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10)
3 “Happy are those who know they are spiritually poor;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them!
4 “Happy are those who mourn;
God will comfort them!
5 “Happy are those who are humble;
they will receive what God has promised!
6 “Happy are those whose greatest desire is to do what God requires;
God will satisfy them fully!
7 “Happy are those who are merciful to others;
God will be merciful to them!
8 “Happy are the pure in heart;
they will see God!
9 “Happy are those who work for peace;
God will call them his children!
10 “Happy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they do what God requires;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them!
*역사관
사람을 막론하고 복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여덟 가지의 복을 나열하셨습니다.
먼저 복의 현실을 이르시고 그 복의 근거를 제시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상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난의 현실을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형태가 젓가락처럼 짝을 이루며 여덟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이 사람 눈에는 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암담한 현실을 나열하시며 복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인의 독특한 역사관입니다.
우리 현실에 대한 이해가 철저히 하나님의 평가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현실의 복은 미래의 하나님의 보상에 근거합니다.
지금은 죽을 것 같아도 그 덕에 영생을 보장 받는 것이 복입니다.
병상에서 죽었다 살아났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 고난이 유익이었다는 간증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난함, 슬퍼함, 온유함, 애통함....... 의를 위해 당하는 박해가 복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의 차이는 세상은 현실의 문제가 현실에 그칠 뿐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해석에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당장 현실의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현실 문제가 여러분 미래의 하나님 나라 보장을 이릅니까?
내 현실이 곧 하나님의 문제입니까?
*경제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3 “Happy are those who know they are spiritually poor;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them!
미국에서 회사 다니는 친구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 가면 화장실을 제대로 못 간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똥 냄새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효식품을 먹기 때문입니다.
한번 볼일을 보고 오면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 화장실 다녀왔지!
한국 사람은 피부 색깔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믿는 사람이 세상과 다른 첫 번째의 특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난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눈뜨면 직장으로 갑니다.
해지면 집에 돌아옵니다.
일 년 중 300번 정도 반복되는 일입니다.
이런 노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 벌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마음이 가난하다니 겸손을 두고 하는 말인가?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다루는 주제는 겸손이라는 성품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 몹시 가난함(πτωχοὶ)의 경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같은 본문을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제자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6:20)
즉 가난의 경제 현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와 헤롯 정부에게 심하게 약탈을 당했습니다.
그 비참함 때문에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졌습니다.
거기에다 대고 예수님은 가난을 복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이런 대안 없는 경제 현실에 놓였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아이고, 하나님!”
가난이 그렇게 간절함으로 하나님 이름을 부르게 한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얼마나 부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래서 가난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불러본 적이 없는 하나님!
당시의 가난(πτωχοὶ)이란 수탈이나 사회적인 억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경제 현실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자들에 대한 변호사이셨습니다.
이런 가난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을 애급에서 광야로 부르셨습니다.
그 광야에는 오직 모래바람뿐이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또 다른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하루 이상의 음식을 남겨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고, 하나님!
그들이 40년 광야길을 마친 다음이었습니다.
2.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3.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다.
4.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의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이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다.(신8:2-4)
바로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하고 부르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루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40년 동안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두 주인
믿는 사람에게 재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6:24)
주님은 사람을 지배하는 두 주인을 소개하시고 있습니다.
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주인은 재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두고서 그것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 반대였습니다.
재물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은행 카드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제 마음대로 꺼내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사람을 제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말세에 일어날 일입니다.
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딤전6:5)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그 수단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이렇게 재물이 사람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재물이 몰아낸 것입니다.
이 땅의 썩을 것을 차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눅12:15)
재산이 생명을 보장하는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spiritual)이 가난
마태가 마음(spiritual)이라는 수식어를 가난 앞에다가 쓴 것입니다.
그렇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가난과 구분을 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지는 가난을 두고 복이라고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했다가 몰매 맞는 것 아니야?
그런데 현대의 교회는 물리적인 부자를 가난한 무리에 집어넣기 위해 이 수식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이 맞다면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는 셈입니다.
부를 챙기는 사람도 복의 무리에 집어넣기 위해서 이 수식어를 애용하는 것입니다.
