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람들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백만 대군, 당태종의 30만 대군을 격퇴한 점에 대해 늘 경이롭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식은 이후의 고려나 조선이 비록 고구려의 직계왕조는 아닐지언정, 이런 점을 떠 올려가며 우리를 무척이나 두려워했다더군요.
어떤 사람은 사신으로 온 우리나라 사람에게 너희나라는 무슨 장기가 있어서 수당의 백만 대군을 쳐부술 수 있냐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전란 초반 일본군에게 유린되어 선조가 의주까지 파천하고, 명군이 참전했던 뒤에도 이렇다 할 부흥의 기미가 없이 명에게 계속 군사, 경제적 원조를 요청하는 조선의 현실을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일본의 재침우려를 알려서 다시 원병을 청하려고 북경에 갔던 주문사 정기원 일행에게 명나라의 도찰원 우첨도어사 이화룡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조선이 수, 당 이래 강국으로 불렸는데, 지금 이처럼 허약해진 이유가 무엇이냐? 조선이 원래 이렇게 허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은 동서 3천리, 남북 4천리에 이르는 비교적 넓은 국토와 토질이 비옥하여 오곡이 풍성하게 산출되는 양호한 경제적 조건을 갖고 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와서는 왜 이리 개판이냐?).“
또 한번 놀란 거죠.
임진왜란때 우리나랄 돕는답시고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할 말이 많기는 합니다. 요즘도 우리는 우리 땅에 주둔하면서 우리를 지켜준다는 미군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죠? 그 때도 똑같았죠. 군사지휘권도 빼앗기고...
하지만, 명나라 사람들이 임진왜란때 왜군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조선사람들에게 많은 충고를 했습니다. 물론 당시 우리는 주체적으로 사느냐고(?) 그런 충고를 한가지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죠.
명나라 사람의 조선진단에 대해 들어보세요.
송응창 왈
"조선관인들이 시나 읊조리고, 기생을 끼고 앉아 국사를 팽개쳐 두고 있다."
유황상과 원황왈
"조선은 단지 종이를 자르고 붓을 놀리는 짓만 하여 한갓 明軍의 마음만을 상하게 한다"
특히 유황상은
"조선이 고구려 이래 강국이었음에도 선비와 백성들이 독서와 농사에만 치중하여 변란을 초래했다. (맡겨만 준다면) 자신은 이런 조선을 완전무결한 국가로 만들 수 있다."
동정기의 저자 서희진 왈
"조선이 중국만을 믿고 무비를 방기하다시피 하여 거의 황음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당시 조선땅에 들어온 명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경제가 너무도 열악했다는 점을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죠. 또 들어볼까요?
송응창 왈
"우리 군대가 스스로 들어온 조선은 하나의 별세계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은전을 사용할 수 없으며, 푸주간이나 술을 파는 가게도 없습니다.(돈이 있어도 소용이 없어요!) 더욱이 왜놈들의 분탕질 때문에 집들은 한결같이 텅 비었고, 군사들은 입술에 채소국물 한 숟갈을 적셔보지 못했으며 염장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말을 하자니 너무 서글퍼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제가 비록 누누이 염장을 풀고 고깃근을 마련하여 적당히 호상하려 했지만 끝내는 사소한 은혜를 베풀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요양사람들을 불러 장사하도록 달려오게 했지만 길이 멀어 온 자가 적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은을 교환매개로 하는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의 월급도 은으로 지급하던 나라죠. 그런데, 이 병사들이 조선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귀한 은이 무용지물인 겁니다.
그래서, 경리어사 양호는 말합니다.
"조선이 화폐를 사용하지 않아 물화가 유통되지 않기 때문에 부국이 될 수 없다."
이런 지적은 당시 우리 선비인 유몽인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명과 일본이 부유한 것은 화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명군 참장 낙성지는 다음과 같이 건의합니다.
"은광을 개발하여 채굴할 것과 이 은을 밑천으로 요동과 무역함으로써 군량 등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조는 그런 은광개발요구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또 무역의 진흥이나 상업의 진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짧막한 반론을 하죠.
