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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주일 [우리를 위해 넘치도록 능력을 역사하시는 하나님]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엡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기독교는 능력에 기반한 신앙체계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기반한 신앙]
그러므로, 기독교는 신자들의 삶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기본 원칙으로 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신뢰하고, 의지한다.
더불어 하나님이 그와같이 능력으로 도우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능력을 중심에 놓지 않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만일 누가 마치 하나님의 능력을 작게 설명하다거나, 부정하면, 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 교회의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약간이라도 의심할 때, 다 무너진다.
그러므로, 누구도 신자들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축소하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기반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행사한 것 중에 가장 큰 것 중 하나다.
그의 능력의 크심을 대표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우리 죄를 사하셨다면, 결국 우리는 천국에도 이를 수 있다는 결론이 쉽게 나온다.
우리는 오늘 천국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다.
왜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죄사함받았기 떄문이다.
이런 죄사함의 놀라운 능력은 그 규모와 위력 자체로 우리를 하늘에 능힐 올릴 수 있다.
이치상으로도 이는 분명하다.
만약 우리 중에 천국에 결국 가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사함을 받은 것을 의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함을 받아서, 그것이 이루려는 효과가 그 사람에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애초에 사하실 때, 큰 위력으로 하셨다.
그래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었다.
오직 하나님만 영원토록 그 때만 한번 할 수 있는 것을 하셨는데, 지옥갈 자를 구하신 것이다.
말도 안되는 엄청난 능력의 결과다.
지옥에 갈 자를 끌어내는 것은 단지 완력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을 살려서, 이제는 천국에 이르도록 똑같은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있다면, 애초에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사람을 죄에서 사함받게 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의로운 영혼으로 인정받게 했다는 것인데, 엄청난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지옥에 들어갈 죄인이다.
흙에서 나왔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받으셨던 의로움 속으로 우리를 불러주셔서, 인정하셨다.
이 자체가 엄청난 역사다.
이 능력이 우리 삶속에서 계속 역사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가는 길에는 기도로 간구하고, 그 간구도 응답이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기도의 응답이 자연히 따라온다.
우리 기도의 응답을 보고,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잘 인도받는지 알 수 있다.
기도는 마땅히 응답되어야 하는데, 설령 우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제 능력을 베풀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응답을 받든 아니든, 여전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능력으로 계속 천국으로 견인하고 계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듫이 이런 방대한 시스템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판단한다.
자기 마음이 기준이다.
기도 응답이 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은 한계가 있다든지, 하나님은 작은 일은 놔두신다든지, 하지 못할 태도로 대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과연 도우시려고 하기는 한걸까.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완전히 반대로 나가는 질문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도우신다고 시작했기 때문에 나오는 부작용이다.
교회 나오니까, 무조건 도우셔야 하는데, 왜 안도우시지.
이것은 하나님이 부당하게 오해받으시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악인은 돕지 않으신다.
[자신을 돌아보지는 않고, 베푸심만 바라는 태도]
많은 신자들이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이 베푸시지 않는다고만 한다.
응답이 없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다든지, 제한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약속하셨는데, 왜 도우시지 않지.
이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그리스도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서 있다.
조금이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대해, 능력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좋지 않다.
절대 덕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이 없다는 것은 모름지기 우리 자신에게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정욕으로 간구하고 있을지도]
어떤 자격문제 때문에 그런 결과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응답받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성이 바뀐 것도 아니고, 쉬시는 것도 아니고, 돕기를 거절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도우시고 계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단 하루도 지날 수 없다.
이 사실이 우리 자신의 삶의 정체를 제대로 말하고 있다.
그런 진리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우리 영혼이 갈 길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영혼은 방황한다.
주님 만나던 첫날부터 우리는 주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이탈하는 것이다.
우리의 간구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의 영적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무슨 성취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룬 큰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정욕의 인간이 갖고 있는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는 성취하면 인정받고, 보람을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성취의 크고, 작음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신다.
큰 성취를 생각하니까, 직분을 갖고 싸운다.
또, 내 간구가 응답되지 못하는 것은 내 열심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가장 근본의 문제는 회개치 않은 마음이다.
회개치 않은 마음은 기도도 정욕적으로 하려고 한다.
정욕에서 나온 생각으로 기도를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은 절대 응답이 있을리가 없다.
또, 봉사하거나 무엇을 해도, 나를 채워주고, 내가 개운해져야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나는 못채우고, 남을 채우는 것이 봉사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자기 구주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상호 신뢰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멀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 문제는 내가 성취했느냐, 아니냐, 열심이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과거 세상에 살던 가치판단 기준에 의해서, 나의 신앙의 가치를 평가할 것이 아니다.
