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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너무 많은 '非'들-이수명 작품론
이영숙
등단한 지 17년 만에 출간된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2011)은 이수명의 다섯 번째 시집 이다. 그로부터 10여 년간 그의 시집 목록에는 『마치』(2014)와 『물류창고』(2018), 『도시가스』(2022)가 추가되었고, 그는 여덟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 되었다. 이 글에서 다룰 다섯 편의 시는 모두 『도시가스』에 실렸는데, 최근작을 논하기 위해 10여 년 전에 출간된 시집의 표제를 호출한 이유는 ‘비’ 때문이다. ‘비rain’가 아니라 ‘비非’로 읽었을 때 첫 시집에서 여덟 번째 시집까지를 관통하는 전류가 느껴진다. 정형외과의 물리치료사가 통증 부위에 댄 전압장치의 강도를 조절해주듯 각자 체질에 맞는 정도만큼 우리는 이렇게 시적으로 감전되지 않았던가.
통상적으로 시 다섯 편이라는 분량은 시집 한 권에 비해 주어지는 정보가 당연히 적다. 따라서 시인의 시세계에 대한 전면적 통찰이나 풍부한 논의의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 시 다섯 편에는 시인의 선택 의도를 내재한 시적 서사가 ‘있고’, 다섯 편을 하나로 꿰는 의미망이 ‘있으며’, 이를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는 지배적인 인상뿐 아니라 서정적이라거나 실험적, 실천적이라는 장르적 특성, 화자(주체) ̄대상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시의 구성요소가 활용되는 방식 등이 일정 부분 드러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수명에게서는 이런 ‘있음’들이 ‘없음’으로 나타나며, 어떤 창작방법론에도 묶이지 않는 특이점이 지속되어 왔다. 반면에 이수명의 시에는 ‘언제나 너무 많은 非들’이 있어 왔고, 현재도 그렇다.
꿈에 네가 나왔다.
네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 버렸어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에는
누더기 옷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꿈속을 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가서
너무 쓸쓸해서 땅에서 돌멩이를 주웠는데
빛을 다 잃은 것이었다.
돌벽 앞에 네가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피하라고 했는데
너는 집을 나와서 천천히 산책 중이라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아주 짧은 꿈이었다.
 ̄「꿈에 네가 나왔다」 전문
꿈에 나타나는 표상은 대체로 단편적으로 구성되나 인과적이지 않으며, 현실의 체험이 융합하고 치환되거나 상징과 형상화의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A가 B라는 인물로 인식되거나 C라는 사건이 D라는 사건과 겹쳐져도 꿈의 주체는 의구심을 갖지 않으며, 대화나 설명이 없어도 대상의 의도를 그대로 파악한다. 심지어 보라색 물방울에 쫓기거나 세발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 때조차 그지없이 현실적이다. 꿈을 묘사한 시가 환상이 아니라 초현실에 가까운 것은 그것이 현실 너머의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관습과 교육과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와 인간의 경향성 등으로 세속 현실이 오히려 왜곡된 상[歪像]으로 충만한 환상이라고 했을 때, 꿈은 왜상 없이 순수한 현실이 된다. 꿈꾸는 당사자인 꿈의 주체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꿈속에서 행위한다. 내가 누구의 공포심과 불안과 슬픔을 목격하거나 가위에 눌리는 것을 보지 않고, 공포심을 느끼고 불안하고 슬피 울거나 적극적으로 가위에 눌리는 것은 바로 꿈꾸는 나 자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은 피동이 아니라 능동이다.
이 시에서 ‘나’는 점차 비(非)인칭화 되고 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 버렸어”라고 ‘너’에게 감정을 이입하던 ‘나’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너무 자연스럽게” 나를 지나치는 ‘너’로 인해 “너무 쓸쓸해서” 기분이 “빛을 다 잃은” “돌멩이” 같아진다. 이로 인해 앞의 “누더기가 되어 버”린 주체가 되짚어지는데, 누더기를 입고 있는 ‘너’로 인해 감정이 누더기 같아진 것은 ‘나’이며, 이 밀착된 능동의 정서가 점차 ‘너’를 능동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피동으로 물러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는 인식을 하면서도 ‘나’는 “돌벽 앞에 네가 한동안 서 있”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 뭔가 위험하다고 느낀 것과 동시에 “피하라”고 하지 않고 말이다. 달려가 ‘너’를 돌벽으로부터 떼어낼 수도 있었는데 ‘나’는 그러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한 것이다. 이미 ‘나’는 피동이 되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걸맞게 “너는 집을 나와서 천천히 산책 중”이라고 말한다. 이런 어긋남에 의해 꿈속 주체는 ‘너’라는 2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이되고 ‘나’는 인칭을 잃는다. 능동이 사라진 텅 빈 꿈은 그러므로 “꿈에 네가 나”온 “아주 짧은 꿈”으로 간략하게 정리된다. 왜상적 현실에서의 피동과 어긋남이 꿈이라는 순수한 현실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 이수명의 시에서 그 테마는 사실 반복적이다.