"한가지 이익을 더하느니보다는 한가지 폐단을 더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이런 실정에 대해 조선의 신흠은 다음과 같이 말하죠.
"물화가 통하고 막히는 것의 성쇠는 역시 때가 있다. 우리 동방은 은광이 많으므로 고려 말에 중국의 수색 때문에 백성이 견디지 못하였는데 조선 초에 주청하여 상공을 면제받았다. 상공을 면제받았다면 나라의 화폐로 쓸 수 없기 때문에 열성이 이를 준수하여 드디어 은을 캐는 길을 폐쇄하고 법령으로 분명히 제정하였다. 심지어 역관이 북경에 갈 적에도 만일 사사로이 싸 가지고 강을 건너는 자가 있으면 그 죄는 죽이는 데에 이르렀다."
임란 이전에는 은광을 개발하는 일 자체가 불법이었다는 거죠. 왜냐? 바로 사대외교 하려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가혹한 명나라의 수탈을 어떻게 견뎌 내겠습니까?
하지만, 점차 명나라 군사들과 그들을 따라온 명나라 상인들의 영향으로 우리 역시 명의 은 경제에 편입됩니다.
그런 실정에 대해서도 신흠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죠.
"거의 2백년이 경과되어 임진왜란에 이르러 중국에서 은을 우리나라에 내려주고 군량과 군상도 모두 은을 쓰니, 이로 인해 은화가 크게 유행하여 중국과 통화하는 금령은 폐하여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정에서 매매하는 무리가 다른 재물은 저축하지 않고, 오직 은으로 재물의 고하를 정하였다. 오늘날에 이르러 호조의 경비는 중국에 주청하는 것과 사신의 접대비용으로 더욱 많아져서 은값이 오르자 민간에서 폐기되었던 자모전이 이로 인하여 큰 이익을 얻게 되었으며, 조정에서는 재물을 탐하는 관리가 서로 뇌물을 주는데, 은을 버리고는 할 수 없었다."
한편 경리어사 양호는 은 이외에 조선이 중국과 무역할 수 있는 상품을 나름대로 제시하면서 무역을 권장합니다.
"조선이 요동상인들과 무역할 수 있는 물종으로서 차를 제시한다. 그는 조선에서 차를 채취하여 요동에 판매하면 10근에 1전은 받을 수 있다. 명이 서번인에게 차를 판매하여 받은 대금으로 1년에 전마1만필 이상을 구입하고 있다."
이런 지적에 대해서 역시 우리 선비인 이덕형은 당시 피폐한 경제현실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상을 활용할 것을 주장했고, 특히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 물화를 유통시킬 것을 주장 즉 어염을 저장했다가 북변지역으로 수송 판매하여 은이나 면포, 모피 등을 확보한 후 이것을 남부의 농업지대에 판매하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이런 배경하에 1593년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인 중강에서 중강개시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걸 받아들인 것은 명나라의 강압에 가까운 요구에 조선이 굴복해서 그런 것뿐이지요. 명나라가 무역을 강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군의 군수물자를 운송하여 조달하는데 대단히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죠. 명나라는 임란 중, 우리나라에 상인들을 대거 불러들여 우리나라에서 상업활동에 종사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체제 성격상 상업을 활성화하는 일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전쟁이 끝나가자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개설되었던 중강개시는 간사한 무리들이 끼치는 폐단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폐지하려고 합니다.
조선에서도 유몽인같은 이는 이런 실정을 비판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의 상공업을 진흥할 것을 주장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조선보다 부강하다. 그 원인은 바로 화폐의 유통과 활발한 무역활동에 기인한 것이다. 산지가 많아 농업에는 불리한 조선이 대외무역을 도모하지 않고, 좁은 국토에서 생산되는 한정된 물자를 가만히 앉아 갉아먹고 있기 때문에 삼국 가운데 가장 가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사람들이 너무 고식적이라 변통을 모른다는 지적도 합니다.
