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암스님] 나의 삶의 영역이 작은 깨달음으로 수없이 점철돼 나가는 그런 수행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 불교TV ; '선승에게 길을 묻다'에서(제38회 2012년 3월8일 방영)
단지 좌선만이 선은 아니다
행주좌와 모두가 선이 되어야 한다. 단지 좌선만이 선은 아니다.
남종선, 육조선에서 선의 종지는 전 생활이 선이 될 수 있는 그런 선 수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변천에 따라 그 때 그 때마다 좌선에 중심을 두거나 또는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방편이 달라질 수 있다.
간화선에서 앉는다는 의미는 몸의 안정이 아니라 달마의 말씀을 빌리자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되 경계에 집착, 오염되지 않는 걸 심불기라 한다면, 단경에도 염불기, 생각을 하되 생각한 바 없이 생각한다는 것. 이것이 단경에서 말하는 무념의 종지로서 염불기가 된다.
육조의 말대로 일체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것이 좌(坐)라면, 좌선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선을 하는 마음 상태가 경계에 끄달리느냐 아니냐,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느냐로 좌를 말해야 한다.
간화선에서는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질 수 있다면 그게 좌의 의미다.
몸의 안정을 포함한 일체 삶의 영역에서 흔들림없는,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그래서 화두로써 순일한 입장이라면 그 사람을 일러 좌선, 선수행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해야 하겠죠.
수행자가 수행 전문가가 되어선 안 된다
수행자가 수행 전문가가 되어선 안 된다.
수행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게 수행이라 생각한다.
신앙과 삶(생활)과 수행은 삼정립, 셋이면서 하나여야 한다.
신앙이 빠져버리고 생활이 빠져버린 수행은 공허하다. 건혜지가 되어 올바른 선수행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빠진, 신심과 원력이 빠진, 중생의 삶이 빠진, 수행을 위한 수행을 한다고 하면 이는 제대로 된 수행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수행을 위한 수행, 수행 이외엔 신심과 원력도 배제하고, 중생의 삶의 아픔이 빠진 메마른 수행은 수행이 아니기에 전문가란 말을 썼다.
선방에서는 농담으로 <직업 수좌>라 한다.
한국불교는 깨달음과 실천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깨달음과 실천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선종 발원을 보면 파사현정의 정신으로 돌아가 그것이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로 나타난다.
선이 중생을 삶을 떠나 이루어질 수 없다.
선의 종지는 견성성불 요익중생이라, 선 수행이 나 혼자만의 수행,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닌, 나의 깨달음이 중생, 사회에 회향될 수 있는 수행이 선의 종지에 부합되는 선수행이다.
달마스님 말씀 중 <혜행상응하는 것이 곧 조사>, 즉 <깨달음과 실천이 일치하는 것이 조사>다.
실천행, 육바라밀행을 떠나 선의 깨달음이 있을 수 없고, 또 깨달음을 여의고 바라밀을 이야기, 실천될 수 없다는 걸 보면 선의 깨달음과 바라밀의 실천행이 하나되는 선수행이 선의 종지에 부합된 선의 모습.
깨달음과 중생의 살림살이
흔히 깨달음이라 하면 한국에서는 구경각, 돈오돈수를 통한 불지에 이르는 깨달음... 이렇게 굉장히 고준하게 깨달음을 정의한다.
작은 깨달음은 배격할 깨달음으로 여기는데 이걸 어떻게 보면 깨달음에 철저한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볼수 있지만....
그러나 역대 조사들의 깨달음을 보더라도 초견성이 있고 여러 번의 깨달음이 있음을 봤을 때, 깨달음을 마냥 최고의 구경각만 가지고 정의하기에는 너무 중생의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중생은 그야말로 아픔과 고통 속에 있는데, 그 아픔과 고통의 질곡을 일상 속에서 돌이킬 수 있는 작은 깨달음도 깨달음일 수 있고, 중생의 업생을 불보살의 원력, 원생의 삶으로 돌이키려는 노력도 깨달음의 영역에 넣어야 우리도 우리 삶이 깨달음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깨달음의 생활화, 깨달음의 대중화도 이룰 수 있다.
요즘 우리 조계종에서는 간화선의 대중화, 세계화를 이야기하는데 너무 고준한, 완전한 깨달음만 주장하면 두 가지 현상이 벌어진다.
하나는 나는 이런 고준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수행자로서의 증상만이 생겨 세상을 도외시 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 저것은 너무나 고준해서 나는 도저히 나아갈 수 없겠구나 하는 퇴굴심이 생겨 수행, 선을 포기하는 중생심이 나오게 된다.
이 두 가지 현상만 보더라도, 깨달음을 나의 삶의 영역이 작은 깨달음으로 수없이 점철돼 나가는 것으로 여기는 그런 수행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작은 생각이다.
올바른 간화선
간화선의 대중화를 말하지만, 기본적 입장에서 대중화의 인식이 되어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화두가 무엇이냐라는 말을 상용한다. 이미 간화선적 인식에 젖어 있는 것이다.