짐을 가지고 오지 마
짐을 항상 너무 많이 가지고 오잖아
짐을 둘 데도 없잖아
거리를 걸어가다 말고 같은 시간 같은 길
짐을 내려놓고 우리는 또 말다툼을 한다.
장소부터 말해봐
어느 국수집으로 가는 건지
아까 본 베트남 쌀국수는 사거리 번화가에 있고
베트남 쌀국수는 어디에도 있다. 다음 골목에도
베트남 쌀국수 계속 베트남 쌀국수
어느 집으로 갈 건지
베트남 쌀국수 집엔 사람이 많아
항상 많잖아
테이블이 몇 개 붙어 있는 좁은 집인데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잖아
너는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는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데를 검색해보자
네가 좋아하는 숙주나물을 잔뜩 얹어주는 곳
우리는 설익은 나물을 씹으며 평소의 표정을 지을 거야
먼 곳을 바라보며 가능하면 보편적인 표정을
보편적인 나물 앞에서
근데 거기는 자주 갔던 곳이야
자주 만나지도 않았잖아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길에서 맞춰지지 않는 말을 계속한다.
번갈아 대화를 놓친다. 대화가 아니라 애원을 한다.
내일 가자고 했잖아
거기는 아름다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잖아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가스통을 싣고 달려간다.
하나 둘 셋 넷
가스통을 너무 많이 싣고 간다.
위험한 오토바이 위험한 가스통
서울은 거의 모든 가구에서 도시가스를 사용한다.
 ̄「도시가스」 전문
표면적으로는 음식점을 가기 위해 만난 ‘너’와 ‘나’. 그러나, 어긋남은 처음부터 발생한다. 목적과는 달리 ‘우리’ 중 하나는 “짐을 항상 너무 많이 가지고 오”며, 마치 데자뷰처럼 “같은 시간 같은 길/ 짐을 내려놓고 우리는 또 말다툼”을 한다. 게다가 “어느 집으로 갈 건지” 선택은 계속 유예되고, “베트남 쌀국수는 어디에도 있”어서, 혹은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로 선택이 유예될 핑계는 계속 늘어난다. 지친 “너는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고, ‘나’는 “여기서 가장 가까운 데를 검색해보자”며 “네가 좋아하는 숙주나물을 잔뜩 얹어주는 곳”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기지만, “근데 거기는 자주 갔던 곳이야”라고 ‘너’는 반대하고, “자주 만나지도 않았잖아”라며 ‘나’는 반문한다. “내일 가자고 했잖아/ 거기는 아름다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잖아”라는 대목에서 어긋남은 정점에 달한다.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길에서 맞춰지지 않는 말을 계속”하고, “번갈아 대화를 놓”치는 그곳은 과연 어디일까. 또한,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채 “설익은 나물을 씹으며” “평소의 표정”을 ‘지을’ 가능성만 있는 “아름다운 지역”은 어디일까.
앞서 꿈속을 ‘순수한 현실 공간’이라 했으니, 우리가 사는 이곳을 ‘세속의 현실 공간’이라 칭하기로 하자. “오토바이가” “가스통을 너무 많이 싣고” “달려”가는 이곳의 세속적 풍경을 통해 우리는 역으로 ‘너’와 ‘나’가 결코 도달하지 못한 채 “같은 시간 같은 길”에 계속 머무는 저곳을 순수한 현실 공간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우리의 어떤 체험은 심연에 자리잡은 채 꿈속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반복적으로 재생되지 않던가. 시험을 보러 가야 하는데 신발이나 교복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어떤 사유로 군 제대가 계속 미루어지는 악몽 따위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시적 공간이 꿈속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꿈속으로 상정되는 어떤 공간이 이수명의 시적 공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 실마리는 “보편적인 표정”, “보편적인 나물”에서의 ‘보편적’이란 현상과, “모든 가구에서 도시가스를 사용”하는 보편적 상황에서 ‘가스통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일부 사는’ 목적지로서 “아름다운 지역”이 암시하는 비(非)보편적인 장소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비(非)현실적이고, 비(非)상식적인데 순수한 현실 공간은 아닌 그런 시적 공간. 같은 제목을 사용하고 있는 다음 시에서 ‘비(非)’의 영역을 좀 더 구체화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썩은 광장을 따라 걸었지
썩은 낙엽 썩은 사과가 굴러다니고
게임을 난 할 줄 모르지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너는 말한다. 나는 배워야 한다. 두드리고 계속 두드리는 것을 새로운 공격을 하는 것을 그래, 각오를 다진다.