바탕이 바뀌었는지, 아닌지에 있다.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결단]
십자가에 두 강도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계속 예수님을 모욕했지만, 하나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그는 주님께 자기의 모든 운명을 맡겼다.
십자가 위에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은 시간이었다.
숨을 쉬기 위해, 고통을 참고 다리를 일으키면서, 몇번 반복하고 숨이 끊어질 지 모른다.
거기에 다른 선택이 없다.
십자가에서 내려가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희망도 없다.
거기가 끝이다.
그 격정의 순간에, 주님은 의인이시다. 이분은 잘못한 것이 없다. 나를 기억하소서.
자기를 맡기는 것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당신이 나를 버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소서. 그러나,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데려갈 것이니, 해보시오가 아니라, 그를 신뢰하고, 소망을 두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몇십년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 사건은 우리 인생을 그대로 농축해서, 한 장면으로 몰아놓은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결단이다.
우리 앞에 여러가지 선택이 있다고 볼 수 없는 급박하게 진행되는 마지막 순간이 있을 뿐이다.
이 분이 나를 도와주셔야 한다.
나를 받아주소서. 소망으로 나가야 한다.
[더 크게 더 근본적으로 도우실 것]
신앙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변해야 하는 기본 자체를 간과하고, 왜 도와주시지 않을까.
마치 하나님을 도우시는 기계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는데, 기도의 제목으로 올린 것만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한다.
구하지 않는 것은 도와주시지 않을까봐, 세세히 제목을 적는다.
그러다가 깜빡하고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안해 한다.
간구하지 않았으니, 이미 글렀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간구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필요를 아신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지 않은 것 조차도 풍성히 베푸신다.
때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고, 구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런 것까지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정말 온전한 곳에서 이탈되지 않게 하자.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의 하시던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
온 사랑을 다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 땅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실 것이다.
우리가 신뢰할 것은 하나님이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자기 영혼의 깨끗함도 지키고, 주변에도 옛사람의 어두운 생각들이 오염시키지 않게 하자.
[넘치도록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라]
엡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를 충만하게 하기를 원한다.
여기가 기도의 마지막이다.
엡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이제는 넘치도록 역사하실 분에게 영광을 돌린다.
갑자기 새로운 패턴의 글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예배드릴 때, “이제는”이라고 말하면서, 축복하는 내용같은 것이다.
기도로 가장 큼직한 요구로 간구했다가, 이제는 영광돌리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우리의 은혜의 시간들을 한마디로 농축해서 결론 짓는다.
엡3:20-21이 그렇게 하고 있다.
가장 골자적인 진리로 기원을 올리면서, 영광돌린다.
우리 말에는 없지만, now onto him으로 되어있다.
그에게 있을지어다.
본문에 더 넘치도록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바울이 만든 단어다.
여러단어를 합성해서, 만들었다.
평범해 보이지만, 원어는 상당히 파격적인 단어를 쓴 것이다.
많은 것보다 더 무한하게.
결국 영광송, 찬미,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베푸시는 무한한 능력에 대해서 인식하고, 감사하는 내용이다.
두번째로는 그 기도를 듣고 있는 성도들에게 함께 참여할 것을 유도하고 있다.
영혼들이여, 이 기도에 대하여, 그들의 화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20절의 내용에서 우리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 얼만한 능력으로 지원하시는지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
[간구한 것을 행하실 수]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한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둘째, 간구한 것을 넘치도록 행하실 수 있고,
셋째,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고,
넷째,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을 넘치도록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행하실 수]
[생각하지 못하여 구하지 않은 것도 행하실 수]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서 구하지 않은 것까지 넘치도록 행하실 수]
요점은 생각하지 않은 것까지 넘치도록, 생각할 수 없는 규모로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이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한다.
이것이 요점이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역사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초월성을 갖고 있다.
우리 입맛에 맞추지 않는다.
우리가 제한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까지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도대체 어떤 능력을 의미?]
엡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능력은 무엇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다.
부족하면, 부족한 것을 채우신다는 의미도 있다.
속사람이 완전히 생기도 없고, 폐기도 없고, 자신의 구실도 못할 때, 살아나도록 능하게 하셔서, 일으켜 세우셨다.
능력을 준 것이다.
그의 부족한 것을 채우셨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능력의 동사형은 더 파워풀하다.