풍중영(명군 지휘관)왈
"조선의 문화는 중국과 거의 같아 중국 이외에는 대등한 나라가 없다. 다만 예절, 문장, 병기제작 등 몇 가지가 중국과 다른 것이 문제다. 그 이유는 조선이 옛것에 얽매여 변통할 줄 모르는 습성 때문이다."
또 양호가 선조 거동시에 호종했던 사관 박승업, 유색이 기록한 사초를 강제로 빼앗아 열람한 뒤 이런 말을 했죠.
"사관들이 기록한 것이 전부 사소하고 형식인 내용들뿐이다. 실사를 중시하시오."
아울러 명나라 사람들은 조선이 오르지 주자만을 높이 받드는 것을 비판하고 새로 일어나는 양명학을 수용할 것을 권합니다.
송응창은 양명학을 수용할 것을 권하며, 이정구, 황신, 유몽인 등을 불러 진중에서 강학하면서
"조선 학인들이 존숭하는 주자 등의 송나라 학인들의 성리학설은 고루한 유자들의 진부한 학설일 뿐이요."
"마음으로 떠오르는 내용으로써 책을 만드시오."
또 원황은 말하기를
"명나라는 더 이상 주자를 종주로 여기지 않는다오!"
하지만, 그런 명나라 사람들의 권유에 대해 조선의 대다수 사대부들은 차가운 반응을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응대하죠.
"이단의 학문은 배울 수 없소!"
"송응창이 용병을 왕양명처럼 잘한다면 우리는 양명학을 우러러 볼 것이다."
당시 명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에 와서 한 행적은 훌륭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미군이 우리나라에 와서 여러가지 행패를 부리듯이 명나라 군인들도 대국사람입네 하고 우리를 얼마나 탐학해 갔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명나라 사람들의 충고는 부강 조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움이 되는 말이었읍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자랑스럽게도 주체적(?)인 길을 걸어 드디어 후금이 일어나고, 명나라가 기울어가는 시점에서도 명나라 사람들의 충고는 한마디도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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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당시 우리랑 차원이 다른 사회 이미 송대부터 매뉴팩쳐단계로 명대엔 공장하나에 백대 이상의 직기를 구비한 직물공장이 널려 있었고 1600년엔 소주의 직물공장직공 수만명이 연대 파업을 하기도 화폐제도는 전국시대에 뿌리 내리고 어음등 유가증권은 당대에 이미 확고한 위상을 차지 근데 조선은 17세기 후반18세기초 까지도 화폐가 정착이 안되었다
는 리플도 있군요... 돈이 없으면 아무리 군사력을 논하려고 해도 어렵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군대를 양성하는 데에는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정말로 이해 할려해도 이해가 안되는 것은 바퀴 이걸 써서 마차를 만들자는 상소에 유학자랍시고 유교 경전에 나오는 금과옥조중 한 구절을 인용해서 묵살 했다는. 그러고도 나라가 유지가 되었다는것이 미;스테리 입니다. 유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체 중세 유럽의 그것처럼 조선도 그리했던것 아닌지요.
하지만, 고구려, 신라, 고려도 국내에서 화폐 경제를 제대로 운용해 본적이 없고, 군사력도 토지를 수여받은 무사집단에 의존했다는 것을 볼 때 반드시 경제력=군사력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도 송대에 시장경제의 전단계라고 할만큼 부유했지만, 실질적인 군사력은 꽝이었지요. 조선의 무능함은 평화가 너무 계속되어 실전경험이 적고, 대규모 병력과 물자를 동원할 노하우 자체가 부족한 것이 주요인이 아닐까요?
그 이유는 고대사회는 노예노동력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전쟁을 통해서 획득한 노예들의 노동력이 경제의 근간을 받쳐주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조선은 노예사회는 아니었습니다.전쟁을 통해서 노예를 잡아들인 사회가 아니었죠. 또한 화약무기시대에 접어든 상황에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네요.