같은 산상수훈 중에 예수님을 이 재물을 두고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재물의 위치입니다.
그 재물이 썩지 않는 장소 하늘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재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너희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6:19,20)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쌓을 수 있나요?
33. 너희는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눅12:33)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십 수백억의 저택에 주식에 기업에.......
제 소유욕과 사치를 위해 있는 그 재물의 위치가 신앙의 정체성을 이르는 것입니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6:21)
이 세상에다가 재물을 가득 쌓아 두고는 영적인 가난을 운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얄팍한 술수가 하나님께는 통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보상
가난에 처한 사람은 걸음마다 “아이고, 하나님!”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에 속해(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them!) 있다는 증거입니다.
가난이 악몽이 아니었습니다.
당장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는 서 있을 근거를 잃은 것입니다.
그 위기감에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다른 복들은 미래에 그들에게 주어질 보상을 이릅니다.
하지만 가난에 대한 보상은 그들에게 현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이 가난의 복과 여덟 번째의 복에 대해서만큼은 현재 하나님의 나라로(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them!) 보상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belongs 현재형)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0 “Happy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they do what God requires;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them!
물론 나머지 여섯의 복들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will)
이런 가난의 현실을 두고 복이라니!
그들 안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며 수용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그 성령을 통해서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 안에 속해 있으니 그 가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슬픔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4 “Happy are those who mourn;
God will comfort them!
예수님은 슬픈 현실을 두고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말이 되나요?
슬픔이 복이 되는 근거는 미래에 하나님께서 위로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석은 이하의 다른 복들이란 가난의 경제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 복음을 보면 이 주석이 이해가 됩니다.
21.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눅6:21)
누가복음은 나머지 여러 복을 굶주림으로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
성경 해석에 대한 언급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태의 말씀과 누가의 말씀을 마치 딴말처럼 해석하는 사람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누가는 가난의 현실을 말씀하지만 마태는 가난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딴말입니다.
마태와 누가가 보는 시각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르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수식어 하나를 가지고 딴말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의 해석과 싸우신 것입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마12:11,12)
하나님께서는 세상에도 통하는 선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말씀을 철저히 종교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안식일 규례를 환자들에게 잔인하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슬픔을 당하는 그 사람을 그들의 안식법을 위배하면서 치료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해석을 꾸중하셨습니다.
*온유(humble)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5 “Happy are those who are humble;
they will receive what God has promised!
예수님께서 탁월하신 온유(humble)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5.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2:5-8)
지금 성경은 예수님께서 본래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일어난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humble)를 의지적으로 실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온유를 실천하시는 일이 그냥은 안 되셔서 겟세마네를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온유(humble) 실천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 온유의 실천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를 실천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what God has promised)을 주실 것입니다.
땅이라는 주의 말씀에 귀가 번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부동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그 땅의 첫 번째의 특징은 거기에 독재자 바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동산을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입니다.
지파마다 그 구역을 정해주셨습니다.
그 땅은 다른 지파에게 넘겨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거기에다가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경계석(boundary stone)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14. "너희는, 주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어 차지한 땅에서, 이미 조상이 그어 놓은 너희 이웃의 경계선을 옮기지 말아라."(신19:14)
그 경계석을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어떤 식이든지 땅따먹기를 할 수 없다!
*의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6 “Happy are those whose greatest desire is to do what God requires;
God will satisfy them fully!
제가 처음 달내 교회에 왔을 때입니다.
교회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교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노회에 갔더니 재정 지원 받기를 포기하라는 각서를 요구했습니다.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 때 코로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굶어 죽게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에 사람들은 죽자사자 소유를 챙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소유를 추구하듯이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를 목적으로 삼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당연히 불의를 미워할 것입니다.
의에 갈급한 사람은 불의의 냄새만 나도 구토하는 사람을 이르는 것입니다.
계엄이 뭔 줄 아십니까?
사람 죽이고 고문하는 일입니다.
그 불의와 교회가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입니다.
이렇게 먹을 것 챙기지 않았는데도 교회가 얼마 전에 승합차를 샀습니다.