장갑을 벗고 흰 장갑을 벗고 장갑을 치우고 손을 치우고 배워야 한다.
바닥에 한 사람이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있다.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 몇 장은 둥근 맨홀 뚜껑으로 굴러가서 뒹군다.
맨홀 뚜껑에는 도시가스라 씌어져 있다. 뚜껑을 열지는 않는다.
가스가 있다. 우리에게는 가스가 있다. 가스는 색깔이 없고 냄새가 없고 무게가 없고 가스는 소리가 없고 보이지도 않고 그러나 가스는 부드럽고 가스는 온화하고 가스는 은은하게 순조롭게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고 가스는 우리를 어루만지고 우리의 생각은 온통 가스로 가득 차 있다. 도시가스 보급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산책 같은 건 필요 없다. 산책길에 해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소용없다. 해는 우리가 인사도 하기 전에 빨리 떨어지고
저기 광장의 끝이 벌써 보인다. 끝을 향해 제대로 나 있는 길 반듯한 길을 따라 걷는다. 썩은 광장에 당신은 서 있어요 입에서는 태만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너는 반듯한 이마를 들고 이번에는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화면을 두드리지 말라고 썩은 손가락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사용하지 않는다. 새로 나온 게임을 배우지 않는다.
 ̄「도시가스」 전문
네 명의 등장인물이 있고, 다섯 개의 공간이 등장한다. 썩은 광장을 따라 걸어가는 나, 게임을 배워야 한다고 나에게 강요하거나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너, 신문지를 깔고 누워있는 한 사람, 길 끝의 썩은 광장에 서 있는 당신이 그들이다. 그리고 썩은 광장, 게임 속 공간, 노숙자[떠돌이]를 암시하는 인물이 누워있는 공간, 도시가스 표시가 있는 맨홀 뚜껑 근처, 끝을 향해 제대로 나 있는 반듯한 길이 또한 그곳이다. ‘나’는 ‘썩은 광장’과 연루되어 있고, ‘너’는 ‘게임의 가상공간’과 ‘반듯한 길’에 연루되었으며, ‘한 사람’은 ‘썩은 광장’과 ‘도시가스’를 매개하는 일에, 그리고 ‘당신’은 ‘썩은 광장의 끝’에 연루되어 있다.
둥근 형태로 조성된 세속의 광장을 떠올려보자. 광장의 가장자리에서 직선거리로 중심부를 지나면 광장의 끝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썩은 광장”에서 출발하여 “썩은 광장”의 “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당신”과 같은 부류다. 그러나 “게임을” “할 줄 모르”는 ‘나’에게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너’의 말을 거부하지 않고 ‘나’는 “그래, 각오를 다”지기까지 한다. 가상세계에 익숙해진다는 건 도시가스를 사용하는 일이나 “반듯한 길을 따라 걷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적 삶의 일반화된 패턴이기 때문이다. 세속 공간을 지배하는 것(“도시가스 보급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은 ‘가스’처럼 색깔도, 냄새도, 무게도, 소리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온화하고, 은은하고, 순조롭게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고, 우리를 어루만지며, 우리의 생각 속에 가득 들어차는 그 무엇이다. “산책”하면서 “해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소용없다”는 부정적 견해는 “해는 우리가 인사도 하기 전에 빨리 떨어”진다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연유한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르기 전에 이미 ‘나’에게는 균열이 왔다.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있”는 인물이 이 시에서 기여하는 바를 보라. 그는 자신이 깔고 덮은 신문지 몇 장을 굴러가게 하여 우리의 시선을 “도시가스라 씌어져 있”는 “맨홀 뚜껑”으로 데려간다. 그에게 도시의 보편화된 시설인 “도시가스”는 결코 사용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잉여 인간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 판단은 시적 판단과 당연히 다르다. ‘나’는 그 인물로 인하여 “화면을 두드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던 ‘너’의 강요가 “화면을 두드리지 말라”는 제한으로 바뀌는 것을 쉽게 받아들인다. “새로 나온 게임을 배우지 않”기로 한 ‘나’는 “끝을 향해 제대로 나 있는 반듯한 길을 따라 걷”기는 하지만 이는 다만 “썩은 광장”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다. 