사회학에는 무지하기 때문에 조선이 비노예사회였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투력이 비교적 우수했던 의병들의 하급병들은 사족들 휘하의 노비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중세 고려도 전쟁 포로가 노동력의 근간을 이루지는 않았는데, 어째서 전쟁이 나면 항상 조선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는지 설명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향소부곡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말 그대로 천민과 노비들이 주축이 된 사회계층의 거주지대입니다. 여기에 끼지도 못하는 부류가 양수척이죠. 그러나 조선은 이미 자경농민들이 국력의 중추라는 점을 깨닫고 조선초기 노예위주의 지방호족사회를 대폭 바꿉니다. 즉 공노비, 사노비제도를 도입한 것이기야 하지만, 그 수가 고려말의 노비숫자에 비하면 제한적이었죠. 또한 15세기 이후 16~17세기가 되면 화기의 발달로 전투에 변화가 옵니다. 이런 부분도 고려와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무엇보다 고려대의 노비는 전쟁노비보다는 빚을 갚지 못해서, 호족의 수탈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방관이 있으니 그정도는 아닙니다.
여기다가 고려는 일종의 능력위주의 사회였습니다. 즉 싸움만 잘하면 어떠한 과거나 뭣이라도 불문이었고, 일종의 무신사회였으나, 조선은 과거제의 정착으로 문신사회가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 전쟁때의 지휘관도 문신이 종종 맏게되고, 이런 경우 전투력이 무신지휘관을 둔 것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없죠. 그런 관직제도의 변화도 있다고 봅니다.
조선의 결정적인 약점은 유사시에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야 할 장교 집단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주지 못한데 있어 보입니다. 고려 때까지 무인들은 정식으로 토지를 사여받고 여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군사력, 곧 사병집단을 형성했지요. 이러한 방식은 무신의 난같은 정정 불안의 주요인이 되었고, 조선왕조는 이들을 무과시험을 통과한 공식적인 지배 계급으로 편입시키는 대신 녹봉을 주는 월급쟁이 장교로 만들었지요.
병사와 장군 사이에 어떤 유대 관계도 없이 수백년을 평화롭게 지내다가, 100여년 동안 전란으로 단련된 수십만 대군과 맞서야 한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요? 몇번 잡아보지도 못한 병장기에, 서류와 딴판인 실제 병력 집계에 난생 처음 보는 지휘관한테 지휘를 받는 관군의 전투력이 수준 이하일 것은 뻔해 보입니다. 결국 관군은 권율같이 개인적인 역량이 탁월한 소수의 지휘관들 외에는 쉽게 와해되는 거죠.
왕도 못보는 사초를 일개 장군이 강제로 본다라...그리고 사견으로는 쿠데타로 나라를 엎은 태조,전왕조인 고려의 상공업,무역에 대한 똘기어린 반응.군사력과 경제에 대한 조선의 노이로제로 밖에 생각이 안듭니다.화약무기도 왕권에 위협이 됐는지,어떤 왕은 해당청(화기개발.청?화통도감?)을 폐지도 했지 않습니까.
"사치품의 교역=일부 특권층의 부의 집중" 이라는 시각은 반드시 그러지 만도 않습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신흥계층(역관출신 재산가)을 만들어 개혁등을 추진하는 원동력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제라는 것은 한 계층만이 향유하는 소수의 물건이 아닙니다. 물건에는관련산업이 있기 마련이고, 관련산업의 발달은 사회전반적인 파급효과를 주기때문이죠. 그리고 조선의 화약무기는 사실 효종이후로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비근한 예로 노획한 수석식 총을 도입할 생각도 못하니까요. 따지고 보면 고려시대의 보다 원시적인 화기류에서 어느정도 발전을 이룬 것이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고립주의 때문이죠.
