 141인의 익명의 후보들이었다. 전반적인 인상은 현실에 대한 체험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는 것이고, 그 점에서 감각의 즉각적인 표출보다는 삶에 대한 차분한 관조와 반성이 인상적이었다.
이 중에서 열 사람을 고른 후, 다시 네 분으로 압축하였다. 이 예비 시인들의 대표작을 뽑아, ‘혜령언니의 재봉틀’ ‘도배사’ ‘탁설’ ‘겨울 북성포구’를 최종 후보작으로 상 위에 올렸다. ‘겨울 북성포구’는 바다에 면한 도시의 경관을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다. 세상 너머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포구에 갇힌 삶의 비애를 쓸쓸히 곱씹으며, 산다는 사실 자체의 지난함을 일깨운다. 다만 자연스럽게 쓰인 비유와 표현들이 매우 익숙해서 진한 느낌을 주기에 부족하다. ‘혜령언니의 재봉틀’ 그리고 함께 투고된 ‘봄날’은 재봉 공장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튀는 움직임을 스냅사진처럼 찍어 늘어놓음으로써 삶의 생동을 가쁘게 전달한다. 거기에서 풍기는 땀내는 썩 간지러운 에로티시즘이다. 그 신명이 리듬을 타고 있다. 거기에 삶에 대한 고독한 반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터, 그럼에도 그게 없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느낌은 가득한데 질문이 없다. 이 기분 뭐지? 하는. ‘도배사’는 벽 도배하는 사람의 작업을 촘촘히 묘사하고 있다. 시간을 미세히 쪼개 그 하나하나의 동작을 부조한다. 거기에서 삶의 매순간의 긴장이 선명히 느껴진다. 그러면서 사람의 노동이 광활한 자연의 풍경속으로 투사되었다가 다시 사람에게로 반사된다. 그 묘사가 아주 자연스럽지는 않다. 벽지에서 자연을 보는 건 사람의 환상에 근거한다. 그 환상은 물론 환상일 뿐이다. ‘탁설’은 절에서 봉사하는 옥분엄마의 수행을 보여주고 있다. 아들을 잃은 슬픈 사연이 있고, 그 때문에 절에 들어와 ‘묵언수행’ ‘쇄골공양’을 하는 중이다. 화자(話者)가 따로 있다는 게 이 시의 멋의 출발점이다. 화자는 옥분엄마도 보고 절에 몰려온 중생들도 본다. 중생들의 소란스러움에 깃든 자잘한 욕망들과 그 표현들은 한 때 중생의 일부였던 옥분엄마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렇다고 죽은 아들이 돌아오진 않는다. 화자는 옥분엄마의 마음 다잡는 안간힘을 본다. 그 안간힘을 각성으로 돌리는 게 ‘탁설’이다. ‘탁설(鐸舌)’은 풍경(風磬)안의 방울을 가리킨다고 한다. 각성의 혀끝이다. 묘사와 비유와 서술과 상징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심사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