어쩌면 “입에서” 태만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당신”은 미리 당도한 ‘나’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썩은 광장”이 암시하는 장소성이 앞의 「도시가스」에서 드러난 “아름다운 지역”과 겹쳐지면서 비(非)장소성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마르크 오제는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로 규정될 것이다.”(「비장소」, 아카넷, 2017, 97쪽)라고 갈파했다. 이어서 그는 “전자는 결코 완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후자는 결코 전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98쪽)면서 미셸 드 세르토를 빌어 “비장소가 장소의 부정적인 속성, 즉 장소에 부여된 이름이 부과하는, 장소가 장소에 부재하는 상황을 암시한다”는 점과 “이 이름들은 장소들 안에 비장소를 창조한다. 그것들은 장소를 거쳐 가는 곳으로 변형시킨다.”(105쪽)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이수명의 시에 할당된 장소/비(非)장소는 마르크 오제가 ‘장소’의 예로 든 집이나 학교, 교회, 광장 등의 인간적인 면이 깃든 곳과 ‘비장소’의 예로 든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공항, 대형마트, 여행지 등 인간적인 면이 거세된 장소 ̄그러므로 비장소란 장소가 아닌 장소를 일컬음 ̄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장소와 비장소의 의미 맥락은 ‘장소가 아닌 장소’(비장소)와 ‘현실이 아닌 현실’(비현실)이라는 시공간을 시적 공간으로 채택한 이수명의 시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부터 마신다.
흐린 눈앞에 무분별한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 흔들리는
아침은 우울해
아침 담배는 우울해
아침빛이 너무 쓸쓸해서
빛에 무엇을 비춰볼 엄두가 안 난다.
오늘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다가
비행기 시간을 검색해 보다가
출발하는 것이 싫어 아무 곳도 가고 싶지 않다.
정오가 지나 타이레놀을 두 알 먹고
빌려온 책을 뒤적거린다.
일주일 연체된 책을 다 읽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일을 미루고 저 일을 미루고
멀쩡한 약속을 깨고
일주일 치 필요한 식료품 목록을 짜다가 집어던진다.
물을 한 잔 더 마시고 지하실로 내려갈까
지렁이와 이야기를 나눌까
최근에 발견한 지렁이에게
같이 죽자고 말하는 대신 그래도 잘 지낸다고
말하는 게 좋겠지
창을 뚫고 들어오는 나뭇가지가 있어
그것이 머릿속을 뚫고 들어올지 잠시 생각한다.
손이나 몸이 나뭇가지가 될지도 모른다.
나무가 되기 전에
나뭇가지가 되기 전에 일어나
주방에 타일을 붙일까
하나를 붙이면 다른 하나가 떨어지고 그것을 붙이면
처음 것이 떨어지는
이상한 타일 붙이기를 하고 있을 때
계속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한다. 어디로 옮겨가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신음소리는 내지 않는다.
떨어진 타일들이 움직이는 것만
바라보고 있다.
 ̄「무단결석」 전문
시공간으로 시야를 좁혔을 때 ‘무단결석’은 최소 두 가지 상황을 창출한다. 내가 출석해야 할 공간의 텅 빔이 하나요, 내가 부재해야 할 공간이 의외의 나로 채워지는 것이 또 하나다. 출석해야 할 공간의 상황은 상상을 통한 예측이 가능하지만, 내가 부재한다고 해서 그 시공간이 나의 의식에서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이고 규칙적이던 일상이 보내오는 파동에 나의 일탈은 자극받는다. 보편적이고 규칙적이던 일상의 양날이었던 이 ‘장소’가 갑자기 ‘비(非)장소’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실내는 ‘여행지’와 같아지고, ‘정체성’이나 ‘관계성’, ‘역사성’을 일시적으로나마 탈피한다. 이 장소는 ‘창조’된 비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창조가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부터 마”시는 것은 습관적 행위다. “아침”과 “아침 담배”가 “우울”한 것도 평소대로다. 여기까지는 이곳이 여전히 ‘장소’임을 말해준다. 이윽고 “비행기 시간을 검색해 보다가/ 출발하는 것이 싫어 아무 곳도 가고 싶지 않”은 자유와, “빌려온 책을 뒤적거”리는 여유와, “이 일을 미루고 저 일을 미루”는 나태와, “멀쩡한 약속을 깨”는 객기와, “일주일 치 필요한 식료품 목록을 짜다가 집어던”지는 방임을 거치면서 장소는 서서히 비정체적이고, 비관계적이며, 비역사적인 비장소로 옮겨간다.