정확하게 말하면 도입할 필요성을 못느낀거죠. 하멜 등을 활용해 수석식 총을 제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대량 양산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서양제국과 교류면에서 조선과 비교가 되지 않았던 일본도 흑선이 오기 전까지 우리와 별반 다를바 없었습니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한 국가가 주변국들이 전부 mig21이나 F-4같은 구식 전투기를 쓰는데 일부러 F-22도입 안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나라 경제가 크면 뭐하나 당시 중국과 일본 백성들 사는 꼴보면 참...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화폐경제를 처음으로 정착시킨 나라도 조선인데 그리고 상업 진전 시키는 것은 일단 나라의 부가 쌓이게 할수는 있지만 그만큼 빈부격차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콰지모드님 당시 도로 교통은 교통 수단때문에 어차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수운 교통은 효율이 좋았고 조선인들이 많이 활용했죠 그리고 수자리 갈때 함경도까지 가는 경우가 있고 세곡 운반할때 수백리 정도 강과 강 사이에 육로로 운반하기도 합니다 물론 모세혈관이라는 측면에서는 도로 교통이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백성이 사는 모습이야 뭐 대동소이하겠죠...ㅎㅎ 문제는 중산층이 있느냐 없느냐죠. 즉 상업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역관이 생긴 조선후기에는 이른바 중산층이 생기지만, 조선 전기에는 양반아니면 평민 혹은 천민인지라 모아니면 도인 사회였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은 중산층이 생기거든요... 중산층이 지금이나 예나 중요하답니다.
어차피 그들 눈에 비친 나라.... 조선이 평범할 때는 적어도 농사꾼이 잘사는 세상이었다고 합니다... 요즘 너무 조선조 말의 모습이 조선의 전체에 비교해서 착잡합니다. 일본이 잘살았다고요..? 상업이 발달해서 일부 거대상인(무사-사무리이와 결탁한)제외하곤 다 빈곤하게 살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조선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나쁜 것이 사실이기는 한데, 사실 500년 동안 국가를 유지한 것만 봐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조선이 통일신라 이후에는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기도 했고(발해는 잘 모르겠음)... 왕조교체기의 내전은 정말 파괴적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중국이 원-명-청 왕조로 바뀌는 동안 국내의 질서를 유지했다는 것 만으로도 훌륭하다고 봅니다.
게다가 조선시대는 현대처럼 정부가 국가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기술적 여건도 되지 않았고 전근대사회는 현대와 비교하면 워낙 기술혁신이 느린 사회여서 사실 사회나 경제의 혁신이 없었던 이유가 정부 때문이라고 따지기도 힘듭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된 육상교통의 경우는 철도 이전에는 세계 어디서나 정말 엉망이어서 운송은 최대한 수운과 해운을 이용한 것이 사실이고. 조선정부야 그저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겠지요.
예를 들면 중국의 경우도 사실 빠르게 기술혁신이 일어난 시기는 송대이고 그 이후 명, 청대의 기술혁신은 대단히 느렸고 그저 지속적인 인구증가로 인해 전체의 경제규모만 커졌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근대화에 실패한 것은 아쉽기는 하지만 비유럽국가로 근대화에 빠르게 성공한 나라는 일본 뿐이죠. 특별히 조선만 욕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현대의 지식에 기초해서 판단을 하면 언제나 과거는 어리석어보이죠. 하지만 과거에 얻을 수 있었던 제한된 지식에 기초해서 판단한다면 완전히 어리석었던 것도 없다고 봅니다. 어쨌든 착오가 있었지만 500년간 국내의 질서를 유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닐까요?
로마는 가도를 만들어서 국가가 팽창한 예입니다. 따라서 예외일수 없죠. 더구나 한 국가가 500년간, 내부정권교체없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회는 정체된 사회였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물론 너무 자주 바뀌어도 문제지만요. 그리고 빈부격차때문에 상업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궁색한 핑계같습니다. 너무 부작용만 보니까요. 물류의 발달은 관련산업에 파급효과를 주게되어 있습니다. 그게 원리죠. 면포를 수출한다면, 면화재배농민, 면포를 만드는 사람에게 이득이돌아가고, 염색이 추가되면 염색업자, 염료추출업자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식입니다. 경제는 단편으로 보는 것이 아니니까요.
