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믿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살 찢으시고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의 피로 우리 죄가 깨끗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피가 우리의 죄사함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성육신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또 주님은 창조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곧 신적이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오늘 읽은 이 마태복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널 때 엄청난 파도가 일어났는데 그 파도를 잠잠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하는 말이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보기 때문에 이해가 잘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창조주가 되심을 알면 쉽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첫째, 배 안에 계신 주님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마태복음 8:23]
예수님은 제자들과 갈릴리 주변 도시와 촌들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때로는 배를 타고 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주님이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였습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오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참 가다가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라고 했습니다. 큰 놀 이라는 말은 ‘세이스모스’입니다. 다른 성경에는 ‘광풍’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큰 바람이 부니 큰 파도가 쳤다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육군인데 경비정을 몰았습니다. 육군 경비정을 운영했습니다. 바다에 나가면 파도를 볼 때가 있습니다. 파도가 흰색으로 엎어지면서 치기 시작하면 파고를 1m 이상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흰 파도가 뒤집어지는 것이 심하면 굉장한 파도가 되며 배가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고물에 주무셨다고 했습니다. 이물은 배 앞을 말라고 고물은 배 뒤를 말합니다. 배 뒤쪽에서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도 피곤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똑같이 피곤하기도 하고 힘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막 깨웠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그 파도를 꾸짖으시고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이 상황을 우리가 오늘날 적용을 해볼 때 이 배를 우리의 인생이라고 비유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으로 비교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잔잔한 바다를 만나서 평안하게 배를 운행하여 마치 여행하듯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고 구경하고 때로는 바다에서 잡아올린 생선을 회를 쳐서 먹기도 하고 재미있게 다니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마치 잔잔한 바다를 배타고 여행하듯이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엄청난 큰 문제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바람이 부니 파도가 치고 파도가 치니 배가 흔들리고 위험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가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건강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어떤 경우 물질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 자녀 때문에 근심거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사람마다 형태는 다르지만 큰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냥 적당히 힘들 정도면 좀 참고 이겨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내 이성으로 이겨낼 수 없는, 그리고 나의 힘으로 견뎌낼 수 없는 그런 문제가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말하면 전쟁도 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전쟁을 원해서 일어나겠습니까! 적군이 쳐들어오면 나라가 전쟁으로 뒤엎어지는 것입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태복음 8:25]
이 제자들에게 다행인 것은 그 배 안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주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는 주님이 동행하십니까?
교회에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주님과 동행하며 한 주 동안 살 때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사십니까? 비록 우리의 인생이 힘이 들고 우리가 무거운 짐이 있다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이상한 힘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만일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즉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주님을 믿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내 의지대로 내가 스스로 모든 짐을 지고 간다면 그 인생은 너무나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지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주님과 작별이나 하고 잘 계시라 하고 집에 가서는 주님과 아무 관계없이 내 마음대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전혀 주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주님께 구하지도 않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않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이 제자들은 다행인 것은 주님께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태복음 8:25]
우리가 죽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파도가 쳐서 배가 뒤집힐 것 같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마가복음 4:38]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선생님 돌보지 아니하십니까?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삶과 상황이 죽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힘든 적이 있습니까? 혹 지금 또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 구하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마치 주무시는 것 같이 아무 것도 안 하시고 잠잠히 계실 때가 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 간절히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구하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구하여 주실 것입니다. 아멘
둘째, 파도를 꾸짖으시는 주님
제자들이 난리를 치며 주님을 깨우고 또 부르짖으니 주님이 일어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왜 그렇게 무서워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런 상황이 되면 초죽음이 되어 두렵고 떨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 안에 주님이 계신데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신데 그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 떤다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아무리 산더미 같은 파도와 문제가 일어나도 주님은 그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주님은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구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제대로 믿는다면 일단은 평안을 유지하면서 지혜롭게 대처를 하면서 주님께 구할 것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시고 좀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 때만해도 아마 공생애 초기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생님’라고 표현합니다. ‘이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아직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심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생님’라는 히브리어 ‘랍비’입니다. 오늘날 그냥 학교 선생님이나 보통 선생님이라 호칭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스승님’입니다. 스승이 제자들 가르치며 훈련하는 그런 분을 말합니다. 당시 랍비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말씀을 가르치며 가정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예식을 인도합니다. 오늘날 목회자가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예배를 인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신앙을 지도하며 목양하는 목자와 같습니다. 그 시대에는 랍비가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잘 몰랐습니다. 바다를 만드시고 그 모든 만물을 운행하시며 모든 주권을 가지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심을 아직 잘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좀 더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시기를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에 말씀을 드릴 때 로마의 백부장에게는 칭찬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인데 그가 예수님을 믿기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그 분이 말씀만 하시면 병도 고침을 받는 주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파도가 잠잠해지는 그런 분이심을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런 일을 수없이 경험하다보니 나중에 다 알게 되죠.
그리고 예수님이 바다를 향하여 꾸짖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즉시 바다가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 파도도 잠잠해졌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과 동행한다면 만일 우리가 주님께 구한다면 우리의 인생의 큰 파도도 잠잠하게 될 것입니다.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배에 함께 동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불신자입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지 않고 내 인생에 주로 모시지 않는 것은 불신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고 함께 하시는데 주님께 구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심지어 주님이 주무시고 계시는데 깨우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께 구할 생각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부르짖고 기도를 안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배 안에 계시고 주님께 부르짖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 성경 말씀의 제자들처럼 그들은 위험이 생기니 주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일어나셔서 바다와 파도를 꾸짖으셔서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믿음의 성도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성도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내가 두렴없네! 고백하는 성도입니다. 물론 주님께 구하고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상 앞에서 두려워 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입니다. 아멘
결론) 주님과 동행하며 주를 신뢰하는 성도가 됩시다.
우리는 그런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사랑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중심의 성도가 되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충만하셔서 담대하게 세상을 이고 현실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