‘전적으로 실현되지 않는’ 비장소의 특징은 「꿈에 네가 나왔다」와, 두 편의 「도시가스」에서도 이미 언급되었다. 전자에서 ‘나’는 ‘너’에 도달하지 못하고, 후자에서 ‘우리’는 ‘베트남 쌀국수집’이나 ‘아름다운 지역’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실패한 것일까. 그러나 목표 지점에 도달하고야 마는 세속의 현실 세계가 더 가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이수명의 비장소가 아름다운 이유는 ‘전적으로 실현되지 않는’ 지점에 대한 일관된 헌신에 의해서다. 「무단결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지하실로 내려갈까”, “지렁이와 이야기를 나눌까”, “그래도 잘 지낸다고/ 말하는 게 좋겠지”와 같은 유보적인 자세, 그리고 “창을 뚫고 들어오는 나뭇가지가” “머릿속을 뚫고 들어올지 잠시 생각”하면서 그것이 “손이나 몸이” “나뭇가지가 되기 전에 일어나” “주방에 타일을 붙일까”하는 사유에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비장소에서는 “하나를 붙이면 다른 하나가 떨어지고 그것을 붙이면/ 처음 것이 떨어지는/ 이상한 타일 붙이기”와 같은 유희가 파생한다. 타일이 떨어지고 깨어지는 찰나는 얼마든지 길게 연장할 수 있는, 여기는 “떨어진 타일들이 움직이는 것만/ 바라보고 있”어도 되는 ‘창조’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일어나면
한밤중에
집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안에 있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 사람은 머리가 짧아 보인다.
바람에 날아가지도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지지도 않고
어둠 속에 부풀어 오르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까맣다.
그 사람은 밖에서 까맣게 서 있다.
한동안 그 사람으로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밖에 서 있는 동안 그 사람 비슷한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비슷하고 어떤 사람은 지나가면서 입을 가리고 무어라고 얘기하지만
입을 가린 채 비슷하고
비슷한 것은 계속 비슷한 것으로 있다. 나는 안에서 계속 안에 있다.
이제 비슷한 것에게 오늘의 작별 인사를 한다.
어쩌면 다른 것에게 했는지도 모른다. 밖에 있는 또 다른
 ̄「밖에 있는 사람」 전문
유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자. “한밤중에 일어나면/ 한밤중에/ 집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는 대목은 ‘한밤중에 일어나지 않으면 한밤중에 집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없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바깥이 어두울 때 베란다 유리창이 거울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리하여 시는 시작점부터 ‘집 밖에 서 있는 사람’이 ‘나’일 수도 있을 가능성을 짐짓 숨기고 있음을 은연중에 유포한다. 시적 유희가 시작되는 것이다. 시침 떼기(“나는 안에 있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와 단서 제공(“그 사람은 머리가 짧아 보인다.”)이 밀고 당기기를 하며, 명징하게 거리를 두었다가(“그 사람은 밖에서 까맣게 서 있다.”) 믹스(“어쩌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하여 초점을 흐리기도 한다. 관용(“밖에 서 있는 동안 그 사람 비슷한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하는가 했더니, 이 모두를 단숨에 무(無)로 만들어 버린다(“이제 비슷한 것에게 오늘의 작별 인사를 한다./ 어쩌면 다른 것에게 했는지도 모른다. 밖에 있는 또 다른”). 유희의 형태를 띤 이 시는 한밤중에 잠이 깬 ‘나’가 “집 밖에 서 있는 사람”이 되었다가 “그 사람”으로, 그리고 “그 사람과 비슷한 것”으로 바뀌는 사물화 과정을 거치면서 아예 “다른 것”이라는 비(非)사물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진술로도 읽힌다.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존재에서 비존재로, 사물에서 비사물로.
영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1999)에서 ‘콜 시어’는 현실 세계에서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을 볼 수 있는 남다른 감각을 가졌다. 건물의 계단에서도, 도로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아이는 귀신과 맞닥뜨린다. 모든 게 담겨 있으면서 어느 것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은 여덟 살배기의 건조한 표정이 이수명의 시에 오버랩된다. 그의 시는 철학 용어 없이 철학을 내포하고, 심각함 없이 깊으며, 유희처럼 담백하다. 그의 시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세속의 현실 공간에 발을 디딘 채 아무도 가보지 않은 지점과 누구도 보지 못한 대상을 시로 옮기는 창조적인 작업을 시인은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는 언제나 너무 많은 ‘非’를 가지고 있다.
-《시와세계》 202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