첫댓글 만력제 나라돌아가는 꼴 보면 명인들이 조선 갖고 그런 소리 할 상황이 아니었을텐데.. 쯧쯔
그런 명나라 눈에 마저 조선이 한심해 보이니 정말 비참한 일이죠... 에효....
뭐 틀린말을 들은건 아니었겠지만 당시 천장, 천병들께옵서 하신 일이 무엇이온지 생각해 본다면야 뭐....-_-; 왜군은 얼레빗이고 명군은 참빗이라...
정말로 이해 할려해도 이해가 안되는 것은 바퀴 이걸 써서 마차를 만들자는 상소에 유학자랍시고 유교 경전에 나오는 금과옥조중 한 구절을 인용해서 묵살 했다는. 그러고도 나라가 유지가 되었다는것이 미;스테리 입니다. 유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체 중세 유럽의 그것처럼 조선도 그리했던것 아닌지요.
조선은 온리원 농업뿐 ~~ -_-;;;
하지만, 고구려, 신라, 고려도 국내에서 화폐 경제를 제대로 운용해 본적이 없고, 군사력도 토지를 수여받은 무사집단에 의존했다는 것을 볼 때 반드시 경제력=군사력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도 송대에 시장경제의 전단계라고 할만큼 부유했지만, 실질적인 군사력은 꽝이었지요. 조선의 무능함은 평화가 너무 계속되어 실전경험이 적고, 대규모 병력과 물자를 동원할 노하우 자체가 부족한 것이 주요인이 아닐까요?
그 이유는 고대사회는 노예노동력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전쟁을 통해서 획득한 노예들의 노동력이 경제의 근간을 받쳐주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조선은 노예사회는 아니었습니다.전쟁을 통해서 노예를 잡아들인 사회가 아니었죠. 또한 화약무기시대에 접어든 상황에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네요.
사회학에는 무지하기 때문에 조선이 비노예사회였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투력이 비교적 우수했던 의병들의 하급병들은 사족들 휘하의 노비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중세 고려도 전쟁 포로가 노동력의 근간을 이루지는 않았는데, 어째서 전쟁이 나면 항상 조선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는지 설명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향소부곡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말 그대로 천민과 노비들이 주축이 된 사회계층의 거주지대입니다. 여기에 끼지도 못하는 부류가 양수척이죠. 그러나 조선은 이미 자경농민들이 국력의 중추라는 점을 깨닫고 조선초기 노예위주의 지방호족사회를 대폭 바꿉니다. 즉 공노비, 사노비제도를 도입한 것이기야 하지만, 그 수가 고려말의 노비숫자에 비하면 제한적이었죠. 또한 15세기 이후 16~17세기가 되면 화기의 발달로 전투에 변화가 옵니다. 이런 부분도 고려와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무엇보다 고려대의 노비는 전쟁노비보다는 빚을 갚지 못해서, 호족의 수탈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방관이 있으니 그정도는 아닙니다.
여기다가 고려는 일종의 능력위주의 사회였습니다. 즉 싸움만 잘하면 어떠한 과거나 뭣이라도 불문이었고, 일종의 무신사회였으나, 조선은 과거제의 정착으로 문신사회가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 전쟁때의 지휘관도 문신이 종종 맏게되고, 이런 경우 전투력이 무신지휘관을 둔 것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없죠. 그런 관직제도의 변화도 있다고 봅니다.
조선의 결정적인 약점은 유사시에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야 할 장교 집단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주지 못한데 있어 보입니다. 고려 때까지 무인들은 정식으로 토지를 사여받고 여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군사력, 곧 사병집단을 형성했지요. 이러한 방식은 무신의 난같은 정정 불안의 주요인이 되었고, 조선왕조는 이들을 무과시험을 통과한 공식적인 지배 계급으로 편입시키는 대신 녹봉을 주는 월급쟁이 장교로 만들었지요.