우리는 능력에 힘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히 하실 것에 힘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훨씬 강력하다.
이미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대로.
놀라운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엄청난 능력으로 계속 돕고 계셨다.
이미 풍성한 것인데, 그는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다.
앞으로 능히라는 표현을 할 때, 굉장히 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의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우리를 위해 넘치도록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를 돕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이 능력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시는 능력.
우리도 살리시고, 하늘로 올리는 능력.
수천년간 조화가 되지 않았던 이방인을 통해 교회를 세우신 능력.
바울을 통해 계시를 주신 능력.
엡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그 능력은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했던 능력이다.
그 능력이 오늘 본문 엡3:20에 나오고 있다.
같은 능력이다.
이미 능력이 역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은 우리 삶속에 이미 유효하다.
[경험에 근거한 확신/믿음]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바울은 말만하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힘을 주고 있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나는 구원받으라고 촉구하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이 가서 말을 전하고, 사람의 말로 한번 외치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계시다.
저들을 회개시키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할 때, 실수하지 않도록 열심히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계속 지원되는 것이 잘못될까봐.
내가 합당치 않아서, 잘못될까봐.
그래서, 참고 열심히 한다.
고후6:3-7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말씀 전하는 것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이루시는 일을 실패한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있어서, 통찰력이 전혀 다른 사람인 바울은 이미 하늘을 봤기 때문에, 보는 시각이 다르다.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잘 알고 있다.
그가 자기 일을 하다보니, 하나님의 능력이 받쳐주고 있었다.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사람이 하면 안될 것인데, 이루어지더라.
거기 하나님의 힘이 역사하더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명하는대로 사역을 할 것이다.
나는 이 사역을 하지만, 뒤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 일이 능하도록 지원하고 계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현장에서 일할 때, 거기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롬16:25-26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능히...굉장히 큰 능력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유1: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가운데에서도 계속 역사하고 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단계를 먼저 밟아야]
그러나, 문제는 있다.
하나님이 다 능력을 주신다며?
하나님은 복종하는 자에게 다 이루어주신다.
하나님은 능하시고, 지극히 풍성하게 행하실 수 있다.
구하는 것도, 구하지 않은 것도, 더 넘치게 하실 수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도우심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자가 있다.
신앙의 발전하는 여정을 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속사람이 강건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내주하시고, 사랑을 계속 행해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갖는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하나님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진다.
그런데, 이런 것을 다 건너뛰고, 믿음이 있으니까 다 된다면서, 해달라고 하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았는데, 다른 말로 회개하지 않은 심령인데, 들어주시겠는가.
사랑도 하지 않고, 이기심이 가득한데, 들어주시겠는가.
단계를 밟지 않고, 갑자기 뛰어들고, 왜 안되느냐고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우리 가운데서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회개한 자라면, 바로 예수 믿는 자다.
주로 인하여, 자기를 비우고, 주님으로 채우려고 하는 자들.
요14:12-1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나를 믿는 자는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
그냥 믿는다고 다 된다고 하면 안된다.
과정을 다 지나야 할 것이다.
주께서 명하시고, 사도들을 통해 가르치신 것을 다 빼놓고, 그저 예수 이름으로 한다, 주세요 하면 염치도 없다. 되지도 않는다.
여기서 요점은 속사람을 살리고, 예수께서 편안히 거하시는 것, 이런 것을 절대적으로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인격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첫단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요구할 수 없다.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사도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도들이 자기처럼 하나님의 능력 안에 들어오도록 유도한다.
[내 믿음이 너희에게도 있어, 너희도 영광을 돌릴찌라]
엡3:14-15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바울 자신이 기도를 시작했다. 대신 기도해주었는데, 20절에서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을 넘치게 하실 이에게 라고 하면서, 듣는 성도들도 함께 불러들이고 있다.
바울이 확실히 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시하면서, 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바울이 하는 간구를 그들도 하기를 원하고, 바울이 가졌던 변화를 그들도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성락인들도 다 그렇게 하기 바란다.
하나님께 무례하게 다 해준다고 했잖아요 하지 말자.
내가 널부러지고, 끝이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의로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가 우리를 능력으로 지원하기 때문에, 그에게 나를 맡기고, 나를 그로 가득 차도록, 속사람을 키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온통 하나님께 전념하기 바란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기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자.
능력의 하나님.
내게 처음부터 예수에게 베푸셨던 능력을 베푸사, 여기 있게 하신 하나님.
매일 대기하고 계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
앞으로도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당신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주여 나를 받아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