다만 삶이 수행으로 승화되는 의미에서의 간화선은 대중화되지 못했다.
우리가 화두를 1700 공안이라는 의미에서만 찾지 않는다면, 공안이란 것은 존재의 실상, 참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뭣고와 동시에,. 일반인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인가로 통일될 수 있다면 간화의 물음이 자기의 내면적 물음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가 건전하고 행복하고 올바른 사회가 될 수있느냐로 함께 되어지기에 우리 국민은 간화의 체질적 바탕이 되어 있다.
물론 수행의 점차도 익히고 단련도 해야겠지만...
돈오돈수
(사회자) 달라이 라마같은 분도 <아주 열심히 수행하면 아주 조금 진전한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스님) 누구나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로 자기 자신을 반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바깥으로 향하는 생각들을 자기의 내면세계, 선적으로는 본래부처로의 회귀로 본다면, 우리는 체질적으로 간화의 체질을 갖추고 있다.
이런 입장으로서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론적 문제만 해결한다면, 생활이 수행이 되고 참선수행이 바로 생활이 될 수 있는 수행풍토를 만들 수 있다.
선을 전문가들만이 하는 것이라는 고준한 모습으로만 한정짓는 것이 장점도 있겠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간화수행자, 화두수행자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널리 펼 때가 되었다고 본다.
한국불교의 위기
(사회자) 50년 뒤에는 출가자가 일년에 20여명 밖에 안 될 거라는 말이 있다.
(스님) 출가자의 책임이 크다. 불교가 우리 국민의 삶 속에 그야말로 화두로서 침투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해야한다.
수행자들이 중생의 아픔을 떠나 자기 개인의 구원에만 집중한다면 점점 사회와는 괴리되며 더 멀어질 것이다.
좌복 밑에 중생의 아픔과 고통의 질곡을 깔고, 그야말로 견성성불하고 나서 요익중생하겠다는 게 아니라, 견성성불과 아울러서, 견성성불 하고자 하는 수행 그대로가 요익중생이 되는 삶을 살아갈 때, 출가가 너무 훌륭한 삶이다, 나도 출가해야겠다 는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다.
첫댓글 개인적으로 참 시원한 법문이십니다. ^^
설우 큰스님께서 강조하시듯 선지식의 법문을 두고 맘에 들면 좋아하고 안들면 싫어하는 것을 경계해야하는 것이 불자의 당연한 도리이겠지만 깨달음과 수행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시는 부분이 많아 감사할 뿐입니다.
언뜻 원효스님의 '귀일심원 요익중생' 도 생각이 납니다. 귀일심원 하고나서 요익중생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것이 보리를 구하고 나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인듯 합니다.
귀일심원과 요익중생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것이 인과동시의 가르침이겠습니다.
수행 따로 생활 따로인 것이 평범한 재가불자의 수행과 삶이었다면 수행과 삶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 불교의 지향해야 할 점이라는 것이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지난한 수행을 통해, 어떻게 구경각에 이르러 영원한 행복을 구하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것에서 약간 시각을 바꾸어 보면...
우리의 일상 삶에서 마음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고 중생의 고통과 아픔을 돌보아야겠다는 깨달음과 실천도 실은 작은 깨달음이란 것, 그리고 우리 사회를 건전하고 올바른 사회로 만들겠다는 서원과 실천도 깨달음이란 결론에 도달된다고 하시는데요...
깨달음의 정의를 이렇게 작게(?) 정의한다면 재가 불자도 얼마든지 스님들 못지않게 열심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불교 안믿고 그냥 어려운 사람 도와 주면서 살아도 얼마든지 성불할 수 있겠네? 그런 사람들도 다 깨달은 거네? 라는 의문도 생기는데 그래서 유위의 보살행과 무위의 보살행이란 가르침이 나오는가 봅니다.
끝으로 이렇게 일상에서의 원력과 부처님 말씀 실천(공경, 찬탄, 참회) + 일과 수행 = 곧 보현행원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보현행원으로 불국이루리..._()_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성불합시다......()()()
감사합니다. 간화선, 염불선, 경초선... 선지식들께서 이름붙이신 선 들이 결국은 다 같은 목적을 향하도록 하는 방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체 생명을 다 섬기고 공양하는 그 마음. 주었다는 마음 없는 그 보시. 또 그 법에 얽매이지 않는 그 궁극한 마음. 우리도 부처님같이~ 마하반야바라밀 _()()()_
거사님 말씀대로 정말 시원한 법문입니다.
간화선의 대중화를 위하여 꼭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너무 완벽한 깨달음만을 강조하면
수행자로서의 증상이 생겨 세상을 도외시 하는 현상이 생길 수 있고
나는 도저히 안되겠구나 하는 퇴굴심이 생겨 선을 포기하는 현상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은
참으로 옳은 진단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재가불자들의 깨달음은 많은 작은 깨달음을 거쳐 큰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깨달음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이룰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법혜거사님 좋은 법문 감사드립니다.