병사와 장군 사이에 어떤 유대 관계도 없이 수백년을 평화롭게 지내다가, 100여년 동안 전란으로 단련된 수십만 대군과 맞서야 한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요? 몇번 잡아보지도 못한 병장기에, 서류와 딴판인 실제 병력 집계에 난생 처음 보는 지휘관한테 지휘를 받는 관군의 전투력이 수준 이하일 것은 뻔해 보입니다. 결국 관군은 권율같이 개인적인 역량이 탁월한 소수의 지휘관들 외에는 쉽게 와해되는 거죠.
앗.. 그렇담 중국에서 조선에게 "너희가 무슨 제주로 수당을 까부셨냐?" 라고 물은 것은 고구려-조선 라인을 중국이 인정했다는거네요? ㅋ
부족단위로 쪼갈라져 있는 여진은 눈에 들어왔겠습니까.걔들 입장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것 중에서 그나마 지들 눈에 봐줄만 하니까 그런거죠.
=_=... 썩 기분 좋아할 내용은 아닌데요... 비아냥 거린 내용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파드시다니...
어째 에커트 같이 자본주의 맹아론 따위 즐드시라는 사람들의 근대주의 시각이랑 맞물리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왕도 못보는 사초를 일개 장군이 강제로 본다라...그리고 사견으로는 쿠데타로 나라를 엎은 태조,전왕조인 고려의 상공업,무역에 대한 똘기어린 반응.군사력과 경제에 대한 조선의 노이로제로 밖에 생각이 안듭니다.화약무기도 왕권에 위협이 됐는지,어떤 왕은 해당청(화기개발.청?화통도감?)을 폐지도 했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그 고려의 화약무기를 업그레이드 시킨 것도 조선입니다 그리고 고려 백성들의 사는 걸 봤을때 과연 상업을 통한 경제 개발이 꼭 좋다고만 할 수 없다고 봅니다(당시 상업적으로 이익을 내려면 대부분의 경우 사치품을 교역하니까요)
"사치품의 교역=일부 특권층의 부의 집중" 이라는 시각은 반드시 그러지 만도 않습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신흥계층(역관출신 재산가)을 만들어 개혁등을 추진하는 원동력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제라는 것은 한 계층만이 향유하는 소수의 물건이 아닙니다. 물건에는관련산업이 있기 마련이고, 관련산업의 발달은 사회전반적인 파급효과를 주기때문이죠. 그리고 조선의 화약무기는 사실 효종이후로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비근한 예로 노획한 수석식 총을 도입할 생각도 못하니까요. 따지고 보면 고려시대의 보다 원시적인 화기류에서 어느정도 발전을 이룬 것이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고립주의 때문이죠.
정확하게 말하면 도입할 필요성을 못느낀거죠. 하멜 등을 활용해 수석식 총을 제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대량 양산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서양제국과 교류면에서 조선과 비교가 되지 않았던 일본도 흑선이 오기 전까지 우리와 별반 다를바 없었습니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한 국가가 주변국들이 전부 mig21이나 F-4같은 구식 전투기를 쓰는데 일부러 F-22도입 안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나라 경제가 크면 뭐하나 당시 중국과 일본 백성들 사는 꼴보면 참...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화폐경제를 처음으로 정착시킨 나라도 조선인데 그리고 상업 진전 시키는 것은 일단 나라의 부가 쌓이게 할수는 있지만 그만큼 빈부격차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콰지모드님 당시 도로 교통은 교통 수단때문에 어차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수운 교통은 효율이 좋았고 조선인들이 많이 활용했죠 그리고 수자리 갈때 함경도까지 가는 경우가 있고 세곡 운반할때 수백리 정도 강과 강 사이에 육로로 운반하기도 합니다 물론 모세혈관이라는 측면에서는 도로 교통이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백성이 사는 모습이야 뭐 대동소이하겠죠...ㅎㅎ 문제는 중산층이 있느냐 없느냐죠. 즉 상업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역관이 생긴 조선후기에는 이른바 중산층이 생기지만, 조선 전기에는 양반아니면 평민 혹은 천민인지라 모아니면 도인 사회였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은 중산층이 생기거든요... 중산층이 지금이나 예나 중요하답니다.