저는 여태껏 굶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당장에 죽을 것 같아서 불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지금 다 감옥에 가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배부르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자비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7 “Happy are those who are merciful to others;
God will be merciful to them!
주님은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모아두시고 그들의 자비를 물으셨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들은 주님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무자비한 자들은 왼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들은 염소들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42.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마25:42,43)
물론 자비를 보인 사람들은 주님이 주님의 오른 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35.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마25:35,36)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구별이 주님을 제대로 대접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 염소들은 주님을 대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해 예수님은 이 답을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45. 그 때에 임금은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마25:45)
주님의 지적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비 행위란 종교적 숙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보고 그 때 주님에게만 대접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 약자만 보면 가져다가 퍼주는 그 자비심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약자 중에 주님께서 계셨다는 것입니다.
실은 그 약자들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남의 고통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남은 죽여도 된다는.......
마귀들의 속성입니다.
*구원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푼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역시 자비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었던 그 양의 무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25:34)
자비를 베푼 자들은 주께 자비를 얻을 것입니다.
즉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8 “Happy are the pure in heart;
they will see God!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 복이란 첫째 돈 많고
자식을 잘 두고
이빨이 좋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은 속마음을 두고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존재입니다.
그 마음이 깨끗한 여부입니다.
앉은뱅이를 벌떡 일으킨 부흥사의 속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성 문제와 돈 문제로 음탕하고 음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을 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성 문제와 돈 문제로 그의 종말을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는 그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 마음이 깨끗하냐의 문제입니다.
방언 예언 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깨끗하게 되기를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세례를 베푸는 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역시 세례를 베푸는 자라고 했습니다.
세례란 사람 마음을 깨끗하는 예식입니다.
다만 본인의 세례는 한계를 가질 것입니다.
그는 물로 씻는 세례를 베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불과 성령을 가지시고 사람 마음 속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확 태워버리실 것입니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3:11)
맞습니다.
신앙은 마음을 깨끗게 하는 일입니다.
봉사한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일이 아닙니다.
밥하러 다니고
주차장 정리하러 다니고....... 그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합당한 자녀를 만드는 일입니다.
마음을 깨끗케 하는 일입니다.
*평화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9 “Happy are those who work for peace;
God will call them his children!
당장에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우리는 지금 교회 장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돈도 벌러 가고, 놀러 가고, 또 운동도 하러 가고.......
지금 우리는 평화를 이루신 예수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을 받은 것입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엡2:14-16)
이렇게 교회 장의자에 앉아서 평화를 위해 일하신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배움이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those who work for peace)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의 정체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을 아실 것입니다.
손에 십자가 깃발을 들었지만 막상 사람 죽이러 간 것입니다.
그들은 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평화를 이루는 일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의 자녀
그렇게 평화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라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모든 자녀는 부모의 DNA를 타고 납니다.
만약에 그가 주님의 자녀라면 그에게 평화의 DNA가 드러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그를 통해 드러났으니 그는 자녀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박해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0 “Happy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they do what God requires;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them!
지금 박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을 두고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죄를 지어서 당하는 박해가 아닙니다.
의(what God requires)를 행했는데 터무니없이 불의한 자로 취급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통하셨던 그 십자가의 현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스가랴가 이 상황을 예언했습니다.
10. 그러나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 곧 그들이 찔러 죽인 그를 바라보고서,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며, 맏아들을 잃고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다.(슥12:10)
예수님께서도 이 스가랴의 예언을 인용하셨습니다. (요19:37)
그런데 이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리스도를 찌른 자가 그리스도의 찔림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찌른 그리스도를 보고 회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박해를 가한 자가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를 하고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를 우리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였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자를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행7:60)
예수님께서 하셨던 바로 그 기도를 스데반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돌로 쳐서 죽이던 자가 스데반의 기도를 통해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 일은 사람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었던 것(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them!)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그 복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예수님을 찌른 바울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그가 찌른 자 예수님을 보고 회개했습니다.
찔림을 받은 예수께서 그를 찌른 자를 사도로 불러 주셨습니다.
바울도 사람들에게 수없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그가 죽음으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의 찔림이 바울에게 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에 속해 있었습니다(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Pau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