어차피 그들 눈에 비친 나라.... 조선이 평범할 때는 적어도 농사꾼이 잘사는 세상이었다고 합니다... 요즘 너무 조선조 말의 모습이 조선의 전체에 비교해서 착잡합니다. 일본이 잘살았다고요..? 상업이 발달해서 일부 거대상인(무사-사무리이와 결탁한)제외하곤 다 빈곤하게 살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조선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나쁜 것이 사실이기는 한데, 사실 500년 동안 국가를 유지한 것만 봐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조선이 통일신라 이후에는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기도 했고(발해는 잘 모르겠음)... 왕조교체기의 내전은 정말 파괴적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중국이 원-명-청 왕조로 바뀌는 동안 국내의 질서를 유지했다는 것 만으로도 훌륭하다고 봅니다.
게다가 조선시대는 현대처럼 정부가 국가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기술적 여건도 되지 않았고 전근대사회는 현대와 비교하면 워낙 기술혁신이 느린 사회여서 사실 사회나 경제의 혁신이 없었던 이유가 정부 때문이라고 따지기도 힘듭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된 육상교통의 경우는 철도 이전에는 세계 어디서나 정말 엉망이어서 운송은 최대한 수운과 해운을 이용한 것이 사실이고. 조선정부야 그저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겠지요.
예를 들면 중국의 경우도 사실 빠르게 기술혁신이 일어난 시기는 송대이고 그 이후 명, 청대의 기술혁신은 대단히 느렸고 그저 지속적인 인구증가로 인해 전체의 경제규모만 커졌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근대화에 실패한 것은 아쉽기는 하지만 비유럽국가로 근대화에 빠르게 성공한 나라는 일본 뿐이죠. 특별히 조선만 욕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현대의 지식에 기초해서 판단을 하면 언제나 과거는 어리석어보이죠. 하지만 과거에 얻을 수 있었던 제한된 지식에 기초해서 판단한다면 완전히 어리석었던 것도 없다고 봅니다. 어쨌든 착오가 있었지만 500년간 국내의 질서를 유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닐까요?
고구려때는 무가 흥한 시기에 밖으로 팽창할려는 팽창주의 였을거라 보여지고 조선때는 문이 흥한시기에 쇄국과 보수로 유지되어온 시기라 그러지 않을까요? 간단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로마는 가도를 만들어서 국가가 팽창한 예입니다. 따라서 예외일수 없죠. 더구나 한 국가가 500년간, 내부정권교체없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회는 정체된 사회였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물론 너무 자주 바뀌어도 문제지만요. 그리고 빈부격차때문에 상업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궁색한 핑계같습니다. 너무 부작용만 보니까요. 물류의 발달은 관련산업에 파급효과를 주게되어 있습니다. 그게 원리죠. 면포를 수출한다면, 면화재배농민, 면포를 만드는 사람에게 이득이돌아가고, 염색이 추가되면 염색업자, 염료추출업자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식입니다. 경제는 단편으로 보는 것이 아니니까요.
제 소견으로는 우리나라는 조선부터 꼬인거같습니다. 고려의 북방정책도 그런대로 쓸만했지만 조선의 사대부정신은 임진왜란에서까지도 명나라에 기댈정도였으니 조선이 국가의 힘을 상실했다고 볼수있죠
제 소견으로는 우리나라는 조선부터 꼬인거같습니다. 고려의 북방정책도 그런대로 쓸만했지만 조선의 사대부정신은 임진왜란에서까지도 명나라에 기댈정도였으니 조선이 국가의 힘을 상실했다고 볼수있죠
제 소견으로는 우리나라는 조선부터 꼬인거같습니다. 고려의 북방정책도 그런대로 쓸만했지만 조선의 사대부정신은 임진왜란에서까지도 명나라에 기댈정도였으니 조선이 국가의 힘을 상실했다고 볼수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